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꽃잎의 약속 (6)
해가 저문 뒤에는 한나와 레이, 그리고 바네사가 찾아왔다.
한나는 안 그래도 되는데 너무 상냥하게도 오스먼드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편지 봉투도 붉은색이라 읽기 싫어서 구석에 던져 두려다, 혹시나 늦게라도 온다는 편지일까싶어 읽었다.
편지의 내용은 못 가서 미안하니, 늦게라도 보리언과 함께 선물을 보낸다는 이야기였다.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편지였다. 안 읽었으면 어쩔 뻔했어. 오스먼드의 얼굴 따위 보기 싫다.
덕분에 기분 좋게 셀비스가 준비해 준 맛있는 저녁을 먹은 뒤, 서로서로 소개도 해 주고 근황 이야기도 할 겸 거실에 모여 티 타임을 가졌다.
한나와 바네사, 지아, 그리고 마린은 첫 만남부터 쿵짝이 잘 맞아 이미 그들만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색할 것 같았던 레이가와 메이븐은 의외로 나쁘지 않은 조합이었다. 둘 다 몸으로 행동하기보단, 책상에 앉아 머리를 쓰는 타입이라 잘 맞는 것 같았다.
케이시는 자신 때문에 험한 꼴을 당한 드로이프에게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끼는지 노반을 지극정성으로 대했고, 노반도 그런 케이시의 마음을 받아들여 자신을 쓰다듬는 것을 허락했다.
덕분에 노반을 무릎에 올린 케이시는 셀비스와 함께 인생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미네르바의 영향인지 셀비스는 의외로 나이가 든 여성과 잘 맞는다.
그들이 점차 친해지는 모습에 내 입가엔 저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들이 하하호호 대화를 나눌 때마다 먼지들이 둥실둥실 떠다니며 신나 하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먼지들은 연회를 따로 하지 않아도 행복하다는 듯, 많은 인간들의 대화나 행동을 지켜보며 신기해했다.
“저리 좋을까….”
철수는 한 발자국 물러나 먼지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철수를 향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철수 너도 날 안 만났으면 저러고 있었을 거 아니야.”
“이 몸은…! 그랬을지도 모르지.”
철수는 자신은 저렇게 호들갑을 떨지 않을 거라 부정하고 싶었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니 별달리 할 말이 없었는지 순순히 인정했다.
“처음 나랑 만났을 때에도 빨리 계약하고 싶어 했으니까. 말 다 했지.”
철수는 신나게 대화하고 있는 한나를 아련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너한테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우린 거의 포기하고 있었거든. 다시는 중간계에 발을 못 붙일 것 같았어.”
하급, 중급, 상급 정도는 중간계의 균형을 맞춰야 해 돌아다닐 수 있지만, 정령왕은 정령사에게 소환되지 않는 한 움직이는 게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치만 나를 만나고 난 뒤, 중간계로 올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마음으로 말했다.
“앞으로 너네가 좀 더 알려지면 앞으로 정령사도 나오고 그러겠지.”
그러니까 나한테 집착 그만해.
내 말에 철수는 시원하게 웃고는 자신도 먼지 같은 모습으로 변한 뒤 셀비스의 곁에 모여 있는 정령들에게 갔다.
나는 내 옆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젠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저택엔 웃음소리가 가득 찼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말이다.
“내가 왜 이런 일을… 나도 초대받은 건데….”
“시중들기 뽑았잖아.”
필릭스는 보름달처럼 넓은 쟁반을 들고, 우리가 다 마신 찻잔을 수거해 갔다.
“쿠키도 가져와 줘.”
나는 주방으로 들어가려는 필릭스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그에 필릭스는 나를 돌아보며 짜증을 냈다.
“나 설거지도 해야 한다고!”
“시중들기 끝나면 해.”
“이씨…!”
케이시는 마구간 청소를 제외하면 부서진 물건 고치기, 책장 정리하기같이 마법 몇 번 쓰면 끝나는 일을 뽑았었지만, 필릭스는 시중들기, 설거지하기, 빨래 널기 등등 마법으로 하기 애매한 것들을 뽑는 바람에 점심때부터 쉬지 않고 일하는 중이다.
그래도 이젠 마탑주의 자리도 얻었고, 마탑에서 제일 좋은 방도 쓰게 됐으니 행복하겠지.
“행복하지?”
“장난쳐?!”
필릭스는 어느샌가 가져온 쿠키를 내 앞에 꽝! 내려놓고 다른 이들의 앞에도 쿠키를 내려놨다.
고놈 마탑주가 아니라 노예였어도 사랑받았을 텐데.
“쿠키만 먹으면 목 막히는데… 저, 사과주스를 가져다주실 수 있을까요…?”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사과주스를 마시고 싶다는 지아를 시작으로, 오렌지주스, 포도주스 등등 무수한 요청이 들어왔다. 그에 필릭스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이들의 주문사항을 외웠다.
그리고 그 꼴을 보고 있던 한나가 일어나 말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전 괜찮으니 앉아 계세요.”
필릭스는 자신을 도와주려는 한나에게 괜찮다며 사양했다. 하지만 한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필릭스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갔다.
보통 사람이 봤을 땐 뚜두룻두- 소리가 배경음으로 깔리며 하트하트 러브러브한 분위기가 풍길 거라 생각하지만, 내가 아는 한나는 다르다.
분명 차기 마탑주와 좋은 관계를 쌓으려는 거겠지.
“저희는 이만 들어가겠습니다. 연회는 내일 점심에 시작되니 늦지 않게 나와 주세요.”
나와 젠은 사람들에게 인사한 뒤 방으로 들어갔다.
실은 우리도 이야기를 나누다 조금 늦게 들어가려 했지만, 철수와 오랜 시간 함께 지냈던 한나의 곁에 있으면 먼지들도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고 하길래 먼지들을 냉큼 한나에게 떠밀었다.
오랜만에 방해꾼 없이 젠과 함께 밤을 보낼 수 있다.
* * *
곧 시작될 연회의 준비를 하고 있던 마린이 내게 물었다.
“표정이 왜 그러세요?”
“…끝까지 못 했어.”
“네?….”
내 대답에 잠시 당황한 듯한 마린은 나와 젠을 번갈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대단하시네요.”
동의한다.
그동안 못해서 발정 난 건 나뿐이었는지, 젠은 미뤄 둔 정사를 당장 치르려는 나를 어르고 다독여 줄 뿐이었다.
“사람이 많아서 안 된대… 다음에 하재….”
“방음이라면 확실히 잘되…어 있지 않나 보네요.”
“….”
마린은 잠시 내 눈치를 보다 음식을 들고 연회가 준비되어 있는 마당으로 나갔다.
마당에는 그새 도착한 크로스반 쌍둥이와 노반이 놀고 있었고, 잠시 들른다던 시아는 메이븐에게 잡혀 진지한 이야기를 하러 방으로 들어갔다.
어젯밤 시아의 이야기를 메이븐에게 하길 잘한 것 같다.
오늘 시아가 오지 않았어도, 메이븐은 시아를 찾아갔을 테니까.
보리언은 아주 이른 아침에 찾아왔는데, 보리언이 온 것을 눈치채고 마중 나간 젠에게 선물만 주고는 바로 돌아갔단다.
나는 안부 인사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거 아니냐며 빨리 가 버린 보리언에게 서운하다 했고, 젠은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으니 걱정 말라 답했다.
“미르 님, 이제 시작하면 좋을 것 같아요.”
준비를 끝낸 마린이 내게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나는 마린의 말을 듣고 마당을 둘러보았다.
배치해 놓은 테이블 위에 셀비스가 준비한 음식이 세팅되고, 어느샌가 메이븐과 시아도 나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자, 시작하겠습니다!”
연회를 시작한다는 말에, 크로스반 쌍둥이들과 이야기하던 노반이 마당에 자라있는 큰 벚나무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벚나무 위로 작은 손을 올려 힘을 불어넣었다.
노반의 힘이 벚나무 안으로 스며들어 가며, 아무것도 피어 있지 않았던 가지 끝에서 연한 분홍빛의 꽃봉오리가 텄다.
“아….”
하지만 그 뒤로 노반이 아무리 힘을 주어도 꽃봉오리가 피었을 뿐, 꽃이 피진 않았다. 그렇게 아쉬운 마음이 들던 그때,
“내가 도와줄게!”
한나의 곁에 있었던 노란 먼지가 자신 있게 외치며 벚나무를 향해 다가갔다.
노란 먼지가 벚나무 주위를 빙글빙글 돌자, 틔워진 꽃봉오리가 만개하며 예쁜 벚꽃이 화사하게 피었다.
“이제 내 차례인가?”
하얀 먼지가 활짝 핀 꽃들 사이를 지나가자, 연한 꽃잎들이 떨어지며 춤을 췄다.
푸른 하늘 아래 햇살이 비추고, 우리는 벚나무 아래 꽃비를 맞았다.
다시 없을 장관이었다.
“와! 이번에 꽃구경 못 했었는데! 황자님, 너무 예뻐요. 감사합니다!”
크로스반 쌍둥이 중 동생인 클로에는 흩날리는 꽃잎 아래서 환한 미소를 지으며 연회에 불러 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클로에의 뒤를 이어 다른 이들도 멋진 장면을 보았다며 고마워했다.
사실 연회라기보다는 피크닉이다.
돗자리 대신 테이블이지만, 워낙에 건전해서 벚나무 아래서 샌드위치를 먹는 거나 다름이 없으니까.
“황자님, 이건 이름이 뭐예요?”
지아는 꽃잎이 흩날리든 말든,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샌드위치를 먹었다.
“몬테크리스토라고 해. 저건 에그샌드위치, 저거는 칠면조 샌드위치야. 브로콜리 크림소스를 써서 맛있어.”
“진짜 너무 맛있어요.”
한 손에는 몬테크리스토, 또 한 손에는 에그샌드위치를 들은 지아는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샌드위치를 와구와구 먹으며 그렁그렁 눈물지었다.
지아는 세네카 황궁에서 입맛을 혹사당하다, 우리 저택에만 오면 거지처럼 음식을 흡입한다.
그걸 또 뭐라 할 수 없는 게… 입에 맞지 않은 음식을 먹어야만 하는 고충은 나 또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너는 프레오나에서 시작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프레오나는 향신료를 듬뿍 뿌린 고기밖에 없으니까….
“아, 너 이건 안 돼.”
지아는 은근슬쩍 포도주를 가져와 마시려 했지만 내가 저지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그리곤 억울하다며 말했다.
“저도 여기선 성인이에요…!”
“나한텐 미성년자야. 주스 먹어. 저거도 직접 짠 거라 맛있어.”
나는 오늘 아침 시아가 가져온 과일로 짜낸 혼합 과일 주스를 지아에게 건넸다.
지아는 입술을 삐쭉 내밀었지만, 받은 주스를 한입 마셔보곤 맛있다며 좋아했다.
나는 음식에 빠져 있는 지아를 내버려 두고, 아직 벚나무를 바라보고 있는 노반에게 가까이 갔다.
“노반, 뭐 하고 있었어?”
“미르….”
“너무 예쁘게 폈다. 노반 덕분이야. 이렇게 멋지게 핀 건.”
나는 벚나무에 손을 올리곤 활짝 피어있는 꽃망울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벚나무는 꽃이 피지 않는 벚나무로, 여름과 가을에 나뭇잎은 피었어도, 꽃잎이 만개해야 했을 봄날엔 꽃봉오리조차 틔우지 못했다.
하지만 노반은 이 벚나무의 꽃을 틔우려 매일 자신의 반짝이를 뿌려 주고, 물도 주고, 노래도 불러 줬다. 그런 노반의 갖은 노력으로 벚나무가 드디어 꽃봉오리를 피워 낸 거다.
물론 정령왕들이 힘을 써 준 덕도 있지만, 노반의 정성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거다.
노반이 주먹을 꽉 쥔 채 말했다.
“약속했었잖아! 난 그 약속을 지킨 거야.”
“꽃놀이하자는 약속 말이지?”
“응…!”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그리고 노반을 만났을 때, 우리는 이 벚나무 아래서 꽃놀이를 즐기자고 약속했다.
“수고했어, 노반. 여러 의미로 정말 고마워.”
여행 도중 받아들이기에 힘겨운 일이 많았지만, 결국 우리는 주어진 모든 과업을 마치고 이곳에서 꽃놀이를 즐기고 있다.
“수고했어요. 노반.”
어느새 우리의 곁으로 젠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는 나를 따라 노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잘했다, 수고했다고 말해 줬다.
노반은 잠시 젠의 손길을 받다, 이내 손을 쳐내 치워 버리고 내게 안겨 눈을 흘겼다.
“하지 마!”
“하지 말까요?”
젠은 한쪽 입꼬리만 살짝 올린 채 노반을 향해 웃어 보였고, 노반은 젠의 반응이 짜증 난다는 듯 젠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노반의 주먹을 가뿐히 피한 젠은 내게 꽉 달라붙어 있는 노반에게 말했다.
“쌍둥이들이 노반을 찾고 있어요.”
“그래?….”
노반은 젠의 말을 미심쩍어하면서도 크로스반 쌍둥이들이 찾는다니 밝게 웃으며 쌍둥이들에게 다가갔다.
나는 노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젠에게 물었다.
“일부러 보낸 거야?”
내 물음에 젠은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내게 가까이 다가와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나는 젠의 온기를 느끼며 왁자지껄한 사람들을 돌아봤다. 다들 그동안 내게 도움을 많이 준 소중한 사람들이다.
“평화롭다. 이게 꿈일까 봐 무서워.”
눈 떠보면 병원이었다 같은… 그런 개꿈이라면 절대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 젠이 내 옆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은 죽음보다 무섭다.
나는 상상만 해도 끔찍한 생각에 몸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저었고, 젠은 그런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만져 보실래요?”
“응?”
무엇을 만지냐는 내 물음에, 젠은 무심히 내 손을 자신의 심장께로 가져다 댔다.
쿵쿵쿵.
“아.”
맨손으로 전해지는 그의 고동은 빨랐다.
젠의 심장은 나를 향해 빠르게 뛰고 있었다.
“느껴지세요?”
“응….”
“미르 님을 향해 잘 뛰고 있어요. 꿈이라면 이것도 느껴지지 않았을 거예요.”
그는 살풋 웃으며 나를 안심시켰다.
나는 그를 마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고, 그는 내 미소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사랑해요.”
아. 진짜 이렇게 훅 들어오는 거 반칙이다.
잠깐 숨이 멎은 듯했고, 이어 가슴이 벅차올랐다.
“당신을 사랑해요.”
젠은 다시 한번 내게 사랑을 속삭였다.
나는 대답 대신 그의 손을 잡고, 그의 손목에 입을 맞췄다.
연분홍 꽃잎이 우리를 감싸며 아름답게 휘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