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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을 듣고 있던 학생들은 방어막을 치는 교수를 따라 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셀비스에게서 여분으로 얻어낸 기숙사로 가는 스크롤을 찢었다.
우리 노반부터 챙겨야 돼.
나는 죽어도 노반은 지킨다.
스크롤 덕분에 빠르게 기숙사에 도착했고, 나는 방으로 들어가 사이렌 소리에 혼란스러워하는 노반을 안아 올렸다.
“괜찮아.”
나는 긴장으로 곤두선 노반의 털을 쓰다듬으며 괜찮을 거라 다독였다.
필요한 건 전부 아공간 주머니에 있으니 따로 챙길 건 없었다. 아, 우리 노반 애착 담요는 챙겨야지.
무인도에 떨어져도 문제없을 정도로 단단히 챙긴 다음 방 밖으로 나가자, 저 멀리서 그간 모습을 찾을 수 없었던 젠의 모습이 보였다.
“제… 아니, 야!!!”
이름을 부르려 했지만, 이쪽의 젠과는 아직 통성명이 되어 있지 않아 냅다 야! 라고 불렀다.
그러자 나를 향해 몸을 돌린 젠은 나를 향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나를 향해 빠르게 달려왔다.
“왜, 여기…!”
“왜긴 왜야. 노반 챙기려… 뭐야, 저거.”
복도에 붙어있는 창문 너머로, 무시무시한 눈깔을 가진 거대한 존재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게 뭐람…?
“드래곤의 망령이에요.”
“망령?”
드래곤이면 드래곤이지 망령은 또 뭐야?
나는 드래곤의 망령이라는 것을 빤히 바라봤고, 곧 그게 평범한 생명체와는 달리 몸체가 희미하단 걸 깨달았다.
“망령이어도 드래곤의 힘을 가지고 있어요. 조심해야 해요.”
젠은 잠시 실례한다는 말을 하곤 내 어깨를 잡아 기숙사 밖으로 이끌었다.
“시선이 마주쳤으니 당신을 따라올 거예요.”
어라라… 그 말은 내가 좀 위험할 거라는 뜻인가?
“저거 못 없애?”
“천사라면서 아는 게 없으시네요.”
젠은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고, 나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말했다.
“…중간계랑 천계는 세계 자체가 다른 곳이라 정보가 많이 없어. 난 망령도 오늘 처음 봤다고. 그래서 저거 못 죽여?”
드래곤의 망령을 처리할 수 없냐는 내 물음에 젠은 고개를 저으며 거의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망령이라 물리적인 힘으로는 죽일 수 없으니, 망령이 힘을 잃고 사라지길 기다려야한다고 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하는데?”
“오래는 안걸릴거에요.”
길면 한달, 짧으면 오늘 저녁에라도 사라질 수 있단다.
“그럼 그때까지 도망 다녀야 하는 거야?”
아주 천천히지만 드래곤의 망령은 우리를 향해 몸을 움직였다. 나는 그런 드래곤을 바라보며 젠에게 물었고, 당연한 거 아니냐는 뜻인지 젠은 내 말에 대꾸도 해 주지 않았다.
은근 차갑다니까. 그래도 같이 도망가주려 하는지 내 어깨를 꽉 잡은 그의 손이 든든했다.
아무튼 이렇게라도 젠의 얼굴을 봐서 좋다. 상사병에 걸리기 직전이었단 말이야.
“넌 이름이 뭐야?”
나는 얼른 젠의 이름을 부르고싶었다. 하지만 젠은 알려주고싶지 않은지 내 질문을 무시하며 제 갈 길을 걸었다.
하지만 나는 끈질기게 젠의 이름을 물었고, 젠은 손을 들어 올리며 자신의 이름을 말해 줬다.
“젠 이프리트입니다.”
“젠이구나.”
“이프리트라고 불러 주세요.”
“젠, 예쁜 이름이네.”
젠은 내게 거리 유지를 하자며 가문의 이름으로 불러달라 했지만 어림없다. 젠은 젠이다.
“근데 우리 어디로 가?”
“카르넬 숲이요.”
“카르넬 숲?”
망령이니만큼 깨끗한 기운이 있는 숲이랑은 맞지 않는다며, 도망갈 거면 숲으로 가야 한다며 못을 박았다.
난 어디든 젠이랑 가면 좋아.
“힘들지도 몰라요.”
젠은 황궁에서 곱게 자란 황자님에게는 많이 힘들지도 모른다며 내게 경고했다.
나는 그런 젠을 바라보며 살긋 웃었다.
“괜찮아. 곱게 자라진 않았거든. 그리고 난 천사잖아.”
“아, 그랬었죠.”
“그나저나 내가 황자인 건 어떻게 알았어?”
내가 세네카의 황자라는 소문이야 아카데미에 공연하게 났지만, 다른 사람은 다 알아도 젠은 모를 것 같았다.
워낙 세상일에 관심이 없어 보이기도 하고, 처음 기숙사에서 만난 날을 제외하고선 아카데미 안에선 스치듯 만난 적도 없다.
“워낙 시끄러워야 말이죠.”
젠은 그렇게 말하며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이곳에서 처음 보는 그의 미소였다.
“시끄러워?”
젠은 내 소식이 워낙 시끄러워서 아카데미에 관심이 없는 자기도 알 정도였다고 말했다.
뭐가 시끄러웠지?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심지어 친구도 없다. 신분 때문인지 먼저 다가와 주는 사람도 없었고, 내가 먼저 다가가기엔 새로운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게 매우 귀찮았다.
나름 조용히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여러 방면에서 두각을 드러내셨다고 들었어요.”
“아.”
그런 거라면 이해가 간다.
처음 수업에 들어갔을 때, 내 수준을 알아보기 위해 봤던 시험이 있다.
웬만한 교과목은 4황자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걸로도 충분했고, 마법은 전문분야고, 검술은 조금 많이 부족하지만 현실의 젠에게 배운 몇 가지로 대처가 가능했다.
생각보다 높은 성적에 교수들이 많이 놀라긴 했다만, 학생들까지 알고 있을지는 몰랐다.
아니, 성적 같은 건 비밀유지 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시원하게 말아먹었으면 어쩔뻔했어. 라이언 황제의 귀에 들어갔다면, 세네카의 수치라며 암살 시도를 당했을지도 모른다.
“그게 너한테까지 소문이 갔구나…”
“네, 저한테까지 왔네요.”
우리는 아카데미와 조금 떨어진 뒤쪽에 위치한 카르넬 숲 입구로 들어갔다.
카르넬 숲은 햇볕이 따스하게 스며드는 기분 좋은 숲이었다.
요새 보았던 숲이라고는 전부 우중충해서 마물이 여기저기 튀어나올 것 같은 곳이었다. 그래서 카르넬 숲도 마찬가지라 생각했지만 이곳은 달랐다.
“되게 예쁜 곳이다.”
“카르넬 숲 깊은 곳엔 엘프가 살고 있다는 소문이 있어요.”
“엘프?”
기회가 된다면 엘프도 한번 보고 싶다. 웬만한 마물, 악마, 드워프, 망령이지만 드래곤도 봤다. 하지만 엘프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궁금한데.
진짜 판타지에서 나온 것처럼 귀도 뾰족하고 예쁠까?
“넌 엘프를 본 적 있어?”
“네.”
엘프를 본 적 있냐는 내 물음에 젠은 본 적이 있다 말하며, 우리 앞을 막고 있는 풀을 헤쳐서 편하게 갈 수 있는 길을 만들었다.
“어땠어? 진짜 귀도 뾰족하고 예뻐?”
엘프는 어떻게 생겼냐는 내 질문에 젠은 잠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조금 어색한 침묵 속에서 그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랑 비슷해요.”
나는 젠의 말에 잠시 숨이 멈췄다. 젠은 그런 나를 잠시 바라보다 다시 앞으로 나갔고, 나는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보다 노반의 톡톡 치는 손길로 정신을 차리고 걸음을 옮겼다.
생각지도 못한 멘트로 훅 들어오는 게 내가 아는 젠과 비슷하다.
그래, 이 외모가 취향이 아닐 리 없지. 너도 젠인데.
“젠! 같이 가!”
나는 으스스한 망령 드래곤의 눈빛을 느끼며 젠의 뒤를 따랐다.
* * *
몇 주째, 망령이 사라질 생각을 안 한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만 보고 있다.
혹시 따로 바라는 게 있는 건가?
아니 뭐, 덕분에 젠이랑 오순도순 지내고 있긴 하다.
아무것도 할 게 없는 숲이라고 해도 젠과 노반과 함께라서인지 지루할 틈 없이 놀고 있다. 오히려 하루가 부족할 정도다.
“꽃차야. 마셔.”
“고마워요.”
아공간 주머니 속엔 별별 것들이 들어 있다. 사실 그냥 집 한 채를 들고 다니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젠도 아공간 주머니 덕분에 많이 편한지, 전보다 내게 더 살갑게 대해 주는 것 같았다.
이게 다 저 드래곤 망령 덕분이다. 아카데미에서 언제 젠이 나오나 오매불망 기다리는 것 보다, 이렇게 도망 나와서 하루 종일 붙어 있는 게 몇십 배는 더 이득이다.
고맙다, 드래곤아.
“컁!”
어느새 젠의 무릎 위에 앉아 있는 노반이 망령 드래곤을 향해 컁! 하고 짖었다.
처음에는 노반의 컁! 때문에 망령 드래곤이 화가나 브레스라도 뿜을까 노심초사했지만, 드래곤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은 채 노반을 빤히 바라보다 다시 나를 바라봤다.
이제는 하루에 한 번 하는 인사치레 같은 건지 노반이 아침에 일어나면 드래곤을 향한 컁! 기본이 되었다.
역시 귀여워.
“이젠 슬슬 물어봐 줘야 하나?”
나는 아공간 주머니 속에 있는 호박쿠키를 베어먹으며 젠에게 말했다.
“뭐를요?”
“왜 저러고 있는 건지? 화가 난 거라면 브레스부터 쏘고 보면 될 텐데 그건 또 아닌 거 같아서.”
내 말에 젠은 그것까진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애초에 말은 할 수 있나?”
“사념은 전할 수 있을 거예요.”
“음… 그럼 슬슬 물어봐 볼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 말을 뱉었고, 젠은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다 나직하게 물었다.
“그러고 싶으세요?”
응? 그러고 싶냐니?
나는 된다 안 된다라는 명확한 답을 듣고 싶지만, 오는 대답은 질문형 대답이었다.
“응…?”
“물어보고 싶으세요?”
무슨 뜻이냐는 내 말에 젠은 다시 한번 질문으로 답했다.
젠은 내 대답을 들을 때까지 물어볼 생각인지 끈기와 인내가 가득한 눈빛이었다.
나는 말을 더듬으며 젠에게 말했다.
“어… 응. 아무래도 그렇지?”
물어보고 싶다는 긍정적인 대답에 젠은 눈을 한두 번 깜박이곤 입을 열었다. 그 안에는 서운함이 가득 비쳤다.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으신가 보네요. 그렇다면 물어봐도 괜찮을 거예요.”
어라?… 이게 무슨…
젠은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 노반을 쓰다듬었다. 내 눈을 살짝 피한 채로.
내가 지금… 무슨 젠을 보고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