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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황자는 지금 당장, 카르넬 아카데미로 가거라.”
‘4황자는 지금 당장 가거라’. 목적지는 다르지만 내게는 아주 익숙한 대사다.
나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며 상황을 파악했다.
그때와 같은 공간이었다. 화려한 빛을 뽐내는 보석, 값을 매길 수 없는 장식, 그리고 나를 둘러싼 사람들.
“….”
이런 우라질. 하필 보내 줘도….
* * *
며칠 전, 크로스반 외곽에서 낯익은 아저씨와 마주쳤다. 누군가 했더니 프레오나 수도의 중심가에서 마주쳤던 이상한 마법 상점의 주인이었다. 나와 젠에게 목걸이를 줬던 대마법사 아크레나의 제자 말이다.
왜 이곳에 왔냐는 내 질문에 마법사는 ‘어라, 그때 그 반인반마네!’라며 자기 나름대로 나를 반겨 줬고, 자신은 아주 옛날 묵혀 뒀던 물건을 가지러 왔다며 이곳에 왔다고 했다.
그래도 아는 얼굴이고 나와 젠의 사이에 도움도 됐었으니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저녁이라도 같이하자며 예의상 저택에 불렀었다. 그러니 냅다 알겠다며 와서는 담가 놓은 과일주며 냉장고에 있는 식량들을 다 거덜 내고 갔다.
그리고는 만족한 얼굴로 잘 먹고 잘 마시게 해 준 보답으로 작은 선물을 줬다.
“이게 뭐예요? 주전자인가…?”
“나는 가능성의 향로라고 불려.”
붉은색인지 자주색인지 정확한 색을 말할 수 없는 오묘한 색을 띠고 있는 이상한 모양의 주전자는 향로였나 보다.
오래된 유적의 유물처럼 몇천 년은 묵어 보이는 이 작은 향로는 시전자의 모든 가능성을 보여 주는 향로라고 설명했다.
“모든 가능성이요…?”
마법사는 의아해하는 나에게 알아듣지 못할 마법사들의 언어를 끼워 가며 향로에 대해 설명해 줬다.
설명이 조금 이상해서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똑똑하기 때문에 거의 완벽하게 이해했다.
한마디로….
“IF.”
“뭐?”
무슨 말을 한 거냐 묻는 마법사의 말에 나는 별말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고, 받은 향로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마법사의 장황한 설명에 따르면, 향로 안에 향을 피우면, 그동안 무의식에서 바랐던 일을 꿈꿀 수 있게 해 준단다. 거의 빙의 수준으로 겪을 수 있다던데, 이런 사기 같은 아이템이 왜 안 알려진 거지?
의문에 가득 찬 내 표정을 읽은 마법사는 알 것 같다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환상이란 그런 것이니까.”
“….”
“끝이 오면 신기루처럼 사라지지. 잡을 수 없는 행복은 고통일 뿐이야.”
알려지면 좋을 게 없어.
그 말을 하는 마법사의 표정은 나름 밝아 보였지만, 목소리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채였다.
저 사람에게 이 향로는 백일몽이었구나.
“나도 이제 벗어날 때가 된 것 같아.”
향로를 내게 건네는 마법사의 표정은 꽤나 후련해 보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현실도피를 끝내겠다는 다짐인 것 같았다.
선물이 아니라 처리하기 곤란한 쓰레기를 주는 거였네.
“잘 버려 드릴게요.”
난 향로를 들며 마법사를 향해 말했고, 마법사는 머쓱한 마음을 숨기려는지 저택이 울릴 정도로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호기심에 향로에 향을 피웠다.
* * *
그런데…
행복한 꿈을 꾸게 해 준다며, 즐거운 꿈을 보게 해 준다며.
“4황자는 지금 당장, 카르넬 아카데미로 가거라.”
이런 거지 같은 상황을 두 번씩이나 겪게 하다니.
“4황자는 대답해라.”
나는 속으로 별의별 욕을 지껄이며 담담히 말했다.
“예… 따르겠습니다.”
첫 번째 빙의 때는 적국으로 끌려갔고, 두 번째 빙의는 학교다. 이런 거지 같은 경우가 있나.
다행이라면 이미 한 번 겪어 본 거라 생각만큼 당황하지 않았고, 이번 빙의는 내가 원할 때 끝을 낼 수 있다는 거다.
죽으면 끝이다.
죽임을 당하든 자살을 하든 이곳에서 죽어 버리면 향로의 힘에서 벗어나고 현실로 돌아갈 수 있다.
원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깨어날 수 있지만, 이왕 써 보는 거 어디까지 갈 수 있나 보고 싶긴 하다.
아. 저 반갑지 않은 얼굴 앞에서 혀 깨물고 죽어 버리면, 그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폐하.”
나는 고개를 들어 반갑지 않은 이의 얼굴을 보았다. 마음 같아선 저 얼굴에 주먹 한 방 꽂아 넣고 싶은데, 그랬다간 아카데미가 아니라 지하 감옥으로 끌려갈 테니 참아야 한다.
내 부름에 라이언 황제는 눈썹을 들어 올리며 말해 보라 했고, 나는 당당하면서 뻔뻔하게 말했다.
“세네카 제국을 벗어나 아카데미로 가게 되면 다른 제국, 왕국과의 왕래가 깊어질 겁니다. 그들에게 세네카의 위용을 보여 줄 수 있도록 아낌없는 지원을 요청합니다.”
“….”
내 말에, 라이언 황제의 여상한 얼굴 위로 잠시 당혹스러움이 비쳤다.
쓸모없는 4황자를 눈앞에서 치워 버리려고 아카데미로 보내는데, 도리어 지원을 바란다니 얼토당토않은 소리였다.
나는 침묵하고 있는 황제를 향해 진지하다는 뜻으로 뜨거운 눈빛을 보냈고, 황제는 내 얼굴을 바라보다 시선을 피하곤 뒤에 서 있는 신하에게 손짓했다.
지가 생각해도 나를 지원해 주는 게 세네카 평판에 좋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사실 아카데미가 어디인지, 뭐 하는 곳인지 모른다. 하지만 판타지 속에 나오는 웬만한 아카데미와 비슷하지 않을까. 여러 제국과 왕국에서 전도유망한 자제들이 거쳐야 하는 발판 정도?
“감사합니다.”
나는 살긋 웃으며 황제를 향해 인사했고, 황제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내게 나가라 손짓했다.
황제는 짐을 덜어내려다 도리어 짐을 얻은 듯, 아주아주 언짢아 보였다.
나는 아주아주 만족이다, 이놈아.
상쾌한 기분으로 응접실에서 벗어난 뒤, 발걸음을 가볍게 옮겨 4황자의 궁에 있을 마린을 찾았다.
첫 번째 빙의 때는 전부 얼떨떨해서 주위도 둘러보지 못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다르다.
어떻게 끝내야 하는지도 알고, 눈치 볼 것도 밑질 것도 없으니 아주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다닐수있다.
회사원들이 이런 기분으로 사직서 하나 품고 출근하는 건가?
* * *
“마린은 어디 있어?”
4황자 궁을 돌아다니던 시종에게 마린의 행방을 물었다. 그에 시종은 잠시 놀란 듯 멈칫하다 내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말했다.
“마린이라는 이름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생김새를 알려 주시면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마린이 없다고? …아, 이런 식으로 현실과 다를 수도 있구나.
“아니야. 짐 좀 챙겨 줄래? 당장 카르넬 아카데미로 가야 하거든.”
시종은 화들짝 놀라며 알겠다고 떠났고, 나는 내 방으로 올라갔다.
젠장, 마린이 없다니. 나는 무슨 재미로 아카데미에 가지?
나는 울적해진 기분으로 돈이 될법한 물건들을 아공간 주머니 안에 쑤셔 넣었다.
아공간 주머니가 나한테 있다는 뜻은, 케이시가 세네카에 있다는 뜻이다. 근데 왜 마린은 없을까?….
향로는 내 무의식을 바탕으로 이 세계를 만든다고 들었는데, 그럼 마린이 내 옆에 있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불량 향로인가…
“황자님, 준비가 끝났습니다.”
이 엉터리 향로의 꿈에서 일어날까 말까 하는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익숙하지 않은 얼굴의 중후한 시종 한 명이 준비가 끝났다며 나를 불렀다.
그 시종을 따라 궁 밖으로 나가자, 눈앞에는 웬만큼 중요한 일이 아니고선 잘 내주지 않는다는 세네카 황궁의 최고급 마차가 서 있었다.
“허.”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이건 너무 현실성이 없다. 라이언 황제가 이 마차를 내줬다고? 제국의 문양까지 아주 큼지막하게 박혀 있는 이 마차를? 나한테?
나는 마차를 한번 바라본 뒤, 얼떨떨한 표정으로 시종을 바라봤다. 그에 시종은 인자하게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제가 폐하께 부탁드렸습니다. 먼 길을 떠나실 때 이 마차만큼 편한 게 없습니다.”
이 시종이 직접 부탁했다고?
라이언 황제를 모시는 시종인데,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라… 정말 현실성 없다.
아무튼 간 이 마차를 타고 갈 수 있다면 엄청난 이득이다.
마차 안에 침대가 있으니 지칠 때가 아니라면 굳이 마을을 들러 여관을 가지 않아도 되고, 그저 하루 종일 마차 안에서 쉬고 있으면 된다.
좋네.
“정말 고마워.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아.”
“아닙니다. 이 정도밖에 해 드릴 수 없는 게 죄송스럽습니다.”
표정을 굳히는 시종을 향해 살긋 웃어 주었고, 시종은 마차의 문을 열어 내가 들어갈 수 있게 에스코트를 해줬다.
나는 마차 안으로 들어가 두툼한 방석이 깔린 소파에 앉았다. 곧 이럇! 하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출발했다.
* * *
“젠장.”
마차 밖으로 나가지 못한 지 어언 보름이 지났다.
나는 밖에 나가지 않고도 집에서 몇 날 며칠을 박혀 있을 수 있는 순혈 집돌이가 맞지만, 마차에서 몇 날 며칠을 지낼 수 있는 마차돌이는 아니다.
세네카에서 프레오나 제국으로 갈 때도 이렇게는 힘들지 않았는데. 카르넬 아카데미는 세네카 제국과 정 반대편에 있는지 도착할 생각을 안 한다.
이제 한계다.
마부에게 부담 주지 않으려고 했는데, 언제 도착하냐 물어보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다.
나는 창문을 열어 마부를 불렀다. 그에 마부가 내 신호를 받고 뒤를 돌아보는 순간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으악!”
덕분에 마차는 급정거를 했고, 나는 앞으로 쏠리는 마차 속에서 벽을 짚고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눈앞에는 보석으로 꾸며진 세네카 문양의 장식이 있었다.
어휴, 여기에 얼굴 박았으면 코 깨질 뻔했네.
“죄, 죄송합니다, 황자님!! 다치신 곳은 없으신가요!!”
마부는 내게 달려와 고개를 숙이며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확인했다. 나는 그런 마부에게 손을 휘저으며 멀쩡하다 말했고, 마차가 멈춘 틈을 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헉!!!”
이럴 수가. 밖으로 나온 나는 두 가지 이유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