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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님 먹고 싶어요-207화 (207/227)

207 교황청으로 가다 (3)

“테네트 왕국의 왕세자?”

혹시나 잘못 들은 게 아닐까 하는 걱정에, 나는 미청년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그에 미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럼 다시 소개해야 할 것 같네. 나는 세네카의 4황자인 도브로미르 세네카야.”

“아…! 제 소개를 하지 않았었군요. 저는 라르칸 테네트라고 합니다.”

라르칸… 핑크빛 미청년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건장한 이름이었지만, 듣고 보니 묘하게 입에 붙는 이름이었다.

근데 왕세자라면서 몸이 이렇게 허약해?

성대는 선천적으로 약해서 말을 못 했다고 해도, 몸은 키울 수 있었잖아. 프레오나 주변국이었으니 검술을 배울 기회도 많았을 텐데.

왕세자라는 높은 자리에 앉아 놓고 말도 못 하면 너도나도 왕세자 하겠다고 위협도 많이 받았을 텐데 몸이라도 키우지… 아, 설마 쟤도 나처럼 저주받은 몸뚱어리인 건가?

“반가워.”

나는 속에 품은 의문은 잠시 집어넣어 두고 라르칸에게 웃으며 말했다. 그에 라르칸은 다시 한번 내게 고개를 숙이며 어리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황자님.”

그리고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테네트의 왕은 자식이 라르칸밖에 있지 않아 왕권에 대한 치열한 싸움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왕은 왕으로 추대하기 힘들다는 귀족들의 의견으로, 스물세 살까지 유예 기간을 두고 만약 그때까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면 혼인을 하여 자손을 낳아 왕세자의 자리를 잇게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단다.

지금이 스물두 살이니, 곧 자유 의지가 사라질 뻔한 라르칸은 자신의 목을 낫게 해 준 내게 너무나 감사하다며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황자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혼인한 채 제 의지대로 살지 못했을 겁니다.”

나는 라르칸의 말에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이런 말을 내가 하면 안 되는 거지만, 사실상 황족이나 왕족은 자신이 원하는 사람과 결혼하지 못할 확률이 높지 않나?

로이븐이나 메이븐을 봐라, 라이언 황제가 지아랑 꼭 혼인해야 한다고 둘을 엄청 쪼아 대고 있지. 게다가 프레오나의 황제인 오스먼드도 선황제가 황천에 조금 더 늦게 갔다면, 어디 이름 모를 왕녀와 혼인을 하게 됐을 거다.

나야… 뭐, 제국의 황자지만 애초부터 볼모 황자로 버림받았으니, 버린 것도 모자라 혼인까지 시키면 뒤집고 엎었을 거다.

“목이 나아서 다행이야. 마나를 끝까지 쏟아부은 보람이 있네.”

“헛…! 제게 그렇게까지….”

라르칸은 내게 더욱 감동받았다는 듯 눈을 빛냈다.

사실 케이시가 준 스크롤에 시간을 돌리는 마법이 없었다면, 라르칸의 성대를 고치는 일은 불가능했을 거다.

무언가의 시간을 바꾸는 건 어마어마한 마나와 힘이 든다. 필릭스도 쓰기 힘들 정도로 어려운 마법이니, 수박 겉핥기 식으로 마법을 배운 내가 이 마법을 성공하기는 하늘의 별을 맨손으로 따는 것보다 어려웠을 거다.

물론 이런 방식을 생각해 낸 내가 더 대단한 거지만.

“마법이란 정말 신기하군요… 그간 그 어떤 의술과 신성력도 제 목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라르칸은 아직 비밀공간에 박혀 있는 교황을 바라보며 말했다.

교황은 끼니마다 라르칸에게 성수를 주며 마시라고 하고, 그가 직접 나서서 밤낮으로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런 피나는 노력에도 라르칸의 목소리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당연하겠지. 성수는 치유의 효과를 발휘한다. 하지만 라르칸의 성대는 망가진 다음 그 상태로 굳어져 치유가 될 상처가 없다. 제아무리 성수가 위대하다지만, 고칠 곳이 없는 성대를 치유할 수는 없다.

그러니 나는 라르칸이 말을 할 수 있었던 멀쩡한 시간대의 성대로 되돌려, 훗날 목소리를 잃게 되는 원인을 잘라 버린 거다.

잠깐. 그러고 보니 라르칸에게 성수가 통하지 않았다면… 좀비가 원래대로 되돌아가는 것도 불가능한 거 아니야?….

아. 모르겠다.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목소리가 나았으니, 이제 고국으로 돌아가겠네.”

“네, 덕분에.”

“다행이네.”

“다 황자님 덕분입니다. 이 은혜를 갚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아버님께 부탁해 세네카 제국에 성의를 보이겠습니다.”

교황보다 더 성스러운 얼굴을 한 라르칸은 두 손을 무릎 위에 모은 뒤, 세네카에 은혜를 갚겠다 말했다.

나는 잠시 생각을 하다 라르칸에게 말했다.

“세네카 말고, 프레오나 제국에 해 줘. 성의 같은 것도 필요 없어. 그냥 잘 지내고 있냐 묻는 것만 해 줘도 충분해.”

“세네카가 아니라 프레오나요…?”

“응, 나 볼모거든. 프레오나 황제가 여간 눈치를 줘야지. 너네 왕국이랑 아는 사이라고 하면 덜하지 않을까?”

그러니 다음엔 네가 왕이 된 모습으로 만났으면 좋겠다.

나와 테네트 왕국의 주인인 라르칸 사이에 연결점이 있단 걸 오스먼드가 알게 되면, 그놈이 날 무시하는 것도 적당해질 거다.

세네카 말고도 빽이 생긴 거나 다름없으니까.

내 검은 속내를 드러낸 말에도, 라르칸은 자신의 은인이 그런 취급을 받는 건 참지 못하겠다며 자신이 도움이 된다면 자주 찾아뵙겠다 말했다. 그리고 지치지도 않는지 또 한 번 감사하단 말을 남겼다.

나는 그런 그에게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그럼 우린 가 볼게. 나중에 보자.”

이만 가겠다는 내 신호에, 젠은 비밀 공간에 끼어 있는 교황의 멱살을 꽉 쥐고 그곳에서 빼냈다.

비밀 공간에서 꺼내진 순간, 교황은 젠을 밀쳐내 밖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젠이 꼼짝도 하지 않는 바람에 탈출에 실패했다.

젠에게 단단히 붙잡힌 교황은 자신이 도망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무력감에 빠졌고, 나는 그런 교황에게 가까이 다가가 밧줄로 돌돌 묶어 움직임을 봉쇄했다.

“멍청하긴, 경고를 받았으면 바로 도망갔어야지.”

나는 혀를 차며 멍청한 교황에게 말했다. 그에 교황은 입을 꾹 다문 채 조금이라도 널널하게 묶이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교황은 내가 생각했던 배불뚝이 두꺼비도 아니었고 사악한 뱀도 아니었다.

그저 어디에나 있을법한 평범한 옆집 아저씨 같은 이미지였다. 할아버지는 아니지만 나이가 꽤 있어 보이고, 머리카락도 빈틈없이 잘 나 있고, 주름은 깔끔하게 져 있다.

“도망가도 못 살았겠지만.”

도망가도 얼마 가지 못해 잡혔을 거라는 내 말에, 교황은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이곳이 내 집이고 고향인데 어디로 도망친단 말인가!”

“웃기고 있네. 너 도망치려고 쟤 도와주려던 거잖아.”

나는 턱으로 라르칸을 가리켰다.

교황은 프레오나와 가까운 테네트의 왕세자를 도와주려 했고, 그 이유는 뻔하디뻔하다.

테네트로 도망가기 위해서겠지.

세네카가 망하면 도망갈 곳 하나를 뚫어 놓으려 한 거 아니야.

내 말뜻을 알아챈 교황은 큰소리를 내며 자신을 모욕하지 말라고 했지만, 귀가 붉어져 있었다.

정곡을 찔렸나 보다.

우리는 라르칸에게 인사를 한 뒤, 셀비스와 율리우스가 기다리고 있을 밑으로 내려갔다.

율리우스는 젠의 손에 잡혀 있는 교황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왜인지 셀비스는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유, 율리우스! 네가 어째서…!”

율리우스의 얼굴을 마주한 교황은 깜짝 놀라며 율리우스에게 소리쳤고, 율리우스는 고개를 돌려 교황의 시선을 피했다.

“나를 배신한 것이냐…?”

교황은 끈질기게 율리우스의 시선을 갈구했고, 율리우스는 비통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저는 제 방에 있는 장부를 가져오겠습니다. 함께 가시겠습니까?”

“나는 여기 있을게. 다녀와.”

율리우스는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방으로 가기 위해 탑을 나갔고, 교황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교황이 율리우스가 배신을 했다는 사실에 분노를 하거나 증오를 표하진 않았다는 게 조금 신기했다.

그래도 그를 많이 믿고 있었나 보구나.

“도비, 저 밑으로 내려가 볼래요? 재미있는 게 많이 있더군요.”

셀비스는 방긋방긋 웃으며 내게 지하로 내려가자고 꼬셨다. 그러자 셀비스의 말을 들은 교황은 허망했던 표정이 단번에 다급함으로 바뀌었다.

그에 나는 가지고 있던 아공간 주머니를 꺼내 셀비스에게 건네며 그에게 말했다.

“다 쓸어와.”

셀비스는 내게 아공간 주머니를 받은 뒤, 웃으며 지하로 내려갔다. 그리고 셀비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교황은 안 된다며 발버둥을 쳤다.

“어차피 세네카에서 받은 거잖아. 세네카로 돌아간다고 생각해.”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세네카 사람이니까, 내가 받으면 세네카한테 가는 거지 뭐.

그리고 토지계약서나 유물적으로 중요한 물건이 있다면 양심적으로 로이븐에게 돌려줄 예정이다. 아우 된 도리는 해야지. 처리하기 귀찮아서 돌려주는 건 절대 아니다.

나는 밧줄에 꽁꽁 묶인 채 지하를 바라보고 있는 교황을 향해 말했다.

“뭐가 더 허망해?”

내 물음에 교황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숨이 죽은 듯한 동태 눈으로 무슨 소리냐 물었다.

“아끼던 사제한테 배신당한 게 허망해, 아님 모았던 재물을 뺏기는 게 더 허망해?”

“….”

교황은 내 말을 듣고 무엇을 깨달은 듯한 표정과 함께 급격히 어두워졌다.

“뭐가 더 허망했든, 넌 둘 다 놓친 거야.”

만에 하나 라이언 황제가 나와의 싸움에서 이긴다 해도 교황은 쉽게 살아남지 못할 거다. 프레오나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고, 또 다른 왕국들도 들고 일어날 것이다.

이것이 권선징악이고, 악인의 말로다.

* * *

교황의 지하에서 어마어마한 재물을 들고 나선 셀비스는 활짝 웃는 표정으로 내게 아공간 주머니를 건넸다.

보통 재물을 좋아하는 건 나고, 셀비스는 큰 욕심이 없었다. 그에 왜 그렇게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냐 묻자, 셀비스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 ‘세상 희귀한 요리재료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식기구에도 전부 보석이 박혀 있었습니다.’라며 요리에 대한 애정을 뽐냈다.

그밖에도 신기한 물건들과 책들이 많아 전부 아공간 주머니 안에 넣었다고 한다.

나중에 천천히 뜯어봐야지.

“셀비스는 사제들과 로웨나로 돌아가서 좀… 그 아픈 사람들을 확인해 줘.”

“네, 문제없습니다.”

“마린이랑 노반도 잘 부탁해. 누가 힘으로 해결하려 하면… 죽을 만큼 때려도 괜찮아. 우리가 이겨.”

죽이는 건 그래도 좀 그렇지만, 죽을 만큼 때리는 건 괜찮다.

어떻게든 살릴 수 있으니까.

셀비스는 고개를 끄덕인 채, 교황청에 있는 모든 성수와 율리우스가 믿는 사제들과 함께 로웨나 왕국으로 향했다.

나와 젠, 율리우스, 그리고 묶여있는 공주와 교황은 세네카 황궁으로 향했다.

다행스럽게도 미리 뚫어놓은 지름길이 있어 빠르게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차를 타고 가는 와중, 애매 모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율리우스가 보였다. 나는 그를 잠시 바라보다 그에게 물었다.

“기분이 어때?”

“솔직히… 마음의 짐을 놓을 수 있어 편해진다는 기분이 듭니다.”

율리우스는 조금이라도 빨리 죗값을 받고 마음의 짐을 덜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그런 율리우스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교황을 바라봤다.

“너는 안 물어봐도 뻔해. 황궁으로 가서 황제에게 도와달라고 할 셈이지?”

“그, 그런…!”

교황은 자신의 속을 딱 들켰다는 듯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 기대 빨리 접어.”

황제는 무슨 짓을 해도 나를 이기지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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