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1. 나보고 이걸 믿으라고?
“오른쪽에 오크 두 마리가 더 나타났다.”
“제기랄, 하필이면 우리 구역에 나타날 게 뭐야.”
“테릭, 잔말 말고 어서 막기나 해.”
“알았어. 간다고, 가!”
이곳은 아스리온 대륙의 한복판에 자리한 캄차크 산 외곽의 어느 이름 모를 능선이었다.
버려진 땅을 의미하는 캄차크 산은 3개 왕국에 걸쳐 있는 산으로, 오거 같은 포악한 몬스터는 거의 없지만 오크들의 천국이었다.
방금 테릭이라고 불린 금발 사내는 오른쪽에 나타난 오크 두 마리를 향해 다가갔다.
“이봐, 저놈 생각보다 꽤 하는데?”
“그러게. 늘 꼴찌만 하던 놈이라 무시했는데, 오늘 보니 의외로 한몫 단단히 하는데.”
“그래도 저 녀석이 아카데미에 입학할 때는 수석이었다고 하더니 가락은 있나 보지.”
“치~ 그래봐야 옛날 일이야.”
“자! 우리도 떠들지 말고 남은 오크들이나 처리하자고.”
“암! 만년 꼴찌 테릭이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우리도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테릭을 포함해 이곳에 있는 사람은 모두 7남 1녀로, 이들은 타라한 왕국에 있는 케인리히 왕립 아카데미의 4학년 학생이었다.
아울러 이들은 케인리히 왕립 아카데미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는 3개월간의 현장실습에 막 나선 상태였다.
현장실습이란 졸업을 앞둔 아카데미의 4학년 학생 중 기사부와 마법사부의 학생들이 8명씩 조를 이뤄 캄차크 산의 오크를 토벌하는 야외 학습이었다.
다들 정신없이 오크들을 상대하고 있을 때, 오크 두 마리를 막 해치운 테릭은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동료들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낙제를 당할 순 없어!’
테릭은 아카데미를 떠나기 직전에 받았던 아버지의 편지를 떠올렸다.
왕국 북부의 자이스빌의 영주로 있는 테릭의 아버지, 군나르 자작은 아카데미를 제때 졸업하지 못하면 가문의 명부에서 테릭을 지우겠다고 했다.
사실 가문의 명부에서 지워지고 축출되는 건 별로 두렵지 않았다.
아버지가 말로는 그러시지만 하나뿐인 아들을 절대 버릴 수 없다는 사실은 테릭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 가문에서 올라오는 용돈이 끊기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직했다.
“테릭, 뭐해?”
“아! 아무것도 아냐.”
“거기 끝났으면 다른 동료를 도와줘야지.”
“알았어.”
“꼭 말을 해야겠어?”
“미안해. 잠시 숨을 골랐어.”
“얼마나 치열한 전투를 했다고 그새 숨을 골라?”
“지금 가.”
‘내참 더러워서, 졸업은 해야 하니 내가 참는다.’
테릭은 조장이랍시고 명령을 내리는 폴의 엉덩이를 걷어차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현장실습은 철저히 학생들만의 행사였다.
조장은 리더이기도 했지만 교수나 교관을 대신해서 현장실습에 참여한 조원들의 평점을 매기는 역할도 맡고 있었다.
그 말은 테릭이 졸업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3개월간은 조장인 폴의 비위를 잘 맞춰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그때 후미를 맡고 있던 아리아에게서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8명 중 홍일점인 아리아는 유일한 마법사였다.
“꺄아악~ 저쪽에 트롤 두 마리가 나타났어!”
“엥?”
“말도 안 돼!”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젠장, 여긴 오크만 나온다고 했는데.”
오크와 달리 트롤은 그 무지막지한 재생력 때문에 정식 기사들도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없는 몬스터였다.
하지만 이곳은 캄차크 산의 외곽으로, 오크의 개체 수는 많아도 트롤 같은 중대형 몬스터는 거의 나오지 않는 지역이었다.
아무래도 지금 나타난 트롤들은 무리에서 낙오되며 길을 잃은 것 같았다.
“당황하지 말고 남은 오크부터 처리해. 아리아는 트롤을 상대할 수 있는 마법부터 캐스팅하고.”
“응.”
“폴, 우리만으로 트롤 두 마리를 상대하기는 무리야. 아직은 거리가 충분하니까 물러나자.”
“조용해라, 테릭. 넌 무리일지 모르겠지만 나와 동료들은 가능해.”
“굳이 위험을 감수해 가면서 그럴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오크 토벌이잖아?”
“닥쳐! 넌 아니겠지만 우리는 자랑스러운 왕립 아카데미의 긍지 높은 학부생임을 잊지 마.”
“하지만 오늘이 현장실습 첫날인데 누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재수 없는 소리는 그만해.”
현장실습을 이수하기 위해 무조건 3개월은 캄차크 산에서 지내야만 한다.
그러나 만약 부상이라도 당해 중간에 캄차크 산을 빠져 나가면 낙제를 당하거나 극히 저조한 점수가 부여된다.
아카데미에서 가장 큰 학점이 걸려 있는 현장실습에서 나쁜 점수를 받게 된다면 졸업 석차에 지대한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특히 꼴찌를 도맡았던 테릭이 반드시 졸업하기 위해서는 이번 현장실습에서 최소한 B학점 이상의 점수를 획득해야 했다.
‘흐이그~ 저놈의 성질머리 하고는. 내가 참는다, 참아.’
테릭은 물불 안 가리고 덤벼드는 폴의 면상을 한 대 걷어차고 싶은 강한 욕망을 또 참아야 했다.
그리고는 지금 상황에서 트롤을 상대할 만한 방법을 재빨리 떠올렸다.
“알았어, 폴. 하지만 두 마리를 동시에 상대하기는 어려우니까 한 마리는 유인하는 게 어떨까?”
“유인을 하자고?”
“그래, 한 명이 시선을 끄는 사이 다른 일곱 명이 한 마리를 먼저 잡는 거야.”
“오! 좋은데. 그런데 유인은 누가 하지?”
“내가 할게.”
“네가?”
트롤을 유인한다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높은 평점을 받아야만 하는 테릭은 위험을 무릅쓰고 스스로 유인하겠다고 나섰다.
또 그 방법만이 두 마리나 되는 트롤을 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폴, 오크는 다 잡았는데 어떡하지?”
“다들 모여 봐! 아리아는 계속 마법을 캐스팅하고.”
* * *
“오! 그렇게 하면 잡을 수 있겠어.”
“대단한데, 폴.”
“역시 조장이야.”
조원들을 불러 모은 폴은, 테릭이 말한 의견을 마치 자신이 계획한 것처럼 떠들었다. 그러자 테릭은 기분이 상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잠시 후 조원들의 역할을 분담한 폴은 테릭의 등을 두들겼다.
“테릭, 유인 잘해라.”
“걱정 마.”
“테릭,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 쪽으로 오면 안 돼?”
“나만 믿으라니까.”
“먼저 출발해.”
“응.”
“테릭, 파이팅!”
폴과 다른 동료들의 격려를 받은 테릭은 갑옷의 두툼한 상판과 투구를 벗어던지고 바람처럼 앞으로 내달렸다.
그는 트롤과 직접적인 교전이 없다는 점을 감안해서 방어력은 떨어지더라도 민첩함과 속도를 높이는 걸 선택했다.
“이 못생긴 괴물아, 내가 상대해주마.”
“크아아악~~”
“크르르릉~~”
인간들을 발견하고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던 트롤은 테릭을 발견하곤 괴성을 질렀다.
테릭은 놈들의 괴성에 겁이 났지만 최대한 접근해서 몸을 흔들며 야유하다가 방향을 급격하게 틀었다.
두 마리 트롤은 인간이 자신들을 희롱했다는 걸 알고 더 큰 괴성을 지르며 쫓아오기 시작했다.
“폴, 지금 가니까 한 마리는 떼어줘.”
“알았으니까 오기나 해.”
“테릭, 조심해!”
“아리아, 어서 마법을 날려.”
“아… 알았어.”
트롤 한 마리를 떼어내는 일은 마법사인 아리아의 몫이었다.
긴장한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푸른빛 마나가 감도는 스태프를 치켜 올렸다.
“뇌… 뇌전의 기… 기운이여, 모… 든 것을 찌… 찢어발겨라. 라라… 라이트닝 애로우!”
지금 아리아가 시전하는 마법은 2서클 마스터면 사용 가능한 라이트닝 애로우라는 뇌전 계열의 마법이었다.
아리아가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마법 주문을 영창하자마자 허공에서 마나가 맹렬하게 뭉쳐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너무 긴장해서일까? 아리아가 날린 마법이 목표한 트롤의 옆을 살짝 비켜나서는 바로 뒤에서 테릭을 쫓던 트롤의 오른팔을 스치고 지나가며 테릭의 등을 강타했다.
파파팟-
“커헉!”
“크아아악~”
“헉!”
“아!”
라이트닝 애로우에 정통으로 맞은 테릭의 몸은 피를 뿜어내며 끈 떨어진 연처럼 훌쩍 날아가다가 바닥으로 처박혔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폴을 비롯한 다른 동료들이 당황할 때 트롤도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곤 바닥에 쓰러져 꼼짝도 못하는 테릭과 다른 일행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때 오른팔을 다친 트롤이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다른 트롤에게 뭐라고 중얼거렸다.
“#$%%^#@&(조낸 아프다.)”
“#$%^&@@(저것들부터 족칠까?)”
“&*&*@[email protected]@%^&(어차피 저놈은 죽었을 거야.)”
“$&! &*&^^&*#$(좋아! 저놈은 도시락이야.)”
의견일치를 본 트롤 두 마리는 방향을 바꿔 폴 일행이 있는 곳으로 엄청난 괴성을 지르며 달려왔다. 그 사이 쓰러진 테릭은 의식을 차린 것인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헉! 아리아, 다음 마법을 날려.”
“아! 어… 어떡해?”
“어서!”
“아직은 안 돼.”
“뭐라고? 젠장!”
분노한 트롤의 돌진은 저돌적이다 못해 엄청난 위압감까지 느껴졌다. 놈들은 아리아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곧장 달려왔다.
다급히 다음 마법을 준비하던 아리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마나 배열의 순서를 잘못하고 말았다.
“픽……!”
마법을 준비하던 아리아는 마나의 배열에 실패하자 크나큰 절망감에 빠졌다.
그때 광분한 트롤의 음성이 뇌리를 진동했다.
“크아아아악악~~~”
“헉! 나… 나 못하겠어.”
휘릭~
“아리아!”
“돌아와, 아리아!”
“헉! 어떡하지?”
“아! 몰라, 나도 갈래.”
“다들 튀자!”
잘못해서 테릭을 공격한 아리아는 죄책감에다가 마법까지 실패하자 공포감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가 버렸다.
그러자 그녀의 도망은 전염병처럼 다른 이들에게도 옮아갔다.
“야! 돌아와.”
“폴, 어서 피해.”
“야!”
혼자 남아 있던 폴도 결국은 일행을 따라 줄행랑을 쳤다.
트롤은 도망가는 일행을 계속해서 쫓았다.
쓰러진 테릭이 피범벅인 채로 일어난 것은 그로부터 얼마 후였다.
“끄응~”
겨우 정신을 차린 테릭은 주변에 트롤은 물론이고 동료들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 일단 이곳을 피해야 해.’
지금 당장은 트롤이 보이지 않지만 먹성 좋은 그놈들이 자기가 쓰러진 것을 목격한 이상 포기할 리 없었다.
그야말로 오직 살아야 한다는 의지만으로 테릭은 걸음을 옮겼지만, 그가 가는 방향은 동료들이 향한 곳과 반대쪽이었다.
“헉헉~ 저기 1조가 있다.”
“오! 살았다.”
“서둘러.”
한편 트롤들에게 쫓기던 폴과 다른 일행들은 한참 후 현장실습을 나온 1조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에 폴과 동료들은 살았다는 생각에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1조에는 아카데미 최고의 마법 천재와 검술 천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1조 조장의 힘찬 음성이 구원의 메시아처럼 들려왔다.
“폴, 레릭이 마법공격을 할 테니까 좌우로 흩어져.”
“야! 좌우로 흩어져.”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없는 힘도 생겨나는 법이다. 폴과 다른 일행들은 1조 조장의 목소리를 듣고는 재빨리 흩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1조에 속해 있는 마법사의 강력한 마법이 선두의 트롤을 가격했다.
레릭이라는 1조의 마법사는 벌써 4서클 비기너에 오른 마법천재로, 졸업 후 마탑으로 들어가기로 이미 결정이 난 상태였다.
“1조 돌격하라!”
“와아아아~”
“7조도 1조를 도와 공격하라!”
“아… 알았어.”
* * *
1조의 갑작스런 출현으로 7조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1조를 만나기 전 도망치는 과정에서 간헐적인 전투를 벌이다가 두 동료를 잃고 말았고, 아리아를 제외한 전부가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다.
“폴, 어떻게 된 일이야?”
“그게 실은…….”
“보이지 않는 조원들은 어떻게 된 거야?”
전투가 끝나자마자 1조 조장 스탠리가 폴에게 다가왔다.
아카데미 최고의 검술 천재인 스탠리는 벌써 소드익스퍼트 중급에 도달해 졸업 후 근위기사단의 입단이 확정된 상태였다.
그는 아리아를 마음속으로 무척 좋아했는데, 사실 1조가 7조 근처에 있었던 이유도 이번 현장실습을 통해 어떻게든 아리아와 친해지고 싶은 스탠리의 계산된 행동이었다.
“다, 나 때문이야.”
“아리아.”
“내가 마법을 잘못 날려서 테릭을 공격하는 바람에, 그리고 내가 도망만 치지 않았어도… 흑흑흑~”
폴과 스탠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아리아는 죄책감에 참았던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리아가 눈물과 함께 통곡을 터트리자 스탠리는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며 위로를 했다.
“괜찮아, 아리아.”
“아! 내가 제 몫만 해줬다면… 이제 나는 아카데미에서 제적을 당하겠지?”
실력이 부족한 것은 부지런히 수련해서 연마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겁에 질려 동료를 버리고, 그로 인해 동료들을 위험에 빠지게 하고 죽게 한 죄는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 아카데미의 교육 방침이었다.
“레릭, 이리 와서 아리아에게 수면 마법을 걸어줘.”
“응.”
부상자를 치료하던 레릭이 다가와 아리아에게 수면마법을 걸었다. 마법에 걸린 아리아는 이내 잠에 떨어졌다.
스탠리는 아리아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는 폴을 불렀다.
“폴, 어떻게 된 일인지 사실대로 말해봐.”
“그게 실은…….”
폴은 오늘 있었던 일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이미 아리아가 대충 이야기한 이상 속일 수도 없었다.
폴의 얘기를 듣는 스탠리의 눈빛이 점차 빛나기 시작했다.
“잘 들어, 폴.”
“말해.”
“트롤을 잡자고 난동을 피운 것은 테릭이다. 넌 조장으로 그걸 반대했고.”
“그게 아닌데.”
“계속해서 들어. 그런데 테릭이 네 명령을 무시해서 세 마리나 되는 트롤을 공격했어. 그중 한 마리는 아리아의 마법 덕에 처치할 수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테릭을 포함한 세 조원이 죽은 거다.”
“아!”
“알았지.”
“으… 응.”
스탠리의 말대로 한다면 무모한 명령을 내린 폴은 아무 잘못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동료들의 죽음은 전부 테릭의 책임이었다.
“그런데 테릭이 그게 아니라고 진실을 말하면 어떡하지?”
“걱정 마. 우리가 버리면 놈은 어차피 죽게 될 테니까.”
“테릭을 구하러 가지 않겠다는 거야?”
“너에게도 무모한 명령을 내린 책임이 있다는 걸 모르지는 않겠지? 설마 그 책임을 지겠다는 것은 아니겠지?”
“아!”
도망갈 수 있음에도 트롤을 공격하자고 주장한 것은 폴이었다.
이는 조장으로서 현명하지 못한 결정이었고, 그로 인해 두 명의 조원이 죽기까지 했다. 만일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폴도 아리아와 마찬가지로 중징계를 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폴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계속 고민하자 스탠리가 다그치듯 한마디 더했다.
“그놈은 어차피 꼴찌를 전전하던 놈이잖아? 그리고 여기서 죽으면 아카데미에서 명예 졸업장은 수여할 거야. 그런 띨띨한 놈은 이렇게 죽는 것이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몰라.”
“하지만 아직 안 죽었는지도 모르는데.”
“근위기사단에서 그러더군. 졸업 후, 한두 명 정도는 데려와도 좋다고. 아! 근위기사단장이신 모건 후작님이 내 숙부라는 사실은 알고 있겠지?”
“아! 알았어.”
“대신 아리아가 계속해서 다른 소리를 하면 너무 충격이 커서 그렇다고 둘러대라. 물론 너 말고 다른 조원들도 내 말에 따라야 하고.”
“걱정 마. 조원들은 평점을 잘 주겠다고 하면 불평 없이 내 말에 따를 거야. 어차피 도망친 건 그들도 마찬가지니까.”
그 시각, 졸지에 이번 일의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쓴 테릭은 여전히 숲속을 헤매고 있었는데, 등판에서는 아직 지혈이 안 돼 붉은 선혈이 샘솟듯 흘러나왔다.
“아! 어디든 들어가야 해.”
계속 흐르는 피도 문제였지만 피 냄새를 맡고 몬스터들이 몰려올 수 있었다. 특히 곧 날이 저무는 것도 문제였다.
그때 적막을 깨는 산악 하이에나의 울부짖음이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아마도 배회하던 하이에나들이 피 냄새를 맡고 근처까지 접근한 듯했다.
무리를 지어 다니는 산악 하이에나들은 밤에 움직이는 야행성 맹수로, 뭐든지 가리지 않고 먹어치우는 잔인한 맹수였다.
‘트롤도 피했는데 겨우 하이에나들에게 죽을 수는 없지.’
테릭은 아픈 몸을 이끌고 계속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얼마나 들어갔을까?
“아! 이를 어쩐다.”
테릭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거대한 암벽이었고, 매우 거칠고 험악한 것이 성한 몸으로도 오르기 힘들어 보였다.
“아우우우우~~~”
“헉! 놈들이 더 가까이 왔구나.”
오던 길을 되돌아가려고 했던 테릭은 다시 들려오는 하이에나의 울음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암벽에 몸을 숨겨야 했다.
* * *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비집고 들어갈 틈을 찾아야 해.”
궁지에 몰린 테릭은 암벽 곳곳을 돌며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이 있는지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람쥐나 산토끼라면 모를까, 테릭이 몸을 숨길만한 공간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 이렇게 죽어야만 하는가?”
숨을 곳을 찾지 못한 테릭은 허무한 마음에 철퍼덕 주저앉고 말았다.
그 순간 테릭의 발밑에서 뭔가가 눌리는 감촉이 전해졌다.
텅-
스르륵-
“엥! 무슨 소리지?”
등 뒤에서 뭔가 육중한 것이 움직이듯 소리가 들려오자 테릭은 본능적으로 뒤돌아봤다.
“헉! 이게 뭐야?”
테릭이 발견한 것은 시커먼 주둥이를 벌리고 있는 동굴이었다.
테릭은 우선 피해야 한다는 생각에 무턱대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나타난 동굴은 그가 들어가자마자 저절로 닫히고 말았다.
스르륵~
“휴우~ 살았다.”
다급한 순간을 운 좋게 모면한 테릭은 그렇게 동굴 앞에서 얼마동안 서 있었다.
하지만 급한 불은 껐다 해도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상처의 지혈과 치료가 급했다.
‘이럴 게 아니라 들어가 볼까?’
어둠에 잠긴 동굴 안이 무섭기는 했지만 살기 위해서도 뭔가 대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잠시 숨을 고른 테릭은 조심스런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혹시 누구 있습니까?”
“…….”
“아무도 없나요?”
“…….”
대답이 들려올 리 만무했다.
그렇게 얼마나 들어갔을까?
파파팟팟-
“커헉~”
인기척에 반응을 한 것인지 천정과 벽에서 수십 개의 등이 동시에 들어오며 동굴 안이 대낮처럼 환해졌다.
그 탓에 테릭은 순간적으로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우~ 눈이야.”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빛에 익숙해진 테릭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오! 여기가 어디야?”
자신이 들어온 곳은 분명 동굴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고위귀족의 저택이나 왕궁처럼 휘황찬란하며 웅장하기 그지없었다.
“세상에, 동굴 안에 이런 장소가 있다니!”
자연 동굴 안에 이런 조명장치가 있을 턱이 없었다. 게다가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고급스런 소품이며 가구들이 누군가가 일부러 건축한 공간임을 말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품위와 기품이 있어 보이는 장식품들은 하나같이 명품이 확실했다.
“도대체 누가?”
아무리 당황했다고는 하지만 테릭도 바보는 아니었다.
그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검을 뽑아들고는 더욱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수상스러운 이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나? 동굴 안에 이런 웅장한 시설을 지었다면 보통 사람들이 아닐 텐데…….”
한 시간 가까이 동굴을 뒤진 테릭은 온갖 음식물이 들어차 있는 창고 하나와 잡동사니로 가득한 방 하나, 그리고 책이 가득한 서재를 발견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인기척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대신 바닥에 겹겹이 쌓인 자욱한 먼지만이 테릭의 걸음에 맞춰 뿌옇게 일어나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여긴 도대체 누가 만든 공간일까?”
먼지가 이 정도로 쌓였다면 최소한 몇 년 간은 아무도 찾지 않은 게 분명했다.
수색을 포기한 테릭은 조금 전 운 좋게 발견한 약상자를 가져와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꿀꺽! 크윽~”
쓰디쓴 포션을 들이마신 테릭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때 한쪽 구석에 자리한 소파 세트가 눈에 들어왔다.
먼지를 뒤집어 쓴 소파는 널찍한 것이 침대로 쓰기에는 딱이었다.
“그래, 저기서 잠시 쉬자.”
포션을 마셔서 그런지 출혈은 멈춘 듯했지만,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하루 종일 걸었더니 온몸이 뻐근했다.
잠시 눈이라도 붙일 요량으로 소파에 엎드린 테릭은 맞은편 소파 밑에서 빛을 발하는 작은 구슬 같은 것을 발견했다.
“저게 뭐지?”
호기심이 동한 테릭은 바닥을 기어 문제의 구슬을 집었다. 아울러 구슬 밑에 있던 양피지 한 장도 주워들었다.
“이게 뭐에 쓰는 물건이지?”
잠시 구슬을 살피던 테릭은 이번에는 양피지를 펼쳤다.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누렇게 색이 바랜 양피지는 누가 예전에 밟았는지 시커먼 발자국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위대한 드래곤 나, 빠하르간지가 친히 이 글을 적노라!
난 불세출의 위대한 천재,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의 존경과 흠모를 한 몸에 받아도 마땅한, 거룩하고도 위대한 레드드래곤 빠하르간지님이다.
일찍이 차원이동에 성공한 나는, 나의 위대한 업적을 드래곤 로드를 비롯한 일족의 수장들에게 널리 알렸다.
하지만 시기심과 질투심에 눈이 먼 로드와 수장들은 빛나는 나의 업적을 부정하는 것으로도 부족해 날 음해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내게 차원이동의 구체적인 물증과 증표를 요구했다.
……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도 내 말을 믿지 않고 새빨간 거짓말로 치부했던 로드와 수장들의 만행이 생각나 분노가 골수에 사무칠 지경이다.
아무튼 난 증거를 제출하지 못해 모든 드래곤들의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난 개의치 않았다.
원래 시대를 앞서나가는 빛나는 지성은 무지몽매한 것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기에.
대신 영구적이고 안정적인 차원이동기의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또한 누구라도 다른 차원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통역마법과 문자해독마법 같은 보조 마법까지 완벽하게 구현했다.
……
내가 가보았던 다른 차원은 어찌된 것인지 인간들이 단기간에 강해졌다. 예상컨대 10여 년이 지나면 드래곤과 필적할 정도의 실력을 갖출 것 같았다.
심상치 않은 사태에 나는 다른 차원의 일이었음에도 범 드래곤애를 발휘하여 그 세상의 드래곤들을 만나 설득했다.
……
그대는 내가 남긴 차원이동기를 통해 차원이동이 상상이 아닌 현실임을 증명하라.
아울러 뒷면에 다른 차원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을 기재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대륙공용력 1214년 9월 14일-
“허어~ 미치겠네. 드래곤에 무슨 차원이동? 어지간해야 믿어주지.”
양피지를 읽던 테릭은 그 내용이 너무도 터무니없어 아예 무시하고 말았다.
잠시 후 동굴 안은 깊은 잠에 빠진 테릭의 숨소리만 들려왔다.
* * *
“하암~ 잘 잤다!”
한숨 늘어지게 자고 일어난 테릭은 기지개를 켜고 일어났다.
등판의 상처는 다 나았는지 살짝 욱신거리기만 할 뿐 더 이상의 고통은 없었다.
“오! 좋은데.”
아예 허리까지 비틀며 몸 풀기를 하던 테릭은 이곳이 동굴 안이라는 걸 뒤늦게 깨닫고는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상스런 동굴 안에는 여전히 자신 혼자뿐이었다.
“역시 아무도 없구나! 그나저나 뭘 먹긴 먹어야 할 텐데.”
한숨 자고 일어나서 그런지 부쩍 시장기가 느껴졌다.
테릭은 어제의 기억을 더듬어 음식물이 쌓여 있는 창고로 향했다.
다행히 창고 안의 음식은 보관상태가 양호해서 먹기에는 지장이 없었다.
“이상하다! 분명 1214년이면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데.”
음식을 챙기던 테릭은 문득 어제 잠들기 전에 발견했던 양피지를 떠올렸다.
이곳의 주인으로 짐작되는 이가 남긴 그 양피지에는 분명 대륙공용력 1214년이라고 적혀 있었다.
30년의 시간이라면 모든 음식물이 썩어문드러지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내가 잘못 봤나?”
과일을 베어 먹던 테릭은 너무도 신선한 과일의 맛과 향기에 자신이 잘못 봤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창고 안에서 끼니를 해결한 테릭은 다시 소파로 돌아와 문제의 양피지를 다시 확인했다.
“헉! 정말 1214년이네? 설마, 아니겠지.”
아무래도 무슨 착오가 있는 것 같았다. 그것도 아니면 양피지를 작성한 자가 일부러 농간을 부렸거나.
테릭은 양피지를 무시하고 바닥에 내려놓다가 소파 위에 있는 구슬을 봤다.
“마나를 주입해 보라고 했지. 내가 이런 말도 안 되는 내용을 따라서 해야 해?”
스스로 어처구니없어 하면서도 테릭은 구슬에 마나에 주입했다.
다행히 소드익스퍼트 초급에 도달한 그는 힘들게나마 마나를 운용할 수 있는 경지였다.
“윙윙~”
마나가 주입된 구슬에서 톱니바퀴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변화를 감지한 테릭은 마나를 운용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구슬이 알아서 마나를 빨아들였다.
“붕붕~~”
마나를 잔뜩 빨아들인 구슬에서 이상한 소리와 함께 빛이 터져 나오며 테릭을 휘감기 시작했다.
잠시 후 테릭의 모습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소파 위에는 구슬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위윙~ 윙윙~”
덜덜덜~~
빛에 휘감긴 테릭은 자신의 몸이 어딘가로 급하게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서 톱니바퀴 돌아가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심한 진동이 전해졌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테릭이 어찌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영롱한 빛을 발하는 투명한 막이 전방에 나타났다.
테릭은 본능적으로 투명 막과 충돌한다는 걸 느끼며 두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퐁-
츠파파팟-
=꿈과 모험의 세상, 그란티아 월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엥?”
충돌을 예상하고 얼굴을 감쌌던 테릭은 마치 환상처럼 허공에서 들려오는 여인의 몽환적인 음성에 깜짝 놀랐다.
신기한 것은 처음 듣는 언어였음에도 여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테릭은 그때 처음으로 양피지의 내용이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곳은 그란티아 월드의 평생회원만 접속이 가능한 로열존입니다. 망막스캔 결과 아직 캐릭터가 생성되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 캐릭터 생성에 들어가겠습니다.
“캐릭터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그리고 여기는 어디야?”
어리둥절한 테릭은 궁금한 사항을 참지 못하고 속사포처럼 질문을 했다.
약간의 정적이 흐르자 여인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이곳은 새로운 신세계, 꿈과 모험이 가득한 그란티아 월드의 캐릭터 생성 존입니다. 캐릭터는 그란티아 월드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셔야 하는 고객님의 분신이자 또 다른 자신입니다.
“새로운 신세계라고? 여기는 아스리온 대륙이 아니야?”
=죄송합니다. 그란티아 월드에 아스리온 대륙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곳은 모든 이의 꿈이 실현되는 새로운 신세계, 그란티아 월드입니다.
“아! 그럼, 정말로 차원이동을 했다는 말인가?”
=죄송합니다, 고객님. 차원이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캐릭터를 생성하시겠습니까?
그란티아 월드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세상이었다. 때문에 테릭은 차원이동이 허튼소리가 아닌 사실임을 알았다.
하지만 자신은 차원이동에 모든 것을 바친 빠하르간지가 아니었기에, 아스리온 대륙으로 돌아가야 했다.
“혹시 내가 원래의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란티아 월드에서 빠져 나가기 위해서는 접속 종료라고 얘기하시면 됩니다.
“접속 종료라고?”
=그렇습니다.
“접속 종료!”
=지금 당장 접속을 종료하시겠습니까?
“그래.”
=접속을 종료합니다. 그란티아 월드를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5. 4. 3. 2. 1
츠파파파팟-
여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변 풍경이 순식간에 바뀌며, 빛이 전혀 없는 어두컴컴한 암흑 세상이 다가왔다.
테릭은 혹시 잘못된 것은 아닌지 겁이 덜컥 났다. 그러나 잠시 후 톱니바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고, 테릭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소파 위에 앉아 있었다.
“오! 세상에, 정말 차원이동이 가능하다니.”
만일 실제로 해보지 않았다면 절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테릭은 그제야 양피지의 내용이 사실임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