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꽃잎의 약속 (1)
“조금만 더 가까이 가면 안 될까?….”
“안 돼. 인간한테는 이 정도도 부담스러울 거라고 말했잖아.”
“그치만….”
“이 이상 가까이 가는 건 싫어할 거야. 저번에도 혼났잖아.”
“이젠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쯧.”
나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잿빛의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는 먼지들이 보였다.
그들은 내가 자신들을 눈치채지 못했다고 생각하는지, 끊임없이 속닥거렸다.
“원래는 이런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고.”
저 아이는 특별하니까.
한 먼지의 단호한 목소리에 나머지 먼지들은 입을 다물었다.
하아… 진짜 거슬리네.
“밤에는 자리를 피해 달라고… 분명 말했었을 텐데.”
낮게 깔린 내 말에 먼지들은 잠시 침묵했다. 덕분에 잠시 동안이지만 소란스러웠던 방에 고요함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고.
“앗! 아직 안 잤었구나…!”
“혹시 우리 때문에 일어난 거야?… 미안해. 배려가 부족했네.”
“잘됐군, 얼른 밖으로 나가자. 돌아보고 싶은 곳이 아주 많이 있어.”
노란색, 파란색, 그리고 하얀색으로 빛나는 반딧불이 같은 작은 먼지들이 떠들썩하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가 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망설임 없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 그간 많이 참았다는 듯 각자 할 말을 내뱉으며 내 귀를 괴롭혔다.
나는 차게 식은 눈으로 그 먼지들을 바라보다 말했다.
“어지간히 해야지. 민폐라고.”
짜증을 가득 담은 내 말에 먼지들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소란스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그치만 재미있는걸! 그 노반이라는 드로이프 같지 않은 드로이프도 재밌고, 인간이 아닌 것 같은 오묘한 남자도 재밌어. 물론 미르 네가 제일 재밌지만!”
“미르 너한테는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우리가 이 중간계에 발을 들이려면 너를 통하는 방법밖에 없으니까….”
“네가 멀리 떨어져 달라 해서 멀리 떨어져 줬지 않나. 이것도 부족한 건가?”
형체가 없는 작은 반딧불이들은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며 내게 항의 아닌 항의를 했다. 결론은 ‘어쩔 수 없으니 네가 참아라.’였다.
나는 주먹을 꽉 쥔 채 먼지들을 향해 휘둘렀고, 먼지들은 깜짝 놀라 흩어졌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금 빛을 발하며 내 주위를 소란스럽게 만들었다.
아아- 그냥 다 던져 버릴까… 아니야, 그러면 저놈들은 희한한 광경이라며 즐거워하겠지.
“한 달이나 지켜봤으면 됐잖아. 매일 약초 빻고, 젓고, 굳히기밖에 안 하는데 이게 어디가 재밌다는 거야.”
“정령계에서 가만히 있는 것보단 훨씬 재미있어!”
노란색 먼지가 크게 외쳤다. 그러자 다른 파란색과 하얀색 먼지가 동의한다는 듯 몸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내가 아무리 소리치고 짜증을 내도, 먼지들은 포기하고 떠날 생각이 없다는 듯 더욱 밝게 빛났다. 소용이 없었다.
나는 그런 먼지들을 바라보다 한숨을 쉬며 천장을 바라봤다.
“하아….”
몇 달 전, 작은 하급 정령부터 시작해 중급, 상급 정령들이 찾아왔었다.
정확히 말하면 찾아왔다기보다는, 자연이라면 어디에나 있는 그들의 모습을 내 눈으로 볼 수 있게 됐다.
불의 정령왕인 철수와 계약을 맺고 난 뒤, 내 몸은 점점 그의 뜨거운 기운에 적응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덕분인지 전보다 정령을 더욱 잘 느끼게 되었다.
불행은 어느 순간 찾아온다고, 하급 정령과 중급 정령을 보게 된 순간까지는 문제없었다. 그 아이들은 그저 허공을 둥둥 떠다니거나, 해야 할 일이 있는지 분주히 움직이는 게 전부여서 내가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상급 정령은 하급, 중급과는 다르게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자아가 강하다. 그들은 해야 할 일을 하면서도 내게 인사를 하거나, 여유가 있다면 정령의 힘을 이용해 나를 도와줬다.
물의 정령은 약초를 씻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만든 우물에 깨끗한 물을 채워 주었다.
흙의 정령은 약초를 키우기 위해 만든 온실의 흙을 정돈해 주고, 노반의 텃밭에도 힘을 보태 줬다.
불과 바람의 정령은 깨끗하게 씻은 약초나 빨랫감을 건조하거나, 오래 끓여야 하는 물약 냄비의 화력 조절을 도와줬다.
이때까지는 나를 도와준 상급 정령들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하지만 문제는 나와 마주치거나 나를 도와준 상급 정령들이 각자 자신의 상사에게 이 일을 보고했다.
덕분에 불의 정령왕인 철수를 제외한 모든 정령왕들이 나를 보러 중간계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처럼 반딧불이 같은, 아니, 내 눈엔 그냥 먼지 같은 형태로 내 옆에 24시간 딱 붙어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덕분에 젠과 함께 보내는 해피 러브 시간이 통째로 사라졌다. 하다못해 밤에만이라도 떨어져 달라고 부탁했지만, 이들은 3미터 정도 떨어져 주는 게 전부였다.
내 곁에서 멀리 떨어지면 형체도 유지하지 못한다고 한다.
“도와준다고 고마워할 게 아니었어….”
이래서 귀신이 보이면 보이지 않는 척을 하라는 거였나 보다. 안 그럼 더 큰 귀신이 달라붙으니까.
젠장.
“너한테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아주 작은 조각의 중간계라고 해도, 정말 오랜만에 새로운 곳을 보게 되었으니까.”
하얀 먼지가 조심스레 다가와 속삭였다.
한 달 전부터 계속 이 패턴이었다. 참다못한 내가 화를 내면 하얀 먼지, 노란 먼지, 파란 먼지 순으로 다가와서 나를 달래 준다. 너한테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든지, 너를 만나게 돼서 너무 행복하다든지, 끈기를 기르기 위한 수련이라 생각하라느니. 동정이나 짜증이 나는 말을 해 준다.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를 다 듣고 나면 나는 스르륵 잠에 빠진다.
흙, 바람, 물 그리고 내 안에 있는 불의 기운이 합쳐지면 사람을 나른하게 만든다.
오늘은 바보처럼 그냥 잠들지 않으리!
“조용! 전부 입 꾹꾹!!”
나는 먼지들을 향해 단호히 소리쳤다. 그리고 침대에서 일어나 정신 차리자는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자! 다들 내 앞으로 정렬!”
나는 먼지들에게 손가락질하며 단호히 명령했다. 그러자 먼지들은 잠시 둥둥 떠다니다 내 앞에 줄 세워 앉았다.
저런 모습은 좀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철수! 김철수, 너도 이리 와! 김철수!”
허공을 향해 불의 정령왕의 이름을 외쳤다. 그러자 붉은 불길이 화르르 치솟아 오르며 철수가 등장했다.
“드디어 이 몸이 한나를 이길 수 있는 차례…! 뭐야. 너네들이 왜 여기 있는 거야?”
갑작스러운 부름에 한나와 매일 밤 하는 체스 내기를 방해받은 철수는 도깨비와 같은 흉흉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지만, 한 줄로 정렬하고 있는 먼지들을 발견하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 그… 쟤는 부를 필요 없었잖아!”
“크흠!”
철수의 모습을 본 먼지들은 우왕좌왕하다, 철수의 눈을 피해 내 뒤로 다가와 숨었다.
“하하하! 꼴 좋다! 괜찮다고 할 때는 언제고, 역시! 중간계가 그리웠던 거지?”
철수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먼지들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그에 먼지들은 몸을 움츠리며 삐죽삐죽 가시를 세웠다.
먼지들의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철수의 행동에 질려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김철수! 네가 책임지고 얘네 돌려보내!”
나는 무서운 표정으로 철수를 향해 말했다.
“안 그럼 한나한테 못 가게 매일 불러들일 거야!”
협박했다.
“너…!”
그건 어지간히도 싫은지 철수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곤 먼지들을 향해 다급하게 소리쳤다.
“정령왕이나 되는 놈들이 인간에게 민폐나 끼치고! 그러다 미움받는다! 얘가 너희들을 진정으로 미워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그러니 얼른 돌아가라고!”
철수의 말에 먼지들의 몸뚱이가 요동쳤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먼지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래, 민폐라고 몇 번이나 얘기했지!”
나는 팔짱을 낀 채 날이 선 눈빛으로 먼지들을 바라봤다. 당장 떨어져 나가라는 내 염원이 드디어 닿았는지, 먼지들은 주춤하며 물러났다.
내 옆에 선 철수는 잔뜩 주눅이 든 그들의 모습을 본 뒤, 단호했던 표정이 잠시 무너졌다. 아마도 날 만나기 직전까지도 일상이 지루했던 자신이 생각나는 것 같았다.
“그… 미르야, 이 몸을 봐서라도….”
나는 얼토당토하지 않은 말을 하려는 철수를 노려봤다.
한마디만 더 하면 전부 죽여 버릴 거다.
“….”
진지한 내 표정에 철수가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무언가 결심했다는 듯 각오를 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이놈들이 만족할 만한 것을 보여 주면 돌아갈 거야! 그렇지, 너네?!”
“돌아가다니, 우린 그럴 생각이 없…!”
“그, 그럼! 당연히 돌아가야지!”
“약속하지…!”
철수에 말에 노란 먼지가 반대하려 했지만 하얀 먼지와 파란 먼지가 막아섰다.
그래, 너네 둘은 눈치가 있구나.
그런데 말이야….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엥…?”
떠나준다 약속하면 당연히 그래 줄 거라 생각했는지, 부정적이 내 반응에 먼지들은 놀라 했다.
나는 그런 먼지들을 바라보며 어림도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동안 많이 놀아 줬잖아. 지금까지는 너네 정령들한테 받은 게 있으니 여기까지 놀아 줬지만 이 이상은 수지에 맞지 않아.”
나는 무릎을 꿇은 다리를 풀어 거만하게 앉았다.
철수가 말했던 ‘얘가 너희들을 진정으로 미워하면….’이라는 말로 보아, 내가 저놈들을 진심으로 미워하면 먼지들은 강제적으로 내 곁에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
강제는 싫지만, 본인들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 강제로라도 떨어트려 놔야지.
그러게. 밤에만이라도 떨어져 있으라니까.
“미르 네가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는데… 우린 정령이라서 인간이 생각하는 부끄러운 행위도 우리가 보기엔 아무렇지도 않아. 그저 신기할 뿐이지.”
내 마음을 읽은 철수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건 옛날에도 들어서 알아! 문제는 너네가 아니라 내가 민망하다고! 내가 노출증도 아니고…!”
쟤네가 인간이었다면 틀림없이 관음증 환자였을 거다.
“어찌 됐건 얼른 정령계로 돌아가. 너네가 여기서 죽치고 있으니까 다른 정령들이 할 일이 많아졌다잖아.”
“쳇. 계약자만 있었어도….”
지금의 중간계에는 정령을 불러들일 정령술사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니 정령왕들은 중간계로 나올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하지만 철수와 계약한 내가 점점 정령과 친숙한 기운을 갖게 되었고, 덕분에 다른 정령왕들을 이곳으로 끌어들일 수 있게 됐다.
그렇지만 계약자가 없이는 아무리 정령왕이라도 완벽히 중간계로 내려오기 어렵다. 때문에 저런 먼지 같은 형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저 정령왕들은 나한테 들러붙어서 나를 괴롭히고 있고, 반쪽이 된 정령왕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 그 밑에 정령들이 더욱 힘을 쓰고 있다.
“부하들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너네 때문에 요새 쉬는 시간도 없이 움직이잖아. 얼른 돌아가라고.”
책망하는 내 말에도 먼지들은 이대로 돌아가기 싫다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고집도 참 세지….
“그럼 이렇게 하자. 너희는 인간을 지켜보는 게 좋은 거지? 그럼 인간들을 잔뜩 불러서 구경시켜 줄게.”
일일이 사람들을 만나러 가기엔 내가 귀찮으니, 모두 불러 모아서 호기심을 한 번에 해결시켜 주는 게 편하고 빠를 것 같다.
“그, 그래 줄 거야?”
“호기심이 충족돼야 돌아간다며. 그럼 이 방법밖에 없지. 대신 구경 후에는 돌아가는 거야. 약속해.”
나는 먼지들을 향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에 먼지들을 대표해 철수가 손가락을 내밀어 나와 약속했다.
확실하게 약속을 받아놓아야 뒷말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너 부를 사람은 있어?”
철수는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의구심을 가지고 물었다.
그에 나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고개를 끄덕였다.
“연회를 열 테니 한나한테 이곳으로 와 달라고 말해 줘. 레이가랑 바네사랑도 같이. 아, 오랜만에 보리언도 보고 싶으니까 보리언도 부탁해. 오스먼드는… 가능한 안 왔으면 좋겠어.”
나는 철수를 향해 속사포로 말했다. 어차피 한나한테 돌아갈 거잖아? 그럼 내가 편지를 보내는 것보다 철수가 내 말을 전하는 게 더 빠를 거다.
그리고.
“지아한테도 들러 줘. 로이븐 형님, 메이븐 형님, 필릭스도 불러 줘. 아, 정령들의 모임이면 케이시가 좋아할지도 몰라. 케이시도 불러.”
불의 정령왕을 부엉이로 쓰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다.
나는 철수에게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곳으로 와달라는 이야기를 전해 달라 부탁했고, 철수는 잠시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은 네 친구들이 저질렀으니 네가 치워야지. 이게 다 네 업보야.
“일주일 후에 보자.”
“일주일?”
일주일은 너무 촉박한 거 아니냐는 철수의 말에 놓았던 정신을 다시 붙잡았다.
한시라도 정령들과 빠이빠이하고 싶은 마음에 서둘렀는데, 생각해 보니 나도 준비하기에 빠듯한 시간이다.
“…보름.”
보름 정도면 여유 있을 거다. 아무렴 촉박한 일주일보다는 보름이 낫겠지.
다들 내 소식 한번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니, 만나러 오라 그러면 재빨리 준비해서 올 거다. 아마도.
그 외에 준비해야 할 몇 가지를 더 말해 주고 철수는 돌아갔다. 그리고 남아 있는 먼지들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 나와 멀리 떨어졌다.
돌아가지는 않으려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