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자님 먹고 싶어요-193화 (193/227)

193 로웨나 왕국으로 향하다 (2)

“네가 안 오는 줄 알고 식겁했어.”

셀비스의 얼굴을 보고 나니 그간의 걱정이 한 번에 날아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셀비스가 안 왔다면 로웨나는 시작도 못 했을 테니까.

“인수인계를 하느라 늦었습니다. 많이 기다렸습니까?”

“언제 오나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어.”

“그렇습니까? 편지라도 보낼 걸 그랬네요.”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면서 셀비스가 작게 웃었다. 나는 그런 셀비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괜찮아. 이렇게 왔으니까 됐어.”

“사실 오지 않으려고 했는데,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어…?”

나는 그의 말에 놀라 셀비스에게 되물었고,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할머니께서 로웨나 왕국 근처에도 발을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러니 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죠.”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미네르바는 나에게 협박을 하면서까지 그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런 미네르바를 보고 자란 셀비스이니 더욱 로웨나 왕국이 꺼려졌을 것이다.

그런 셀비스한테 로웨나로 가자고 졸랐으니…. 지금 생각해 보니 조금 미안하지만, 이쪽은 이쪽대로 급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솔직히 방금까지 셀비스가 이대로 나타나지 않으면 납치라도 할까 생각이었으니 말 다했지.

“끝나면 네 몫도 크게 챙겨 줄게.”

“네, 도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셀비스는 여상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봤고, 나는 그런 셀비스를 마주 보며 작게 웃었다.

젠은 셀비스를 잠시 바라보다 짧게 인사를 한 뒤 고개를 돌렸고, 나는 셀비스에게 젠의 방을 내어줬다.

“오늘은 푹 자고. 내일 아침에 출발하자. 괜찮지?”

셀비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젠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 * *

북쪽 저택을 떠나는 날 아침, 지아는 주방에서 아침밥을 준비하고 있는 셀비스와 마주쳤다.

“저건 완전 능글 서브 남주 재질인데….”

그런 지아가 처음 내뱉은 말이다.

내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말해서 다행이지, 셀비스가 들었다면 부끄러워서 얼굴을 못 들었을 거다.

나는 지아를 바라보며 바람 빠진 풍선처럼 웃었고, 지아는 머쓱하게 웃었다.

“금발이랑 은발 하면 딱…, 생각나더라고요….”

그래. 지아, 너는 아직 그럴 나이지.

며칠 전 상점가에 갔었을 때, 지아는 마린과 함께 서점에 가서 로맨스 소설을 잔뜩 사서 하루 종일 읽었다고 들었다.

시아를 보자마자 로맨스 소설 속 왕자님이니, 요정이니 신났던 거다. 지금 셀비스도 마찬가지로 소설 속 인물에 비유하는 거 같다.

그런데 왜 우리 젠은 언급해 주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잠결에 보나, 나는 젠보다 잘생긴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젠은 지아의 취향이 아닌 건가?

“젠이 더 멋있지 않아?”

“실망입니다, 도비. 전에는 제가 더 잘생겼다면서.”

깜짝이야, 언제 온 거야.

셀비스는 완성된 요리를 손에 들고 우리의 앞에 다가왔다. 그런 셀비스를 바라보며 지아가 물었다.

“그랬어요?”

“네, 제가 제일 잘생겼다고 인정하셨었습니다.”

지아의 질문에 셀비스는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지아에게 대답했고, 지아는 그럴 리가 없다며 의심을 하면서도 푸하하 웃었다.

“황자님은 이프리트 경이 가장 잘생겼다고 말씀하시는 분인데, 정말 그랬어요?”

“네, 확실하게요.”

셀비스는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내 앞에 야채가 가득 담겨 있는 수프를 내려놓았다.

고기가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은 야채 수프는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린 듯 기름지지 않은 맑은 국물이었다. 그에 나와 지아는 잠시 멈칫했다.

그동안 조미료를 가득 넣은 음식만 먹다가, 갑작스레 건강한 음식을 보니 머리가 띵해지는 기분이었다.

“많이 해 놨으니 많이 드세요.”

나는 셀비스에게 잘 먹겠다는 뜻으로 작게 웃었고, 지아도 나와 같이 인사를 하며 숟가락을 들었다.

“근데 저희만 먹어요…? 다른 분들은요?”

지아는 젠과 마린, 그리고 노반이 보이지 않는 걸 이제 눈치챘는지 슬며시 물었다. 나는 그런 지아의 물음에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먼저 먹고 나갔어.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거야.”

젠과 마린은 이미 밥을 먹은 뒤, 짐을 챙겨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노반은 귀환을 미리 준비하기 위해 집과 밭을 간단하게 청소했다. 저번 여정에서 밭을 방치하고 내버려 뒀던 게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아아… 하긴, 저희가 늦게 일어나긴 했네요. 앞으로는 좀 일찍 일어나 볼게요.”

지아는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고,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지아야 아직 어리고 원래 오래 자는 애니까 그렇다 쳐도, 나는 평소에 힘든 것만 아니면 일찍 일어나는데….

“조금 억울하네…. 난 오늘 새벽에 깼는데.”

나는 아주 이른 새벽에 일어났지만, 젠과 함께한 모종의 일로 쓰러지듯 눕는 바람에 일어나지 못했다.

평소에는 이러다 죽겠다 싶을 정도로 하진 않았지만, 앞으로는 둘이 있을 기회가 없을 것 같아 막판 스퍼트로 열렬히 했던 것 같다.

나도 신나서 했으니 할 말은 없다만, 그래도 적당히 했었다면 나도 지금 짐을 싸고 있었을 것이다.

젠이 전에는 안 그랬는데, 요새는 꼬시는 게 점점 늘고 있다. 힘들어 죽을 것 같은데 힘이 쏟게 한다니까?

“뭐라구요? 잘 안 들렸어요.”

“아니야. 별말 안 했어.”

다시 말해 달라는 지아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야채 수프를 한입 크게 떠먹었다.

심심할 것 같았던 수프의 맛이 그동안 조미료에 사로잡혔던 미각을 정화하는 듯했다. 담백하고 깔끔한 맛이었다.

건강과 맛을 동시에 잡은 듯한 요리를 빤히 바라보며 감탄했다.

“와… 셀비스, 너는 요리 안 했으면 어쩔 뻔했어? 미네르바가 해 줬던 수프보다 맛있는 것 같아.”

“진짜 맛있어요! 단순한 야채 수프인데 메인 요리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예요!”

셀비스는 나와 지아의 극찬에 작게 입꼬리를 올리며 고맙다고 했다.

나는 그런 셀비스를 뒤로하고 접시에 코를 박고 수프를 먹었다. 새벽 내내 운동해서 배가 고프기도 했고, 조미료에 찌든 위장이 정화되는 느낌이 좋았다.

“천천히 드세요, 체하겠어요.”

젠은 떠날 준비를 전부 마쳤는지, 어느새 내가 앉아 있는 식탁으로 다가왔다.

나는 젠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마지막 야채까지 천천히 먹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아야 천천히 먹고 나와. 준비되면 바로 출발하자.”

“네! 저 어젯밤에 짐 싸 놨어요. 이거 먹고 바로 출발할 수 있어요.”

“그럼 준비하고 나와. 날이 조금 풀리긴 했지만 아직 추우니까 옷 잘 입고.”

지아는 먹고 나면 출발하자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뒤, 그릇을 들어 한 번에 마셨다.

천천히 먹어도 된다니까….

* * *

프레오나와 세네카의 국경지대에서, 지아는 셀비스, 젠, 마린, 노반순으로 작별 인사를 했고, 마지막으로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헤어지는 게 아쉬운 듯 고개를 푹 숙이는 지아에게 말했다.

“잘 살고 있어. 소식 없으면 죽은 줄 알고.”

“오빠는 헤어지는 말을 뭐 그렇게 해요! 별일 없을 거예요…. 그렇게 믿을래요.”

일부러 무심하게 하는 내 말에 지아는 그런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화를 냈다.

나는 그런 지아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아니…! 그렇게 웃으면 찝찝하잖아요!”

“난 항상 이렇게 웃는데?”

“거짓말 마세요! 또 놀리려고 그러는 거죠! 다 알아요.”

안 속는다는 지아의 말에 나는 밝게 웃었고, 지아 또한 나를 마주 보며 웃었다.

그나저나 이곳엔 무장한 기사들만 있을 뿐 나와 일면식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네카의 성녀인 지아가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로이븐이나 메이븐 둘 다 데리러 오지 않은 게 의문이었다.

이날 오겠다고 약속을 했는데도 지아를 데리러 오지 않았다는 건, 엄청 바쁘거나 아니면….

“지아야, 조금 긴장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네?”

“혹시라도 황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으면… 필릭스를 찾아가.”

“에반스터 경이요…?”

나는 놀란 얼굴로 되묻는 지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황궁에 무슨 일이 생겼나 하고 눈치를 보던 지아가 에반스터라는 이름에 왜 하필 ‘전’ 약혼자를 찾아가야 하냐는 눈을 했다.

“내가 믿을 만한 놈이 필릭스밖에 없어서 그래. 착한 애니까 너무 그렇게 보진 말고…. 아, 그리고 황제한테는 대충 맞춰 주면서 안전하게 있어.”

황제의 이야기가 나오자, 지아도 자신이 불리한 상황인 걸 눈치챘는지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런 지아에게 괜찮을 거라 안심을 시켜 주고, 무장한 기사들을 한번씩 훑었다. 그러고는 로웨나 왕국으로 갈 수 있는 알란드 쪽으로 빠졌다.

기사들은 왜 우리를 막지 않았을까? 어디까지 가나 지켜보는 건지, 내버려 두고 있는 건지… 황제의 생각을 도통 모르겠다.

알란드로 향하는 길 내내 이런 찝찝함이 들었다. 도착하기 바로 직전까지 혼자 속을 태우고 있자니 답답함이 몰려와 말했다.

“진짜 이상하단 말이야…. 왜 강경하게 나오지 않는 걸까?”

“도비가 알아서 자멸하길 바라는 걸지도 모릅니다.”

내 혼잣말을 들은 셀비스가 나직하게 말했다. 나는 그런 셀비스를 바라봤고, 여우로 변한 노반을 안마하던 중에 그는 잠시 동작을 멈추고 말했다.

“저희가 스스로 사지를 향해 걸어가는 걸로 보일 겁니다.”

“무모한 짓이라고 생각한다는 거지?”

내 물음에 셀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노반의 안마를 다시 시작하며 담담히 말했다.

“제가 그러했듯, 그들은 도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가 없지 않습니까. 그저 뭐라도 해 보겠다는 무모한 행동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겁니다.”

셀비스의 말도 일리가 있다.

세상 그 어떤 미친 황자가 좀비 떼를 끝장내고, 황제를 끌어내리겠다고 로웨나 왕국으로 직접 들어갈까? 셀비스의 말대로, 친모의 복수를 위한 황자의 마지막 발악이라고 생각할 거다.

게다가 드래곤의 가호를 받고 있는 로웨나 왕국이니, 애초에 들어갈 수 없다고 판단하는 건지 막아서지도 않는다.

이건 자존심이 조금 상한달까…. 왜 막지 않는 건지 이해는 했지만, 찝찝함을 지울 순 없었다.

“그래도, 시간 끌지 말고 국경에서 잡는 게 더 이득 아니야? 황제는 예전부터 계속 이런 식이었어.”

“아무래도 여긴 이프리트 경이 있으니, 고전할 거라 생각했을 겁니다.”

정세를 모르는 저도 이프리트 경의 이름은 알고 있을 정도로 위세가 등등하지 않습니까 하고 셀비스는 마차 바깥에 있을 젠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그러고는 아무리 강한 젠이 있다고는 하지만 긴장을 늦춰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

“함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도비가 말했던 것처럼 세네카의 황제는 허술한 사람이 아닐 테니까요.”

나는 셀비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요리와 장난만 칠 줄 알았던 셀비스가, 지금 우리의 상황을 날카롭게 분석했다는 게 의외였다. 그런 셀비스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니 답답했던 속이 조금 뚫린 기분이다.

가끔 그를 써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쯤, 잘 나가던 마차가 속도를 줄이고 멈췄다.

“웅…? 아직 알란드에 도착하려면 멀었을 텐데.”

“함정이 생각보다 빨리 왔나 보네요.”

셀비스는 지금까지 주물럭거리던 노반을 내게 넘겼다. 그러곤 마차 안에 잠시 있으라며 강하게 당부하곤 밖으로 나갔다.

노반은 셀비스의 손에 노곤노곤 풀어져 축 늘어진 상태였다.

셀비스는 안마까지 잘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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