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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님 먹고 싶어요-194화 (194/227)

194 로웨나 왕국으로 향하다 (3)

나는 내 무릎에 앉아 기지개를 켜는 노반에게 조용히 말했다.

“나오지 말라 그랬으니…, 나가 봐야겠지?”

“컁!”

우리 앞길을 무언가가 막고 있으니 마차가 멈췄을 것이다. 셀비스까지 밖으로 나갔으니 슬슬 시끄러워야 할 텐데 밖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그러니 나가 봐야지 어쩌겠어.

“노반도 같이 나갈래?”

“컁!”

내 물음에 노반은 고개를 쭉 들어 위아래로 흔들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노반의 귀여움에 심장을 부여잡았다. 그러곤 만반의 준비를 한 뒤 마차 밖으로 나갔다.

“이게 뭐야?!”

엄청난 군대가 깔려 있어도, 좀비들이 우르르 몰려와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이건 좀 놀랐다.

알란드로 향하는 숲이 전부 불에 탔고, 마차는 물론이고 사람도 지나갈 수 없는 불모지를 만들어 놨다.

“이걸 믿고 안 잡았던 거네.”

라이언 황제가 우리를 국경에서 잡지 않은 이유가 이거였나 보다.

알란드로 가는 길을 완벽하게 막아 뒀으니 잡을 필요도 없던 거지. 여전히 영악하고 못돼 처먹은 놈이다. 나 하나 막으려고 숲 하나를 송두리째 망가 트려 놓았네.

네놈들에게 자연의 저주가 있을 거다.

“곤란하네, 이러면 지나갈 수가 없는데….”

몸체가 작은 동물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법한 아슬아슬한 지면과 군데군데 골이 파여 있는 땅, 그리고 그 중앙에는 무언가가 강하게 내리친 듯 깊은 싱크홀이 있었다.

저걸 사람이 하나하나 팠을 리가 없다. 아마 마법을 썼을 거다. 그러니 더더욱 건들기 무서운 것이고.

저곳에 뭐가 더 들어 있을지 모른다. 건들면 터지는 폭탄 마법이 있을 수도 있고, 발을 들이면 독에 중독이 될 수도 있다.

무슨 마법이 걸려 있을지 모르니 신중해야 하고, 조심해야 한다.

“이걸 어떡하죠…?”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온 마린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고, 나는 우리 앞에 놓인 상황을 보며 작은 한숨을 쉬었다.

“여기서 알란드로 가는 건 무리일 것 같아. 다른 해안가를 찾아야겠어.”

“다른 해안가라면…”

나는 아공간 주머니 안에 있는 지도를 살폈다.

이곳에서 가장 가까우면서, 바다를 타고 로웨나 왕국으로 갈 수 있는 위치….

“디트리아네요.”

“이런….”

디트리아는 해류가 강한 데다가 해적들의 거주지로 악명 높은 곳이다.

시중에서 파는 지도 위에 ‘위험’ 표시가 나 있으니 말 다했지.

“뭐 어때, 해적도 말이 통하지 않을까? 잘 설명하고 보수를 주면 도와줄 거 같은데…, 안 그래?”

나는 젠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이야기했고, 젠은 그런 나를 바라보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여차하면 배를 부수면 돼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이야기해 순간 나도 ‘그래, 그럼 되겠지’라며 수긍을 했다.

“…배를 부수면 더 화내지 않을까?”

그러다가 뒤늦게 나는 은근히 ‘그건 아니지 않아?’라며 반박을 했고, 젠은 그저 잔잔하게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저건 진짜 부순다는 뜻이다.

로웨나 왕국으로 들어가기 전, 더 큰 싸움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디트리아 말고 다른 곳은 없나?”

혹시라도 해적들을 피할 수 있는 곳이 있나 찾아봤지만 단 한 곳도 보이지 않았다.

있어도 한참을 가야 하고, 해류도 엉망이기 때문에 디트리아를 제외하고는 그 어느 곳도 해적들을 피하기란 불가능했다.

“결국 해적도 거쳐야 하는 건가? 싸우긴 싫은데….”

“말보다 행동이 잘 통할 때가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한 젠은 방금까지 꺼내고 있던 검을 질긴 가죽으로 감싼 뒤 허리춤에 묶었다.

나는 그런 젠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말로 잘 풀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너무 걱정 마세요, 도비. 잘 될 겁니다.”

셀비스는 걱정을 하고 있는 내게 가까이 다가와, 모든 게 잘 풀릴 테니 걱정 말라며 나를 다독였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어딘가 측은해 보였다. 저거 지금 놀리는 건가…?

나는 그런 셀비스를 바라보며 눈을 흘겼고, 내 눈빛을 확인한 그는 소리 내어 웃었다.

“제 위로는 항상 진심입니다. 게다가 이프리트 경의 말대로 해적들의 배를 부수는 것도 좋은 방법 중 하나이구요.”

“응?”

젠의 무모한 계획을 셀비스도 들었나 보다. 그런데 그 무모한 계획이 좋은 방법이라며 공감했다.

나는 마린을 바라보며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고 물었다. 그에 마린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모르겠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름깨나 알려져 있는 해적들은 배를 두세 척 정도 가지고 있을 겁니다. 하나 정도는 부숴도 괜찮을 거란 소리죠.”

“….”

“물론 가장 좋은 배는 저희를 위해 남겨 둬야 합니다.”

셀비스의 말을 풀어 보자면, 해적들의 배를 부숴서 협박하자는 거잖아…?

‘우리 안 태워 주면 네놈들의 배를 부숴 버리겠다’라는 협박.

내가 생각해도 저 방법은 통할 거 같다. 그리고 해적들은 바다 위에서 우리를 죽이려 들 거다.

“그래…. 그래도 일단 배는 부수지 말고, 이야기부터 잘해 보자.”

걱정스러움이 가득 담긴 내 말에, 젠과 셀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디트리아로 가는 길은 평화로웠다.

해적들의 도시라고 해서 분위기가 험악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사람들은 부지런히 이곳저곳을 다녔고,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었다.

상점가도 있고, 여관도 있었다. 물론 해적 도시답게 물가가 다른 곳에 비해 3배는 더 나갔다.

솔직히 그 정도 돈은 우리에게 부담이 되진 않지만, 조금이라도 더 뜯어 내려 바가지를 씌우는 게 훤히 보여 크게 한바탕 난리를 쳐 줬다.

덕분에 반값으로 좋은 방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일은 ‘말보다 행동이 더 잘 통한다는 것’의 예시가 되었다.

“해안가로 나가면 해적이 있으려나?”

“그럴 것 같아요. 이곳이 바다와 가장 가까운 마을이지만 바다와는 거리가 있으니까요.”

해적들은 배 위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들었다.

다른 왕국으로 가는 무역품을 약탈해 가거나, 작은 섬을 침략해 엉망을 만들어 놓는다거나 그런 나쁜 짓을 하는 게 해적이라 들었다.

그들을 만나서 왜 그런 짓을 하냐며 갱생시킬 생각은 없지만, 이번에도 내게 해를 입힌다면 크게 혼내 줄 생각이다.

“잠깐 혼자 계실 수 있겠어요?”

“응, 걱정 마. 마린이랑 노반도 있잖아.”

아무리 사람 냄새도 나고 안전해 보인다고는 하지만 이곳은 위험 표시가 찍힌 지역이다.

그러니 우리의 안전을 위해 젠은 셀비스와 함께 주위를 둘러보고 온다 했다.

“다녀올게요.”

“보고 싶을 거야….”

나는 밖으로 나가려는 젠의 뒷모습에 대고, 아주 처량하게 보고 싶을 거라 말했다.

그에 젠은 가려던 걸음을 돌려 내게 다가와선 이마 위로 부드럽게 입을 맞춰 주며 말했다.

“얼른 올게요.”

그러곤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젠은 작게 웃으며 방을 나섰다.

마린과 노반은 잠시 여관 식당에 가 본다고 하며 방으로 들어오지 않았고, 나는 그동안 아공간 주머니를 정리할 겸 짐을 꺼내 놨다.

대충 정리를 마치고 버릴 것을 선별하려는 그때, 뒤에서 드르륵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마음에 확 뒤를 돌아보니, 창문틀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뭐야, 쟤는…?

나는 정리하던 아공간 주머니를 잘 챙겨 놓은 뒤, 남자가 매달려 있는 창문으로 가까이 갔다.

“뭐야 너.”

“내, 내 손 좀 잡아 줄래…?”

남자는 손톱만 한 창문틀을 간신히 잡으며 내게 도와달라 말했고, 나는 한심한 눈으로 남자를 바라봤다.

도둑질하러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사람도 있고, 창문틀도 잡을 곳 없어 위험하다.

참 허술한 도둑이네.

여기까지 올라온 건 그렇다 쳐도, 이 정도 높이에서 떨어지면 웬만한 낙법이 아니고서야 최소 골절이다.

도둑질을 하러 온 놈인데 도와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됐다.

“너 여기서 떨어지면 뼈 부러지는 거 알지? 머리부터 떨어지면 죽을 수도 있어.”

까딱하면 죽는다는 내 말에 남자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선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감정도 못 숨기고, 이놈 진짜 허술하네. 왜 이런 허술한 놈이 도둑질을 해?

“나이도 어린… 것 같진 않고. 돈 필요해? 옷을 보면 또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이러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남자는 멀끔하게 생겼다. 도둑질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걸치고 있는 옷도 꽤나 신경 쓴 것 같고, 얼굴만 봐서는 ‘난 도둑질 같은 건 몰라요’라고 말하는 듯 순한 인상이었다.

나는 남자를 위아래로 훑으며 시간을 끌었고, 남자는 그런 내 태도에 초조해진 듯 설득하기 시작했다.

“나 진짜 오래 못 버티거든?”

“그래 보이네.”

“나, 나 돈 많아! 구해만 주면 돈 줄게!”

“나도 많아.”

나는 남자를 바라보며 내가 솔깃해할 만한 제안을 하길 기다렸다.

“그, 그럼 내가 아끼는 걸 줄 수 있어!”

“네가 아끼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필요 없어. 난 네가 왜 도둑질을 하려 했는지가 궁금하네. 왜 하는 거야?”

“이유는 나중에 알려 줄게! 우선 나… 으악!”

잘 버틴다 했더니, 남자의 손은 결국 힘을 잃었고, 잡을 곳을 놓친 몸은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스파시오>.”

떨어지면서 눈을 꼭 감은 남자에게 운동 속도를 느리게 해 주는 마법을 걸어 줬다. 그리고 남자의 상태를 확인하려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남자는 떨어진 그대로 땅바닥에 누워 혼이 쏙 나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몸에 큰 충격이 올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가볍게 떨어져 놀란 것 같았다.

멀쩡하네.

남자를 확인한 뒤, 나는 열었던 창문을 다시 닫았다.

이젠 찾아오지 않겠지 생각하며 어지러운 바닥을 정리하려 할 때, 똑똑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 설마 온 건가.”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문을 살짝 열어 바깥을 확인하자 방금 전 떨어진 남자가 있었다.

“고, 고마워….”

“….”

“고맙다니까…?”

남자는 조금 낯간지러워하는 듯하면서도 내게 감사 인사를 했다.

나는 그런 남자를 해괴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용케 멀쩡하네. 꽤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데 어떻게 살았대.”

“네가 마법 써 준 거 다 알아!”

아, 맞다. 여기 세네카였지.

사람의 왕래가 적은 해적 도시라 여기도 세네카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마법에 무지한 프레오나와 다르게 마법이 익숙한 세네카인이라면, 내 마법을 알아채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다.

“그래, 살았으면 돌아가. 도둑질을 하려면 좀 제대로 하고.”

내 말에 남자는 창피한 듯 얼굴과 귓불을 붉혔다.

나는 할 말이 끝났으니 열었던 문을 닫으려 했지만, 그 사이로 남자의 손이 들어오는 바람에 완전히 닫을 수 없었다.

“은, 은혜 갚는다고 했잖아! 갚게 해 줘!”

이건 또 어디서 굴러온 까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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