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 교황청으로 가다 (5)
오랜만에 보는 세네카의 황궁은 여전히 화려하고 사치스러웠다. 하지만 예전과는 다르게 황궁엔 사람 하나 없이 고요했다.
지금쯤이면 로이븐이나 메이븐이 막내아우의 마중을 나와도 진작 나왔을 거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은커녕 그들의 시종조차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황궁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게 틀림없다.
“아무도 없는 것 같지?”
“…그런 것 같아요.”
내 물음에 젠은 황궁을 한번 둘러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기색이라든가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지아랑 로이븐들은 어디 별궁에 갇혀 있는 건가?”
황태자인 로이븐이 별일 없이 황궁을 비우진 않았을 테고, 만일 비웠다고 하더라도 메이븐은 남아 있어야 한다.
둘 다 안 보이는 걸로 보아 어디에 갇혀 있는 거겠지. 아니면 대피했다거나.
대피한 게 맞으면 좋으련만….
소식이 없는 로이븐들이 걱정이 된 내 표정은 점차 어두워졌다. 그에 내 기분을 살핀 젠이 나직하게 말했다.
“죽이진 않았을 거예요.”
“응….”
그래, 죽여도 나를 죽이지. 로이븐과 메이븐을 죽이진 않았을 거다.
아니지, 혹시 모른다.
라이언 황제의 목표는 자신의 혈육이 세세토록 황좌의 권세를 누리는 것이다. 그러니 황좌를 물려 줄 혈육은 하나로도 충분하다 생각할 수 있다.
제발 다 무사해라.
“정이란 게 참 무서운 거 같아.”
생판 남이거나 한두 번 스친 인연의 일이었다면, 그들이 죽든 말든 아무 상관도 없었을 거다.
하지만 그동안 나를 열심히 챙겨 줬던 로이븐과 메이븐의 일이라고 생각하니 감정이 조금 격해지는 것 같았다.
“미르 님은 다정하시니니까요.”
“…응, 이제 인정해야겠어.”
나는 냉정하고,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독한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 혹은 그런 태도는 나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 기제였던 걸지도 모른다.
정에 약한 사람이 얄팍한 감정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아닌 척을 하는 것처럼.
말로는 냉정한 사람이다, 얄짤 없는 사람이다 했지만. 나는 정에 약한 사람이었다.
“그래도 이성은 남아 있어. 내 사람들이 먼저야.”
도와주는 것에도 순서가 있다.
남을 도와주려면, 일단 나의 일부터 끝내야 한다. 내 앞가림도 못한 채 남을 도와주는 건 바보나 다름없으니까.
나는 미소를 지으며 젠을 바라봤고, 젠도 나를 따라 작게 미소를 지어줬다.
우리는 황제가 있을 만한 곳을 찾으러 다녔다.
우선 연회장부터.
* * *
“언제까지 걸어야 해? 이렇게 오래 걸을 거였으면 마차를 탔어야지.”
연회장부터 황좌가 있는 황성, 황제의 집무실, 황후의 정원, 황족의 훈련장, 로이븐과 메이븐의 궁, 심지어 지아의 별궁까지 확인했지만 사람은커녕 개미새끼 한 마리 없었다.
이것을 수상하게 느끼며 마지막으로 황제궁으로 가는 와중, 공주는 다리가 아픈지 우리를 향해 툴툴거렸다.
나는 공주를 돌아보며 침묵을 지켰다. 어디까지 하나 한번 보자.
“이럴 거면 예전처럼 날 재우고 업고 가. 다리가 너무 아파서 못 걷겠어.”
공주는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젠을 바라봤다.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근데 쟤는 나랑 젠이 이렇고 저런 짓을 하는 걸 훔쳐봤으면서 아직도 포기 안 한 거야?
저것도 참 대단한 멘탈이다.
“처맞고 걸을래, 그냥 걸을래.”
“….”
“난 여자도 때려.”
내 악력이나 평균 성인 여성의 악력이나 다를 게 없다. 오히려 나보다 저 공주가 더 강할지도 모른다.
이 저주받은 몸뚱어리는 근육이 전혀 붙지 않는 몸이다. 철수 덕분에 내부는 강해져도 외부는 강해지지 않는 것 같았다.
“걸으면 되잖아. 걸으면….”
공주는 아쉽다는 듯 혀를 차며 발을 옮겼다. 그러게, 곱게 갔으면 기분 상할 일도 없고 좀 좋아?
나는 하찮다는 듯 공주를 바라보곤, 교황의 옆에서 그를 부축하고 있는 율리우스를 바라봤다.
교황은 율리우스가 자신을 배신한 거에 대해선 포기를 했는지, 율리우스의 부축을 받으며 아무 말 없이 착실하게 걷고 있었다.
나는 그런 교황을 지긋이 바라봤다.
“…왜, 왜 그렇게 보는 건가. 나는 불만 없이 잘 걷고 있어.”
나를 의식한 교황은 공주와 다르게 자신은 잘 걷고 있으니 때리지 말라고 했다.
저런 찌질이 같은 놈이 교황이었다니….
빙의가 되었을 당시에는 악마와 관련된 자들을 찾아내 고문하고 불태워 버린다는 교황청이 제일 무서웠었다. 하지만 교황의 실체를 알게 된 지금은 그런 것에 겁을 먹었던 옛날의 내가 너무 불쌍하고 자존심이 상했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잔뜩 쫄아 있는 교황을 향해 물었다.
“걷기 힘들어?”
공주는 젊으니까 그렇다 쳐도, 교황은 늙었으니 노인공경을 해 줘야겠지.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내 물음에 교황은 잠시 공주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기 나무에 묶어 줄 테니까 쉬고 있을래?”
“그, 그래도 되는 것이냐?”
묶인다는 건 그다지 개의치 않는 건지, 쉬어도 된다는 내 말에 교황은 밝게 웃었다.
“그럼 묶어 주게!”
“나, 나도! 나도 묶어 줘! 나도 쉴래!”
교황은 많이 피곤했었는지 자신을 냉큼 묶어 달라며 자신의 밧줄을 내게 넘겼고, 그의 옆에 있던 공주도 내게 밧줄을 넘겼다.
나는 교황의 옆에 있던 율리우스를 향해 말했다.
“율리우스는? 교황이랑 같이 있을래?”
“저는 황자님을 따라가겠습니다. 제가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율리우스는 미안하단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확실히 율리우스가 도움이 될 일은 없겠지.
라이언 황제와 대치를 하게 되면, 젠의 검이나 내 마법, 그리고 철수의 힘으로 싸워야 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성수를 뿌리는 것밖에 하지 못하는 사제가 무슨 수로 싸우겠어.
“…그래, 같이 가자.”
하지만 자신이 배신했던 교황이랑 단둘이 남는 건 껄끄러울 테니, 나와 함께 가는 게 속 편할 거다.
그리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면 율리우스는 세네카에게 있어 중립적인 입장이니,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증언을 해 줄 수 있을 거다.
“저 나무가 좋겠다.”
나는 교황과 공주의 밧줄을 끌어 거대한 느티나무와 함께 묶었다. 그리고 만일을 대비해 밧줄이 풀리면 폭발을 하는 마법을 걸어 뒀다.
그런 줄도 모르고, 교황과 공주는 쉬게 되서 좋은지 나무에 묶여 있어도 무척이나 편하다는 표정으로 드디어 쉰다며 잡담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향해 담담히 말했다.
“자의든 타의든, 밧줄이 풀어지면 폭발할 거야. 운이 좋아 산다고 해도 팔다리가 멀쩡하진 않겠지.”
“….”
“치료받으면 괜찮을 거야. 아, 과다출혈로 안 죽는다는 전제하에 말이야.”
방금까지 하하호호 웃음을 지었던 이들은, 밧줄이 폭발할 수도 있다는 내 이야기를 듣고, 멀쩡했던 낯빛이 금세 노래졌다.
“그, 그게 무슨 말인가! 차라리 걷겠다! 걸을 테니 풀어 주게!”
“내가 쉬고 싶다 그랬지 죽고 싶다 그랬어?! 이거 풀어!!”
자진해서 묶어 달라 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풀어 달라며 극성이었다.
우습게도 그들은 혹시 움직이다 밧줄이 터질까 봐 최소한의 몸부림으로 소리만 크게 지르고 있었다.
사실 풀어 주는 거야 문제없지만, 밧줄에 들어간 내 마나가 아까워서라도 안 풀어 줄 거다.
“다녀와서 풀어 줄게. 가만히 쉬고 있으면 안 터지니까 걱정 말고. 아, 나 말고 다른 사람이 풀려고 해도 터지니까 조심해라?”
나는 벌벌 떨고 있는 그들을 향해 상큼하게 웃어 줬다.
내가 장난치는 것 같지? 절대 아니야.
그런 내 미소를 본 그들은 풀어 달라 열심히 떠들던 입을 꾹 닫았다. 그리곤 해탈한 표정으로 나무 뒤로 몸을 기댔다.
“얼른 돌아와… 불안해서 밧줄보다 심장이 먼저 터질 것 같으니까.”
공주는 불안하단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밧줄을 잡고 강하게 당겼다.
공주와 교황은 혹여나 밧줄이 터질까 봐 하지 말라며 고개를 돌리며 몸부림을 쳤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곧 어리둥절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이렇게 당겨도 안 터져. 그니까 걱정 마.”
“거짓말이었어?”
“마법을 쓰거나 억지로 자르려고 하면 터진다는 이야기였어. 이렇게 막 당겨도 안 터지니까 걱정 말고 있어.”
나는 최대한 친절하게 말해 주며 그들의 불안을 잠재웠다.
“조심해! 너 죽으면 우리도 죽은 목숨이라고!”
“내가 안 죽어도 너넨 죽은 목숨이야.”
공주는 내가 무사히 돌아와야 자신도 산다며 다치지 말라 격려해 줬다.
그간의 정을 봐서라도 내가 공주의 목숨줄을 늘려 줄 알았는지, 어림없다는 내 말에 공주의 표정이 굳었다.
나는 혀를 한 뒤, 젠과 율리우스와 함께 황제가 있을 황제궁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밑에 층부터 황제가 있을법한 곳을 찾으며 돌아보던 순간, 잠시 잊고 있던 한 곳이 떠올랐다.
“만약 거기 있으면, 진짜 음침 끝판왕인데.”
나는 소름이 돋는 팔을 문지르며, 레이트라의 물건들이 잔뜩 숨겨진 비밀의 방으로 향했다.
* * *
심호흡을 가다듬고 방문을 열자, 열린 방문 너머로 레이트라의 물건들을 바라보며 홀로 고고하게 앉아 있는 라이언 황제의 모습이 보였다.
“왔구나.”
“네, 왔네요.”
내 목소리를 들은 황제는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맞췄다. 마치 나를 꿰뚫어 보는 듯한 기분 나쁜 눈빛이었다.
곧이어 내게서 고개를 돌린 황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이군. 너는 도브로미르지만 내가 알던 아이가 아니야.”
응?….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 듯한 황제의 말을 다시 곱씹어 보려 했지만, 내 뒤에 서 있던 젠이 나를 끌어 자신의 뒤로 보냈다.
“황제에게서 영혼의 색이 보이지 않아요. 영혼이 없는 상태예요.”
“신기한 능력을 가지고 있군. 그대가 나의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황제는 젠을 바라보며 비소를 지었다. 그리곤 앉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나는 조금 불안함이 느껴져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율리우스를 밖으로 보냈다.
“밖에 나가 있어. 혹시 사람이 들어오려 하면 막아 줘. 위험할지도 몰라.”
율리우스를 포함한 누군가가 이곳의 상황을 본다면, 내가 곤란해질 거다.
혹시라도 그놈을 불러야 할지도 모르니까.
“나가 있어.”
율리우스는 진지한 내 표정에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쾅 소리가 나며 문이 저절로 닫히고는 단단히 잠겨 열리지 않았다.
“여, 열리지 않습니다.”
당황스러운 표정의 율리우스는 손을 덜덜 떨며 내게 말했다.
그 소리에 나는 철수를 불러봤지만, 항상 빠르게 나타났던 철수는 어쩐 일인지 응답하지 않았다.
나는 작은 한숨을 쉬며 문고리를 잡고 있는 율리우스에게 말했다.
“…최대한 구석에 가 있어.”
이곳에는 나와 젠, 율리우스 그리고 황제뿐이었다.
마법사도 아닌 황제가 저절로 문을 닫거나, 열리지 않게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어떤 버러지 같은 놈이 너한테 붙었을까.”
라이언 황제는 악마와 함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