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 로웨나 왕국으로 향하다 (11)
“여기서부턴 어두우니까, 계단 조심해서 잘 따라와.”
로웨나 성에 있는 비밀통로는 페모스토프 공작의 집에서 보았던 느낌과 비슷했다. 사실 비밀통로들이 다 그렇지. 깃발이나 액자 뒤에 있는 게 기본이다.
라이언 황제가 가지고 있는 방 중, 레이트라의 물건들이 가득했던 그 소름 끼치는 방이 그나마 신박한 비밀의 방이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길목에 횃불을 밝히는 곳이 있는데도 어두운 걸 보니, 공주는 밝히는 법을 모르거나, 밝혀 줄 사람도 없는 것 같다.
나는 철수에게 부탁해 홰에 불을 붙였고, 순식간에 환해진 장소에 공주는 신기해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네가 불을 막 해 가지고 그것들을 죽였지? 세네카의 사람들은 마법을 다 잘하나 보네.”
공주는 곱게 자란 황자가 마법도 할 줄 안다며 신기해했고, 한층 공간이 밝아지자 벽을 더듬대면서 걷고 있던 공주는 벽에서 손을 떼었다.
나는 공주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했지만, 궁금한 게 몇 가지 있어 입을 떼었다.
“다른 사람들은? 여기 너만 있어?”
“정신 멀쩡한 사람은 몇 명밖에 없어.”
드로이프로 약을 만들어 내는 세네카의 마법사 몇 명과 살림을 담당하는 시녀 몇몇을 제외하고는 전부 좀비 상태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좀비들은 전부 한곳에 모아 가둬 두었다고 했다.
여기까진 예상했다. 우리를 마주했을 때 좀비들만 데리고 온 게 아주 수상했으니까.
“그럼 왕은? 처음부터 네가 벌인 일은 아닐 거 아니야.”
“아바마마는… 얼마 전에 돌아가셨어.”
로웨나 왕국의 왕은 드로이프의 생명력으로 만들어 낸 약을 자신의 백성들이 마신 뒤,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좀비로 변하는 꼴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게 왕은 시름시름 앓다가 바로 얼마 전, 숨을 쉬지 않았다고 했다.
“그때부터 개고생은 내가 다 한 거지. 일을 벌인 건 아바마마인데 내가 처리를 하고 있으니….”
“너도 공조한 거나 마찬가지야. 그러게 왜 그런 끔찍한 짓을 했대.”
“아바마마는 속았던 것뿐이야.”
공주는 억울하다고 말하며 사건의 경위를 말했다.
드래곤의 힘이 약해지면 약해질수록, 로웨나 왕국엔 평소 보이지 않았던 마물들이 늘어났다고 했다. 그것도 모자라 그 마물들이 민가를 덮치는 일도 수두룩해 피해도 컸다.
왕은 드래곤의 힘이 더 이상 로웨나 왕국을 지켜 주지 못한다면, 무엇으로 왕국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압박감이 컸다고 했다.
그래서 세네카의 황제가 제안한 ‘군력을 강화시키는 일’에 동참을 했던 거다.
“처음엔 좋았지. 돈도 주고, 물자도 주고, 식량도 주고, 군사도 줬으니까. 그런 놈인 줄도 모르고….”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다 나쁜 마음이지.”
“이 일이 성공하면 프레오나를 몰아낼 수 있다니까. 서로 이득을 보는 일인 줄 알았지.”
황제는 세네카가 유일한 제국이 되기 위해선, 로웨나 왕국이 꼭 필요하다는 말을 하고, 일이 잘 풀리면, 드래곤의 힘이 사라지고 난 후에도 로웨나 왕국에 가해지는 피해를 막아 주겠다는 약조까지 했다고 한다.
나는 공주의 이야기를 담담히 듣다 그녀를 책망하며 말했다.
“일이 벌어진 건 둘째 치고, 못된 일인 줄 알았으면 그만뒀어야지. 왕이 못 했으면 너라도 말렸어야 했고.”
“우리라고 좋아서 한 줄 알아? 우린 선택권이 없었어.”
“선택권이 없다니?”
“황제가 교황이랑 손을 잡았어. 우리가 그들의 뜻대로 하지 않으면 이 문제로 재판에 회부할 거라잖아. 결과는 안 봐도 뻔한 거 아니야?”
로웨나 왕국이 독박 쓰고 끝났겠지.
왕국과 제국 사이의 문제는, 중립인 교황청에서 잘잘못을 따져 그 죄의 합당한 벌을 내린다.
라이언 황제가 교황청과 손을 잡았다는 것은 가장 막대한 권력을 잡 은것과 다름이 없다는 소리다.
설마설마했는데, 황제가 교황청과 연결되어 있다는 게 진짜였구나. 이거 좀 성가시겠네.
공주는 ‘어쩔수 없었어’라고 말했고, 나는 그런 공주를 향해 말했다.
“프레오나랑 이야기해 보지. 제국을 치려면 또 다른 제국을 이용…, 아니다. 지난 이야기 해서 뭐 해.”
이제 와서 말하는 것도 웃기고, 이미 벌어진 일을 후회해서 좋은 거 없다는 걸 알고 있느니 입을 다물었다.
계단을 끝까지 내려가니, 3개로 나누어진 갈림길이 나왔다.
공주는 우리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느 길 같아?”
나는 잠시 멍한 얼굴로 공주를 바라봤다.
설마 이렇게까지 멍청한 거야…? 비밀통로의 길을 잊어 버렸을 정도로?
“설마… 까먹은 거야?”
“아, 알고 있어! 그저 너희들이 무슨 길을 고를지 궁금했던 거야!”
공주는 자신을 어디까지 무시하는 거냐면서 지하 통로가 울리도록 소리를 질렀다.
내 뒤에 있던 철수는 그런 공주가 웃겼는지 배를 까뒤집으며 하하하 웃었고, 공주의 바로 뒤에 서 있던 셀비스는 공주의 고함이 듣기 싫다는 듯 귀를 막았다.
셀비스는 공주를 아주 많이 싫어하는 것 같다. 공주가 가만히 있어도 표정이 굳어질 만큼. 하지만 공주를 통해 드로이프가 있는 곳을 찾아야 하니 어쩔 수 없이 참아 주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셀비스를 바라보며 공주를 향해 말했다.
“그냥 조용히 가자.”
“맞혀 봐!”
공주는 이런 사소한 재미를 느껴 본 적이 아주 오래 전 일이라며 꼭 맞춰 보라고 했다.
나는 대충 오른쪽에 있는 길을 찍었고, 나머지 일행도 공주에게 맞춰 주기 싫어 내가 했던 선택을 따랐다.
“땡! 정답은 가운데야!”
공주는 자신이 이겼다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가운데 갈림길을 향해 걸어 나갔다.
나는 공주의 뒷모습을 보면서 참 성가신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생각도 내 생각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가운데 길을 끝에 다다르자, 노반만 한 엄청 큰 자물쇠가 걸려 있는 문이 나왔다.
공주는 자물쇠를 잡고 아래로 힘을 주어 끌어내렸다. 그러자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자물쇠의 잠금장치가 풀렸다.
저것도 자물쇠라고 달아놓은 건가?
“잠그지도 않을 거면서 왜 달아놓은 거야?”
“밖에서는 열 수 있지만, 안에서는 절대 못 열게 하는 마법 도구랬어.”
아….
나는 공주의 대답에 잠시 말을 잃었다.
공주의 말대로 이건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게 아닌, 내부에 있는 드로이프가 탈출하지 못하게 막아 두는 용도였다.
어휴… 나쁜 새끼들.
공주는 자물쇠를 빼서 바닥으로 던졌다. 그리고 육중한 문을 천천히 열었다.
나는 노반의 기색을 살폈고, 노반의 몸은 딱딱해져 있었다. 긴장을 한 모양이다.
그리고….
“컁!”
문이 열리면서 안이 보이자, 노반은 내 품을 벗어나 앞으로 달렸다.
나는 놀란 마음에 노반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젠이 내 앞을 막아서는 바람에 들어가지 못했다.
“제가 먼저 들어갈게요. 미르 님은 세르비스와 함께 있다 들어오세요.”
젠은 노반을 찾으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공주는 놀란 내 모습을 보며 별거 아니라는 듯 담담히 말했다.
“걱정할 거 없어. 나쁜 환경도 아니란 말이야.”
공주는 반쯤 닫혀 있는 문을 활짝 열었고, 우리의 눈앞에는 희한한 장면이 보였다.
지하인 줄 알았던 곳에는 밝은 태양이 떠 있었다. 마법으로 만든 청명한 하늘이었다. 그런 하늘 아래, 아주 넓고 푸른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초원을 뛰어다니고 있는…,
“저게 뭐야.”
“저 짐승들이 마음을 편하게 먹어야 약을 얻어 낼 수 있다고 하더라고.”
공주의 말대로, 드로이프들은 삼삼오오 모여 초원 위를 신나게 날뛰고 있었다.
그 안에는 노반과 가까운 사이인 드로이프도 있었는지, 오랜만에 재회한 드로이프들은 노반의 생사를 확인하며 기뻐했다.
마치 평화로운 양떼 목장 같았다.
“이상해….”
나는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공주를 바라본 뒤, 주위를 둘러봤다.
그때 노반의 모습을 지켜보다 내가 들어온 것을 확인한 젠이,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는 내게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미르 님?”
“이상하지 않아…? 우리가 봤던 두루마리랑은 전혀 다른 풍경이잖아.”
뭔가 싸하고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건 확실한데 왜인지 모르겠다. 심증만 있고, 물증이 없다.
내 말을 들은 젠도 이상하다 생각했는지 목장 전체를 천천히 훑었다. 그리고….
“저기 희미하게…”
“미르, 저기야.”
철수가 험악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그리고 젠과 철수가 동시에 가리킨 곳을 보자 흐릿하게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희미한 균열을 발견했다.
나는 그곳으로 달려가 마법을 해체하는 주문을 외쳤고, 마법이 풀리자 본래의 모습이 보였다. 경악스러웠다.
“….”
유리처럼 투명한 장막으로 쌓인 집채만 한 마법의 기계 위에는 사지가 묶여 온몸에 검은 호스가 박힌 드로이프가 보였다. 묶여 있는 드로이프는 괴로운 듯 신음을 냈지만, 움직일 힘조차 없어 보였다.
페모스토프가 행했던 그 착취 방법과 소름 돋게 일치했다.
“이… 쳐 죽일 새끼들이…!!!”
나는 케이시가 준 마법 스크롤을 꺼내, 기계를 부수는 마법을 사용했다. 그러자 마법 장막이 사라지고 신음을 앓고 있던 드로이프의 숨이 편해졌다.
기계 근처에 있던 세네카의 마법사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깜짝 놀라 내게 마법을 쓰려 했지만, 철수가 막아 준 덕분에 통하지 않았다.
젠은 기계 위에 있는 드로이프에게 빠르게 다가가, 사지를 결박하는 부분을 부서트렸다.
그리고 자신에게 달려드는 마법사들을 칼등으로 제압해 기절시켰다.
나는 젠이 보호하고 있는 드로이프를 조심스럽게 쓰다듬다가 치유 마법을 걸어 줬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공주가 있는 곳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이거 해결되면 뒤질 줄 알아라.”
공주는 경악하며 밖으로 뛰쳐나갔고, 셀비스가 그런 공주의 뒤를 쫓았다.
쟨 이제 뒤졌다.
“저, 저기요….”
힘겨워하는 드로이프의 치료를 신경 쓰고 있는 와중, 기계의 뒤편에서 얇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와 젠은 기계의 뒤를 살폈고, 그곳에는 두꺼운 밧줄로 묶여 있는 남자가 있었다.
쟤는 또 뭐야?
“저는 수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믿어 주십시오! 저는 교황청의 사제인데… 피치 못할 사정으로….”
나는 드로이프를 치료하며 남자에게 더 말해 보라고 이야기했고, 남자는 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신은 로웨나 왕국을 지켜보라는 교황의 명령으로 이곳까지 왔는데,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보게 됐다고 한다.
결국 양심에 찔려 드로이프들을 탈출시키려 했지만 실패하고 잡혀서 이렇게 묶여 있는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됐다고 말했다.
착한 놈인가….
나는 젠을 바라보며 저놈이 괜찮은 놈인지 물었고, 젠은 저자의 영혼은 깨끗하다고 했다.
남자는 늦게라도 우리가 와 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이제 끝났으니 너도 돌아가.”
“아,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공께서는 자아를 잃은 불쌍한 육체들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그분들을 자유롭게 해 드려야 합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한 번에 알아듣기는 힘들었지만, 저 사제가 하려는 말은 드로이프뿐 아니라 좀비들까지 구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나는 진지한 표정의 남자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