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꽃잎의 약속 (3)
나는 해맑게 웃는 노반의 볼을 감싸고 말랑이 인형을 만지듯 주물럭거렸다.
“미르, 걔네 아직 안 갔어?….”
노반은 내 격한 주물럭거림을 받으며 먼지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응, 연회를 즐기고 난 뒤에는 갈 거야.”
“가, 가는 거야?….”
노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 했다. 그리고 조금 서운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런 표정이지…?
나는 혹시나 노반이 허튼 생각을 하는 게 아닌가 싶어 조심스레 물었다.
“노반은… 얘네가 안 갔으면 하는 거야…?”
설마 그런 거냐는 내 표정에 노반은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그리곤 내 시선을 피하며 침묵했다.
그런 노반의 반응에 먼지들은 신이 났는지 으쓱거리며 말했다.
“드로이프는 자연을 사랑하니까!”
“우리와 가까이 있고 싶어 하는 게 당연하다.”
“노반 좋아!”
식물과 가까운 드로이프에게 물의 정령, 흙의 정령, 그리고 바람의 정령은 떼어놓을 수 없는 정령이다.
불의 정령은 상성이 맞지 않으니 철수를 박해한다 치고….
“노반, 혹시 쟤네가 좋은 거야…?”
노반 너는 그동안 얘네 때문에 내가 얼마나 짜증이 났는지 알고 있잖아…!
아련함이 가득 담긴 내 눈빛을 본 노반은 죄책감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좋아하는 편…이 아니야. 쟤네 때문에 미르가 힘들어했잖아. 미르가 힘든 건 싫어.”
노반은 먼지들에게로 향했던 시선을 가까스로 돌렸다. 노반이 애쓰는 모습을 보니, 먼지들을 일부러 싫어하라고 강요하는 느낌이라 양심이 조금 찔리는 기분이었다.
“노반이 좋다면….”
그냥 내비 두…지는 못한다.
아무리 노반이라도 이건 안 된다.
젠과 해피 러브한 시간을 보내지 못하니 슬슬 스트레스가 쌓여 간다.
고기도 먹은 놈이 더 잘 안다고, 매일 고기만 먹다가 어느 날 갑자기 채소만 주면 사람이 돌아 버리지.
성욕이 적은 나도 이 정도인데, ‘그’ 젠은 얼마나 힘들겠어.
“중급 정령들은 주변에 많으니까. 그걸로 만족해 줘.”
나는 서운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노반을 위해 뭐라도 해 줄까 싶어 잡초를 뽑으려 밭으로 다가갔지만, 노반은 내 손을 잡고 말렸다.
“미르, 괜찮아! 거의 다 했어. 나머지는 정령들이 도와준다고 했거든.”
노반의 말에 공중에 퍼져 있던 흙의 하급 정령들이 다가와 아직 여린 잡초가 있는 지반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모두 박자에 맞춰 통통 뛰었다. 그러자 밭의 흙들이 조금씩 흔들리며 박혀있던 잡초가 조금씩 올라오더니 뿌리를 뱉어 냈다.
“와….”
“신기하지? 아직 덜 자란 잡초는 가능한데, 깊게 박힌 잡초는 뽑기 어려워서 그것만 내가 뽑고 있어.”
노반은 흙의 하급 정령들이 기특한지 자신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귀여운 노반을 잔뜩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파티가 끝나면 노반의 밭일을 도와주는 하급 정령들이 멀어질 거라 생각하니 미안했다.
“나중에 잡초 뽑는 거 도와줄게….”
“미르는 괜찮아! 젠이 도와주면 돼.”
미르 손에 흙을 묻힐 순 없어!
노반은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자신만 믿으라고 신신당부했다.
귀여워라…
“노반은 언제까지 귀여울 거야? 이렇게 귀여우면 범죄 아니야?”
“으앗! 미르…!”
나는 참지 못하고 노반을 껴안았다. 그리고 노반의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마구마구 귀여워해 줬다.
“노반. 내일 크로스반 영지로 내려갈 건데 같이 갈래?”
“영지로?”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되묻는 노반의 볼을 마지막으로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내가 격하게 흔든 덕분에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해 주며 말했다.
“장도 봐야 하고, 클로에 남매랑 시아한테 연회 초대장을 줘야지.”
“쌍둥이한테 가는 거야?”
“아, 걔네 쌍둥이였지.”
로이에 비해 클로에가 너무 점잖아서 그런지 은연중 클로에가 한참 누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응, 쌍둥이한테도 와 달라고 하려구. 문제는 시아인데… 왠지 안 오려고 할 것 같단 말이지.”
“내가 도와줄게!”
노반은 자신이 말하면 시아는 올 거라고 말했다.
그래, 시아 걔가 은근 어린애한테 약하더라.
“응, 노반이 도와주면 되겠다.”
아주 든든하네.
* * *
내가 약초 정리와 빨래를 하는 동안 노반은 밭의 정리를, 마린은 저택의 전체적인 청소와 쓸모없는 물건들을 처분했고, 셀비스는 주방 정리와 청소를 했다. 그리고 젠은 저택 뒤에 있는 뒷산을 뒤엎으러 갔다.
날이 따뜻해져서인지 산속 깊이 잠들어 있던 마물들이 슬슬 내려오기 시작했다.
고블린부터 코볼트, 오크, 트롤, 오우거, 심지어 하늘을 나는 와이번까지 나오는 바람에 조금 곤란해졌다.
덕분에 젠이 많이 바빠졌다.
젠이 오우거의 숨통을 단 한 번에 끝내는 걸 본 뒤에는 젠이 마물에게 당할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게 됐지만, 이번엔 공중전의 귀재라는 와이번 무리까지 나오는 바람에 아무래도 걱정이 돼서 셀비스와 몰래 젠을 따라갔었다.
하지만 걱정도 팔자였는지 한 손으론 와이번의 모가지를 잡아채 꺾고, 다른 손으론 와이번의 날개를 도륙 내는 걸 보고 난 후부터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젠이 와이번 무리를 토벌하는 동안 우리는 그간 얻었던 상위 마물의 피를 근처에 뿌려 다른 마물들이 저택으로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오늘은 미루고 미루던 장을 보러 노반과 함께 크로스반 영지로 내려갔다.
연회에 필요한 물품은 물론, 바닥이 보이는 향신료나 식자재를 채우기 위해 상점가를 돌았다. 덕분에 우리가 타고 온 마차가 가득 찰 정도로 많은 양의 짐이 생겼다.
마지막으로 연회엔 과일이 필요하다.
“저기 있는 과일들 전부 줄 수 있을까?”
“전부요?….”
“응. 그동안 도움받았던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도 할 겸, 작지만 연회를 열 생각이거든.”
진열되어 있는 모든 과일이 필요하다는 내 주문에 시아는 의문을 표하다 설명을 듣고는 팔 한가득 과일을 안아 들었다.
“그래서 말인데, 시아도 연회에 와 줬으면 좋겠어.”
“네…?”
시아는 자신이 왜 초대됐는지 모르겠다는 듯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런 시아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말했다.
“시아도 와 줬으면 좋겠어.”
나는 고개를 들어 예쁘게 시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목소리도 꾀꼬리처럼 말했으니 웬만하면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일 거다.
하지만 미인계를 이용한 내 부탁에도 시아는 내키지 않는지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시아는 과일가게와 자신의 집을 벗어나지 않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주민들 말에 따르면 외식도 거의 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이쯤 되면 시아는 소통을 하러 먼저 나가는 성격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런 딱딱한 시아의 모습에 여우의 모습으로 내게 안겨 있던 노반이 폴짝 뛰어내렸다. 그리곤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여 내게 가세했다.
“형아! 형아도 와 줘!”
노반을 시아를 향해 눈을 빛냈다. 연회에 오지 않는다고 거절하면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물에 젖은 눈동자였다.
시아는 노반의 반짝이는 눈망울을 차마 피하지 못했고,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들르는 거라면….”
노반의 귀여움이 내 미인계를 이겼다.
“정말? 형아도 오는 거야?”
“응, 큰 일정이 없다면 갈게.”
확실히 이긴 게 아니었네. 큰 일정이 없다면 간다는 말은 어린 노반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둘러댄 말이다.
노아로도 안 되는구나. 역시 내 미모가 죽은 게 아니었어.
시아는 가볍게 웃으며 ‘일이 너무 많아서 가지 못했어요….’ 같은 빠져나갈 구멍을 파 놨다.
나는 그런 시아를 바라보며 빠져나갈 구멍을 주지 않는다는 뜻으로 단호히 말했다.
“시아 네가 편하게 올 수 있게 마차를 보내 줄게! 아, 그리고 그날 과일도 다 살 생각이야. 우리가 독점하는 거니까 값은 세 배로 칠게.”
시아가 취급하는 과일은 품질도 최상급에다가 프레오나에서 구하기 힘든 과일이 많아, 보통 과일가게와는 다르게 가격이 조금 많이 나간다.
원가에 세배를 준다 하면 거의… 평민의 세 달 치 월세 값이다.
하지만 내게 그 정도 돈은 시아가 연회에 와 준다면 아깝지 않은 돈이다.
“꼭 와 줘.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도 있거든.”
모든 일이 끝나고 세네카를 떠나기 며칠 전, 로이븐은 젠이 내게 어울리는 사람인지 시험을 한다며 술을 궤짝으로 마셨었다. 그날 젠은 멀쩡했지만 로이븐 혼자 술에 잔뜩 취해선 내게 털어놨다.
라이언 황제로부터 살아남은 가리엘 황후의 막내딸은 태어나자마자 아스본 왕국으로 입양 비슷한 피신을 했다고. 확실하진 않지만 9~11번째 왕녀 중 하나라고 했다.
라이언 황제의 눈을 피해 급하게 넘어간 거라 지금껏 여동생을 찾을 수도 없었고, 찾았어도 연락 한 번 할 수 없었다며 오빠로서 너무나도 미안하다고 했다.
그런 로이븐과 메이븐에게 시아를 소개시켜 주고 싶었다.
본인은 숨기고 있지만, 시아는 아스본 왕국의 사람이니까 어쩌면 무언가 알고 있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시아도 아스본 왕국에서 도망친 이유가 있을 테니, 로이븐과 메이븐이라면 분명 그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로이븐과 메이븐, 그리고 시아는 내가 호감을 가지고 있는 내 편인 사람들이니, 이왕이면 근심 없이 잘살아 줬으면 한다.
“꼭 와 줘.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게.”
나는 진지한 눈으로 시아를 바라보며 말했고, 시아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활짝 웃으며 시아를 도와 진열되어 있는 과일을 시아에게 가져다주었고, 시아는 내가 가져온 과일을 받아 얇은 종이로 감싸 포장했다.
내 손 가득, 그리고 노반의 손에도 과일이 가득 담기고 나서야 우리는 과일가게를 나설 수 있었다.
이왕이면 크로스반 쌍둥이 남매인 클로에와 로이를 보고 저택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장을 너무 열심히 보는 바람에 진이 다 빠졌다.
우리는 상점가 중앙에 있는 우체국으로 들어가, 남매에게 줄 초대장을 전했다.
우체국이 알아서 잘 전하겠지.
“근데 미르, 과일이 이렇게나 많이 필요해?”
한 손 가득 과일 들고 마차로 돌아가는 길, 노반이 궁금해하며 물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사실 이 정도까지는 필요 없어. 연회 당일에도 살 테니 과일은 넘쳐나겠지….”
우리가 산 과일의 양은, 과일로만 사흘을 버틸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그리고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과일을 많이 먹을 것 같지도 않고.
“그럼 이 과일은 어디에 쓰려고? 혹시 과일청 만들어 주려구?”
노반은 과일청을 기대하는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물어 왔다.
그러고 보니 과일청이 다 떨어지긴 했다. 새로 만들긴 해야 하는데 워낙 귀찮아야지….
그치만 노반이 원한다면야….
“응, 과일청 만들어 줄게. 남으면 잼도 만들어야지.”
과일청이나 잼을 만들어 놓으면 티 타임에도 좋을 거고, 지아나 필릭스같이 단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예 가져가려 할 것이다.
이번엔 돈 받고 팔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