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자님 먹고 싶어요-200화 (200/227)

200 로웨나 왕국으로 향하다 (9)

며칠에 걸쳐 꾸준히 걸었더니, 로웨나 왕국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로웨나 왕성의 깃발이 보였다.

우리는 조금 빠르게 걸어 왕성 앞까지 도착했고, 멀리서부터 보였던 아름다운 로웨나 왕성은 가까이서 봐도 아름다웠다.

그 왕성 안으로 가기 위해서 일자로 쭉 뻗은 길을 걸어야 했고, 그 앞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이상합니다.”

“네, 아무리 문제가 있는 곳이라지만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건 이상하네요.”

개미 한 마리조차 없는 광경을 바라본 셀비스는 이상하다며 들어가기를 꺼려 했고, 옆에 있던 마린도 그의 의견에 동조했다.

“함정이 있는 거겠지.”

쥐 죽은 듯 조용하고, 사람이 있어야 할 곳에 아무도 없다면 100% 함정이 있다는 소리다.

함정이 아니라면 라이언 황제와 연관이 되어 있는 놈이 좀비들을 잔뜩 데리고 와서 우리 앞을 막아섰겠지.

함정이 있을 거라는 내 말에 귀를 기울인 젠은 로웨나 왕국 근처에 있는 숲속으로 들어갔고, 곧이어 내 상체만 한 큰 돌덩이를 들고나왔다.

그 거대한 돌덩이를 가지고 뭘 하려는 건지 지켜보려던 순간, 젠은 있는 힘껏 돌덩이를 들어서 왕성으로 향하는 길 위로 던졌다.

돌덩이는 어마어마한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갈랐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리고 잠시 후, 평평했던 지면이 와르르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

“저게 무슨…!”

무너져 내린 지면 아래에는 날카로운 죽창으로 보이는 것들이 빈틈없이 메웠다.

저곳에 빠졌을 거라 생각하니, 속이 메슥거려 구토가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만일 저 위로 사람이 떨어졌다면, 웬만한 운동 신경 없이는 백이면 백 저 죽창에 찔려 죽음을 당했을 거다.

“나는 공중 함정일 줄 알았는데….”

투석기를 이용한 돌덩이든, 화살이든, 마법이든, 무언가가 공중에서 날아와 우리의 움직임을 제어할 거라고 생각했다.

본래 그것이 정석이니까.

하지만 예상과는 반대로 이곳은 공중 함정이 아닌 지면을 이용한 함정이 설치되어 있었다.

멀쩡한 땅을 이딴 식으로 망가트렸으니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생각지도 못한 함정을 설계했으니 똑똑하다고 해야 할지….

나는 한숨을 쉬며 이 함정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연결되어 있는지 살폈다.

철수가 한나에게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면 이곳에 있는 함정을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이 한나에게 중요한 시기니 철수는 나중에 자신을 부르라고 말하곤 돌아가 버렸다.

남의 일도 아니고, 한나의 일이니 어쩔 수 없지. 그리고 이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으니까.

철수의 부재를 아쉬워하면서 함정을 살피고 있자, 나와 같이 함정을 들여다보던 셀비스가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입을 열었다.

“저희를 막으려 설치한 함정은 아닐지도 모르겠네요.”

“응?”

그게 무슨 소리냐는 내 말에 셀비스는 잠시 왕성과 나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이건 왕국을 빠져나가려는 사람을 위한 함정 같습니다. 일종의 경고죠.”

그리 말한 셀비스의 얼굴은 냉정하리만치 굳어 있었다.

그런 셀비스의 모습에 뭐라 말을 해 줘야 할지 고민하다 말했다.

“사람보단 좀비를 제어하기 위해서일 거야.”

“좀비….”

“전에 말했었지? 로웨나 왕국이 좀비를 만들어 내는 방법.”

내 말에 셀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말하기에 앞서 노반을 힐끗 바라봤고, 다행스럽게도 노반은 내 이야기를 듣지 않은 채 처음 보는 함정을 심각하게 살피고 있었다.

나는 그런 노반에게서 시선을 떼고 셀비스를 향해 말했다.

“내가 아는 사람이 연구했던 바에 따르면, 죽은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아. 살아 있는 사람에게 그걸 먹여야, 죽었을 때 다시 살아나는 좀비가 돼.”

“….”

“이곳에 빠지는 게 사람이라면 즉사하겠지? 그럼 좀비로 만들 수 없어. 냉정한 말이겠지만 그건 로웨나 왕국의 손해라는 뜻이지.”

내 말을 차분히 들은 셀비스는 이해를 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이 함정은 사람을 잡기 위해 만든 게 아닌, 좀비들을 제어하기 위해 만들었을 가능성이 커.”

좀비는 죽지도 않고 잘린 육체마저 재생하니 끊임없이 포효하는 그들의 움직임을 막고 있기엔 이 함정이 최선일 거다.

내 말을 완벽하게 수긍한 셀비스는 한껏 풀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비의 말이 맞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럴 거야. 언제 내가 틀린 거 봤어?”

전보다 온화하고 부드러워진 얼굴로 고개를 젓는 셀비스에게 나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침울해져 있는 것보단 웃는 게 낫지.

나는 우리가 가는 길에 함정이 더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마법을 사용했다. 덕분에 마나가 조금 줄었지만, 교묘하게 감춰져 있던 다른 함정을 발견했기에 아깝지 않았다.

우리는 함정을 피한 뒤, 안전한 샛길을 통해 왕성 안으로 들어갔다.

무거운 문을 낑낑거리며 열자, 쇠를 긁는 듯한 앓는 소리가 빠져나왔다.

“들어가자마자 있나 봐. 조심하자.”

조심하자는 내 말에 일행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철수를 불렀다.

철수의 이름을 두 번째 불렀을 때, 불길이 화르르 치솟았고 철수는 화려하게 나타났다.

“화려하게 나타났네.”

“응, 기분 좋은 일이 생겼거든.”

철수는 씨익 웃으며 즐거워했다. 무슨 일인지 묻고 싶었지만, 각 잡고 진지하게 물어볼 여유가 없었다.

“지금 이 문 뒤에 좀비들이 득실거릴 것 같은데. 그 좋은 일이란 거 한 번에 설명해 줄래?”

내 말을 들은 철수는 문 너머를 바라보며 표정을 찌푸렸지만, 곧이어 말할 주제에는 환하게 웃는 표정이 어울린다는 듯 밝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한나가 공작이 됐어! 거지 같은 할배 하나를 밀어내고 차지했지.”

“응…? 공작? 이제 이프리트가는 공작 가문이야?”

확인차 다시 묻는 내 말에, 철수는 신이 난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자신이 그동안 한나를 도우면서 얼마나 열심히 뛰어다녔고, 정령왕과 어울리지 않게 이런저런 짓까지 했다면서 즐거운 얼굴로 투덜거렸다.

그간 바빴던 이유가 있었구나. 그나저나 한나 정말 대단하다.

한나를 처음 본 순간부터 느꼈지만 될 사람이었구나.

백작이 후작을 거치지 않고 바로 공작이 되는 사례는 드물다. 게다가 한나는 정계에서 홀대받는 여성이다. 그런 여성이 스스로 높은 신분을 거머쥐었다는 게 놀랍고, 기특하고, 아무튼 간에 대단하다.

이제부터 한나를 선두로 프레오나에 새로운 바람이 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프레오나 왕도 한나가 하자. 한나가 해도 충분할 것 같은데.

“철수 네가 바빴던 이유가 이거였구나? 수고했어.”

“한나는 너희들이 걱정할 테니 말하지 말아 달라 했지만, 위험한 일도 많이 하고, 잠도 자지 못하고, 아무튼 그랬어. 이 몸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철수는 그간 한나를 도왔던 자신의 노력이 뿌듯한지, 한나와 함께 있었던 이야기를 끊임없이 떠들었다.

나는 철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젠을 바라봤다.

젠은 자신의 아우인 한나가 위험한 일에 휘말렸었던 게 마음에 걸렸지만, 지금은 안전하게 있고 자신의 뜻을 이뤘다는 것에 만족하고 있는 것 같았다.

“철수야, 이제 여기에 집중해 줘.”

한나의 일은 나중에 본인한테 듣는 걸로 하고, 이제는 저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다시 정신을 차려 왕성의 무거운 문을 열었다.

“하, 미치겠네.”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고요했던 바깥과는 천지 차이로, 왕성 안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굶주린 좀비들이 있었다.

어째서 바로 우리에게 달려들지 않는가 했거니, 좀비들의 목에 얇은 쇠사슬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 쇠사슬이 어디와 연결되어 있는지 시선을 옮기면, 왕이 앉아 있을 법한 높은 상단 위에 있는 여자가 있었다. 셀비스와 비슷한 색이지만 조금 더 탁한 회색빛의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가 쇠사슬을 쥐고 있었다.

나는 여자를 향해 소리쳤다.

“야! 고운 말로 할 때 내려와라!”

이 큰 왕성이 울릴 정도로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에 내 말을 들은 여자는 주먹을 쥐며 소리쳤다.

“무엄하다! 감히 공주의 앞에서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곧 뒤질 사람에게 예의는 무슨. 너 이리 안 내려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나는 세네카 제국의 황자다. 그러니 신분에 상관없이 공주든 뭐든 제멋대로 굴 수 있다.

하지만 저 공주라는 애의 성깔도 저 모양이고, 정신 상태도 멀쩡한 건 아닌 거 같다. 괜히 귀찮아지고 싶지 않아 무시했다.

저런 애와 말싸움해 봤자 피곤해지기만 할 거다.

“이… 이 무례한…!”

공주는 자신이 잡고 있던 쇠사슬들을 한 번에 놓았고, 덕분에 억압됐던 좀비들은 자유를 찾아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우리에게 달려드는 좀비는 다양한 무기를 손에 쥐고 있었다. 검과 방패, 그리고 활까지.

잔인하게 느껴졌다.

자기 왕국의 병사들을 좀비로 만들다니….

전투의 시작은 젠이었다.

젠은 내 옆에서 가만히 서 있다가, 좀비들이 달려들자 가장 빠르게 반응해 검을 뽑아 들어 좀비의 머리를 베었다. 그의 검이 뿜어내는 오러가 흉흉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철수는 교묘하게 젠이 좀비를 벤 것처럼 꾸며 내 좀비들을 제압했고, 그 외에도 내가 마법을 부리는 것처럼 불을 날리고, 셀비스의 투척용 단검에 철수의 불을 붙여 제압을 하기도 했다.

셀비스는 생각보다 손에 잘 맞고 부드럽게 꽂히는 단검을 신기해하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좀비들을 노렸다.

나는 철수에게 눈치를 주며 시간 끌 것 없이 한 번에 쓸어 버리자고 했고, 철수는 한곳에 모여 있던 좀비들의 몸에 큰불을 질렀다.

역시 정령왕의 이름값을 한다.

대충 정리가 돼 갈 때쯤, 망해 가는 와중에도 도망치지 않고 상단 위에 있는 공주를 바라봤다.

공주의 시선은 젠을 향해 있었다. 마치 꿈에서 바라 왔던 왕자님을 마주한 듯 황홀한 표정이었다.

나는 약간의 짜증이 났다.

그래, 우리 젠이 멋있기는 하지…. 근데 그런 눈으로 보는 건 너무 거슬리는데.

나는 공주를 향해 크게 소리 질렀다.

“내 손에 잡히면 넌 뒤진다! 네 발로 내려와!”

날이 선 내 목소리를 들은 공주는 화들짝 놀라 젠에게서 시선을 떼고, 목소리의 주인공인 나를 바라봤다.

공주는 그제야 제가 처한 상황을 살피며 자신의 좀비 군대가 몰살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하얗게 뜬 얼굴로 상단의 뒤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때, 셀비스가 투척용 단검을 던져 공주의 진로를 방해했고, 마지막에는 공주의 종아리를 향해 단검을 던졌다.

“악!”

셀비스의 단검은 그대로 공주의 다리를 관통했고, 공주는 추하게 넘어졌다. 그리고 종아리에 박힌 단검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아프다고 소리쳤다.

나는 안고 있던 노반을 마린에게 넘긴 후, 넘어져 있는 공주를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공주는 가까이 오는 나를 바라보며 겁에 질린 채 몸을 떨었다.

“고대 생물은 어디 있어.”

“….”

“묻잖아. 어디 있어.”

내 말에 공주는 입 안쪽을 씹으며 떨리는 동공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저 사람을 나한테 주면 알려 줄게!”

공주의 손끝에는 젠이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