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 로웨나 왕국으로 향하다 (6)
<미르의 항해 일지. 1일 차.>
바다 위에서 보낸 첫날은 나름 괜찮았다. 파도가 조금 거셌지만 버틸 만했다. 그런데 마린이 아주 심한 멀미를 하더라. 나보다 심해 보이길래 내가 가지고 있는 멀미약을 전부 줬다. 나는 이제 뒤졌다.
<미르의 항해 일지. 2일 차.>
죽겠다. 멀미가 이런 건가. 이 몸은 왜 이렇게 약한지 모르겠다. 빌어먹을.
<미르의 항해 일지. 3일 차.>
밖이 소란스럽다. 마물이 나타났나 보다. 노반이 이상한 문어 다리를 씹고 있다. 설마….
<미르의 항해 일지. 4일 차.>
방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나를 안쓰럽게 여긴 리카가 부선장인가 뭔가한테 받은 엄청나게 쓴 물을 마시라고 줬다. 노반이 괜찮을 거라 해서 쭉 들이켰는데 너무 쓴맛이 뇌를 직격해 3초간 기절했다. 덕분에 미각을 잃었다.
<미르의 항해 일지. 5일 차.>
그 쓴 물을 마시고 난 뒤, 달팽이관이 진화한 느낌이다. 이날 저녁에는 멀쩡히 걸어 나가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해적들이 한 요리는 맛은 없었다. 그동안 내 방으로 들어온 죽은 누가 만든 건가 했더니, 셀비스가 직접 만든 죽이었다. 앞으로는 해적선 식당이 아닌 셀비스의 방으로 가서 밥을 먹을 거다.
<미르의 항해 일지. 6일 차.>
젠장. 그 쓴 물의 비밀을 알아 버렸다. 위 내시경이 절실하다.
<미르의 항해 일지. 7일 차.>
로웨나 왕국으로 가까워지자, 삼지창을 든 심해 아귀같이 생긴 마물 떼가 해적선을 덮쳤다. 그 어류들은 육지에선 오크 떼와 다를 바 없다고 했다. 몇 십 마리를 죽였는데 또 몇 백 마리가 나타나 항로를 바꿔야 했다.
<미르의 항해 일지. 8일 차.>
리카와 그 부선장인가 뭔가 하는 애가 수상하다. 나쁜 뜻은 아니고…, 둘이 썸 타고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부선장 말로는 선장의 동생이니 자신이 잘 챙겨 주는 거라고 했지만, 젠이 말하길 저 눈빛은 나를 볼 때의 자신의 눈과 비슷하다며 단순히 보호자의 눈빛이 아니라고 했다.
<미르의 항해 일지. 9일 차.>
젠과 함께 해적선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구경하면서 만나게 된 해적들은 의외로 착하다. 피도 눈물도 없는 약탈자라고 알려져 있지만, 저 사람들도 문지방에 발을 찧으면 울고 난리를 치는 사소한 존재들이었다.
<미르의 항해 일지. 10일 차.>
오늘은 해적들과 게임을 했다. 우스꽝스러운 그림이 그려진 다트를 했는데, 하필 내가 던질 때 배가 흔들리는 바람에 전부 과녁에서 빗나갔다. 덕분에 젠과 셀비스가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냈지만 졌다. 억울하다.
<미르의 항해 일지. 11일 차.>
다트에 진 대가로 창고 정리를 도와줬다. 뭔 놈의 먼지가 한 뼘이나 쌓여 있더라. 몇 백 년 동안 청소를 안 하다가 시킬 사람이 나타나서 시킨 것 같다. 이건 아니지 않느냐며 베리타에게 가서 따졌더니 그녀는 하하하 웃으면서 필요한 게 있으면 마음껏 쓰라며 화를 내는 나를 달랬다. 덕분에 내 아공간 주머니는 값이 꽤 나갈 것 같은 골동품으로 가득하다. 기분이 좋다.
<미르의 항해 일지. 12일 차.>
마린의 멀미 약이 떨어졌다. 어쩔 수 없이 마린도 그 끔찍한 쓴 물을 마셨다. 뭘로 만들었는지는 절대 알려 주지 않을 거다. 배 밖으로 몸을 던지고 싶을 테니까.
<미르의 항해 일지. 13일 차.>
지루하다.
<미르의 항해 일지. 14일 차.>
지루하다고 했지 마물을 보고 싶다고는 안 했다. 하필 선박에 나와 있을 때라 쫄딱 젖었다. 오늘 아침에 씻었는데….
<미르의 항해 일지. 15일 차.>
어젯밤, 젠과 약속했던 날이 끝났다. 그리고 다시는 각 방 얘기는 꺼내지도 않을 거다. 오랜만에 했더니 찢어지는 줄 알았다. 아주 죽겠다.
<미르의 항해 일지. 16일 차.>
엉덩이가 너무 아파 이틀 내내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더니, 내 안위를 궁금해하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일단 베리타는 다시 멀미가 도진 거냐며 그 쓴 물을 먹이려 했고, 셀비스는 영양이 가득 담긴 죽을 한솥 가득 끓여 줬다. 그 밖에도 그동안 정이 들었던 해적들이 찾아와 사탕이나 작은 요깃거리들을 줬고, 마지막으로 부선장이 찾아와선 나와 젠의 상태를 살핀 뒤 연고를 주더라. 자기가 써 봤는데 이게 최선이란다.
부끄러워하는 부선장의 모습에 젠과 나는 한동안 침묵했다.
<미르의 항해 일지. 17일 차.>
확실히 마물들이 늘었다. 하루에 한 번 꼴로 나타나던 마물이 오전 오후를 지나, 아침 점심 저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해적들은 점점 지치고 있다.
<미르의 항해 일지. 18일 차.>
해적들 몇 명이 부상을 입었다. 독에 중독됐는데 다행히 해독제를 만들 수 있었다. 해독제가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많은 사상자가 나왔을 거다.
<미르의 항해 일지. 19일 차.>
운이 좋았다. 삼지창을 든 어류 마물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준 탓에 큰 파도가 일었다. 덕분에 우리가 탄 해적선은 높고 거친 파도를 타고 로웨나 왕국으로 가는 안전한 해류에 안착했다.
그리고 베리타는 내가 생각했던 대로 물의 정령과 계약을 했었다. 아직 하급 정령밖에 불러내지 못하지만, 아주 큰 위기상황을 넘기기엔 그것만큼 도움이 되는 게 없으니 대단한 거다.
<미르의 항해 일지. 20일 차.>
로웨나 왕국이 보인다. 드래곤의 투명한 실드가 선 전체에 씌워져 있는 게 멀리서도 보였다.
<미르의 항해 일지. 21일 차.>
로웨나 왕국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이 해적선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그동안 정들었던 해적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리카와 부선장의 밀회를 발견했다. 보고 싶지 않았던 장면이었지만 흥미로웠다.
근육이 많은 사람은 그런 자세가 가능하구나.
* * *
드래곤의 실드가 닿지 않는 선착장 끝자락에 해적선을 정박했다.
“정말 같이 안 가 줘도 되겠어?”
“응, 사람이 많으면 걸리적 거릴 거야.”
“그렇다면 여기서 안녕이네.”
전에 로웨나 왕국으로 가는 이유를 묻는 베리타에게 그저 드래곤을 보고 싶다는 대답으로 무마했었다. 그리고 그간 정이 들었는지 위험할지도 모르니 함께 가 준다는 베리타에게 고맙지만 사양한다며 거절했다.
내가 저 안으로 들어가서 하는 행동들은 저들에게 평범하게 받아들여지진 않을 테니까. 그리고 따로 변명하기도 귀찮다.
나는 저 사람들에게 내 신분을 속이고 있다. 그저 있는 집 도련님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 도련님이 로웨나 왕국을 휘젓고 다니는 걸 알면 어이가 없을 테니까.
사실 신분을 숨길 생각은 없었지만, 밝혀서 좋을 것도 없기 때문에 숨겼다.
이곳에선 단순히 돈이 많은 부자일 때와, 명예를 가진 부자는 다르니까.
“잘 지내. 아, 리카한테도 잘해 주고. 걔도 이제 성인이니까 너무 가두려고 하지 마. 그러다 역효과 난다.”
리카의 의견도 잘 수용해 주라는 내 말에 베리타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전이었다면 리카는 아직 어리고 순진한 아이라 지켜 줘야 한다고 했을 테지만, 이번 항해를 통해 리카에 대한 생각이 조금 바뀐 듯했다.
나는 저 멀리 부선장의 옆에 딱 붙어있는 리카를 한번 바라보곤 로웨나 왕국 안으로 발을 옮겼다.
실드가 쳐져 있는 바로 앞까지 가자, 전류가 흐르는 듯이 우우웅 소리가 희미하게 났다.
“이게 드래곤 실드구나….”
드래곤 실드의 안으로 들어가기 전,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워 실드를 향해 던졌다. 그러자 나뭇가지는 실드에 맞고 스파크가 일며 튕겨 나왔다.
“으앗!”
나뭇가지는 내 얼굴을 향해 날아왔고, 젠은 내 앞으로 손을 내밀어 튕겨 나온 나뭇가지를 잡았다.
실드를 살피고 있던 셀비스는 젠이 잡은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많이 약해졌나 봅니다.”
“이게 약해진 거라고…?”
“전에는 실드에 닿으면 눈이 녹듯 사라졌습니다. 생물이 아닌, 나뭇가지라서 튕겨 나온 것에 그친 걸 수도 있지만….”
자신이 전해 듣고, 봐 왔던 예전의 실드와 지금의 실드는 조금 다르다는 셀비스의 고민에 나와 마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제가 있으니 괜찮습니다.”
나와 마린의 표정을 확인한 셀비스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실드 너머로 팔을 뻗어 안전하단 걸 보여 줬다.
확실히 로웨나 왕국의 핏줄이 맞는지, 실드는 셀비스를 거부하지 않았다.
“진짜 희한하네. 이런 마법은 또 처음 봐.”
드래곤의 마법은 인간이 쓸 수 있는 마법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라더니….
“그럼 철수 부를게.”
바다 위에서는 자신의 힘이 약해지니, 바다를 건너면 다시 소환해 달라는 철수가 생각났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철수를 불러 소환했다.
“이 몸이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네.”
내 부름에 나타난 철수는 로웨나 왕국을 빙빙 둘러보며 오랜만이라며 신기해했다.
그리고 실드의 안으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갔다.
“철수, 너는 인간이 아니라 출입이 가능한 거지?”
“그렇지. 아마 미르, 너도 들어올 수 있을 거야. 이 몸의 기운이 돌고 있으니까.”
철수는 셀비스의 도움을 받지 말고 실드 안으로 들어오라 말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안전한 방법을 놔두고, 혹시 모를 방법을 택하는 바보가 어디 있어.
젠, 마린 그리고 노반은 이미 셀비스의 도움으로 실드의 안쪽으로 들어갔고, 나는 마지막으로 셀비스의 손을 잡고 실드의 안쪽으로 들어왔다.
실드 안쪽의 땅을 밟자, 신기한 기운이 느껴졌다. 몸이 조금 무거워진 듯하면서도 단단해진 느낌이랄까, 이런 게 드래곤의 힘인가 보다.
“드워프를 찾아 달랬지? 어디 있는지 느낌은 와.”
“정말?”
드워프가 무기를 만들 때 쓰는 것은 불이다. 그러니, 드워프가 어디에 있든 그 드워프가 쓰는 불의 기운은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철수는 로웨나 왕국을 멀리 둘러보다 울창한 숲 너머를 가리켰다.
“저기 근처에 있는 것 같네.”
저 울창한 숲에는 없는 거 빼고는 다 있을 것 같다.
나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고, 철수는 자기만 믿으라며 드워프가 있을 곳으로 앞장섰다.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해가 져 있었다. 우리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으려 했지만, 조금만 더 가면 나올 것 같다는 철수의 말에 쉬는 것을 포기하고 걸었다.
곧이어 철수의 말대로 어느 음침해 보이는 동굴이 나왔는데, 그 앞에는 수십 마리의 마물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장난하냐…?”
드워프를 찾으랬더니 마물 떼를 찾아?
“저 안에 있어! 이건 확실해!”
철수는 억울하다며 고개를 저으며 동굴 안을 가리켰고, 젠과 셀비스는 우리에게 달려드는 마물을 제압했다.
나도 마법을 쓰며 젠과 셀비스를 도와주려 했지만,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젠의 말에 꺼냈던 스크롤을 다시 집어넣었다.
마린의 후방 공격과, 내 손을 꼭 잡은 노반의 응원까지 합세해 마물들은 빠르게 정리됐다.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뚫리자, 철수의 들어가도 괜찮을 거라는 신호를 확인한 젠을 선두로 우리는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