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 교황청으로 가다 (7)
붉은 피가 움직이며 위대한 악마, ‘그’를 부르는 소환진이 그려졌다.
황제의 몸을 지배하고 있는 악마는, 내 발아래로 그려지는 소환진을 보며 배신이라도 당했다는 듯 입을 떠억 벌렸다.
그리고 크게 포효했다.
“너!!!”
벼락 같은 목소리였다.
듣기만 해도 오금이 저렸다. 그 목소리를 조금 더 들었다가는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악마의 소환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소환자를 죽이는 것밖에 없다.
황제의 몸에 들어간 악마도 그것을 알아챘는지, 그가 뿜어내던 독 안개가 나를 향해 빠르게 휘몰아쳤다.
하지만 독 안개는 소환진을 넘을 수 없었고, 내게 닿지도 못했다.
소환진이 악마의 독 안개를 막아 줬기 때문이다.
“이익…!”
악마는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아 많이 화가 났는지 우리를 향해 빠르게 다가왔고, 소환진에 가까워진 그는 황제의 손에서 길고 징그러운 촉수를 뿜어 내 나를 공격하며 소환진을 파훼하려 했다.
내게 돌진하는 촉수는 젠이 검으로 베어 막아 줬지만, 촉수는 끊임없이 재생하고 또 재생했다.
촉수의 반은 나를 향했고, 나머지는 소환진은 뭉개 버리려고 했지만, 악마의 노력에도 이미 반절 이상 구축된 소환진은 망가지지 않았다.
“아아악!!!”
소환진이 전부 그려지자, 악마는 소리를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악마는 황제의 몸에서 빠져나가 검은 안개의 모습으로 방을 휘저었다. 마치 고양이를 피하는 쥐의 모습처럼.
“쿨럭…!”
악마가 빠져나간 황제의 몸에는 큰 무리가 왔는지, 그는 잠시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그리고 갑지기 피를 토해 냈다.
그와 동시에 ‘그’를 부르는 소환진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서 있는 이 방을 포함한 궁 전체에 위압적인 기운이 내려앉았다.
마침내 그가 모습을 보였다.
“절대 부르지 않을 거라던 그대의 목소리가 아직 귀에 생생한데.”
나를 향해 비릿한 웃음 지은 악마는 뭐가 웃긴지 내 꼴을 보며 하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내 인간은 당당했던 모습이 매력이었는데 말이지.”
“시끄러워.”
“그래, 그런 앙칼진 매력도 있었지.”
아가레스는 두 팔을 벌려 나를 껴안으려 했지만, 내 앞을 막아서는 젠 때문에 움직임을 멈췄다.
자신의 길을 막았다는 이유로 분노할 듯 눈을 빛냈던 아가레스는 젠을 바라보며 다시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아가레스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보는 내가 더 부담스러울 정도로 젠을 빤히 바라봤다.
그런 아가레스의 눈빛을 곧이곧대로 받은 젠은 잠시 아가레스의 심장께를 바라보다 물었다.
“저와 마주쳤던 적이 있으신가요.”
젠은 엄청난 위압감을 뿜어내는 아가레스가 무섭지도 않은지,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아가레스는 빠르게 젠의 위아래를 훑다, 무엇이 생각난 듯 말했다.
“아! 희한한 인간이다 했더니. 그때 그 인간이었네.”
“그랬었군요….”
제가 봤던 건 드래곤이 아니었네요.
젠은 작은 실망을 한 것처럼 보였지만, 담담하게 읊조렸다.
그런 젠을 바라본 아가레스는 젠이 신기한지 기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야, 정확해. 네가 본 건 드래곤이 맞아.”
“….”
아가레스는 젠의 침묵에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명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영혼은 드래곤의 영혼이니까.”
악마는 영혼을 바라보며 사는 존재다.
그들은 영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갖지 못한 것에 대한 갈망이 크다.
악마는 영혼을 가진 상대의 바람을 들어 주고, 그 상대의 영혼을 빼앗아 삼킨다. 그럼 잠시 동안만이라도 악마는 영혼을 가질 수 있다.
“너와 마주치기 며칠 전에 드래곤의 영혼을 삼켰었지. 늙어서 맛은 없었지만.”
아가레스는 어느 한 왕국을 벗어나지 못하는 드래곤의 소원을 들어 주고, 그의 영혼을 취했다고 말했다.
드래곤의 소원은 자신이 영면에 빠져도,그 왕국을 지키고 있는 자신의 보호막을 유지해 달라는 것이었다.
“인간들은 참 재밌어. 드래곤의 보호막은 내가 살아있는 한 영원했을 텐데.”
웃기는 짓을 했더라고.
아가레스는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져 있는 라이언 황제와 구석에 처박혀 덜덜 떨고 있는 악마를 바라봤다.
“보고 있으니 재밌더라.”
방금까지 살살 웃으며 유려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던 아가레스는 표정을 굳힌 뒤, 다시 한번 강력한 위압감을 내뿜었다.
“크윽…!”
나는 아가레스의 위압감을 크게 느끼지 못했지만,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의 몸이 움츠러들며 다리가 후들거렸다.
나는 아가레스가 했던 말들을 조합해 머리를 굴려 봤다.
드래곤은 본디 고고하고 자유로운 존재다. 그런 존재가 한 왕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의 보호막을 유지해야 한다니… 그런 드래곤은 내가 알고 있기로 딱 하나다.
로웨나 왕국의 드래곤.
“그럼 저 위에 있는 드래곤은….”
“영혼은 없고, 가죽만 남아 있겠지.”
드래곤은 죽어도 몇천 년 동안 멀쩡하다는데, 아직 잘 있나 모르겠군.
조무래기들한테 다 뜯겼으려나.
“아무튼, 이건 드래곤의 영혼이 맞아.”
아가레스는 젠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무덤덤한 표정을 한 젠에게 물었다.
“너는 지금도 그때랑 똑같은 마음인가?”
나는 아가레스의 영문 모를 질문에 젠을 바라봤다. 그리고 젠은 나를 빤히 바라보다 작은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똑같아요.”
젠의 대답에 아가레스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젠의 이마 위로 손을 올리려 했고, 젠은 순순히 그의 손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젠의 이마 위로 붉은 빛이 돌았다.
곧이어 그 빛은 눈이 아플 정도로 새빨갛게 빛났고, 순식간에 아가레스의 손으로 빨려들어 갔다.
그 모습을 본 나는 깜짝 놀라 아가레스를 향헤 말했다.
“너 지금 뭐 한 거야…?”
“뭐 하긴, 오래전에 약속했던 걸 지키는 거지.”
그는 내가 생각하는 못된 짓은 하지 않았다며 안심하라고 말했다.
나는 그런 아가레스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다 젠을 바라봤다.
아가레스의 손이 닿았던 젠은 잠시 눈을 깜빡이며 눈을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을 올려 넘겼다.
그리고 방 안에 있는 존재들을 둘러보았다.
율리우스로 시작해, 황제, 악마, 아가레스, 마지막으로 나까지 바라보고서야 편해진 표정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약속이었으니까. 난 했던 약속은 지켜.”
감사하다는 젠의 말에 아가레스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쳐들며 대답했다.
나는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궁금함을 참을 수 없어 젠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젠이 저놈이랑 만날 일이 뭐가 있길래…?”
불안함이 가득한 내 질문에 젠은 내 어깨를 두드려 진정을 시키고는 천천히 말했다.
“제가 말했던 거 기억하세요? 붉게 빛나는 드래곤의 영혼을 보았다구요.”
기억한다. 그래서 그 드래곤을 보러 로웨나 왕국으로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응, 기억해.”
“그때 제가 만났던 이는 드래곤이 아니라 저 악마였었나 봐요.”
젠은 아가레스를 만났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해 줬다.
자신은 여러 지억을 유랑하며 인간에게 해로운 마물을 베어 검술을 갈고닦았다고 한다. 실상은 귀족의 의무로부터 도망치기 위함이었지만, 어찌 됐건 젠의 행동이 가문에 좋은 일로 받아들여져 별말이 없이 허용됐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유랑하던 당시, 으스스한 산등성이에서 지금껏 봐 왔던 영혼의 색들과는 다른 새빨간 영혼의 색을 보았다고 했다.
흥미가 돋아 가까이 가려 했지만, 붉은 영혼을 가진 그 존재가 굵은 목소리로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그 바람에 그 존재의 실체를 보진 못했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무거운 기운 때문에 막연하게 드래곤이라고 생각했단다.
“그땐 내 기운을 전부 숨기고 있었지. 인간을 포함해 그 어떤 존재도 나를 찾을 수 없었을 거야. 하지만 저 인간은 찾았었지.”
아가레스는 젠과 만났을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그에 젠은 아가레스를 잠시 바라보다 다시 나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저는 영혼의 색이 보이니 그를 쉽게 찾을 수 있었어요. 그리고….”
그에게 부탁했었어요, 이 능력을 없애 주실 수 있냐구요.
젠은 나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능력을… 없애?”
“네, 당시의 저는 이 능력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젠은 영혼의 색을 보는 자신의 능력이 너무 싫었다고 했다.
남들은 보지 못하는 걸 자신만 보는 것도 싫었고, 그 사람의 본질이 자신의 눈에만 보인다는 게 유쾌한 기분은 아니라고 했다.
이 능력이 감사했던 적은 나를 만났을 때 딱 그뿐이었다고 한다.
“미르 님을 볼 수 있었던 건 천운이라 생각해요.”
“…”
“덕분에 당신을 만났으니, 이 능력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아요.”
젠은 나와 눈을 맞추며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의 미소를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한테 고마워해야겠군. 내가 저 인간을 무시하지 않았으면 그대들은 만나지 못했을 테니.”
젠과 나의 두근두근한 분위기를 깨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레스는 자신이 젠을 무시하지 않고 그때 능력을 없애 줬더라면, 젠이 영혼을 보는 눈으로 나를 발견할 일은 없었다는 식으로 말했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아가레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만날 사람은 다 만나게 되어 있어.”
“그래, 인간들은 그 인연이라는 게 있다지. 하지만 그대는 이곳 사람이 아니잖아.”
아가레스는 얄미운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나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새침하게 말했다.
“나도 이제 여기 사람이거든? 그리고, 능력 지워 주기로 약속했다며. 그럼 지키는 게 맞지.”
“악마한테 약속 같은 게 어디 있어. 내가 다른 악마들과 다른 거지.”
그건 맞는 말이다. 아가레스는 의외로 착한 악마다. 착하다는 수식어가 어울리진 않지만… 그래도 나름 말이 통하는 악마다.
“게다가 난 절대 지키지 못할 법한 약속을 했는데.”
아가레스는 젠을 바라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고, 젠은 궁금해하는 내게 얕게 웃으며 말했다.
“당시에는 사정이 있으니,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 능력을 없애 주기로 했었어요. 그래서 저는 로웨나 왕국으로 가려 했던 거구요.”
“내가 저 인간에게 했던 약속은 지키지 못할 약속이나 다름없었어. 나는 그대가 아니라면 이곳에 올 일이 없었으니까.”
듣고 보니 그러네.
악마는 역시 악마였다. 영악해서는. 쯧.
젠은 아가레스를 향해 혀를 차는 나를 바라보며 전부 내 덕분이라 말했고, 나는 아가레스에게 지었던 표정을 지우고 젠을 향해 웃어 줬다.
젠이 좋으면 나도 좋아.
“자, 그래서 나를 부른 이유가 무엇이지? 그대의 영혼을 준다는 이야기였으면 좋으련만, 그건 아니겠지.”
아가레스는 나와 젠의 두근두근 분위기를 싫어하는지, 우리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뻔뻔하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아직도 구석에서 벌벌 떨고있는 악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론웨.”
“히이익!!”
아가레스의 부름에, 안개의 모습을 한 악마가 두려움에 떨며 요동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