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꽃잎의 약속 (5)
필릭스는 그런 놈이다.
자신의 흥미가 있는 것이라면 귀신같이 눈치채고 반응도 빠르지만, 흥미 이외라면 너무할 정도로 무심하다.
그래서 지아가 필릭스랑 잘되지 않았던 거였고.
나는 이미 졌다는 마음으로 필릭스와 케이시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아!”
“아.”
케이시와 맹렬하게 싸우고 있던 필릭스가 말 위에서 내려와, 산산조각 난 돌바닥 위에 복구 마법을 사용했다. 그리곤 다시 케이시와 말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몸을 줄인 걸 보고 따라 했잖아요!”
“몸을 줄여야 우리의 무게가 줄어들고, 공기의 저항이 적을수록 빨리 달릴 수 있는 건 상식이지. 그러는 너는 내가 말에 신체 능력 향상 마법을 쓴 걸 보고 따라 했지 않냐.”
“그건 당연한 마법이었잖아요!”
필릭스가 마법을 사용해 고쳤다. 저 필릭스가.
나는 신이 난 것을 최대한 감추며 젠을 바라봤다.
“필릭스가 고쳤어.”
“….”
“필릭스가 고쳤어…!”
나는 신이 나 방방 뛰고 싶은 걸 참았고, 젠은 필릭스의 얼굴을 보며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다시 나를 바라봤다.
“그러네요.”
내기에서 진 젠은 조금 아쉬워 보였지만, 이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소원을 말해 주세요.”
소원이라… 뭘 빌어야 잘 빌었다고 소문이 날까?
옛날에는 소원 같은 거 없이 심심풀이로 내기를 했지만, 요새는 소소하게 소원을 걸고 내기를 한다.
예를 들어 같이 산책 나가기, 마사지해 주기, 지칠 때까지 뽀뽀해 주기, 지칠 때까지 놀기, 팔베개해 주고 잠자기, 자신의 위에 올라와서 잠자기, 그리고 밥 다섯 숟갈 먹기, 영양제 먹기, 윗몸일으키기 한 번 하면 뽀뽀 여섯 번 하기까지 다양하다.
소원 내기의 시작은 내가 밥을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만 마시고 밥은 먹지 않아 걱정하기에 소원 내기가 나온 것이다.
최근에는 항상 젠이 이기는 바람에 내 소원을 말할 기회가 없었는데. 이렇게 된 이상 그동안 밀린 소원 다 합쳐서 멋진 소원을 말할 거다.
“속박.”
“….”
내 소원의 뜻을 단박에 알아차린 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리곤 잠시 하늘을 바라보다 한숨을 쉬었다.
“정말 그게 하고 싶으세요?”
“응. 속박!”
“….”
단호한 내 말과 눈빛에 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언제 할지는 제가 정해도 될까요?”
“응, 당연… 안 돼!”
그러다가 10년 후 20년 후에 하자고 그러면 어떡해.
젠은 절대 안 된다는 내 말에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자신의 눈이 보이게 머리를 쓸어넘기곤, 손을 올려 내 뺨을 감싸 부드럽게 쓸며 말했다.
“그럼 이번 달 안에 할 테니 날짜는 제가 정하게 해 주세요.”
순간 젠의 황금빛 눈동자를 바라보며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하지만 노반이 내 뺨을 감싼 젠의 팔을 꾹꾹 눌러 준 덕분에 정신을 잡을 수 있었다.
“이번 주!”
봐준다!
“… 네, 이번 주.”
젠은 작게 웃으며 내 이마 위로 입을 맞춰줬다.
젠이 내 이마에 뽀뽀를 해 줄 땐 4초 안에 입술을 떼고 내 눈을 마주 보는데, 오늘은 6초나 더 길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아마 기간을 더 늘릴 수 있었는데 실패해 아쉬워하고 있나 보다.
그래도 안 되지.
“약속이야.”
나는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그에 젠은 너털웃음으로 마주했다.
“이제 그만 인정하시라구요!!!”
아, 깜짝이야.
“쟤네 아직도 싸워?”
화가 잔뜩 난 필릭스의 모습에 나는 당황하며 물었고, 젠도 그들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쉽게 끝날 것 같진 않네요….”
“끄응….”
젠의 말대로 필릭스와 케이시의 사이는 그닥 좋아 보이지 않았다.
케이시가 범죄자였긴 해도, 필릭스를 포함한 마법인들의 입장에서는 존경할 만한 실력 있는 마법사다.
예의를 아는 놈이 저렇게까지 소리 지르는 걸 보면 확실히 뭔 일이 있긴 한가 보다.
우리가 언제까지 여기 서 있을 수도 없는 법이니 조금이라도 중재를 할까 싶어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젠은 아직 열이 식지 않은 말을 진정시키며 나를 보호했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싸워.”
내 질문에 대판 싸우고 있던 필릭스와 케이시가 돌아보며 말했다.
“누가 먼저 들어왔어?”
“누구의 말이 먼저 들어왔는지 봤니?”
아, 귀청 떨어질 뻔했네.
그들은 눈을 이글이글 빛내며 진지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나는 그들의 모습에 혀를 차며 말했다.
“내가 말하면 받아들일 순 있고?”
순순히 결과를 인정하고 승복할 거냐는 내 말에 필릭스와 케이시가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한숨을 푸욱 쉬곤, 노반의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왜 싸웠는데.”
내 물음에 필릭스와 케이시는 서로 말하려고 혈안이 되며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두 사람의 말을 잘 들어보니, 새로 지은 마탑의 전망 좋고 넓은 방을 차지하기 위해 한 달 내내 싸우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가위바위보로 결정하려 했지만, 앞으로의 편안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이 가위바위보로 순식간에 결정되는 게 싫다며 마탑에서 함께 일할 다른 마법사들에게 투표로 결정하기로 했단다.
하지만 필릭스와 케이시 한쪽을 고르면 다른 한쪽에게 미움을 받으니, 귀찮은 일에 연관되기 싫었던 마법사들은 다 같이 기권을 했다고 한다.
그 이후 사소한 싸움을 계속 이어나가다 오늘이 왔다는 것이다.
“유치하긴….”
“이게 뭐가 유치해! 일을 해도 좋은 환경에서 일을 해야 좋지!”
“이건 에반스터의 말에 동감해.”
그러니 마탑의 스위트룸은 절대 포기 못 한다며 핏대를 세웠다. 나는 그런 둘을 바라보며 물었다.
“마탑주는 누군데.”
내 질문에 두 사람 다 몸이 굳었다.
“그….”
“크흠…!”
뭐야. 설마 마탑주도 미루고 있어?
마법을 다루는 마법사라면 한 번쯤은 꿈꾸는 자리가 마탑주다.
차기 마탑주 후보였던 필릭스 에반스터, 그리고 현시대 가장 뛰어나다 할 수 있는 마법사인 케이시는 마탑주가 될 자격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필릭스는 자유롭게 지내고 싶고 책임을 지기 싫어해 마탑주의 자리엔 관심이 없고, 케이시는 한 번 해 본 자리라 마탑주가 얼마나 피곤하고 지치는 자리인지 알고 있다.
“마탑주가 그 방 쓰면 되겠네.”
둘 다 은근슬쩍 말하지 않고 넘겨 온 문제였는지, 내 말에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내며 그들을 향해 말했다.
“일단 들어가자. 곧 비가 올 거야.”
불의 정령은 쪼그라들며 정령계로 사라졌고, 바람의 정령은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물의 정령과 흙의 정령이 활발하게 움직였다.
비가 온다는 신호였다.
나는 필릭스와 케이시가 타고 온 말을 마구간에 데려다준 뒤, 저택 안으로 들어가 그들이 지낼 방을 안내해 줬다.
필릭스와 케이시가 자신들의 방으로 들어가고,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종이와 펜을 꺼냈다.
“뭐 하시려구요?”
거실 구석에서 마린에게 몸빼 바지를 영업하던 지아가 고개를 빼꼼 들어 물었다.
나는 종이에 적는 것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다 그녀의 여행 가방 안에 잔뜩 들어있는 몸빼 바지에 놀랐다. 그에 지아는 검은색과 핫핑크색 바지를 들이밀며 내게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라 했다.
“검은색.”
“탁월한 선택이에요! 이거 프리사이즈에 통풍도 잘돼서 습기도 잘 안 차요! 이건 황자님 애인분 거예요.”
커플 아이템이에요.
지아는 찡긋 윙크하며 검은색 몸빼 바지 두 개를 내게 건넸다. 하나는 젠의 것이라는데… 젠이 이런 걸 입을지 모르겠다.
잘 때 입히면 되겠지.
“고마워, 잘 입을게.”
“네! 근데 뭐 하고 계세요?”
“쟤네 계속 싸우길래, 빨리 해결하려고.”
연회할 때도 저 모양이면 여러 사람 불편하니까.
내 말에 지아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오는 동안 엄청 시끄러웠다고 말했다.
지아는 신분이 가장 높은 메이븐에게 저 둘을 진정시켜 달라고 부탁해 봤다 한다. 하지만 마법사들의 일에 잘못 끼었다간 지금보다 더 머리 아파진다고 메이븐이 방치하는 바람에, 지아만 케이시와 필릭스의 사이에서 얻어터졌다고 한다.
“제발 해결해 주세요. 가는 길도 그러면 저 욕할 거 같아요.”
몸빼 바지 3장 더 드릴게요.
지아는 내 팔을 부여잡으며 해결이 가능하다면 제발 해결해 달라며 간곡하게 부탁했다.
메이븐이야 세네카 황궁에서 일하니 마탑과 연관해서 할 일이 많다. 그래서 그 둘에게 밉보이면 좋지 않겠지만, 나야 연관된 것도 없고 두 사람과의 관계도 그럭저럭 좋은 편이라 아무 문제 없다.
아, 그리고 몸빼 바지는 필요 없다.
나는 짐 정리를 다 끝내고 나온 필릭스와 케이시에게 준비한 각서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내가 내밀은 각서를 본 필릭스와 케이시는 의아함을 내비쳤다.
나는 각서에 대해 알려줬다.
“각서야. 내가 마탑의 방이랑 마탑주까지 정해 줄 테니 동의한다고 여기 서명해.”
내 말에 필릭스와 케이시는 ‘그걸 미르 네가 왜 정해 주냐.’ 하고 펄펄 날뛰었다.
“두 사람 때문에 피해받는 사람이 많잖아, 어지간히 해야지. 얼른 서명해! 안 하면 내쫓을 줄 알아.”
나는 표정을 구긴 채 날카롭게 말했고, 둘은 정곡을 찔린 듯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내쫓는다는 내 말에 둘은 각서를 잘 읽어보지 않은 채 서명을 했다.
다 큰 어른이 계약서 무서운 줄 모르네.
“이 각서를 지키지 않으면 내 노예로 전락한다는 내용은 읽었지? 만일 결과를 받아들이기 싫다면 내 노예가 되면 돼.”
마탑주보다 노예가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
내 말에 둘은 찜찜한 표정을 지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각서를 꼼꼼히 읽지 않고 서명을 한 조심성 없는 어른 둘에게 바구니를 내밀었다.
“준비됐으면 뽑아. 아, 하나씩만 뽑아야 한다?”
필릭스와 케이시는 내가 내민 바구니를 바라보며 이게 무엇이냐 물었고, 나는 그들에게 설명하지 않은 채 일단 뽑으라고 바구니를 들이밀었다.
그들은 미심쩍어하면서도 바구니 안에 손을 넣어 잡히는 것을 뽑았다.
“다시…?”
“꽝?”
필릭스와 케이시는 자신이 뽑은 종이를 펴 그 안에 쓰인 것을 읽었다.
나는 그들의 종이를 회수하고 다시 바구니를 내밀어 뽑게 했다.
“마탑주라는 단어가 나올 때까지 뽑는 거야. 그리고 당연히 마탑주가 좋은 방 쓰는 거고.”
내 말에 케이시와 필릭스는 눈이 돌아 바구니 안에 손을 넣고 뽑기 종이를 뽑았다.
그리고 네 번째 뽑기 종이에서 뭔가가 나왔다.
“설거지?….”
그동안 꽝, 다시만 뽑다가 그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다른 단어가 나왔다.
“오늘 설거지 필릭스 네가 하는 거야.”
“이게 뭐야!”
“각서에 제대로 쓰여 있잖아. 자신이 뽑은 대로 잘 이행하겠다고.”
필릭스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다시 한번 각서를 했지만 각서에는 내가 말한 그대로 쓰여 있었다.
필릭스는 이럴 수는 없다며 설거지라는 단어가 적힌 종이를 바라보며 절규했고, 케이시는 그 모습을 웃으며 지켜봤다.
“자, 다시.”
나는 둘을 향해 바구니를 내밀었고, 그들은 다시 뽑기 종이를 뽑았다.
“마구간 청소…?’
“잡초 뽑기….”
슬슬 나오는구나.
“이 안에 몇 가지 잡일들이 있는데. 뽑으면 그 잡일을 해야 돼.”
내 말에 두 사람의 얼굴엔 먹구름이 가득 찼고, 나는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확인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 둘 중 한 명이 마탑주를 뽑을 때까지 다시 뽑아.”
그렇게 두 사람은 마탑주가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종이를 뽑았고.
“필릭스, 축하해. 좋은 방을 얻게 돼서 기쁘겠네.”
“…잡일 열여섯 개는 기쁘지 않아.”
케이시는 4개의 잡일을 하고, 필릭스는 16개의 잡일과 마탑주에 등극하는 것으로 뽑기는 끝이 났다.
운도 지지리 없네. 필릭스 넌 나중에 복권 같은 거 절대 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