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 로웨나 왕국으로 향하다 (13)
“야.”
“예?”
나는 뻔뻔하기 그지없는 율리우스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도 말했지만 우리는 시간이 넘쳐나지 않아. 시간은 돈이라는 소리 들어봤어?”
짜증을 가득 눌러 담은 내 말에 율리우스는 잔뜩 긴장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 들어본 것 같습니다.”
“내 시간은 돈으로도 못 사는 아주 귀한 재산이야.”
“….”
“그런데, 그 돈으로도 못 사는 내 귀한 시간을 네가 무상으로 쓰려고 하네?”
알기 쉽게 풀어 설명해 줬는데도 율리우스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율리우스의 모습에 끓어오르는 화를 진정시킨 뒤 다시 한번 알아듣기 쉽게 말했다.
“너네 같은 사제들은 불쌍하고 위급한 사람들을 아무 대가 없이 도와주겠지만, 나는 아니라고. 나는 내가 하는 모든 일에 대가가 필요한 사람이야.”
“아….”
“내가 널 도와주면, 넌 나한테 뭘 해 줄 수 있는데?”
내가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세상은 기브 앤 테이크다. 주는 것이 있어야 받는 것도 있는 법.
사제 양반은 나한테 뭘 해 줄 수 있으려나.
진지한 내 눈빛에 율리우스도 자세를 바로잡고 진지하게 말했다.
“제가 해드릴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드리겠습니다.”
율리우스는 기사의 서약을 하듯 아주 진지하게 대답했다.
만일 우리에게 시간이 충분하거나 여유가 충분했다면, 모든 것을 해드리겠다는 율리우스의 대답은 그의 골수까지 빼먹을 수 있는 좋은 대답이었겠지만… 지금 우리는 한시가 바쁜 사람이다.
“그러니까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그리고 그건 내게 도움이 되는 일이야?”
내게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라면 쓸모가 없다는 내 말뜻을 알아차린 율리우스는 미간에 주름이 잡히도록 고민을 하다 입을 열었다.
“교황청에 있는 제 방에 장부가 있습니다.”
“장부?”
“예, 그동안 라이언 황제와 교황님께서 주고받은 거래 품목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장부입니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적어 뒀습니다.”
나는 조금 놀라 동그래진 눈으로 율리우스를 바라봤다.
쟨 어떻게 된 배짱이야? 그런 걸 일일이 적어 놨다고? 들키면 어떻게 하려고 그런 걸 적어놨대? 순한 사제인 줄 알았더니, 강심장이 따로 없네.
“비리 장부 말하는 거야?”
“예! 그걸 드리겠습니다. 황자님께서는 라이언 황제와 적대관계이지요? 그렇다면 제 장부가 황자님께는 유용한 물건이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율리우스의 말대로 이건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다.
라이언 황제가 비리를 저질렀다는 그 장부를 증거로 황제의 실태를 귀족들과 제국민들에게 알리고, 신임을 완전히 잃은 라이언은 황궁에서 아웃. 그러면 로이븐이 황좌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교황청의 사제가 기입한 장부는 의심받을 리가 없으니 계획이 틀어질 일도 없겠지.
하지만.
“그 장부가 실재하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지?”
율리우스는 내가 의심할 거란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으며 ‘그런 문제가 있었군요….’라며 침울해했다.
오스먼드에게 했던 것처럼 마법을 이용해 거짓말을 꿰뚫어 볼 수 있다면 좋을 테지만, 율리우스는 자신에게 마법을 사용하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사제라 그런가? 아무튼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저 말의 진위를 판별할 방법이 없다.
나는 율리우스를 바라보며 그가 어떤 대답을 할지 기다렸지만, 율리우스는 자신의 진심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모르겠어 당황하며 나와 젠을 번갈아 보았다.
“애 울겠다. 대충 해 주겠다고 해. 어차피 해 줄 거였잖아.”
철수는 내 양심상, 지금 해결하지 않으면 나중에 끙끙 앓으며 신경 쓸 거면서, 왜 시간 아깝게 고집을 부리냐고 혼내기도 했다.
“이 몸은 바쁘다고!”
저거 저거. 성질내는 걸 보니, 다시 한나에게로 돌아가고 싶은가 보다.
좋겠다. 누구는 뿅 하면 사라지고, 뿅 하면 나타날 수 있어서.
나는 얼른 끝내자는 철수에게 어림없다고 말했고, 율리우스가 만족스러운 답을 낼 때까지 지켜볼 생각이었다.
그때, 율리우스를 가만히 지켜보던 젠이 깊은 고민을 하고 있는 율리우스를 바라보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장부가 없다면, 사제님 본인이 나서서 증언을 해 주시면 되겠네요.”
“증언 말입니까?….”
“예, 직접 눈으로 보셨다고 하셨으니까요.”
한마디로 장부 따위에 숨지 말고 앞으로 나서서 목숨을 걸고 증언을 하라는 소리였다.
은근 젠이 더 잔인하다니까.
장부는 주고 빠지면 그만이지만, 증언은 말 그대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목숨을 위협받을 확률이 높다.
아무리 바보라도 그 정도는 알고 있을 거다.
나는 율리우스의 반응을 살폈다.
“알겠습니다.”
더 당황할 줄 알았던 율리우스는 정직해 보이는 눈동자로 고개를 끄덕이며 강인하게 말했다.
“증언은 당연히 할 겁니다. 제 잘못으로 인한 죗값도 제대로 받겠습니다.”
“….”
“제 증언으로 인해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몇 번이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율리우스의 말에 잠시 말을 잃었다.
그동안 인간의 이기심은 살고 싶은 욕구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은 살기 위해서 하는 짓이니까.
하지만 율리우스는 자신이 죽을 위기에 놓여도 다른 사람들을 구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한다고 말했다.
저건 속죄인가, 희생인가.
아무튼 인간은 정말 알 수 없는 동물이다.
“좋아. 장부가 없으면 증언이라도 해 줘. 있어도 증언해 주면 좋고.”
“그럼…!”
“그래. 교황청으로 같이 가 줄게. 이곳으로 돌아오는 것도 도와줄 거고.”
내게서 확답을 받아낸 율리우스는 어두운 기색이 서려 있던 방금 전과는 다르게 밝고 화사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 교황청에 갔다가 세네카까지 가려면 서둘러야 할 거야.”
나는 젠의 손을 잡고 숨겨진 공간의 밖으로 나갔다.
바깥에는 신이 난 드로이프들이 노반과 마린을 둘러싸며 푸른 초원을 뛰어놀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마린을 불렀다.
“마린! 잠깐만.”
마린은 드로이프들을 쓰다듬어 주는 것을 멈춘 뒤, 노반을 내려놓고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네, 황자님. 무슨 일 있으세요?”
“아무래도 교황청에 가야 할 것 같아.”
“교황청이요? 갑자기 교황청은 왜….”
나는 반문하는 마린에게 방금전까지의 상황을 설명했고, 마린은 내 뒤에 서 있는 율리우스를 잠시 바라보며 상황을 가늠하다 한숨을 쉬었다.
“설마 또….”
“동정에 넘어간 건 아니니까 걱정 마. 저 사제가 증언까지 해 준다니 우리한텐 이득이지. 운이 좋으면 교황을 잡는 것도 좋을 것 같고.”
“교황까지 잡으시게요?”
마린은 갑자기 커진 일에 놀라 되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교황은 우리가 가는 걸 모를 테니, 잡는 건 수월할 거야. 그리고 다 늙은 할아버지가 무슨 힘이 있겠어.”
라이언 황제랑 손을 잡은 것만 봐도, 신을 섬기는 사제로서 타락했다는 뜻이잖아.
그에 가만히 서 있던 율리우스는 내 이야기에 양심에 찔렸는지 어깨를 흠칫 떨며 고개를 숙였다.
“너는 타락까진 안 했어. 어깨 펴.”
나는 율리우스의 어깨를 두드리며 기운을 북돋아 주었고, 율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를 애써 폈다.
“아, 그래서 말인데… 마린이 여기 좀 지켜 줄 수 있어?”
“제가요?”
“응, 달리 맡길 사람이 없어서. 공주는 우리랑 같이 갈 거야. 교황이랑 붙여 놓으면 황제는 환장하겠지.”
마린은 황제의 찡그린 얼굴이 벌써부터 보인다며 좋아했다.
내가 세운 계획은 이렇다.
나와 젠, 셀비스, 율리우스, 그리고 공주는 교황청으로 갈 것이다.
교황청에서 교황을 잡고, 장부도 얻고, 얻을 것은 전부 다 얻을 것이다.
그리고 율리우스의 바람대로 좀비를 치유해 줄지도 모르는 성수와 믿을 만한 사제 몇몇을 뽑아, 로웨나 왕국을 통과할 수 있는 셀비스와 함께 보낼 것이다.
처음부터 율리우스가 가면 좋을 테지만, 그는 라이언 황제의 앞에서 증언을 해야 하니 나와 함께 세네카로 가야 한다.
증언을 해 줄 율리우스, 로웨나 왕국의 공주, 마지막으로 교황까지 챙겨서 세네카로 간 뒤, 라이언 황제를 탈탈 털어버리는 게 이번 계획이다.
잘될지는 모르겠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만 없어도 기본은 할 것 같다.
“셀비스. 잘 들었지?”
셀비스는 도망간 공주를 잡는 데 성공했는지, 그녀의 목 뒤를 잡고 우리 앞에 와있었다.
그는 내 계획을 듣고 문제없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거 놔!”
나는 셀비스에게 잡혀 발버둥 치는 공주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디서 굴렀는지 방금까지 깨끗했던 옷은 진흙투성이에, 아스팔트에 긁힌 양 얼굴도 조금 쓸려 있다.
“너희들, 나를 이렇게 대한 걸 후회할 거야! 나는 드래곤이 지키는 로웨나 왕국의 마지막 공…!”
“넌 그냥 자고 있어라.”
공주에게 수면에 빠지는 마법을 사용했다.
그녀의 몸은 순간 혼이 빠져나간 듯 추욱 처졌고, 셀비스는 그녀의 목 뒤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덕분에 철푸덕 쓰러진 공주는 땅바닥에 얼굴을 박고 쿨쿨 잠에 빠졌다.
공주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여러 사람을 거슬리게 한다. 게다가 딱히 쓸모가 없으니 조용히 자고 있는 게 서로 좋을 거 같다.
“아, 황자님. 저기에 같이 가 주셔야 할 것 같아요.”
마린은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 어느 한구석을 가리켰다. 그곳엔 흰색의 넓은 돌로 조성된 제단 같은 곳이 있었고, 그 제단 위에는 죽은 듯 쓰러져 있는 드로이프가 몇 마리 있었다.
“아, 맞다.”
나는 케이시가 만들어 냈던 ‘수면향’을 기억해 냈다.
처음 드로이프들을 봤을 때, 푸른 초원을 신나게 뛰돌아 댕기는 거에 놀라서 수면향이란 게 있었다는 걸 완전히 잊고 있었다.
이걸 잊다니 제정신이 아니구나, 도브로미르.
나는 케이시가 줬던 스크롤을 이용해 드로이프의 몸속에서 수면향을 몰아내는 마법을 사용했다.
아크레나의 팔찌가 진동하며 사용하는 마나를 반으로 줄였지만, 그래도 많은 양의 마나가 몸에서 빠져나갔다.
망할. 이래서 마나가 넘쳐 나는 천재 마법사가 싫다는 거다. 마나가 적은 마법사를 배려할 줄을 모른다.
다행히 강한 드로이프만 재워 놨는지, 수면향에 빠진 드로이프는 대여섯 마리밖에 없었다.
하마터면 몸 안에 있는 모든 마나를 전부 소진할 뻔했다.
“곧 잠에서 깨어날 거야. 회복도 천천히 할 거고.”
나는 걱정을 하고 있는 다른 드로이프들을 향해 이제 괜찮을 거라 말했다. 그에 가장 앞에 서 있는 하얀 드로이프가 맑고 강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나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뒤로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던 마린에게 말했다.
“건강하게 잘 지키고 있어 줘. 금방 끝낼게.”
“저는 잘 있을 수 있어요. 황자님이야말로 무모한 짓 하지 마세요.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으면 황자님이 직접 나서서 해결하려 하지 마시고, 젠 님의 뒤로 가셔서 철수 님을 부르세요.”
마린은 아주 멀리 떨어지는 철부지 아들을 챙기듯 이건 하지 말고, 저건 하지 말고, 이런 일이 생기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같은 따듯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알았어, 마린. 걱정할 일 없게 잘할게.”
마린은 내 대답에 믿음이 가질 않는지 젠을 바라보며 잘 부탁한다고 말했고, 젠은 걱정 말라며 마린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입술을 쭉 내밀고 철수를 바라봤고, 철수는 마린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미르. 괜히 네가 나서지 말고 이 몸을 불러.”
젠장. 여긴 내 편 하나 없구만.
안 되겠다. 귀여운 걸 봐야겠어.
나는 고개를 돌려 저 멀리 잃어버렸던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노반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