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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의 본분을 다할 수 있는 책상과 의자, 그리고 수업에 필요한 교과서와 참고서가 책장을 가득 채워져 있었고, 세 명은 충분히 잘 수 있을 것 같은 넓은 침대에 한쪽 벽면 전체가 옷장과 수납장으로 되어있었다. 개인 화장실과 욕실도 있고, 반려동물을 위한 공간도 마련되어있다.
역시 이름있는 아카데미라 그런가 시설이 참 좋다. 아마 밥도 맛있겠지?
나는 품 안에 있는 노반을 침대 위로 내려놓고 다시 한번 셀비스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바쁠 텐데 시간 내 줘서 고맙네. 덕분에 도움이 많이 됐어.”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혹시라도 곤란하신 게 있다면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고맙네.”
셀비스는 예의가 가득 담긴 얼굴로 미소를 짓고는 푹 쉬라며 문을 닫아 주고 나갔다.
나는 셀비스가 사라지자 바로 옷장 문을 열어 세네카에서 어떤 짐들이 왔나 살폈다.
다행히도 세네카의 위상을 위해서 신경 써 준다는 라이언 황제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는지, 하나같이 전부 깨끗하고 좋은 품질의 옷과 교복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다행이네.”
혹시라도 옷이라고 할 수 없는 거적때기가 있을까 봐 조금 쫄았다.
기본적인 물품이 구비되어있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샤워가 하고 싶었다. 마법으로 항시 몸을 깨끗하게 하고 있었지만, 역시 직접 씻는 것과는 느낌이 다르다.
나는 재빠르게 욕실로 들어가 몸을 씻고 나왔다. 마음 같아선 목욕까지 하고 싶지만 몸이 너무 고단해 목욕하다 잠이 들 것만 같았다.
현실이었다면 목욕을 하다 잠이 들어도 젠이 해결해 줬을 텐데….
당장은 만날 수 없으니 의식하지 않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다. 현실의 젠이 너무 보고 싶다. 하다못해 향로의 젠이라도 못 만나나?
여기서 만날 수 있을까? 만날 수 있겠지. 아무리 무의식이 만들어낸 세계라고 해도 내가 세네카의 4황자인 것처럼 젠은 이프리트 가문의 자제고, 이곳은 그런 사람들이 오는 곳이다.
내일부터는 아카데미로 가서 젠을 찾아봐야겠다. 없으면 바로 이 꿈에서 깰 거다. 체감상 한 달을 못 본 기분이다. 이렇게는 못 살아.
“노반…?”
하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며 밖으로 나가자, 침대에 곤히 자고 있어야 할 하얀 털 뭉치가 보이지 않았다.
침대 밑과 옷장, 책상 아래 등등 노반이 들어갈 법한 곳은 전부 찾아봤지만 실오라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창문도 안쪽에서 닫혀 있어 창문으로 나가지는 못했을 거다. 설마 얘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을 리는 없고…
아니지, 우리 노반은 영리한 아이라 문을 열고 나갔을 수도 있다.
나는 식겁한 마음에 입고 있던 가운을 벗어 던지고 가벼운 옷을 입은 뒤 곧바로 문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컁!”
“….”
방문 앞에서 쪼그려 앉아 등을 보인 검은 인영과, 그 사이사이 하얀 털 뭉치가 보였다.
내 존재를 감지한 검은 인영이 고개를 돌렸다.
너무나도 익숙한 그의 금빛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심장이 기분 좋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여기 있었구나.
젠이다.
칠흑 같은 머리카락과 대조되는 진한 금빛 눈동자. 누가 뭐라 해도 젠이다.
특이사항이 있다면 고등학생 나이대로 보이는 젠이라는 거다. 내 앞에 있는 젠은 내 키를 훌쩍 넘는 큰 키를 가졌지만 내가 아는 현실의 젠보다는 조금 작은 듯했고, 아직 얼굴에 앳됨이 가시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젠에겐 오늘이 첫 만남이겠구나.
현실에서는 세상 모든 악을 긁어모은 듯한 악연으로 시작했지만, 이곳에선 그러지 않아도 된다.
그저 평범하게 아는 사람으로 시작할 수 있다.
향로가 만들어낸 허구의 세계지만 젠과 새로운 시작을 해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두근거렸다.
나는 그런 마음을 최대한 숨긴 채, 내게 별 관심 없어 보이는 젠에게 인사를 했다.
“아, 안녕하세요.”
긴장했는지 목소리가 떨렸다.
“….”
내 목소리를 들은 젠은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침묵하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별 볼 일 없다는 듯 그는 다시 노반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나를 무시했다.
어라…?
“안녕.”
나는 다시 한번 젠을 향해 인사했지만, 여전히 젠은 내게 아무런 반응도 보여 주지 않았다. 오히려 현실에선 관심 없었던 노반이 귀엽다는 듯 노반의 등을 살살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이건 의도적으로 나를 무시하는 게 틀림없다.
아니, 인사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거 아니야?…
난생처음 만난 사람이 인사하면 ‘안녕하세요’라고 반응해 주는 게 보통 아닌가? 게다가 나는 누가 봐도 예쁘고, 고급지게 생겼고, 지금은 나이도 어려서 귀엽기까지 하는데….
젠이 원래 이렇게 싸가지가 없는 캐릭터였나?
나는 조금 심통이 난 상태로 젠을 향해 말했다.
“그 여우를 돌려줄래?”
“위험해요.”
노반을 돌려달라는 내 말에 젠은 ‘위험하다.’며 짧게 대답했다.
노반이 내게 위험하다는 걸까, 아님 내가 노반에게 위험하다는 걸까.
“뭐가 위험한데?”
뭐가 위험하냐는 내 물음에, 젠은 쓰다듬어 주던 노반의 목덜미를 잡아 올리며 말했다.
“보통 여우가 아니니까요.”
그리곤 나를 바라보며 이어 말했다.
“당신도 보통 인간이 아닌 것 같고요.”
그리 말하는 젠에 눈빛엔 많은 감정들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신기하기도 하고, 경계가 되기도 하고.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골머리를 앓는 복합적인 눈빛이었다.
젠은 이번에도 영혼의 색이 보이는구나.
우선 친해지려면 자기소개를 해야 하는데, 나는 내 이야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사실은 현실에서 살다가 악마와 계약 이 세계로 왔고, 이 세계에서 살다가 향로라는 희한한 물건을 얻게 됐는데 그 안으로 들어온 거라 너네들은 전부 허구다. 라고 말하기엔 너무 길고 장황하다.
그냥 거짓말할까?
“눈치가 빠르네.”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젠에게 말했다. 그에 젠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무슨 뜻인지 설명하라는 듯 보챘다.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네 말대로 나는 보통 인간이 아니야.”
보통 사람이었으면 무슨 개소리를 하고 있냐 다그칠 만도 하지만, 젠은 짚이는 게 있는지 가만히 내 눈을 바라봤다.
나는 젠의 손에서 노반을 꺼내곤 품에 안아 올렸다.
“이 여우는 드로이프라는 종족이야. 마물이랑은 달라. 음… 따지자면 드래곤이랑 비슷하겠다.”
“드래곤…?”
“그리고 나는 천사.”
내 말을 들은 젠의 눈이 동그래졌다.
나는 하하 웃으며 놀라 있는 젠에게 밀어붙였다.
“천사는 처음 보지? 아, 조금 거리감은 느껴질 수 있어. 완벽한 천사는 아니거든.”
인간의 몸을 빌렸어.
나는 거짓 하나 없는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물론 거짓말이지만.
“몇천 년 마다 한 번씩 중간계로 내려오는 문이 열려. 원래는 열렸다고 막 들어가면 안 되는데 어쩌다가 빠져 버렸지 뭐야.”
“….”
“덕분에 인간으로 태어나게 됐어.”
“….”
“그치만 천사인 내 영혼을 감당하기엔 인간의 몸은 너무 약해서 오래 살지 못해. 아마 지금도 간당간당할걸? ”
“….”
“아! 걱정은 하지 마. 태어나자마자 인간처럼 살아서 그냥 인간이랑 다를 게 없어. 위험한 거 하나도 없어.”
그에 젠은 내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구별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근데 뭐… 안 믿으면 어쩔 거야? 내가 인간인지 천사인지 해부해서 까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안 그래?
티 없는 내 얼굴에 젠은 생각하길 포기한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나와 노반을 지나쳐 이 자리를 뜨려 했다.
어떻게 만난 젠인데, 이렇게 보내선 안 된다.
방이 어디인지만이라도 알자!
“곧 수명 다해 떠날 것 같은데 그때까지 신세 좀 지자. 잘 부탁해.”
“….”
“나는 미르라고 불러 줘! 너는 이름이 뭐야?”
“….”
“저기, 대답도 안 해 주려고? 우리 앞으로 좀 많이 볼 것 같은데 통성명은 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젠의 빠른 걸음을 겨우 따라가며 그에게 말을 붙였다. 하지만 젠은 나와 엮이기 귀찮은 건지 꿋꿋하게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리고 내 방이 있는 복도에서, 내 방과 가장 멀리 떨어진 방으로 들어갔다.
여기가 젠의 방이구나!
“내일 보자!”
나는 젠의 방문 앞에서 내일 보자며 인사를 한 뒤, 내 방으로 돌아갔다.
내일부터는 젠만 졸졸 따라다녀야겠다. 수업이고 뭐고 그런 거 듣지 않아도 된다.
이곳에서의 젠이 어떤 생활을 하는지 보고 싶기도 하고, 조금 소름 끼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현실보다 훨씬 어린 젠을 계속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평온해질 것 같다.
그리고….
“얘는 도대체 몇 시에 나가는 거야?”
매일 아침 7시가 되기 전, 젠의 방문 앞에서 기다렸지만 젠은 무슨, 그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보지 못했다.
무려 한국인인 내가 아침밥도 거르고 찾아가는 건데, 아예 나가 있는 건지 뭔지 매일 아침 젠의 방 안에는 개미 울음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덕분에 일주일 내내 퇴짜맞고, 열심히 수업을 듣고 있는 상태다.
“이 부분은 시험에 나올 겁니다. 잘 외워 두세요.”
시험에 나올 거니 잘 외워 두라는 말은 어느 학교에나 있는 말인가보다.
나는 궁금하지도 않은 공식들이 마구 적혀 있는 칠판에서 시선을 뗐다.
언제까지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 회의감이 들었다.
현실로 돌아가면 마린이 해 준 디져트도 먹을 수 있고, 무뚝뚝한 학생화장이랑은 전혀 다른 셀비스가 해 주는 맛있는 음식도 먹을 수 있고, 인간으로 변할 수 있는 우리 노반이랑 대화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아침마다 젠을 볼 수 있다. 지금처럼 내가 찾아다니지 않아도 눈만 뜨면 볼 수 있다.
망할.
그냥 바로 가 버릴까. 재미없는데… 라고 생각할 때.
“대, 대피!!!”
귀가 떨어질 것 같은 사이렌 소리와 함께, 수업을 가르치던 교수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선 대피 명령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