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 로웨나 왕국으로 향하다 (4)
남자는 은혜를 입고서 갚지 않는다면 사나이 실격이라며, 내게 입은 은혜를 ‘꼭!’ 갚고 싶다고 말했다.
“들어나 보자, 네가 나한테 뭘 해 줄 수 있는데?”
“돈…은 필요 없다고 했지?”
“그래, 돈은 많아.”
남자는 내게 줄 것이 돈 말고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듯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멀뚱히 남자를 바라보며 작게 읊조렸다.
“뭣하면 몸으로 때워도 되는데.”
“….”
귀도 밝네.
남자는 작게 속삭이는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입을 벌린 채 말을 잃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거 아니란다.
“내 심부름 같은 걸 하라는 거지. 발랑 까져서는 이상한 생각하지 마.”
“이상한 생각…? 나도 노예 같은 걸 생각했어. 그리고 노예는 이제 없어졌잖아.”
나는 ‘이상한 생각’이 뭐냐고 되묻는 남자의 눈을 봤다.
저 눈은 진짜다. 진짜 순수하게 무엇인지 묻고 있는 것이다.
발랑 까진 건 나였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 설마…!”
남자는 그제야 떠오른 건지 얼굴을 붉히며 그런 건 절대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아, 안 돼! 무슨 그런…! 그런 건 안 돼!”
“나도 그런 뜻 아니었으니까 진정해.”
아니, 다 자란 성인이 저렇게 순수해도 돼? 더 웃긴 건 저렇게 순수한 애가 도둑질을 하려했다는 거다.
도대체 왜?
“일단 도둑질을 왜 하려 했는지부터 알려 줄래?”
“그, 그건….”
남자는 우물쭈물거리며 말하기를 주저했다.
분위기로 봐서는 대충 넘어가 줬으면 하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그럴 순 없지.
나는 남자의 말을 끈기 있게 기다렸고, 남자는 내 시선을 피하며 작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누, 누님에게 인정받고 싶었을 뿐이야.”
“누님?”
“그래….”
남자는 본격적으로 말하려는지 바닥에 주저앉았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던 내게도 함께 앉으라고 손짓했다.
마린과 노반은 여관 밖으로 나갔는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고, 젠과 셀비스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할 일도 없으니 이 남자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어디 한번 말해 봐.”
나는 남자와 똑같이 주저앉아, 그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했다.
도둑질을 하러 무려 건물을 타고 올라왔는데, 남자는 열리지 않는 창문을 깰 생각도 하지 않고 버텼다. 그런 남자라면 내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떨어졌으니 말 다했지.
“우리 누님은 큰 해적단의 선장이야. 나는 그런 누님을 존경하고 있고.”
어라…? 이거 복덩이가 굴러들어 온 걸지도 모르겠다.
역시 나는 운이 좋다니까.
“누님이… 해적이라고? 그것도 엄청 큰?”
“맞아! 베리타 해적단이라고 들어 봤을 거야. 우리 누나가 이끄는 해적단이지.”
남자는 신난 목소리로 자신의 누님을 자랑하며 뿌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마치 ‘우와― 대단해! 정말 멋진걸?’이라는 칭찬을 해 달라는 눈빛이었다.
“와, 대단하네.”
“그치? 수많은 해적단들이 생겨났지만 우리 누님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어. 저번엔 어느 왕국의 해군이 왔었지만 우리 누님한테 크게 당하고는 다시 오지 않았다고 했어.”
“그랬어? 정말 대단하다.”
“바다 위에선 그 누구도 우리 누님을 이길 수 없어. 누님은 바다를 다룰 수 있거든.”
남자는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했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신기함과 흥미로움을 보였다.
바다를 다룰 수 있다는 건 배를 잘 몬다는 뜻의 비유인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면 ‘진짜’ 바다를 다룬다는 건데….
아마도 마법을 사용하는 건 아닐 거다. 그 넓은 바다를 다루려면, 마법을 사용해야 하는 범위라든가, 써야 하는 마나가 한도 끝도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당장 생각나는 건 정령뿐인데.
철수가 말하길, 철수를 제외한 다른 정령왕들은 아직 계약자를 기다리고 있다 하니 계약자가 정령왕은 아닐 거다. 끽해 봤자 중급정령 정도?
“네 누님은 대단한 사람이구나.”
“맞아. 정말 대단하지.”
“그래서, 그 누님 때문에 도둑질을 했다는 거야?”
담담하게 묻는 내 말에 남자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도 누님의 곁에서 바다를 누비고 싶은데…, 누님은 내가 아직 다 크지 않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라 안 된다고만 하셔.”
정말 서운한 듯 남자의 눈꼬리와 입꼬리가 축 내려갔다.
그 모습이 언뜻 보면 비 맞은 강아지 같기도 하다.
그나저나 저렇게 큰 어린아이가 어디 있어? 이 세상 모든 어린아이는 사라졌대?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너 몇 살이야?”
“성인이 된 지 2년도 더 됐어. 난 충분히 자랐다고 생각하는데….”
설마했던 걱정과는 달랐다. 다행히 상당한 발육과 노안을 가진 아이는 아니었다.
“나도 네가 충분히 자랐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그치만 누님의 눈에는 난 아직 어린아이인가 봐.”
나는 축 처져 있는 남자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려 주며 은근하게 말했다.
“네 누님이 너를 많이 아끼나 봐?”
“그렇지. 누님은 내게 부모님과는 다를 바 없으니까.”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때?”
나는 남자를 향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고, 남자는 눈을 번쩍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 좋아!”
주님, 보내 주신 어린양은 맛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유용한 어린양들을 많이 보내 주시옵소서.
아멘.
* * *
셀비스, 젠, 노반 그리고 믿었던 마린까지 새벽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점심을 먹기 전, 눈이 반쯤 감겨 있는 노반과 마린, 그리고 옷이 엉망진창 돼 버린 셀비스, 마지막으로 혼자만 멀쩡한 젠이 돌아왔다.
나는 걱정되면서도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고는 그들에게 자초지종을 물었고, 그 답을 듣자 속에서 작은 분노가 일왔다.
“…그래서, 둘이 싸우느라 이 시간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는 거야?”
“해적들도 조금 해결하고….”
“그래도 결론은 둘이 싸웠다는 거잖아. 그것도 지금까지!”
나는 젠과 셀비스가 큰 마물 떼를 만난 게 아닌가, 노반과 마린이 불량한 해적한테 잡혀간 건 아닌가, 노심초사하며 뜬눈으로 기다렸는데. 들어오지 않았던 이유가 싸워서였다니. 그리고 마린과 노반은 심판을 봐 주고 있었단다.
마물 떼나 다른 해적들과 싸우는 건 이해한다. 하지만 같은 팀끼리 싸우다 늦어? 그것도 말도 없이? 게다가 젠은 일찍 돌아온다고 했으면서!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미르! 미르가 고집부릴 때 우리도 그 마음이었어!”
내가 언성을 높이자 노반이 소리쳤다.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이 꾹 다물렸다.
“…그래도! 나한테 말이라도 해 주지…. 언제 오나 계속 기다렸잖아! 걱정도 엄청 했다고.”
나는 표정에 서운함을 가득 담은 채 내 앞에 죄인처럼 서 있는 이들을 쳐다봤다.
그에 내 표정을 보고 흠칫 놀란 노반이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뒤이어 마린과 셀비스도 사과했다.
“…내일 저녁에 항구로 떠날 것 같아. 다들 출발 준비하고.”
나는 내일 있을 일정을 퉁명스럽게 말했다.
갑작스럽게 생긴 일정에 놀란 이들은 자신들이 없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물었지만, 화가 난 나는 말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미르 님.”
젠은 나를 따라 들어왔다. 그리고 미안함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일찍 온다며…. 얼른 돌아온다며.”
새벽까지 내내 걱정하고 불안했는데, 낮게 가라앉은 젠의 목소리에 이상한 안도감이 들어 속이 울컥 터지는 것 같았다. 젠에게 울먹이듯 말했다.
그에 젠은 내게 가까이 다가와 조심스레 안아 주었다. 그에 나는 젠의 허리에 팔을 감아 꽉 껴안고 머리를 기댔다.
“나 화났어.”
화가 났다는 내 말에 젠은 죄송하다는 말과 셀비스의 쓸데없는 도발에 넘어가는 바람에 늦었다고 했다. 그러곤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라며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걱정 많이 했어. 엄청나게 했어.”
괜히 찾으러 나갔다가 바깥에 굴러다니는 해적한테 잡힐지도 모르고, 길이 엇갈려 도리어 나를 찾으러 다닐지도 몰라 여관 안에 가만히 있었다.
가만히 있는 시간이 얼마나 길던지. 책을 읽으려 해도 집중이 되지 않았고, 밥을 먹을 때도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더라.
“이제 그럴 일 없을 거예요. 약속해요.”
젠은 내 이마 위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고, 나는 그런 젠을 향해 물었다.
“미안해?”
“엄청요.”
나는 반성하고 있다는 젠의 표정을 바라보며 뾰로통하게 말했다.
“…미안하면 2주 동안 각방이야.”
젠은 내 말을 듣자마자 몸을 딱 굳혔다. 나는 젠의 뒤로 가서 그의 등을 밀며 그를 방 밖으로 내보냈다.
* * *
“여기! 여기야!”
작은 랜턴의 불빛만이 보이는 어두운 저녁, 잔뜩 신이 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찍 왔네.”
“응, 네가 사기 치면 저주 걸린다고 그랬잖아. 그래서 사기 치지 않았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 일찍 왔지.”
남자는 해맑게 웃었다. 나는 그런 남자를 마주 보며 웃어 주었고, 내 일행은 남자를 경계하며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여기는 내 일행이야. 인사해, 여기는….”
그러고 보니 이름도 안 물어봤네.
이제 와서 이름을 물어보기 뻘쭘해 말을 늘리자, 남자는 호기롭게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난 첼리카야. 편하게 리카라고 불러도 돼.”
“미르.”
“미르, 인사가 늦었었네.”
일행들과 리카의 인사가 끝난 뒤, 리카에게 베리타 해적단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달라 했다.
그에 리카는 비장한 얼굴을 한 채, 베리타 해적선이 정박하고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마을에서부터 한참을 걸어 바다까지 나왔다. 그런데도 해적선은 보이지 않았고, 진짜 사기를 당한 게 아닐까 의심이 될 무렵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작은 빛이 반짝였다.
“저기야?”
“응, 맞아. 거의 다 왔으니까 힘내.”
리카의 말대로 우리 일행 중 힘들어하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항상 마차만 타고 다녀서 걷는 건 또 오랜만이었고, 해적선까지 가는 길은 전부 자갈이 깔린 곳이라 걷는 게 불편했다.
덕분에 다리가 덜덜 떨렸고, 내 모습을 본 젠이 걱정이 된다며 업어 주겠다고 했지만, 업히는 건 어른답지 않은 것 같아 거절했다. 그리고 나는 그 결정을 후회하고 있다.
어른은 개뿔, 그냥 업힐걸.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해적선 앞까지 걸었고, 도착하자마자 바로 주저앉았다.
“수고했어!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줘, 누님을 불러올게!”
리카는 꿈에 부푼듯한 얼굴로 누님을 불러온다 했고, 나처럼 다리를 덜덜 떨며 해적선 안으로 들어갔다.
저 봐, 나만 힘든 게 아니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