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꽃잎의 약속 (4)
사재기한 과일은 모두 청과 잼으로 만들기로 했다.
과일의 양이 생각보다 많아 놀랐지만, 나를 포함한 노동자가 다섯 명이나 있어서 예상했던 시간보다 빠르게 끝낼 수 있었다.
조금 물렁해진 복숭아와 블루베리는 잼으로, 나머지는 전부 청을 담갔다.
“다시는 잼 안 만들어!”
노반은 복숭아 잼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럴 만도 하다. 잼은 쉴 틈 없이 계속 저어 줘야 하기 때문에 만드는 게 지루하고, 손도 아프다.
“그래, 앞으로는 사 먹자.”
“…아니야. 다음에도 만들래.”
노반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와 마린이 만들어 준 초코케이크를 먹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이거 맛있지?”
“응, 진짜 맛있어.”
으깨진 복숭아를 쉬지 않고 젓고 있자니 한국에서 먹었던 자허토르테가 생각났다.
그래서 만들었다.
자허토르테는 초코케이크 사이에 살구잼을 바르고 겉을 반짝반짝한 초콜릿으로 코팅한 케이크지만, 우리는 살구잼이 없어 복숭아잼으로 교체했다.
스펀지 초코케이크는 마린이 만들어 줬고, 나는 그냥 잼을 발라 초콜릿 코팅을 했을 뿐이다.
“도비가 살았던 곳으로 한번 가 보고 싶네요.”
마지막 과일청을 다 담근 셀비스가 가까이 다가와 노반의 자허토르테를 크게 떼어 먹었다.
노반은 자신의 케이크가 공격당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자신이 먹던 자허토르테를 셀비스에게 넘기고 새로운 조각을 잘라 가져왔다.
“음… 셀비스는 좋아할 것 같아. 내가 살던 나라는 음식에 환장하는 나라였어서 별의별 음식이 다 있거든.”
“흥미로운 이야기네요. 기회가 생긴다면 꼭 가 보고 싶습니다.”
“엄청 센 악마나 천사를 불러내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지 않을까.”
“그렇겠네요.”
셀비스는 아쉬운 척을 하며 노반이 넘긴 자허토르테를 먹으며, 손님에게 대접할 요리를 만들러 다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젠은 내 옆에 앉아 연회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내게 자허토르테를 먹여 줬다.
잠시 동안 아기 새처럼 받아먹다 정신이 들었다.
“젠은 잘 먹고 있는 거야?”
“네, 저도 먹고 있어요.”
거짓말. 나 먹여 주느라 안 먹은 게 확실하다.
나는 젠이 내밀고있는 포크를 뺏어, 다시 젠에게 내밀었다. 그에 젠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 작게 웃곤 입을 벌려 먹었다.
“맛있지?”
“네, 맛있어요. 근데 생각보다 달았네요. 괜찮으신가요?”
젠은 단 디저트를 좋아하지 않는 내게 자허토르테 한 조각을 전부 먹여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응, 괜찮아. 요새 단 게 땡겨서….”
나는 티 테이블 위에서 방방 뛰고 있는 먼지들을 노려봤다.
사흘 뒤면 저놈들과 빠이빠이다.
그렇게 젠과 함께 연회 계획을 세우고 있자, 거대한 마차를 끌고 오는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벌써 왔나?”
“그런가 보네요.”
나와 젠은 마시던 차와 케이크를 내려놓고, 마당 안으로 들어오는 큰 마차를 반겼다.
마차의 문양을 보니 세네카 황궁의 문양이었다.
거리가 머니까 좀 걸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일찍 왔네.
“황자님!!”
정차된 마차 안에서 익숙하고 정겨운 큰 목소리가 들렸다.
나와 젠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반겨 주려 마차 근처로 갔다. 마차 안에서는 아주 편한 몸빼 바지를 입은 지아가 나왔다.
“너 설마 그러고 온 거야?”
“황궁 나올 때는 제대로 입고 나왔죠. 이건 중간에서 갈아입은 거예요.”
지아는 남의 눈치 따윈 보지 않는 듯, 헐렁한 상의 아래로 몸빼 바지를 입고 멋진 패션 센스를 뽐냈다.
세네카 황실의 문양을 단 마차를 타고 있으면서 이런 옷을 입는다니… 로이븐이 보게 되면 깜짝 놀라 뒤집어질 것이다.
하지만 뭐, 지아가 무엇을 입는지는 나와 관계없다.
“멋지네.”
“그쵸? 황자님이 소개시켜 주셨던 로렐라이 씨가 만들어 주신 옷이에요!”
응?… 그 사람이 이 옷을 만들었다고?
자신이 생각하는 미(美)에 충족되지 않으면 옷이고 뭐고 전부 던져 버리는 그 로렐라이가 만들었다고? 저 몸빼 바지를?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몸빼 바지의 힘이죠. 한번 입으면 편해서 벗어날 수가 없다니까요?”
지아는 로렐라이에게 몸빼 바지의 편안함을 알렸다. 그리고 로렐라이는 몸빼 바지에게 함락당했다.
지아의 말로는 로렐라이가 자신의 드레스 샵에서 몸빼 바지를 팔고 싶다고 했으나, 아무래도 외관을 신경 쓰는 귀족들이 대놓고 몸빼 바지를 찾을 수 없을 테니 뒤로 몰래몰래 장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덕분에 도피 자금도 많이 쌓였어요.”
“도피하려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잖아요. 저도 황자님의 가르침을 받아 돈은 벌 수 있을 때 벌어 놓기로 했어요.”
지아는 한쪽 눈을 감아 윙크를 해 보이며 ‘나 잘했지?’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로렐라이 씨가 황자님 것도 만들어 왔다며 내게 보라색 스팽글이 가득 달려 있는 몸빼 바지를 내밀었다.
몸빼 빠지가 편한 건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스팽글이 가득 달린 바지는 피부에 닿으면 까슬까슬해서 입기 불편한데….
“나는 괜찮아.”
“후회하지 않겠어요? 이거 진짜 편한데.”
“스팽글은 싫어.”
입을 거면 평범한 원단이 좋다는 내 말에 지아는 고개를 끄덕이곤 여행 가방을 땅바닥에 내려놓으려 했지만, 뒤이어 나온 메이븐이 지아를 저지했다.
“들어가서 하자.”
메이븐은 지아의 가방을 들고는 내게 저택 안으로 안내를 해 달라고 했다.
“방은 쓰고 싶은 곳을 쓰시면 돼요.”
“엇? 저택이 더 넓어진 것 같네요?”
지아는 저택 안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지아의 말대로 저택 증축을 했다. 손님을 밖에서 재울 수도 없고, 이곳에서 오래 지낼수록 물건도 늘어 창고가 많이 필요해져서 흙의 정령들의 도움을 받아 저택을 증축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가 젠의 망치질을 봤어야 했다. 진짜 멋있었는데….
그 장면을 다시 볼 수 있다면 저택을 성으로 만들 생각도 있다.
“저는 저번에 썼던 방 쓸게요!”
지아는 자신의 짐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고, 메이븐은 잠시 돌아보다 지아의 옆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어느새 여우로 변한 노반을 끌어안고, 뒤이어 온다는 필릭스와 케이시를 마중 나갔다.
메이븐의 말로는 필리스와 케이스가 이곳에 오기 전 크게 싸웠다며, 인적이 드문 곳에 가서 싸우고 오겠다고 하고 떨어졌단다.
“애도 아니고, 다 큰 어른 둘이 왜 싸웠대.”
“컁!”
“우리 노반이 더 멋진 어른이겠네. 그치?”
“컁!!”
노반은 반짝이는 눈을 빛내며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젠은 내 옆에 서서 가만히 노반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젠?”
“네.”
“…노반한테 뭐 묻었어? 아닌데…? 멀쩡하게 귀여운데….”
노반에게 무슨 문제 있냐는 내 물음에 젠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노반의 뒷덜미를 잡고 내게서 떨어트려 놨다.
“컁!!!”
노반은 놓으라는 듯 젠을 향해 컁 짖었지만, 나는 젠에게 끌려간 노반을 가만히 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어린애도 아니니 붙어 있지 마세요.”
젠의 표정은 변함없이 무표정이었지만, 노반을 보고 있는 눈빛은 차가웠다.
그런 젠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귀여워서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나는 가까스로 웃음을 참으며 그의 귓가에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오늘 밤부터 쭉 붙어 있자.”
그래, 오늘에야말로 먼지들이 지켜보든 말든 저지르자.
나는 젠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고, 젠은 아무 말 없이 나와 눈을 마주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우리는 비밀스러운 눈빛을 교환했다.
“컁!!!”
아직 젠에게 뒷덜미가 잡혀있는 노반이 자신을 내려달라고 짖었다.
그에 젠은 손을 놓아 노반을 던지는 대신 몸을 숙여 안전하게 땅으로 내려줬다.
“컁…?”
노반은 젠이 자신을 내팽개치는 줄 알고 안전하게 착지를 준비했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안전하게 내려놓는 바람에 크게 당황했고, 땅에서 어색하게 발을 굴렀다.
나도 놀랐는데 당사자인 노반은 얼마나 놀랐겠어.
“컁컁!!”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노반은 내게 달려와 앙증맞은 발로 젠을 가리키며 짖었다.
아마도 노반은 젠이 아픈 게 아닌지 걱정이 되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노반을 안아 들고는 노반의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아픈 게 아니라 기분이 좋아진 거 아닐까?….”
“츠!”
노반은 ‘가지가지 한다.’ 같은 한심한 눈으로 젠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그리곤 자신을 쓰다듬어 주는 내 손에 머리를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
젠은 그런 노반을 바라보며 ‘다시 던질까.’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이내 저택 밖에 시선을 두곤 나직하게 말했다.
“오는 것 같네요.”
젠의 말을 듣고 저택 밖으로 시선을 돌리니, 우람한 말 두 필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저게 뭐야. 저거 말 맞아?
“조금 뒤로 가야 할 것 같아요.”
젠은 우리 쪽으로 달려오는 말들을 바라보다 이곳은 위험하다며 내 어깨를 잡곤 뒤로 쭉 뺐다.
나와 노반은 젠이 이끄는 곳까지 물러나 저 흉폭해 보이는 말들을 잠시 기다렸다. 그러자 저택에 가까워진 말이 우렁찬 발돋움으로 높이 뛰어올라 방금까지 우리가 있었던 곳에 쿵! 소리가 나게 착지했다.
덕분에 조경 삼아 예쁘라고 깔아 놓은 돌바닥이 산산조각 났다.
말발굽으로 돌바닥을 부수는 게 가능한 거야?
저 발길질은 귀여운 아기 노반의 착지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잘못하면 죽었을 수도 있겠다.”
물론 우리가 아니라 저 말들이.
나 혼자였다면 저 흉흉한 발길질에 채여 머리가 쪼개졌겠지만, 젠과 함께 있었으니 쪼개질 건 내가 아니라 저 말들의 머리였을 거다.
젠은 말들이 죽지 않게 배려해 준 거구나… 참 다정하다.
“컁!”
그때, 노반의 컁! 소리와 함께 말의 안장 위에서 뿅! 하고 필릭스와 케이시의 모습이 나왔다.
어쩐지 말만 달려오고 모는 사람은 없어 신기했는데, 마법인지 물약인지를 사용해 자신의 몸을 줄였었나 보다.
“제가 먼저 들어왔어요!”
“그렇게 착각하고 싶다면 그러거라.”
“착각이 아니라 진짜 제가 이겼다니까요!”
필릭스와 케이시는 몸이 커지고 난 후에도 자신이 이겼다며 빡빡 우기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화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물론 그냥 기다리는 건 아니고, 젠과 함께 내기하며 기다렸다.
“돌바닥은 필릭스가 고쳐 줄 거 같아.”
“저는 케이시 경이 고쳐 줄 것 같아요.”
내기의 주제는 ‘누가 돌바닥을 고쳐 주는가.’였다.
나는 이곳에서 가장 최약체인 필릭스가 고쳐 줄 거라고 생각했지만, 젠은 케이시에게 걸었다.
“케이시가 필릭스보다 더 대단한 마법사인데. 케이시가 필릭스한테 시키지 않을까?”
“에반스터 경은 생각보다 섬세하지 못하니, 돌바닥이 무너진 것도 눈치채지 못할 것 같아요.”
아, 맞네. 이번 내기도 내가 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