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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님 먹고 싶어요-213화 (213/227)

213 교황청으로 가다 (9)

폭풍이 지나가고 난 후의 고요함처럼, 두 악마가 지나간 중간계엔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한 발자국 움직여 밖으로 나가려 할 때, 천장이 쩌억 갈라지며 무너져 내리려 했다.

“바, 밖으로 뛰어!”

나는 문 근처에 있는 율리우스에게 밖으로 뛰라고 했다. 젠은 쓰러져 있는 황제에게 가까이 갔다.

젠은 황제의 다리를 잡고 밖으로 던지려 했지만, 내가 가까이 다가온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미르 님, 왜…!”

“너는 어떻게 나가려고!”

나는 서둘러 젠의 팔을 붙잡고, 단단한 방어막을 만드는 주문을 외웠다.

“<에지스>!”

주문이 성공하자, 하얗고 투명한 막이 내가 잡고 있는 젠, 그리고 젠이 잡고 있는 라이언 황제까지 감쌌다.

나는 이걸로도 불안해 방어막 두 겹을 덧씌웠다.

방어막이 튼튼하게 강화되자, 타이밍 적절하게 황제궁은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아가레스, 이 영악한 놈. 그놈은 자신이 나가면 이곳이 무너질 거란 걸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 끝에 그런 미소를 지었던 거겠지.

“죽을 뻔했네….”

잔해물들에 깔려 캄캄했지만, 방어막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빛 덕분에 주변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제일 먼저 투명한 방어막 위로 건물의 잔해들이 쏟아진 게 보였다. 그리고 흉악한 두께의 잔해물 사이사이로 날카롭게 갈라진 콘크리트 더미와 두꺼운 철근 같은 것도 보였다.

방어막을 제때 펼치지 못했다면, 저 흉흉한 잔해물에 찔리고 깔려서 멀쩡하게 살아 있을 수 없었을 거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젠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를 향해 혼내듯 말했다.

“큰일 날 뻔했어.”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 나에게 젠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사과하려 했지만 나는 그의 입을 막았다.

“젠 말고. 젠은 안전하게 빠져나왔겠지. 내가 말하는 건 황제야. 다 늙어서 던지면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아.”

젠은 황제를 바라보며 난감해했다. 그리곤 ‘일단 이곳에서 빼내고 보자는 마음이었다’며, 황제의 몸 상태는 고려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럴 줄 알았다. 젠은 노빠꾸니까.

나는 그를 향해 작게 웃고는 조심스레 말했다.

“미안해. 젠까지 여기 갇히게 됐네.”

이 방어막 안에 있는 한, 우리는 방어막 바깥의 일에는 관여할 수 없다.

방어막을 압박하고 있는 잔해물을 치우려면 이 방어막을 먼저 해제해야 한다.

하지만 방어막을 해제하자마자 날카로운 잔해물이 우리를 깔아뭉갤 거다.

밖에서 치워 주지 않는 이상, 우리는 이곳에서 나갈 수가 없게 됐다.

미안하다는 내 말에 젠은 괜찮다며 날 다독여 줬다.

그냥 황제는 죽게 놔둘 걸 그랬나….

“저는 괜찮아요. 조금 쉬었다가 나가요.”

젠은 너무 미안해하는 나를 바라보곤, 내가 방어막을 해제하면 쌓여 있는 잔여물들을 날려 버리겠다고 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겠지만, 젠이 말하니까 정말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 할 수 있겠어?….”

“네, 문제없어요.”

젠은 작게 웃으며 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내게 준비가 되면 방어막을 해제하라 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알겠다고 했고, 젠의 신호에 맞춰 방어막을 해제하기에 앞서.

“잠깐만.”

우선 주먹을 강하게 쥐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황제의 뺨을 후려쳤다.

퍽! 소리가 크게 나며 황제의 뺨이 붉어졌다.

작은 복수다. 이 이후로 밖에 나가면 대놓고는 못 때릴 테니까.

그나저나 괜히 주먹으로 때린 것 같다. 때리는 것도 잘 때려야 한다고, 맞은 사람보다 때린 사람의 손이 더 아프다. 그냥 무기로 갈길걸.

나는 황제를 때린 손을 풀려 허공에 탈탈 털었고, 그런 내 모습을 본 젠은 작게 웃으며 털고 있던 내 손을 잡고 주물러줬다.

“다음에는 저한테 말하세요.”

“젠이 때렸으면 황제의 턱이 부서질 거야.”

“그 정도 힘 조절은 가능해요.”

아, 그렇겠네.

나는 워낙 힘이 약해, 있는 힘껏 세게 때려야 상대방도 아픔을 느낀다. 그래서 주먹을 쓸 때는 항상 최선을 다한다.

그래서인지 막연하게 젠도 항상 최선을 다해 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나 보다.

그렇지… 보통 사람한테는 힘 조절이라는 게 있지.

“더 때려 줄까요?”

아쉬워하는 내 모습을 본 젠은 황제를 더 때려 줄까 물었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괜찮아. 젠은 안 때리고 싶어? 얘 때문에 고생 많이 했잖아.”

“음… 기절해 있는 사람을 때리고 싶진 않아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때려 봤자 속이 시원해지지는 않는다고 했다.

이것도 아까의 논리와 마찬가지다.

나는 상대가 기절해 있거나, 무방비 상태일 때만 타격이 가능하지만, 젠은 굳이 그러지 않아도 타격이 가능하다.

나는 내가 얼마나 무력한 인간인지를 잠시 느끼다, 젠의 신호를 듣고 방금까지 유지했던 방어막을 풀었다.

방어막이 사라지자, 준비하고 있던 젠은 검에 오러를 이용해 우리 위에 내려앉는 잔해물들을 힘껏 베어 날려 버렸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우리를 깔아뭉개려던 잔해물들이 날아갔고, 어두웠던 시야가 환해졌다.

“헉…! 미르야!!!”

갑작스레 환해진 시야가 견디기 힘들어 눈을 깜박이고 있는 와중,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눈을 제대로 떠 확인하려던 그때, 잔해물 위를 다다다 달려와 나를 확 껴안은 사람이 있었다.

“미르야!”

커억!

갑작스러운 충격에 기침이 나올 뻔한 걸 참고, 눈을 떠 날 껴안은 사람을 확인했다.

“형, 형님….”

“너한테 큰일이 난 줄 알았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황제궁 사이로 검은 기운이…!”

로이븐이었다.

그는 횡설수설하며 꽉 껴안았던 나를 놓아준 뒤, 내 뺨 위로 손을 올리며 다친 곳은 없는지 확인했다.

“전 괜찮습니다. 멀쩡해요. 형님이야말로 못 본 새에 많이 수척해지셨군요….”

로이븐은 그간 고생을 많이 했는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더 핼쑥해져 있었다.

걱정하는 내 말을 들은 로이븐은 고개를 저으며 자신은 괜찮다고 했다.

“나는 괜찮지만….”

로이븐은 방금까지 황제궁 주변으로 바라만 봐도 덜덜 떨리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검은 기운이 서렸다. 거기에 멀쩡했던 지대가 강하게 흔들리며, 날아가던 새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아, 그건….”

론웨의 기운은 우리가 황제궁 안으로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았으니, 그건 아마도 아가레스가 현신하고 난 뒤의 기운이었을 거다.

나는 잠시 고민을 하다, 무서운 척 눈을 꼭 감고 말했다.

“황제가 불렀던 악마의 기운이었을 겁니다.”

“악마라니…!”

“다행히도, 젠이 옆에 있어 준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버티지 못했다면….”

아마 저희는 악마에게 먹혀 살아 돌아올 수 없었을 겁니다.

나는 고개를 떨며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분위기를 풍겼고, 로이븐은 그런 나를 위로해주며, 거의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내가 다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 말했다.

“그나저나, 여긴 어떻게 오신 겁니까? 제가 황궁에 발을 들였을 때만 해도 이곳엔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도착한 거냐는 내 물음에, 로이븐은 격양된 감정을 진정시킨 뒤 그동안 있었던 일을 천천히 말해줬다.

“우리는 복구된 마탑에 있었다.”

로이븐은 얼마 전부터 황제의 수상한 낌새를 눈치챘다고 한다.

황제에게는 평소와는 다른 어두운 기운이 가득했고, 혼자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는 걸로 모자라, 밤마다 누군가에게 빙의한 듯 덜덜 떨며 누군가를 저주했다고 한다.

로이븐은 무언가가 잘못됐다는 생각에, 최근 자신에게 숨기는 게 많아진 필릭스를 찾아갔고, 그를 탈탈 털어 드로이프와 관련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혹시라도 황제가 눈이 돌아 세네카 황궁의 사람들을 건드는 게 아닌가 싶은 로이븐은 황제가 눈치채지 못하게 천천히 황궁에서 사람들을 내보냈다고 한다.

항상 황궁에 기거하려 하는 귀족들에겐 그간 자신들의 땅을 관리한 문서를 가져오라는 핑계로 전부 집으로 돌아가게 했고, 기사단과 그외 병사들은 마물이 나타났다는 핑계로 넓은 산맥으로 출정을 보냈고, 나머지 황궁과 황제를 지키려 남아 있던 병사들은 프레오나 제국에서 군대가 쳐들어올 것 같다는 거짓 보도로 국경으로 보냈다고 한다. 그것도 퍼디스와 함꼐.

그래서 왕을 지켜 줄 병사들이 단 한 명도 없었던 거다.

퍼디스는 황제 옆에 붙어 있을 줄 알았는데, 순순히 갔나 보네. 의외다.

“그럼 형님들께선 황궁에 계속 남아 있던 것입니까…?”

“그래, 우린 이곳을 떠날 수 없으니 남아 있으려 했었다. 그리고 어젯밤 케이시 경이 찾아왔지.”

혼자서라도 황궁에 남아 있으려던 로이븐과 메이븐의 앞에 케이시가 나타난 것이다.

덕분에 세네카 황궁에서 가장 튼튼한 마탑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됐고, 시종인들을 이끌고 마탑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피난지로 쓰일 줄 알았다면, 철수한테 조금만 태우라고 할 걸 그랬다.

그리고 모습이 보이지 않아 걱정이 됐던 지아는 황제의 손아귀에서 빼내져 필릭스의 저택으로 피신을 가 있다고 했다.

모두 무사하다는 뜻이었다.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나는 로이븐과 메이븐이 멀쩡하게 있어 줘서 다행이라 말했다. 그리고 쓰러져 있는 황제를 로이븐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죗값은 톡톡히 받아야 할 겁니다. 증인들도 있으니 처벌은 문제없이 할 수 있을 겁니다.”

나는 저 멀리서 넋이 나간 채 주저앉아 있는 율리우스를 가리켰다. 그에 내 시선을 확인한 율리우스는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교황청의 수석 사제 율리우스라고 합니다.”

율리우스는 자신을 ‘교황청’의 인간이라고 소개하는 것이 부끄러운지, 평소보다 고개를 더욱 숙여 인사했다.

로이븐은 율리우스의 인사를 받아 주고, 바닥에 쓰러져있는 너덜너덜해진 황제의 모습을 보며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곧이어 마음을 다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이 책임지고 황제와 그를 도와줬던 모두를 처벌하겠다고 했다.

아, 맞다.

“저기 나무에 죄인들이 묶여 있습니다.”

나는 교황과 로웨나 공주의 존재를 잊어버렸다는 것을 티 내지 않고 로이븐에게 말했다. 그러자 로이븐은 그들을 보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들은 케이시 경이 맡고 있다.”

설마 풀어 준 건 아니겠지?

나는 불안함을 가지고 로이븐을 바라봤고, 로이븐은 그런 내 표정을 알아차리곤 걱정하지 말라 말해 줬다.

“건들면 터지는 밧줄을 하고 있는 주제에 멀쩡한 사람은 아니라 생각했지. 그리고 케이시 경과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었어.”

다행이다.

어차피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교황과 공주가 도망쳐봐야 멀리는 못 도망쳤겠지만, 그것들을 잡으러 가는 데에 인력과 시간이 쓰인다는 게 아깝다.

교황과 공주도 해결됐고, 모든 일의 원인이었던 황제까지 로이븐에게 떠넘겼으니, 이곳에서 내 일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개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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