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자님 먹고 싶어요-196화 (196/227)

196 로웨나 왕국으로 향하다 (5)

리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혀를 차고 있자, 잠시 주변을 살핀 젠이 가까이 다가와 내 다리를 주무르며 풀어 줬다.

“안 그래도 되는데….”

“지금 풀어야 내일 안 아플 거예요.”

단호한 젠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문 채 그에게 다리를 맡겼다. 다리를 통해 느껴지는 그의 단단하면서 부드러운 손길이 애틋했다.

2주 각방은 너무했나?

“각방은 1주만 할까…?”

“미르 님이 주신 벌이니 달게 받아야죠. 저는 2주도 괜찮아요.”

“….”

젠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벌을 거두지 않아도 괜찮다고 거절했다.

이거 내가 말리는 기분인데….

“알았어. 13일 남았어.”

뾰로통한 내 목소리를 느낀 젠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런 젠의 입꼬리를 약하게 찔렀다.

“난 젠이 웃는 게 좋아.”

“저도 마찬가지예요.”

젠은 내 다리를 주무르던 손을 멈추곤 내 눈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젠의 눈빛을 마주 보며 슬쩍 웃었다.

“크흠…!”

마린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그에 고개를 들어 일행이 있는 곳을 바라보자,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딴짓을 하고 있는 마린과, 노반을 안고 있는 셀비스가 우리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덕분에 퉁명스러운 노반과 눈이 마주쳤다.

노반은 젠과 내가 연애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은 듯 가끔 ‘저 호랑말코 같은 놈이 미르와 함께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같은 표정을 하며 볼을 부풀린다.

노반, 네가 아무리 귀엽다지만 이건 들어줄 수 없어.

나는 노반을 바라보며 입꼬리만 올려 미소 지었고, 노반은 작게 한숨을 쉬며 셀비스의 손목을 잡았다.

셀비스는 노반을 안고 있지 않은 손으로 노반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지만, 노반이 거칠게 내치자 손을 거두었다.

“네놈들이냐?”

그때, 굵은 오크 통을 내려치는 듯한 단단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니, 눈이 벌게져 퉁퉁 부은 리카와 함께 듬직한 여성이 나타났다.

한눈에 봐도 바다 위를 누비는 해적의 선장으로 보이는 여성은 우리를 살피다가 젠에게 호통을 치듯 소리쳤다.

“네놈이 우리 리카에게 나쁜 걸 가르친 거냐?!”

“….”

젠은 자신에게 호통을 치는 여성을 담담하게 바라보며 침묵을 지켰고, 나는 그런 여성과 리카를 번갈아 보며 상황을 파악했다.

배에 타고 싶다는 말을 해서 혼난 건가? 그러니 리카가 우는 걸 테고…?

“나한테 말해. 여기는 잘 모르니까.”

“이 얄쌍한 계집은 뭐야?”

“누, 누님. 미르는 여, 여인이 아닙니다.”

리카는 날 여성이라 착각하고 있는 여자에게 훌쩍거리면서 진실을 이야기했다. 그에 여자는 잠시 호통을 치는 것을 멈춘 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하다. 네 옆에 있는 남자랑 비교가 돼서…. 아무튼 네가 리카에게 나쁜 짓을 가르친 거냐?”

여자는 빠르게 사과한 뒤,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 다시 호통을 쳤다.

나는 리카를 바라보며 이게 무슨 뜻이냐 설명해 달라는 눈치를 보냈고, 리카는 미안하다는 눈빛을 보내며 고개를 숙였다.

“나쁜 짓이라니. 알아듣게 설명해 봐.”

“네가 리카에게 바다로 나가고 싶다 말했고, 네 꿈을 이뤄 주기 위해 리카가 도둑질을 했다지!”

뭔가…, 말이 꼬인 것 같은데?

나는 앞뒤 맥락이 맞지 않게 말하는 여자를 보며, 흥분하고 있는 여자가 알아들을 수 있게 천천히 말했다.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이네. 내가 바다로 나가고 싶다고 한 건 맞지만, 도둑질을 시킨 건 아니야.”

“뭐?”

“리카가 내가 묵고 있는 여관을 도둑질하려 했어. 나는 리카가 떨어질 뻔한 걸 구해 준 거고.”

나는 여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설명했고, 이 이야기를 처음 듣는 내 일행도 깜짝 놀라 나를 바라봤다.

그들이 싸우고 지지고 볶고 있을 때 나는 도둑을 만나고 있었다. 그 도둑이 리카 같은 순진한 애라 다행이지, 피도 눈물도 없는 못돼 처먹은 놈이었으면 어쩔 뻔했어.

물론 도둑이 못돼 처먹어 봤자 내가 이겼을 테지만.

“그런 거냐?”

여자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리카에게 물었고, 리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가 말했지 않습니까, 누님….”

알고 보니 리카는 제대로 말했지만, 자신의 동생의 입에서 ‘도둑질’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나쁜 말이 나오자 놀란 여자가 머릿속으로 소설을 쓴 모양이다.

“그러니까 나는 리카의 은인이라는 소리지. 리카는 내게 갚아야 할 빚이 있는 도둑이고.”

“….”

내 말에 여자는 말문이 막힌 듯 나와 리카를 번갈아 바라봤고, 리카는 여자를 바라보며 울먹였다.

“전 그저 누님과 함께 바다에 있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제가 도둑질에 성공한다면 저도 이제 바다로 갈 수 있….”

“이 멍청아!!!”

여자는 리카의 머리를 크게 쥐어박았다. 그러고는 도둑질이 얼마나 나쁜지에 대해서 설명한 뒤,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훈계했다.

리카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알겠다고 반성하고 여자를 꼭 껴안아 주었다.

좋은 가족이네.

“오해해서 미안하다.”

여자는 머리를 긁적이며 오해를 하는 바람에 다짜고짜 소리친 거라며 사과했다.

“그리고 고맙다. 리카를 도와줘서. 은혜는 내가 대신 갚을 테니 원하는 걸 말해 봐.”

나는 감사 인사까지 착실히 하는 여자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부탁은 부탁인지라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여자를 향해 이야기했다.

“그래서 말인데, 로웨나 왕국으로 갈 수 있을까? 사례는 할게.”

“리카의 은인이니 사례는 하지 않아도 돼. 은혜를 갚는 건 당연한 거다. 하지만 로웨나 왕국이라면….”

우리의 행선지를 들은 여자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나는 잠시 차분하게 생각하며 바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알란드에서 항해하는 게 좋지만, 그게 안 되니 디트리아로 온 거겠지.”

날카로운 여자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여자는 눈썹 위를 긁으며 말했다.

“쉽진 않을 것 같은데.”

“안 될까?”

“갈 수는 있어. 얼마나 걸리지는 모르겠지만.”

여자는 일주일이 걸릴지 한 달이 걸릴지 모른다고 말하며, 나를 빤히 바라봤다.

“일단 타. 곧 항해할 거니까. 그리고 리카, 너는….”

여자는 어느새 내 옆에서 함께 가겠다며 눈을 반짝이고 있는 리카를 바라봤다. 그리고 고민을 했다.

“누님…!”

“그냥 태워 줘. 바다에 가고 싶어서 도둑질까지 한 애인데 다음엔 뭘 못하겠어.”

내 말을 들은 여자는 그럴듯하다며 미간을 찌푸렸고, 리카는 그런 여자의 손을 간절하게 잡았다.

리카의 눈을 마주 본 여자는 이를 갈며 고민하다 결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베리타 해적단은 역시나 선장인 여자의 이름을 따 지은 해적단이었다.

언뜻 보면 엄청 커다란 고래로 보일 정도로 해적선은 거대했다. 선상에 오르자, 풍채 좋은 해적들이 나타나 우리를 바라보며 신기해했다.

그들이 웅성대는 소리를 들어보니, 우리보다는 선장이 그렇게 아끼고 아끼던 동생을 처음 보게 된 것에 놀란 것 같았다.

그리고 부선장이라는 험악한 사람이 찾아와 로웨나 왕국으로 가는 동안 지낼 방을 안내해 줬다.

젠과 셀비스는 키가 크니 천장이 높은 방으로, 마린은 혼자 여성이라 자물쇠가 아주 크게 달린 독방. 그리고 키가 작은 노반과 내가 같은 방을 쓰게 됐다.

노반은 내게서 떨어지게 된 젠을 바라보며 승리의 미소를 지었고, 젠은 잠시 노반을 바라보다 내게 미소를 지어 주곤 자신에게 배정된 방으로 떠났다.

결국 13일간의 각방 생활을 강제로 시작하게 되었다.

“미르! 나랑 같은 방 쓰는 거야?”

“응, 노반. 잘 지내 보자.”

“응!”

노반의 행복하고 밝아진 표정을 보니 13일 정도는 버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안내받은 방 안으로 들어가 짐을 풀고 대충 정리했다.

엄청 큰 해적선인 만큼 침대 정도는 있을 줄 알았는데 침대는커녕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일을 대비해 아공간 주머니에 엄청나게 푹신한 요와 이불을 들고 다닌다.

아공간 주머니의 좋은 점이 이거지.

“노반, 일단 이거 먹어 두자.”

나는 만들어 둔 멀미약을 꺼내 노반에게 먹였고, 노반은 내가 주는 약이 무엇인지 묻지도 않고 받아먹었다.

“노반, 이게 뭔지 알고 먹는 거야?”

“아니. 뭔지는 모르지만 해로운 게 아닌 건 알고 있어.”

알고 있으면 다행인데….

“멀미 안 하게 해 주는 거야. 노반한테는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거였어?”

노반은 신기하다는 듯 약병을 살폈다. 반고리관이 약한 인간에게는 꼭 필요한 거지.

나는 노반을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그리고 항해하기 전, 잠깐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밤바다의 바람은 차가우니 노반에겐 털 망토를, 나는 겉옷을 단단히 껴입은 뒤 밖으로 나갔다.

인간의 모습인 노반을 안고 다니는 건 무리라서 아직 고사리 같은 손을 꼭 잡고 나갔다.

겨울의 끝자락이 지나가는 선상 위엔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는 베리타가 있었다.

나와 노반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고, 우리의 기척을 알아차린 그녀가 내게 말했다.

“똑똑하네, 막 항해를 할 땐 방에 들어가 있는 것보단 밖을 보고 있는 게 도움이 되지.”

바다 위에서도 정신을 차릴 수 있는 바닷사람들의 지혜란다.

나는 베리타를 향해 작게 웃었고, 그녀를 따라 수평선 너머를 바라봤다. 그런 나를 잠시 흘끗한 베리타는 시니컬한 말투로 물었다.

“로웨나 왕국으로 가는 해류가 왜 거친 지 알고 있어?”

“글쎄.”

지형 때문 아닌가? 추측은 할 수 있어도 확실하지 않으니 입을 다물었다. 그에 베리타는 뭔가 중요한 말을 한다는 듯 긴장감을 조성하며 말했다.

“드래곤 때문이야. 드래곤이 뚫어 놓은 길을 제외하곤 그 주변엔 괴수들이 득실거리지.”

“괴수?”

“그래, 항해를 하면서 괴수들을 만날지도 몰라. 괴수 같은 건 한 번도 보지 못한 도련님 같아 보여서 말해 주는 거야. 긴장하라고.”

하기야, 육지에만 마물이 있는 건 아닐 테니까.

바다에 사는 마물들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그것들을 생각하며 어그러진 베리타의 표정을 보고 나서 바다의 마물은 어떻게 생겼을지 조금 궁금해졌다.

영화에 나오는 문어나 해파리 괴물처럼 촉수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아니면 창을 들고 있는 아가미가 달린 인간형 마물…?

이건 어디까지나 궁금한 것뿐이지, 마물을 마주하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그 괴수는 많이 위험해?”

위험하냐는 내 말에, 베리타는 실소를 날리며 말했다.

“가장 최근에 봤던 괴수는 끝도 없이 늘어나는 촉수를 가지고 있었어.”

오, 맞췄다. 역시 촉수 괴물이 빠져선 안 되지.

나는 맞췄다는 뿌듯함에 속으로 작은 미소를 지었고, 베리타는 하던 말을 이었다.

“그 촉수를 자르면 두 갈래가 되어 재생돼. 그리고 더욱 단단해지지.”

베리타는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는 시늉을 했고, 금방 어두운 낯빛이 되어선 스산하게 말했다.

“그 괴수로 인해 해적선 하나가 침몰됐었어. 부상도 많이 당했고, 사망자도 있었지.”

“아….”

“로웨나 왕국으로 가기 위해선 그런 괴수들의 소굴을 거쳐야 해.”

이제야 베리타의 말이 이해가 갔다.

로웨나 왕국으로 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건, 마물과 싸우는 데만 며칠을 쏟아야 한다는 소리였다.

가지고 온 멀미약이 많지 않았다. 망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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