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 집으로 돌아가다 (2)
나와 로이븐은 집요하게 오스먼드를 갈궜고, 결국 무표정인 오스먼드에게 ‘세상에서 도브로미르가 제일 귀엽고 아름답다.’라는 말을 기어이 받아냈다.
오스먼드는 우리 형제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바라봤고, 나는 말 못 할 만족감을 느꼈다.
“그럼 이번 회담은 이렇게 마치고, 서로 알아서 신경 쓰는 쪽으로 합시다.”
로이븐은 만족한 표정으로 오스먼드를 향해 악수를 청했고, 오스먼드는 로이븐의 손을 맞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날 사이에 둔 만큼 잘 끝냈을 거라 믿는다.
오스먼드의 목숨은 내 손에 있고, 로이븐은 내가 자신의 자식인 양 엄청나게 아끼니까.
“그런데 미르 너 정말….”
“예?”
로이븐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젠 볼모도 아닌데 계속 이곳에서 살 생각이니? 편하게 살고 싶은 거라면 세네카에서도 가능하잖아. 메이븐한테 받은 곳들도 있고.”
아, 그러네. 나 이제 볼모 아니네?
각국의 문제가 해결이 됐으니, 전쟁을 막는 인질의 역할인 볼모는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연하게도 내가 돌아가야 하는 곳이 프레오나라고 생각했다.
로이븐의 말대로 지금의 나는 자유의 몸이다. 어디든 원하는 곳에 갈 수 있다.
그곳이 라이언의 호화 별장일 수도 있고, 다른 왕국의 한적한 곳이 될 수도 있다.
“그러네요….”
나는 곰곰이 고민을 해 봤다.
내가 프레오나에 남아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어차피 돈도 있겠다, 원하는 곳은 어디든 갈 수 있는데 말이야.
나는 고개를 들어 로이븐과 오스먼드를 바라봤다.
로이븐은 내가 세네카로 와서 자신과 가까이 살길 바라고 있고, 오스먼드는 은근히 내가 떠나면 서운해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쯧, 어울리지 않게.
“일단은… 이곳에서 조금 더 살아 볼 생각입니다.”
프레오나에 더 있겠다는 내 말에 로이븐은 실망한 티를 잔뜩 냈다.
그에 오스먼드는 자신이 이겼다 생각하는지 티 나지 않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곤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조금이라면, 얼마를 말하는 거지?”
얼마나 머물 거냐는 질문엔 당연하게 정해진 답이 있다.
“기다리는 아이가 있습니다.”
“기다리는 아이?”
“네, 그 아이와 봄을 보내고 나면 떠날 것 같습니다.”
같이 벚꽃 나무 아래서 피크닉을 즐기기로 했다.
아직 못 해 준 밥도 많고, 공부라든지, 삶의 재미 같은 가르칠 것도 많다.
그 아이의 꿈은 전부 이뤄주고서야 프레오나를 떠날 거다.
노반을 생각하며 나도 모르게 아련한 표정을 지었는지, 이곳은 정적에 휩싸였다.
“돌아오겠죠. 인간의 시간은 무한하지 않으니까요.”
나는 밝게 웃으며 노반이 곧 올 거라 믿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기 전에 왔으면 좋겠다. 그래야 우리 아기 여우를 볼 시간이 많아지는데….
갑자기 우울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라도 노반이 내가 다 늙어 죽기 직전에 오면 어떡하지? 아니면 내가 치매에 걸려서 노반이 찾아왔는데도 알아보지 못하면?
“미, 미르야…!”
생각만 해도 끔찍한 미래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그에 나를 지켜보고 있던 로이븐이 깜짝 놀라 다가왔고, 오스먼드도 내가 울 줄은 몰랐는지 조금 놀라 눈이 커졌다.
“그 여우는 다시 널 찾아올 거야. 미르 네가 많이 아껴주던 아이잖아.”
로이븐은 집 나간 강아지를 그리워하는 동생을 달래 주듯 나를 다정하게 달래 줬다. 그리고 노반은 곧 다시 내 품으로 돌아올 거라며 눈물을 닦아줬다.
옆에서 보고만 있던 오스먼드도 이제야 상황이 이해가 가는지, 울고 있는 내게 가까이 다가와 괜찮아질 거라며 어색하게 어깨를 두드렸다.
놀랍게도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나는 괜찮다고 말하며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에 로이븐은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봤고, 오스먼드는 표정을 굳혔다.
덕분에 이곳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잠시 혼자 고민을 하던 오스먼드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더 예쁜 여우를 구해 주겠습니다.”
사람은 사람으로 잊듯이, 여우는 여우로 잊으라는 말이었다.
나는 그의 말에 표정을 굳히고 말했다.
“노반보다 예쁜 여우는 세상에 없습니다.”
이건 강산이 골백번 바뀌어도 변하지 않을 사실이다.
나는 태어나서 노반보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생명체를 본 적이 없다. 그 어떤 생물체도 노반을 이길 순 없었다.
내 단호한 말에 오스먼드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괜찮은 거면 잠시 이야기를 하자며 로이븐에게 자리를 비켜달라 부탁했다.
그에 로이븐은 잠시 찜찜한 얼굴로 오스먼드를 향해 말했다.
“이건 그저 노파심에 이야기하는 겁니다만, 황제께선 제 아우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요.”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의심하는 로이븐의 질문에 오스먼드는 또다시 말문을 잃었다. 그리고 저놈이 또 저런다 싶어 질린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건 또 무슨 뜻입니까.”
“조금 의심이 가서요. 유독 제 아우에게 유한 표정을 지으시더군요. 그리고 아직 혼인도 하지 않으셨다죠? 정해진 짝도 없어 보이는데, 혹시나 제 아우에게 마음이 있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는군요.”
제 아우의 곁에는 이미 떼어 놓고 싶은 놈이 하나 있습니다. 둘이 되면 곤란합니다.
이가 바짝 갈린 로이븐의 말에 오스먼드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점잖은 표정화 함께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표정이 유해지다니, 그런 적 없습니다.”
“제가 들은 게 있습니다. 황제께서 남들에게 하는 것과 달리 제 아우에게는 다정하게 대해 주고 웃어 주신다는 것을.”
로이븐에 말에 오스먼드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짓고는 머리를 짚었다.
“그건 또 어디서 들은 이야기입니까.”
“프레오나에 제 귀 하나 없겠습니까.”
로이븐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오스먼드를 도발했다. 그에 오스먼드는 머리를 짚던 손을 놓고 로이븐을 향해 천천히 말했다.
“그런 오해는 받고 싶지 않습니다. 4황자에게 표정이 유해지는 건 인정합니다만, 그건 단순히 4황자와 친분이 있기 때문이지 황제가 생각하는 그런 마음이 아닙니다.”
“제 아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만.”
로이븐은 나와 친해지려면 어림도 없다는 식으로 오스먼드를 향해 말했다.
맞다, 맞아! 친분은 개뿔.
오스먼드에게 느끼는 내 감정은 미운 정이다.
오스먼드는 내가 자신의 말에 긍정을 해줬으면 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가만히 미소를 지으며 오스먼드를 바라봤다.
그에 내 긍정을 얻는 것을 포기한 듯한 오스먼드는 작은 한숨을 쉰 뒤, 로이븐에게 말했다.
“…게다가 혼인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는 너무 억지가 아닌가 싶군요.”
그러는 세네카의 황제께서도 아직 혼인을 하지 않으셨지 않습니까.
로이븐은 별안간 자신을 공격한 오스먼드에 찔렸는지, 어깨를 쫙 편 채 반박했다.
“저는 혼약자가 있습니다.”
“성녀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아닌 거 다 압니다.”
“예?….”
로이븐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으며 오스먼드를 바라봤고, 오스먼드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황제께서도 귀가 있는데, 저라고 귀가 없겠습니까.”
로이븐은 지아와의 일을 반박하지 못하겠는지 그냥 입을 다물었고, 오스먼드도 여기서 더 가면 자신의 패가 노출될까 입을 다물었다.
아, 이건 오스먼드의 승리다.
나는 은근 쿵짝이 잘 맞아 보이는 둘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리고 로이븐의 등을 문밖으로 밀며 말했다.
“유치한 장난은 이쯤에서 마무리 지으시죠. 전 오늘 밤 북쪽 저택으로 출발합니다.”
그러니 이야기할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 * *
반짝이는 별들의 빛을 가릴 정도로, 푸른빛의 보름달이 환하게 떠 있는 밤이었다.
보름달이 얼마나 밝은지, 주위에 달무리가 지어 신비함을 자아냈다.
“오늘 보면 보이려나?”
“자수정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응, 오늘은 보일 것 같은 예감이야.”
나는 마차 밖으로 몸을 내밀어 다시 한번 하늘을 확인했다. 그리고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젠에게 물었다.
“곧 저택이랑 가까워지는 것 같은데, 오랜만에 둘이 산책할까?”
“저는 좋아요.”
둘이 밤 데이트를 즐기자는 내 물음에, 젠은 미소를 지으며 수락했다.
우리는 저택으로 향하는 마차를 잠시 멈춘 뒤, 밖으로 나갔다.
조금 쌀쌀한 여름밤이라 그런지, 젠은 내가 감기에 걸리지 않게 자신의 옷을 걸쳐 주었다.
“마린이랑 셀비스는 저택으로 먼저 가 있어. 우리는 걸어서 들어갈게.”
나는 마부석에 타 있는 둘을 향해 말했다. 그에 셀비스가 함께 가자며 마차에서 내리려 했지만, 마린이 그의 팔을 잡고 놔주지 않는 바람에 내리지 못했다.
“네, 젠 님도 있으니 걱정 없네요. 조심히 오세요, 황자님.”
“응, 청소는 하지 말고.”
마린은 걱정하지 말라며 고개를 끄덕이곤 바로 출발했다.
마차가 떠나자, 풀벌레들이 우는 소리가 들리는 여름의 고요함이 찾아왔다.
산이라 그런지 확연하게 맑은 공기를 마신 뒤, 나는 아공간 주머니에 들어있는 레이트라의 자수정을 꺼냈다.
“오늘 보고 안 보이면 포기할 거야.”
세네카를 떠나기 직전, 케이시에게 잊고 있었던 이 자수정에 대해 물었다.
케이시는 그 자수정을 보고 그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건 그 사람이 ‘가장 담고 싶어 하는 기억’이 담기는 자수정이라 하며 달이 환한 날 꺼내 보라 했다.
그 이후 매일 밤마다 자수정을 꺼내 달빛에 비춰 봤지만, 자수정은 아무 변화가 없었다.
오늘이 마지막이다. 오늘은 그간 내가 봤던 그 날보다 달빛이 환한 날이다.
“떨리시나요?”
“내가? 아니야. 나 안 떨려.”
떨릴 게 뭐가 있나.
레이트라가 가장 담고 싶은 기억이라고 하면, 자신이 알고 있는 라이언 전 황제의 비리와 관련된 기억일 게 뻔하다. 하지만 전 황제 사건은 이미 끝나 버렸으니 조금 아쉬운 것뿐이다.
자수정을 달빛에 비추려 했지만, 이상하게 자수정을 들고 있는 손이 덜덜 떨렸다.
“도와줄게요.”
젠은 떨고 있는 내 손을 보며, 자수정을 잡고 있는 내 손을 겹쳐 잡았고. 천천히 하늘을 향해 들었다.
10분 정도 자수정을 들고 있었지만 변화가 없었다. 역시 안 되는 건가 포기하려 하자, 갑작스레 자수정 안으로 밝은 달빛이 스며들었다. 달빛을 흡수한 자수정은 밝은 빛을 내뿜으며 우리를 집어삼켰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뜨자, 누군가의 주마등이 천천히 흘러가는 게 보였다.
“이거….”
한 여자가 아이를 안고 있었다. 여자는 아이에게 노래를 불러 주었고, 책을 읽어 줬다.
아이가 웃었다.
여자는 그 아이가 자라는 것을 지켜봤다. 여자와 아이 둘 다 환하고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여자가 아이의 이마에 입맞춤을 남겼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나의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네 곁에 오래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해. 많이 사랑한단다.”
행복하렴.
여자는 마지막으로 예쁜 웃음을 지었고, 그 말을 끝으로 주마등은 사라졌다.
정신을 차려 주위를 둘러보니, 나와 젠이 멈췄었던 산길이었다.
“이게 레이트라가 남기고 싶었던 기억이구나.”
황제와 관련된 비리가 아니었다. 그저 한 아이의 엄마로서, 자식에게 남기고 싶은 기억이었다.
“….”
이런 걸 내가 봐도 되는 걸까.
나는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들었고, 그런 내 마음을 알아챈 젠은 잡고 있던 내 손에 힘을 주곤, 저택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기분이 묘해.”
“그런가요?”
“응, 내가 어떻게 했어야 하는 걸까.”
할 수 있는 게 뭐였냐고 묻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음에도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행복해져야죠.”
행복… 행복….
젠은 행복만을 읊조리고만 있는 내 몸을 돌려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그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밤에도 아름답게 빛나는 그의 금안을 마주했다.
“저랑 행복할 거예요. 죽을 때까지.”
아, 진짜… 젠, 네 얼굴은 반칙이라고.
젠을 바라보고 있으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된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젠도 나와 함께 웃으며 내 입술 위로 짧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컁!”
나뭇잎이 사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귀를 울리는 익숙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행복이다.
-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