192 로웨나 왕국으로 향하다 (1)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저택에서의 아침은 큰 울음소리로 시작했다.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노반의 목소리에 몸이 피곤했지만, 눈이 번쩍 떠졌다.
“헉!”
“미르!”
노반은 눈물을 글썽이며 내가 누운 침대로 다이빙했고, 헤드에 기대어 앉아 있던 젠은 그런 노반을 내게서 떼어 내 저 멀리 던져 버렸다.
“달려들지 말아요 노반.”
“이 거짓말쟁이!”
노반은 젠에게 내팽개쳐진 채로 바닥에 주저앉아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서럽다는 듯 소리쳤고, 그런 노반을 보고 있자니 내 마음은 약하게 일렁였다.
“거짓말쟁이야! 각자 자자고 했으면서 젠만…!”
“전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
“그래도!”
젠은 노반을 바라보며 금방 들어왔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노반은 각자 혼자 자기로 약속해 놓고 먼저 약속을 깬 젠이 야속한지 서러움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노반에게 다가갔고, 노반은 내게 안아 달라는 뜻으로 팔을 벌렸다. 나는 노반을 안아 들고 울음을 그치게 달랬다.
“오늘 밤은 노반이랑 같이 잘게. 그만 울자. 뚝.”
그에 노반은 고개를 끄덕였고, 내 어깨에 고개를 박은 채 고개를 흔들어 눈물을 닦았다.
젠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거짓말쟁이는 조용히 해!”
젠이 뭐라 말하려 하자, 노반은 고개를 들고 젠을 향해 소리쳤다. 그리고 젠은 그런 노반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노반, 지금 몇 시인지는 아세요?”
“….”
그러고 보니….
“아직 해도 뜨지 않았어요.”
나는 단순하게 눈을 떴으니 지금이 아침인 줄 알았다. 하지만 젠의 말대로 암막 커튼을 걷어 밖을 확인하니, 아직 새들이 깨어나지도 않은 새벽녘이었다.
“저야 그렇다고 쳐도, 노반은 왜 이 시간에 미르 님의 방으로 온 거죠?”
“….”
젠의 날카로운 질문에 노반은 화들짝 놀라며 다시 내 어깨 위에 제 얼굴을 묻었다.
나는 그런 노반의 등을 토닥여 주며 작게 웃었다.
“내일은 같이 자자.”
내 말에 젠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노반을 바라보며 별말 하지 않았다.
“아직 아기네. 우리 지켜 주려면 멀었나 보다.”
나는 노반의 등을 토닥거리며 말했고, 그런 내 말을 들은 노반은 흠칫하며 어깨를 들썩였다.
같이 자고는 싶은데, 보호받는 아이가 되고 싶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런 노반의 마음을 파악한 젠은, 말없이 내게 안겨 있는 노반에게 말했다.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 했지만, 노반은 어린아이니까 어쩔 수 없네요. 다음 일정은 조금 위험하니 노반은 따라오지 말고 저택에 남아 있으세요.”
“뭐?”
“노반은 혼자서는 잠들지 못하는 어린아이인 거죠? 말 그대로 이번 일정은 위험해요. 그러니 어린아이는 집에 있어 줘야겠어요. 방해가 될지 모르잖아요.”
어쩔 수 없다는 젠의 말에 노반은 나를 바라보며 젠의 말이 진짜냐고 물었다.
실제로 위험한 건 사실이니 나는 노반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고, 노반은 얼굴이 창백해져서는 고민에 빠졌다.
미르랑 함께 자고 싶은데, 그러려면 어린아이여야 한다. 하지만 어린아이는 다음 일정에서 빠져야 한다니.
“다시 한번 물을게요. 노반은 어린아이인가요?”
“…아니야!”
“잘 생각하셨어요.”
젠은 노반을 안고 있는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내게 안겨 있는 노반을 거칠게 떼어 방 밖으로 내보냈다.
“앞으로도 혼자 잘 수 있는 멋진 어른으로서 저희를 지켜 주세요.”
“무, 뭐?!”
“그럼 아침에 봐요.”
젠은 노반의 눈앞에서 방문을 닫았고, 문에 달린 잠금장치를 걸었다.
나는 멀뚱히 젠의 모습을 바라보다 이리 가까이 오라는 젠의 손짓에 홀려 그를 향해 다가갔다.
“노반 저렇게 놔둬도 돼…?”
“안 될 건 없죠.”
“그래도 아직 애인데…”
나는 아직 밖에 서 있을 것 같은 노반을 생각하며 방문을 바라봤고, 젠은 그런 내게 단호히 말했다.
“너무 오냐오냐하지 마세요. 버릇이 나빠질 거예요.”
젠은 그리 말하며 나를 다시 침대 위로 눕혔고, 나는 그런 젠의 말에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더 자고 일어나요.”
“응….”
내 위로 이불을 덮어 주고 토닥여 주는 그의 손길을 느끼며 눈을 다시 감았다.
* * *
“오빠는 진짜 신기한 것 같아요. 요리도 잘하고, 김치 같은 것도 척척 만들고.”
지아는 자신의 앞에 놓인 김치찜을 마구 퍼 먹으며 말했다. 황실의 누군가가 봤다면 귀족의 체통을 지키라며 호통을 칠 것 같은 행동이었다.
“많이 먹어.”
셀비스가 오지 않은 일주일 동안 꽤 많은 일들이 있었다.
우선 그간 밭을 가꿔 준 시아를 찾아가 감사 인사를 전했다. 시아는 별거 아니었다며 예쁘게 웃었고 그 모습을 지아가 너무 마음에 들어 하는 바람에, 하루 종일 시아를 지켜보기 위해 과일가게에 앉아 있어야 하는 곤욕을 치렀다.
지아는 동화 속에 나오는 왕자님이 딱 시아라며, 이 세계에 왕자님이 있다면 시아 같은 사람이어야 한다며 강하게 주장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화려한 금발과 투명한 벽안은 완벽한 왕자상처럼 보이기는 했다. 그리고 시아는 실제로도 아스본 왕국의 왕자다. 가출한 왕자지만.
그걸 지아에게 알려 줬더니, 혼인을 한다면 아스본 왕국의 왕자와 하겠다면서 아주 시끄럽게 구는 걸 말리느라 진이 빠졌다.
전에는 보리언이 괜찮다면서 이젠 시아로 갈아타는 거냐고 묻자, 자신의 마음은 갈대 같다며 시아를 보니 보리언은 생각도 나질 않는다고 했다.
지아의 실질적인 약혼자인 로이븐과 메이븐도 괜찮은 인간들인데…, 하긴, 그들의 단점만 봐 온 지아로선 반짝반짝하고 다정하고 착한 시아가 좋아 보였을 거다.
두 번째로는 장을 담그기 알맞은 상태가 된 메주를 이용해 여러 장을 담갔다. 지아라는 손이 하나 더 늘어서 생각보다 빠르게 끝났다.
고추장, 간장, 된장 등등 필릭스가 만들어 놓은 장독대에 꽉꽉 채워 넣으니 마음도 풍족해지고 행복도도 오른 것 같다.
장이 발효될 때까지는 꽤 걸릴 테니, 그동안은 김치를 이용한 요리만 해 먹었다. 돼지 등갈비를 듬뿍 넣은 김치찜, 다진 고기가 들어간 김치전, 계란프라이를 올린 김치볶음밥, 고명으로 김치를 잔뜩 올린 잔치국수, 등등 매일 알차게도 해 먹었다.
나나 지아는 익숙한 맛이라 문제없이 잘 먹었고, 김치를 처음 보고 처음 먹어 보는 젠, 마린, 그리고 노반은 우리가 먹는 모습을 보며 주춤하면서도 곧잘 먹었다. 그리고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먹이니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잘 먹는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저택에 머무는 날이라 냉장고에 있는 남은 재료를 넣고 김치찌개를 끓였다. 그리고 김치찌개만 끓이기 아쉬워 베이컨을 잘게 잘라 넣은 계란말이를 했다.
“그러고 보니 오빠는 어떻게 김치랑 메주를 만들 생각을 했어요? 저는 그냥 포기하고 살았는데…, 오빠 원래 직업이 요리사 뭐 그런 거였어요?”
지아는 밥을 두 공기째 먹을 때 내게 질문했다. 나는 그런 지아를 바라보며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요리사는 아니고 그냥 학생이었어.”
“무슨 학생이 요리를 이렇게 해요? 뭐, 소년 가장…, 그런 거였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자취해서 요리는 집에서 가끔 했었어.”
내 말을 들은 지아는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 무슨 자취생이 김치랑 메주를 만들어요?”
“메주는 옛날에 할머니가 만드는 거 보고 대충 따라 해 본 거고. 김치는 대충 알잖아? TV에도 많이 나왔고.”
하는 법만 대충 알면 누구나 할 수 있을 거라는 내 말에 지아는 재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오빠뿐일 거예요…. 전 이 흔한 찌개 하나도 못 만들었단 말이에요.”
“이걸 왜 못 만들어…? 그냥 대충 물 끓여서 재료만 넣으면 되는 거잖아.”
“그 대충이 안 되는 사람도 있다구요. 아마 대부분이 안 될 거예요.”
지아는 입을 삐쭉 내밀며 밥을 먹는 데 집중했다.
나는 ‘요즘은 세상이 참 좋아져서 치킨스톡 하나 넣고, 대충 끓이면 될 텐데… 왜 그게 안 된다는 건지 모르겠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 말을 입 밖으로 뱉으면 지아의 짜증과 재수 없는 눈길이 올 것을 알고 있기에 그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나저나 그 셀비스라는 아저씨는 진짜 안 오네요…. 오늘이 마지막인데.”
지아는 마지막으로 남은 계란말이를 집으며 말했다.
그에 나는 잠시 잊고 있던 셀비스의 일이 생각났고, 조바심이 생겼다.
셀비스가 오지 않을 리는 없지만, 혹시라도 오지 않는다면 셀비스 없이 로웨나 왕국으로 들어갈 방법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로이븐의 말대로 젠이 드래곤의 실드가 부서질 때까지 치는 수밖에 없다. 부서질지도 미지수고, 실드를 파괴하려는 우리 앞에 화가 난 드래곤이 나타나면 어떡하지…? 드로이프를 구하기에도 바쁜데 드래곤은 또 언제 상대하고 있어.
“하아….”
앞이 조금 깜깜해지는 기분이 들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런 내 모습을 본 지아는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은 채 쩔쩔매며 말했다.
“자, 잘될 거예요. 제 성녀 레이더가 오빠의 앞길은 창창하다고 말하고 있어요.”
“….”
“진짜예요! 아주 작은 조각 같은 장면이지만 꿈에서 선명하게 봤단 말이에요. 오빠가 하하 호호 웃고 있었어요.”
‘꿈은 누구나 꿀 수 있단다.’라고 말해 주고 싶지만 참았다. 지아도 아직 노반과 같은 어린애다.
나는 지아를 향해 작게 웃으며 고맙다고 했고, 지아는 방긋 웃었다.
저택을 떠나는 마지막 밤, 나는 뜬눈으로 밤을 새울 예정이었다. 현관문을 바라보며 바람이 부는 작은 소리에도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기를 반복했고, 제발 인기척이 들리기를 간절히 바라고 바랐다.
그리고 그 간절한 바람은 이루어졌다.
전보다 조금 큰 소리가 들렸다.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니, 큰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있는 셀비스의 모습이 보였다.
“셀비스!”
“좋은 저녁입니다, 도비. 아. 이제 밤인가요?”
은은한 달빛이 셀비스의 은색 머리칼을 비췄다. 나는 그의 붉은 눈을 마주 보았고, 그런 나를 바라보며 얕은 웃음을 짓는 셀비스의 모습에 나는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계속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젠이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와 셀비스를 보며 작은 한숨을 쉬었다.
“결국 왔군요.”
“그래요, 왔습니다.”
셀비스는 그런 젠을 바라보며 당당히 웃었다. 나는 셀비스가 결정을 번복하지 않게 그의 짐을 들어 낑낑거리며 저택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