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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님 먹고 싶어요-214화 (214/227)

214 집으로 돌아가다 (1)

“이것 좀 먹어 보거라, 미르야.”

로이븐은 아기 새에게 음식을 조달하는 어미 새처럼, 너무 달아 이가 썩을 것 같아 보이는 초콜릿을 내게 내밀었다.

“미르 님은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으세요. 저런 거 드시지 말고 이거 드세요.”

젠은 로이븐의 선택에 비웃음을 지은 뒤, 적당히 달고 상큼해 보이는 연분홍빛의 투명한 사탕을 내밀었다.

“황자님, 이거 드셔 보세요! 이것도 맛있어요.”

지아는 아주 해맑은 표정으로 두꺼운 빵 한 통을 들고 와서는, 사탕을 내밀고 있는 젠과 초콜릿을 내밀고 있는 로이븐 사이로 뛰어 들어왔다.

나는 지금 사랑과 혈육, 그리고 우정 사이에서 고민 중이다.

“…그냥 제가 알아서 먹겠습니다.”

나는 젠이 내민 사탕을 받아 들어 입에 넣고, 로이븐의 초콜릿과 지아의 빵을 거절했다.

초콜릿은 너무 달아 보였고, 빵은 너무 컸다.

내 거절에 상처받은 로이븐과 지아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내 마음에 들 만한 것들을 찾으러 나섰다.

“하아… 어쩌다가 이렇게….”

나는 이 넓은 디저트 가게를 열심히 돌아다니며 선물을 사고 있는 이들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작은 한숨을 쉬었다.

내 계획은 이런 게 아니었다.

모든 일이 끝난 후, 나는 프레오나의 저택으로 돌아가 평안하고 한적한 생활을 즐기려고 했다.

하지만, 모든 일이 끝났다고 생각한 건 내 착각이었다.

황제가 무릎을 꿇었던 날로부터 무려 반년이 지났다.

나는 그동안 세네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끔찍한 일의 뒤처리를 위해 반년을 시달렸다.

시작은 귀족들의 대거 교체였다.

로이븐의 명령으로 모든 귀족들은 자신에게 속해 있는 영토의 서류나 그간 어떤 일을 했었는지 증명해 줄 중요 서류들을 제출해야 했었다.

그리고 모든 귀족들은 이때다 싶어 서로의 비리를 터트렸다.

비리를 저지르지 않은 귀족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 작게라도 한두 개씩은 비리를 저지르고 있었다.

덕분에 적당히 죄를 지은 귀족들은 많은 벌금과 봉사 시간을 채워야 했고, 심각할 정도로 많은 비리를 저지른 귀족들은 신분을 빼앗기거나 사형에 처해졌다.

세네카의 귀족들이 직위를 해제당하거나 목숨을 잃는 일들이야 내 알 바가 아니었다.

문제는 내가 그 일로 인해 노동을 했다는 거다.

나는 행정관들이 귀족들의 죗값을 결정하면, 그것이 그 귀족에게 맞는 죗값인지 살피고 승인을 하는 일을 맡아야 했다.

쉽게 설명하자면 판사의 역할을 했다.

나는 억울한 마음에 매일 산더미만 한 서류를 가져다주는 행정관들에게 ‘쉬어도 모자랄 판에 왜 내가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매일 했다.

착하고 선한 4황자의 이미지는 개나 줘 버리라는 생각으로, 안 그래도 바쁜 행정관들을 열심히 갈궜다.

그리고 그런 나를 보다 못한 메이븐이 찾아와선, 이 일을 내가 해야만 하는 이유를 간단명료하게 설명해 줬다.

나는 세네카에서 황좌 싸움을 하지 않았으니 대다수의 귀족들과 얽힌 게 없다. 그러니 가장 객관적으로 상황을 볼 수 있는 중립의 입장인 사람이고, 신분도 황자이니 내 결정을 귀족들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인정한다. 내가 생각해도 이 일에 제격인 사람은 나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쉬고 싶었다.

그래서 한동안 파업 선언을 하고, 젠과 도망을 다녔었다.

다 커서 사춘기가 온 아우가 곤란했던 메이븐은 나를 직접 찾아 나섰고, 결국엔 특출난 마법사들을 이용해 기어이 나를 찾아냈다.

그리고 단단히 삐져 있는 내게 아주 좋은 선물을 줬다.

라이언 세네카가 가지고 있던 호화 별장들, 그리고 3황자인 퍼디스를 노예 부리듯 부릴 수 있게 해 준다는 약속이었다.

나는 그 제안에 발 벗고 나서서 일을 해결했다. 일을 해야 할 이유가 생기니 능률도 오르고, 하루하루가 재밌더라.

노예는 아주 잘 써먹었다.

두 번째로는 대륙 재판이 일어났다.

이 끔찍한 사건은 세네카 제국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세네카와 거의 동등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프레오나 제국과 여러 왕국들의 지도자들이 모여 이 사건에 대한 재판을 열었다.

라이언 황제는 당연히 사형을 선고받았다.

재판에 참여했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다시없을 끔찍한 짓을 저지른 라이언 황제에게 너무 쉽게 죽음을 선물해 주는 게 아니냐며, 더 큰 형벌을 내리길 원했다.

하지만 황제가 이미 한 번 악마를 소환해 낸 전적이 있으니, 다시 한번 악마 소환을 시도하기 전에 뒤탈 없이 사형시키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라이언에겐 살아남을 거라는 일말의 희망조차 없었다.

교황과 로웨나 왕국의 공주는 열악하기로 제일가는 프레오나의 지하 감옥에서 무한히 썩어야 했다.

라이언 황제의 뒤를 봐줬던 페모스토프 공작 또한 신분을 빼앗고, 가지고 있는 것들을 모조리 빼앗은 채 맨몸으로 아스본 왕국에 있는 철광으로 보내 버렸다.

그 외에 이 일에 가담했던 모든 이들에게 죗값에 걸맞은 형벌을 내렸다.

물론 재판 또한 내가 알 바가 아니었다. 나는 그들이 어떤 형벌을 받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문제는 내가 ‘또’ 일을 했다는 거다. 사실 일이라기보다는 시간을 뺏겼다.

나는 이 일과 가장 많이 관련되어있는 사람으로서 ‘증인’이라는 역할로 거의 모든 중요 재판에 참석했다.

황제의 재판, 교황의 재판, 공주의 재판, 공작의 재판, 그리고 케이시의 재판까지. 내가 참여하지 않은 재판이 없었다.

결국 모든 재판에 참여한 나를 희한하게 생각하거나 의심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나는 사람들에게 주목받기 싫었다. 때문에 ‘좀비는 불의 정령왕이 도와줬고, 라이언 황제가 불렀던 악마는 미리 계약했던 악마를 불러 해결했다’라고 말할 수가 없어서 전부 젠 이프리트가 도와줬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젠이 워낙 대단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또 실제로 대단한 사람이라 다들 믿어 줬기에 망정이지. 어림없는 소리라며 나를 끈질기게 의심했다면 상황이 복잡해질 뻔했다.

게다가 둘러댄 말이었다고는 하지만 젠이 없었다면 우리가 여기까지 오는 건 불가능했을 테니, 젠의 덕분이라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밖에도 자잘한 일들이 많이 있었다.

성수로는 좀비들의 원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케이시가 책임을 갖고 좀비들을 되돌릴 연구를 시작했다. 10년이라는 제한 시간이 있지만, 케이시가 밤낮 가리지 않고 힘쓰고 있으니 빠른 시일 안에 해결될 거라 믿는다.

그리고 율리우스가 교황이 되었다. 이번 사건으로 인해 교황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했지만, 악마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경각심을 느낀 사람들이 교황청의 존속을 허락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 나는 노반을 만날 수 없었다.

노반은 해방된 드로이프들과 함께 새 보금자리를 찾으러 떠났다. 곧 돌아오겠다고 이야기했지만, 돌아오지 않은 지 벌써 오랜 시간이 지났다.

잘 지내는지만이라도 알고 싶은데….

시간은 어느새 반년이 훌쩍 지났다. 그 반년 동안 나는 일만 주구장창 했다.

귀족들의 처벌이 끝이 나고, 재판도 끝났으니, 나는 해방된 기쁨을 느끼며 프레오나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그 기쁜 와중, 로이븐과 지아가 프레오나의 황제인 오스먼드를 만나야 한다며 끼어들었다.

덕분에 세네카에서 프레오나로 오늘 길 내내 로이븐과 지아에게 시달렸다.

“이것도 드셔 보실래요?”

로이븐과 지아가 사라진 사이, 젠은 말린 오렌지 위에 설탕 코팅을 입혀 놓은 디저트를 건넸다.

나는 가만히 입을 벌려 젠에게 먹여 달라 했고, 젠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내 입에 넣어 줬다.

설탕 코팅이 바삭 깨졌다. 그다음으로 말린 오렌지의 진득한 식감이 느껴지고, 그 안에 갇혀있던 꿀이 흘렸다. 적당히 달고 식감도 좋은 게 딱 내 취향이었다.

“조금만 참으면 저택으로 갈 수 있어요.”

“응, 얼른 가서 뒹굴고 싶어.”

“동감이에요.”

“여기만 안 들렀으면 더 빨리 갈 수 있었는데….”

아쉬움이 가득 담긴 내 말에 젠은 어쩔 수 없었다며 나를 달랬다.

우리는 오스먼드를 만나러 프레오나 황궁으로 들어가기 전, 프레오나에서 가장 유명한 온천이 있는 마을에 들렀다.

그 바람에 프레오나로 가는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지만, 로이븐이 프레오나의 온천을 꼭 와 보고 싶었다며 억지를 부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슬슬 피로에 절어 가던 일행들과 함께 온 기사들도 쉬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한 건데… 로이븐은 온천욕이 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온천 마을에서 유명한 이 디저트 가게에 와 보고 싶었던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성인 남성이 디저트 하나로 저렇게 신이 날 수가 없다.

저거 봐라, 양손에 든 바구니가 이미 꽉 차 있어. 곧 터질 것 같다.

* * *

세네카의 황제인 로이븐과 프레오나의 황제인 오스먼드 단둘이 회담을 나누러 개인적인 공간으로 들어갔다. 아마도 전쟁과 관련된 이야기일 것 같다.

안타까운 사실은 내가 저 둘의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는 거다.

나는 오스먼드를 만나자마자 약속했던 선물인 ‘라이언 황제와 연관된 프레오나의 귀족 명부’를 주고 난 뒤 가려고 했다.

하지만 오스먼드는 선물은 받았음에도 날 보내주지 않고, 밀린 이야기를 나누자며 잠시 기다리라 했다.

아마도 보리스에게 들었던 걸로는 모자라는지,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하게 들으려는 심산 같았다.

나는 둘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아공간 주머니에 들어 있는 책을 읽었다. 한참 지나 밖으로 나온 둘의 표정은 많이 지쳐 보였다.

“이야기는 끝나셨습니까?”

나는 로이븐의 곁으로 가 예의상 어땠는지 물었고, 로이븐은 오스먼드가 보지 못하게 얼굴을 돌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이 안 통하는 작자란 걸 알았다.”

아.

나는 로이븐에게 어색한 웃음을 짓고는 고개를 돌려 오스먼드를 바라봤다.

오스먼드도 로이븐과 마찬가지로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해결이 되지 않은 거군요.”

로이븐을 비롯해 표정 관리를 잘하는 오스먼드마저 표정이 많이 망가져 있는 걸로 보아, 치열하게 공방을 펼쳤지만 결론이 나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문제가 무엇인지 제가 들어도 되겠습니까? 각국의 일이 해결되지 않으면 제가 마음 놓고 프레오나에 있을 수 없으니까요.”

나는 얼른 해결하고 북쪽 저택으로 돌아갈 심산으로 그들을 향해 물었다.

그에 로이븐은 잠시 나를 바라보며 당환한 표정을 지었고, 오스먼드는 한숨을 푸욱 쉬곤 입을 뗐다.

“공식적인 이야기는 전부 마무리 지었습니다. 그러니 황자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로이븐의 앞이라서인지 평소 나를 대했던 말투가 아닌 정중한 말투였지만, 한마디로 말해주지 않겠다는 거였다.

공식적인 일이 마무리가 됐으면 나는 아무 문제 없는 거잖아? 그럼 가도 되는 거 아니야?

“두 분 사이에서의 일이라면 제가 참견할 자격은 없는 것 같군요. 그럼 저는 이만….”

나는 괜히 시간 낭비를 한 것 같다는 생각에 인사를 한 뒤 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로이븐이 붙잡았다.

“잠깐! 미르야, 들어 보거라.”

나는 로이븐의 말에 나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저자가 세상에는 너를 제외하고도 귀엽고 아름다운 존재가 많이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로이븐의 말에 나는 잠시 정신이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질린 듯한 표정의 오스먼드를 바라봤다.

오스먼드는 말 한 번 잘못 한 걸로, 로이븐에게 내가 갓난아기 때 이야기부터 바로 어제까지의 일을 내내 들었다며, 로이븐을 말려 달라는 듯 나를 바라봤다.

나는 로이븐을 말려 주려고 했지만, 인정을 하지 않는 듯한 오스먼드의 모습에 마음을 바꿨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인간인 주제에 저보다 아름다운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당당한 내 말에 오스먼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곧 머리를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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