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자님 먹고 싶어요-217화 (217/227)

외전. 꽃잎의 약속 (2)

약속했던 그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한곳에 모아두기도 힘든 귀한 손님들이 많이 오시니 그에 맞는 대접을 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하나.”

최근 연구하고 있는 비아그라와 탈모약의 영향으로 저택의 모든 빈방은 약초 더미로 뒤덮여 있었다.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가 보내 준 약초와, 뒷산에서 대량으로 수확한 약초를 정리하기 귀찮다고 몇 달 동안 미뤄 두며 치우지 않았다. 그 결과가 이거다.

이 기회에 쌓여 있는 약초 정리도 하고, 먼지가 많이 쌓인 저택의 대청소도 시작했다.

약초는 노반의 도움을 받아 종류대로 분류했고, 분류한 약초는 젠의 도움을 받아 수납함을 만들어 한약방처럼 정리했다. 상태를 보존하는 마법도 걸어 둬서 약초가 말라비틀어지거나, 썩지도 않을 거다.

진작 이럴 걸 그랬네.

약초 정리가 끝난 뒤에는 깔끔하게 비워진 방들을 정리해야 했다.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인 청소마법을 사용하려고 했지만, 청소 두건을 쓴 마린은 ‘어지르는 사람은 치우는 사람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며 내게 빗자루를 쥐여 줬다.

어지르지 말라는 뜻도 있겠지만, 안 그래도 없는 마나를 사용한 뒤, 죽은 마나를 마셔 마나를 보충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걱정이 더 커 보였다.

덕분에 빗자루질부터 시작해 먼지떨이질, 걸레질, 그리고 바닥 대걸레질까지 빠진 곳 없이 꼼꼼하게 청소했다.

이 넓고 큰 저택을 혼자 청소하기엔 내 체력이 많이 부족하지만, 정령들의 힘을 빌려 큰 수고 없이 청소를 마칠 수 있었다.

“먼지 놈들은 쓸모없지만, 중급 정령은 딱 좋다니까.”

떠들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일만 하고 사라진다. 평화롭고 얼마나 좋아. 그에 반해 먼지들은….

“미르, 이건 무엇이지?”

“미르야! 이거 이거! 나도 이거 해 볼래!”

“호오… 이게 바로 향유라는 건가!”

물의 정령, 흙의 정령, 그리고 바람의 정령은 청소를 하며 드러나는 물건이나 마도구가 신기한지 세상을 처음 배우는 어린아이처럼 끊임없이 물어 왔다.

“그건 세탁기야. 옷이나 이불 같은 걸 빠르게 세척해 주는 기계지. 지구에서 썼던 물건이야.”

“세탁기라….”

“그건 향유…라기보다는 섬유유연제야. 옷감을 향기롭게 하고 부드럽게 풀어 주는 용도지. 이것도 지구에서 썼던 물건.”

정령왕들은 깨끗한 물의 소용돌이 안에서 세탁물이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의 소용돌이가 거의 끝나갈 때쯤, 물의 먼지가 나직하게 말했다.

“신기하구나. 마력으론 못 하는 게 없으니… 인간들에겐 정령이 필요하지 않겠어.”

조금 씁쓸한 듯한 그의 말투에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세탁기나 전기밥솥 같은 건 이 세계에서 나만 쓰고 있지만 말이야….

“흐음….”

아마도 정령사가 사라진 이유 중 하나는 부른 사람이 모르거나, 없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있잖아, 이 시대에 정령사가 없는 이유는 정령을 아는 인간들이 없어서가 아닐까?”

“우리를 아는 인간들?”

흥미로운 내 말에 먼지들은 세탁기에서 눈을 떼고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런 먼지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천천히 말했다.

“지금의 천신은 힘이 다 빠졌지만 인간들의 믿음이 남아 있어서 어찌저찌 살아 있는 거라며.”

“음… 사실은 조금 더 복잡하지만, 쉽게 말하자면 그렇지.”

“그런 거랑 비슷하게. 너네는 인간들 사이에서 잊혔으니까, 인간들이 너희를 소환할 생각도 못 하는 거잖아.”

그럴듯한 내 논리에 먼지들은 부들부들 떨며 동요했다. 노란 먼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정말 그런 걸까?….”

“그런 거 아닐까? 마법을 처음 배울 때도 내 안에 있는 마나의 흐름이랑 마력을 느끼는 것부터 시작하거든.”

내가 무엇을 다루는지 아는 것부터가 시작이란 소리다.

인간들의 대부분이… 아니, 거의 모든 인간이 정령사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느끼지 못하고 안 하는 거다.

검을 쓰는 사람은 피와 살육을 멀리하는 정령과는 거리가 멀고, 마나를 다루는 사람은 정령을 생각할 틈이 없을 테니까.

검도 마법도 쓰지 않는 사람은… 조금 가혹하지만 정령을 소환할 재능조차 없는 거일 테고.

“그, 그럼 우리가 알려지려면 어떻게 해야 해?!”

노란 먼지가 일사불란하게 다가왔다. 그 뒤로 멍하니 있던 파란 먼지와 하얀 먼지도 노란 먼지의 뒤를 따라 내게 다가왔다.

나는 무언가를 강하게 바라는 듯한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음… 정령사의 활약이 널리널리 알려진다거나, 책을 내야 하지 않을까. 마법사들은 그러잖아.”

대마법사 아크레나라거나, 어느 서점에나 있는 마법서같이. 인간들이 흔하게 접할 수 있기만 하면 된다.

그러고 보니 정령에 관해서는 정말로 알려진 게 없네. 사람도, 책도.

“왜 없을까?”

왜 알려진 게 없지?

마법사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조금이지만 정령사가 있었을 텐데….

내가 만났었던 베리타 해적단의 베리타도 하급이지만 물의 정령과 계약했었다.

다른 정령사들도 그렇고, 로테는 무려 불의 정령왕과 계약을 했는데. 이런 대단한 업적은 물론이고 정령 자체에 대해 알려진 게 없다니. 확실히 이상하다.

나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내 침묵이 깨지기를 기다리던 먼지들이 힌트를 주었다.

“정령과 가까운 아이들은 선하니까!”

“물욕을 바라지도 않았지.”

“기본적으로 선하고, 깨끗한 아이들이야.”

아. 정령을 소환할 수 있는 사람에게 제한이 있다는 걸 까먹었다.

그들은 물욕을 바라지 않고, 출세를 바라지 않고, 누군가를 상처입힐 생각조차 하지 않는 선하고 깨끗한 아이들이다.

“그럼 사람들이 탁해져서 그럴지도 모르겠네….”

“탁해져?”

요즘 세상엔 아무리 선해도 선하기만 한 사람은 없다.

예를 들어, 나는 누굴 도와주면 반드시 그에 합당한 보수를 받아야 만족하는 사람이다.

나처럼 보답을 바라는 사람은 정령을 불러내기 부적합하다.

그리고 나는 철수가 없었다면 살인도 하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내 손으로 살인을 하진 않겠지만, 내 사람에게 위해를 가한 놈들에게 철퇴를 내렸겠지.

하지만 정령사에 소질이 있는 선한 사람은 성인군자처럼 복수하고 원망하기보다는 용서를 하는 사람일 테니까.

그런 사람을 호구라고 부른다. 요즘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

“호구… 아니, 착한 사람이 없어서 그러네. 문제 해결! 이건 무용담이나 책을 내도 어쩔 수 없겠다.”

결론은 정령사가 사라진 이유는 이 시대에 착한 사람이 없어서고, 정령에 대해 알려진 게 없는 이유는 선한 정령사라면 전쟁 같은 피가 난무한 곳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란 거다. 게다가 출세욕도 없어 유명한 사람이 없으니 알려질 이유도 없던 거겠지.

이렇게 허무할 줄이야.

“이럴 수가….”

“설사 착한 사람이 있다 해도, 정령을 모르니 부를 수가 있나. 공명을 한다 해도 너희를 느끼지 못하는 거 아니야.”

내 말에 먼지들의 기세가 조금 줄어들었다. 그러다 희망을 잃지 않은 노란 먼지가 말했다.

“그, 그래도… 조금이라도 우리가 알려지면 우리를 부르는 인간이 있을 수도 있잖아!”

“인간들한텐 영웅담이 제일 잘 팔리는데, 정령사는 전쟁 같은 거 참여 안 하잖아. 알려지기 어렵지.”

“그런….”

희망은 다시 멀어졌다.

파란 먼지와 하얀 먼지는 가만히 침묵을 지키며 우울해했고, 노란 먼지는 이럴 수는 없다며 땡깡을 부렸다.

“으아앙!!! 써 줘!! 지어내서라도 써 줘!!!”

“그래! 영웅담을 소설로 쓰면 되는 거잖아. 우리를 주인공으로 쓰면 되는 거 아니야?”

나는 그들을 무시하며 탈수까지 완료된 세탁물을 꺼냈다. 그리고 허공을 날아다니는 중급 바람의 정령들에게 부탁해 건조를 시켰다.

“여행담이라면 팔릴지도 모르겠네.”

아차. 생각만 한다는 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영웅담이 아니어도 자신들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라는 내 말에 땡깡을 부리던 먼지들이 단숨에 침착해졌다.

그리고는….

“여행담 좋다!!!”

“좋군!!!”

“여행 가자!!!”

하아….

나는 귀를 막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밖으로 나갔다.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면 정령들과 함께하는 여행담은 아주 편리하고 재밌을 거다.

바람의 정령의 힘을 빌려 고요한 호수 위에서 조각배를 탄다거나, 호수에서 수영을 하고 나온 후 옷을 건조한다거나, 민들레 홀씨를 잔뜩 날려 봄의 눈보라를 느낄 수 있을 거다.

흙의 정령의 힘을 빌려 흙으로 벽을 만들거나 노숙을 할 때 간단한 집을 만들 수도 있을 테고, 산사태가 일어나면 터널을 뚫어 해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의 정령은 그 어떤 정령보다 쓸모가 있는 정령일 것이다. 사람은 몸의 70%가 물로 이루어져 있을 정도로 물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다. 물의 정령과 함께 떠나는 여행인 이상 탈수로 힘겨워할 일은 없을뿐더러, 노숙을 할 때 샤워도 할 수 있을 테고, 머리도 감을 수 있을 테고. 어쨌건 여러모로 편리할 거다.

불의 정령은 뭐… 모닥불 만들어서 고구마나 구워 먹으면 되겠지.

큰 불편함 없이 재밌을 거다. 그렇지만 여행을 가고, 책을 쓰기는 싫다.

“소설이면 내가 아니어도 쓸 수 있잖아. ”

“소설은 현실성이 떨어지잖아! 생생한 게 최고야!”

방금 전까지 지어내서라도 영웅담을 만들어 내라던 먼지들은 어디 갔나.

“다른 사람을 구해 봐.”

“우리를 볼 수 있는 사람이 너 말고 또 어디 있어!”

“왜 없어. 계약은 안 했지만 한나도 있고, 그… 베리타라고 해적도 있어. 물의 하급 정령이랑 계약했다고 들었어.”

내가 아니라 걔한테 가 보라고. 해적이니 쓸 무용담도 많을 거다.

나는 바람의 정령 덕분에 빠르게 건조된 세탁물을 바구니에 넣었다. 그리고 쫄래쫄래 따라오는 먼지들을 무시하며 마린이 없는 2층으로 올라가 그녀 몰래 마법을 이용해 옷들을 개었다.

“하급 정령의 힘은 정말로 미미해. 작은 물컵에 물을 따르는 정도밖에 하지 못해.”

“그래! 그리고 걔들은 인간의 언어도 쓰지 못하니 소통이 어려울 거 아니야!”

하급 정령의 힘이 미미하다면, 그동안 베리타가 바다를 다뤘다는 이야기는 순전히 운이 좋았다는 소리야?

베리타는 바다의 아이, 뭐 그런 건가?

“그리고 하급 정령과 계약한 걸로는 우리를 볼 수 없어.”

하얀 먼지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한마디로 내가 여행을 가고, 거기에 자기들이 끼고 싶으며, 여행을 다녀온 다음에는 나더러 자기들에 대한 글까지 쓰라는 소리인가 보다.

나는 먼지들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너희를 데리고 여행할 생각이 없어. 지금도 귀찮아 죽겠는데 여행은 무슨. 파티하고 나면 바로 정령계로 돌아가.”

“그치만…!”

“그치만은 없어.”

나는 조금이라도 내 곁에 오래 남고 싶어 하는 그들을 무시하며 저택 밖으로 나갔다.

노반은 이름 모를 채소가 자라있는 밭 위에 듬성듬성 자란 잡초를 뽑고 있었다. 나는 발꿈치를 들고 고양이 발걸음으로 살금살금 노반의 뒤로 갔다.

나름 눈치채지 못하게 걸었던 것 같은데 노반은 내가 다가온 것을 느꼈는지, 잡초를 뽑던 것을 그만두고 손에 묻은 흙을 탈탈 털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 내게 환한 웃음으로 인사했다.

“미르!”

우리 노반은 아침에도 귀여웠는데 점심에도 귀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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