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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님 먹고 싶어요-199화 (199/227)

199 로웨나 왕국으로 향하다 (8)

나무가 빽빽하게 자라 있는 이곳의 숲은 해가 쨍쨍한 아침이 되어도 환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그마한 애벌레가 자취를 남기듯 밝은 햇살이 나뭇잎 사이를 파고들어 땅 위에 보석을 남겼다.

“하늘이 푸른 걸 보면 곧 봄인가 봐.”

나뭇잎 사이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아서인지, 이번 해의 겨울은 도브로미르의 어떤 기억들보다도 유독 길었다.

“네, 곧 봄이 올 것 같아요,”

젠은 내 말에 긍정하며 작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마린과 함께 모포의 먼지를 털던 노반이 우리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털고 있던 모포를 버리고 우리를 향해 쪼르르 다가와 말했다.

“미르! 봄이 오면 꽃놀이하러 가는 거 맞지?”

노반은 기대된다는 듯,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대답을 기다렸다.

그렇지, 봄이 오면 꽃놀이를 가야지.

꽃망울도 예쁘게 틔워 줬는데 꽃놀이를 안 가면 봄의 요정들이 섭섭해할 거다.

“응, 도시락 싸 들고 벚꽃 보러 갈 거야.”

나는 노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노반은 얼른 꽃놀이를 가고 싶은지 활짝 웃었다.

“사람도 많으니까 재미있을 거야! 나랑 미르랑 마린이랑 셀비스랑 젠이랑 크로스반 쌍둥이…, 또 시아랑 파드랑 아마도 마커스!”

“그래, 다 같이 가자.”

노반은 자신과 친하거나 좋아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말하며, 그 사람들과 함께 피크닉을 즐기는 상상을 했다.

“자, 얼른 먹고 출발합시다.”

셀비스는 제 특기인 풍미가 넘치고 느끼하지 않은 크림 수프를 내게 건네줬다. 그리고 거칠한 종이로 감싼 빵도 함께 줬다.

빵의 겉은 딱딱하리만치 바삭하고 안은 보송보송 부드러웠다.

이런 딱딱한 빵을 어떻게 먹나 궁금해 마린을 바라보니, 마린은 딱딱한 빵의 겉면을 뜯어내 버리고 안쪽에 포슬포슬한 부분만 먹었다. 수프에 찍어 먹기도 하고, 그냥 빵만 먹기도 했다.

아, 이거 그거네.

나는 빵의 보송보송한 부분을 긁어내고 셀비스의 크림 수프를 부었다. 그리고 내 모습을 본 노반이 나를 따라 했다.

“이러면 맛있어?”

“웅, 맛있을 거야. 내가 살던 곳에는 이거랑 비슷한 요리가 있었거든.”

이 요리와 빠네는 빵의 생김새 빼고는 다 똑같았지만, 설명하기 귀찮아 대충 넘겼다.

포슬포슬한 부분의 빵이 수프와 섞여 들어 걸쭉해지자, 그제야 든든한 음식을 먹는 느낌이 들었다.

빵의 딱딱한 부분은 수프가 녹아 들어 말랑해졌다. 나는 질긴 육포를 먹는 느낌으로 뜯어먹었다.

“이 빵의 겉 부분까지 먹은 사람은 도비가 처음일 거예요.”

“그래?”

셀비스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나는 조금 수프가 스며들어서 조금 강도가 약해지긴 했지만 아직은 질긴 빵 껍데기를 질겅질겅 씹으며 담담히 대답했다.

“음식은 버리면 아깝잖아.”

내 말에 셀비스는 미네르바가 생각난다는 듯 아련한 미소를 보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먹었다!”

셀비스가 만든 수프를 냄비째로 가져다가 먹은 드워프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셀비스를 향해 소리쳤다.

드워프의 우렁찬 목소리에 놀란 나는 깜짝 놀라 움찔했다.

“정말 오랜만에 먹는 제대로 된 식사였어! 항상 풀떼기와 작은 동물의 고기만 구워 먹다가 이런 제대로 된 음식을 먹으니 위장이 든든해지는 것 같다!”

그동안 되게 힘들게 살았었는지, 드워프는 잔뜩 튀어나온 배를 통통 두드리며 자신이 했던 고생을 말해 줬다.

그리고는 셀비스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어깨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원하는 게 있다면 말해 봐!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 준 보답으로 다 주마!”

드워프는 젠이 찾아 줬던 자신의 모자를 벗고, 그 안에 손을 집어넣어 다양한 장신구와 무기를 꺼내 셀비스에게 보여 줬다.

희한한 모자라고 생각은 했지만, 아공간 주머니일 줄은 몰랐다. 모자로도 쓸 수 있고 좋은 거 가지고 있네.

나라면 저 모자를 달라고 했을 테지만… 셀비스는 뭘 달라고 하려나.

“이것들 전부 내가 직접 만든 거니까 품질은 의심하지 마.”

드워프는 가슴을 팡팡 두드리며 꺼내 놓은 장신구와 무기에 대해 자신 있어 했다.

검부터 활, 창, 도끼 너클, 둔기, 그리고 마법사의 지팡이까지 다양한 무기와 머리, 목, 팔, 손가락, 무릎, 발목까지 다양한 장신구들도 꺼내 놨다.

드워프의 말대로 그것들은 어디서나 볼 수 없는 귀한 물건이었다. 흠이 있다면… 무기는 외관이 심플하거나 너무 괴란한 수준이고, 장신구는 많이 촌스러운 정도?

젠에게 줬던 아무것도 달려 있지 않은 흑색의 검이 가장 멋진 검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저 드워프의 미적 감각은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었다.

“와….”

마린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드워프의 미적 감각에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드워프는 그런 마린의 감탄사를 자신의 무기에 대한 존경을 표한 것으로 여긴 건지, 마린과 마린이 안고 있는 여우 노반에게도 골라 보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저는… 이 검이면 충분합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컁!”

마린은 그나마 심플한 소검을 골랐고, 노반은 긴 대검을 골랐다.

지금은 어려서 들지도 못할 대검을 왜 골랐냐는 표정으로 노반에게 물었더니, 노반은 금세 인간으로 변해 대답했다.

“저택으로 돌아가면 텅텅 빈 밭에 허수아비 대신 이 검을 꽂을 거야! 그럼 날아오는 새들은 검이 무서워서 가까이 오지 않겠지?”

나는 해맑은 얼굴로 말하는 노반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허수아비 대용으로 드워프의 특제 대검을 꽂는 건 아주 아까운 짓이지만, 저 대검은 노반이 받은 것이니 쓰는 것도 노반의 마음이다.

“그럼. 새들도 이 날이 무서워서 안 날아올 거야.”

방긋 웃은 노반은 다시 여우로 변해 내 품에 안겼고, 우리의 이야기를 들은 드워프는 자신의 검이 허수아비 대용이 된다고 생각하니 조금 찜찜한 듯 보였다.

다시 돌려 달라고 하려나… 라고 생각하던 찰나, 셀비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투척용 단검은 따로 없습니까?”

“투척용?”

셀비스의 말을 들은 드워프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 보니 그런 건 만든 적이 없네. 바로 만들어 줄 순 있어. 기다려 봐.”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드워프의 말에 셀비스는 다른 검을 가져가겠다고 했지만, 이미 열의에 불타오른 드워프에겐 들리지 않았다.

드워프는 모자 안에서 투척용 단검을 만들 재료를 꺼냈다.

엄청나게 무거운 모루와 단면이 판판한 망치, 단면이 울퉁불퉁 모양이 잡혀 있는 망치, 마지막으로 노반이 골랐던 대검보다 훨씬 커다란 대검을 꺼냈다.

그 대검의 크기는 셀비스와 젠을 합친 것만큼 거대했다. 단연코 인간을 위해 만든 무기는 아니었다.

드워프는 우리에게 잠시 물러나 있으라고 말했다. 그리고 꺼내 놓은 모루 위에 대검을 올려놓은 채 판판한 망치를 손에 들었다.

우리는 드워프의 말대로 멀리 떨어졌고, 우리의 거리를 확인한 드워프는 우렁찬 소리를 내며 온몸으로 대검을 내리쳤다.

쾅!

귀가 멀 것 같은 큰 소리가 울렸고 대검은 유리가 갈라지듯 조각조각 부서져 내렸다.

“저게 무슨….”

드워프의 모습을 지켜보던 나와 내 일행은, 대검이 부서진 파동으로 멍멍한 귀를 잡으며 당황해했다.

“하하! 오랜만에 망치를 써서 그런가, 울림이 다르네. 너무 힘을 썼어.”

대검을 내리친 손을 털은 드워프는 자신도 이렇게 큰 소리가 날 줄 몰랐다는 듯 호탕하게 웃었다. 그리고 멀찍이 떨어진 우리에게 다시 가까이 와도 된다며 손짓했다.

나는 내 품에서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진 노반을 달랜 채 드워프를 향해 가까이 갔다.

드워프에게 가까이 가자, 드워프는 모루 아래로 떨어진 대검 조각들을 주워 달라고 말했다.

“주우면 내 옆에 가져다줘.”

모루의 아래로 유리 조각처럼 작게 부서진 대검은 놀랍게도 투척용 단검의 크기로 부서져 있었다.

“일정하게 부서졌네? 진짜 신기하다.”

“컁―!”

나는 대검 조각을 줍기 위해 허리를 굽혔지만, 젠은 그런 내 몸을 가볍게 들어 뒤로 빼냈다.

“위험하니 제가 할게요. 미르 님은 거기 있으세요.”

나를 뒤로 밀어낸 젠은 셀비스와 함께 대검 조각을 하나씩 주워 드워프에게 주었고, 드워프는 이들에게 받은 조각을 모루에 갈아 날카롭게 만들었다. 그러곤 단면이 울퉁불퉁한 망치를 들어 하나씩 내리치더니 투척용 단검의 손잡이를 만들었다.

“손잡이를 달면 더 무거워질 테니, 이편이 나을 거다.”

드워프가 망치를 내리쳐 무기를 만들수록 쇠 냄새가 강하게 났고, 드워프의 눈은 광기에 휩싸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날카로운 투척용 단검이 쌓이기 시작했다. 어림짐작해도 50개는 넘을 것 같다.

하긴, 그 큰 대검에서 저 정도는 나와야 이야기가 맞지.

셀비스는 허리춤에 찬 가죽띠에 완성된 투척용 단검 몇 개를 보관하고, 나머지 단검은 기다란 가죽으로 돌돌 감아 마린이 들고 있는 아공간 주머니에 넣었다.

“후우… 나도 늙었는지. 이런 거에 지치는군.”

마지막 투척용 단검을 만들어 낸 드워프는 숨을 몰아쉬며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이건 감사히 받겠습니다.”

셀비스는 드워프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고, 드워프는 셀비스의 요리에 대한 보답이라 말했다.

“그럼 나는 슬슬 위로 올라가야 할 것 같아. 드래곤의 기색도 슬슬 옅어지니, 괴물들이 몰려오기 전에 끝내야지.”

드워프는 드래곤의 힘이 완전히 사그라들기 전에 드래곤의 부산물을 채취해야 한다며, 서둘러 드래곤의 요새인 산 정상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말했다.

올라갈 때는 그렇다 쳐도 내려갈 때는 어쩌려고 그러지? 내려갈 때가 더 위험한 거 아닌가?

나는 의문이 들었지만, 알아서 잘 해결하겠지 싶은 마음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어이, 토르반. 올라갈 때는 그렇다 쳐도 내려갈 때는 어쩌려고.”

내 뒤에서 철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왜 온 거지?

나는 놀란 마음에 뒤를 돌아 철수를 바라봤고, 그런 내 시선을 본 철수는 멀끔하게 웃으며 반가움을 표했다.

“내려갈 때는 따로 파둔 길이 있어. 거기로 내려가면 되지. 그나저나 불의 정령이 여기까지 무슨 일이지?”

“아, 어젯밤은 쓰려져 있느라 인사를 못 했었지? 미르는 이 몸의 계약자야.”

철수는 내게 어깨동무를 하며 드워프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에 나를 바라보며 잠시 놀란 표정을 지은 드워프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그래서 내 걸작을 주고 싶던 거였군.”

그제야 의문이 좀 풀린다며 천천히 말했다.

드워프가 내게 준 단검은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귀한 재료가 들어가 있고, 만들기도 까다로운 검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한테는 그 검을 줘야 할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며 이제는 왜 그랬는지 알겠다고 했다.

불의 정령왕은 드워프들의 은인이나 다름이 없으니, 그의 계약자가 안전하길 바라는 것도 자연스러운 마음이라고 했다.

“다시 한번 고마워.”

내 인사를 들은 드워프는 별거 아니라는 듯 호탕하게 웃고는, 이젠 정말 출발해야 한다며 드래곤의 요새가 있을 산 위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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