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바로 이거야!
털썩-
“헉!”
“헉슬리!”
190센티가 넘는 거구의 헉슬리가 초라한 모습으로 바닥에 쓰러졌다.
테릭은 마나-소드를 해제하고는 헉슬리 앞에 당당하게 섰다.
“똥개가 무슨 잘못이 있겠소? 그렇게 하라고 시킨 주인이 나쁜 놈이지.”
이번에는 테릭이 스탠리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중의 모든 이는 스탠리를 바라봤다.
모든 이의 시선을 마주한 스탠리는 모멸감과 낭패감으로 목덜미까지 빨개진 얼굴로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그러나 테릭의 실력을 직접 목격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테릭은 스탠리가 그랬던 것처럼 미묘한 미소를 그에게 보내고는 몸을 돌려 숙소로 향했다.
“와아~ 봤어?”
“세상에. 만년 꼴찌 테릭이 그런 실력을 갖고 있을 줄이야.”
“조금 전 현상은 분명 마나의 분출이었지?”
“아! 케인리히 왕립 아카데미 만년 꼴찌가 사실은 소드익스퍼트 최상급의 극에 도달한 실력자였다니.”
“태릭은 여태 실력을 숨기고 있었던 거야.”
“클리스만 교관님이 그렇게 산속을 헤매고 다녔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어.”
“그나저나 저런 실력을 갖고 있는 테릭이 겨우 트롤 세 마리 때문에 도망쳤을까?”
“맞아! 그리고 조금 전 아리아가 한 얘기는 무슨 뜻이지?”
“이건 분명 뭐가 있어?”
걸음을 옮기는 테릭의 귓가에 아카데미 동기들의 얘기가 속속 파고들었다.
‘바로 이거야!’
잘 짜인 훌륭한 연극을 무대에 올린 연출자의 심정이 이럴까?
기분이 좋은 테릭은 어디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서 한바탕 웃음이라도 터트리고 싶었다.
한편, 결투장에 남은 스탠리는 여전히 분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테릭, 네놈이 감히!”
테릭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바보로 만들고 조롱했다. 게다가 그렇게 공을 들여서 작업한 아리아의 일을 완전히 무위로 돌려버리고는 누명을 벗었다.
특히 아까 녀석이 아리아를 안고 있는 모습을 봤을 때는 피가 솟구쳐서 죽는 줄 알았다.
만약 할 수만 있다면 녀석의 목을 당장 베서는 지근지근 밟고 싶었다.
“스탠리, 진정해. 녀석의 실력을 몰랐던 것이 실수야.”
“레릭, 어서 대책을 강구해라.”
“알았어. 지금은 폴의 문제부터 해결해야 해.”
“그 따위 녀석은 어찌되든 상관없어.”
“맞아! 지금 상황에서는 폴에게 모든 것을 돌려야 해. 한 가지만 묻자. 아리아는 끝가지 챙길 생각이지?”
“그걸 꼭 얘기해야 해.”
“됐어.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레릭은 급히 1조 소속의 학생 몇을 데리고 폴을 비롯한 7조원들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어떤 얘기가 어떻게 오고갔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다만, 다음날 7조에 있었던 일은 폴이 전부 꾸민 일이라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한편, 숙소로 돌아간 테릭은 폴과 다른 동기들을 기다렸다.
그러나 레릭에게 불려간 그들은 얘기가 끝난 후에도 테릭이 무서워서 돌아오지 못했다.
“아! 이것들. 끝까지 쌩 까네.”
누명을 벗은 것은 벗은 거고, 폴과 다른 이들의 사과는 따로 받아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폴과 다른 동기들은 방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화가 난 테릭은 차원아공간에서 소주를 꺼내서는 방 안에 있던 글라스에 가득 부었다.
“카아~ 좋다!”
화가 날 때 마시는 소주 맛은 색달랐다.
혀에 척척 달라붙고 목구멍이 뜨끈뜨끈해지며 속까지 확 풀리는 것이 테릭의 울컥해진 기분을 살살 달래주는 듯했다.
“똑똑~”
“들어와!”
‘이것들 이제야 기어와?’
테이블에 앉아 홀로 소주를 마시던 테릭은 노크 소리에 버럭 악부터 썼다.
그는 폴을 비롯한 7조의 동료들이 이제야 들어온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처음 보는 중년 기사였고, 그 뒤에는 아리아가 수줍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실례를 해도 되겠습니까?”
“무슨 일이시죠?”
“테릭, 들어가도 돼?”
“으응, 들어와.”
찰나지만 어색한 눈빛이 테릭과 아리아 사이에 오고갔다.
방 안으로 들어온 기사가 그 분위기를 감지하고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아가씨에게 얘기는 다 들었습니다. 아가씨와 몽겔니오스 후작님을 대신해서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리아의 일이라면 이미 용서를 했습니다. 그런데 대관절 어떻게 된 일인지 들어는 봐야겠습니다.”
“테릭, 미안해.”
아리아는 테릭이 쓰러진 직후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의 사정을 낱낱이 얘기했다.
그녀의 얘기를 들은 테릭은 이제야 어떻게 된 상황인지 짐작했다.
그러자 모든 사실을 실토한 아리아는 복받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해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아리아, 울지 마. 당시 우리는 너무 준비가 안 되어 있었어.”
“다들 그렇게 알고 나를 대해주니까 나도 다행이라고만 생각했어.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괴로웠어.”
“전부 지난 일이야.”
“난 네가 나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고 얼마나 자책했는지 몰라. 네가 돌아온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거짓말이 탄로날까봐 걱정도 되었지만 기쁜 마음이 훨씬 더 많았어.”
“그래, 알았어.”
아리아를 달래던 테릭은 때마침 테이블 위에 있던 소주를 글라스에 가득 따라서는 한잔 권했다.
술 한잔 마시고 털어버리라는 테릭의 말에 아리아는 무심코 잔을 받았다.
“이게 뭐야?”
“소주라는 아주 귀한 술이야.”
“소주?”
“일단 마셔봐. 아마 그 맛에 깜짝 놀랄 거야. 아! 단숨에 쭉 들이켜. 소주는 무조건 원 샷이거든.”
“그… 그래, 알았어.”
테릭은 레이나에게 배운 대로 주당들의 주도를 아리아에게도 강요했다.
아리아에게 소주를 따라준 테릭이 이번에는 그녀를 따라온 중년 기사에게도 한잔 가득 따라줬다.
중년 기사는 아리아의 신변을 염려해서 몽겔니오스 후작이 급히 내려 보낸 후작가의 기사로, 아돌프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벌컥~ 벌컥~
“크아아악~~~”
“어때, 좋지?”
“좀 쓴 것 같은데.”
“한잔 더해봐. 이게 위스키나 브랜디보다는 훨씬 순한 술이야.”
꿀~꺽~
“캬아아~ 좋다!”
“아돌프님도 한잔 더하시겠습니까?”
“주시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아리아와 달리 아돌프는 술맛이 좋다며 넙죽 받아마셨다.
한편, 처음에는 쓰다고 했던 아리아도 어느 순간부터는 홀짝홀짝 소주를 들이켜기 시작했다.
잠시 후 테릭의 숙소에는 텅 빈 소주병 여러 개가 굴러다녔다.
* * *
“딸꾹~ 야! 너 왜 실력을 숨긴 거야?”
“그게 귀찮잖아.”
“그래도 우리에게는 알렸으면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지?”
“미안해.”
“아! 몰라. 아무튼 네가 다 책임져. 딸꾹~”
원래 취하기 좋은 알코올 도수는 소주와 비슷한 20도 전후라고 한다.
더군다나 소주잔이 없어 큰 글라스로 연거푸 원 샷을 들이켰으니 안 취하면 사람이 아니라 술고래였다.
결국 만취한 아리아는 테릭을 타박하기까지 했다.
테릭은 어린아이처럼 앙탈을 부리는 그녀의 모습이 귀여워 다 받아주었다.
같이 술을 마셨던 아돌프는 안주를 가져오겠다며 나가서는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스탠리가 앞으로 너를 노릴 텐데 어쩔 거야? 이제는 왕국 제일의 권력자와 상대해야 할 텐데?”
“제깟 놈이 노리거나 말거나.”
“와우~ 테릭, 알고 보니 배짱도 두둑하네?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천하의 오바마 폰 아인리히 공작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 줄은 몰랐네.”
“그게 뭔 대수라고?”
“아인리히 공작은 네가 설령 소드마스터라고 해도 두려워하지 않을걸. 이미 다섯 명이나 되는 소드마스터를 휘하에 두고 있으니까?”
타라한 왕국은 총 10명의 소드마스터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중 좌파인 카이스트 공작 휘하에 4명의 소드마스터가 있었고, 아인리히 공작 휘하에 다섯 명, 그리고 중도파에 한 명이 있었다.
“됐어! 많이 취했다. 이제 그만 들어가.”
“딸꾹~ 취하기는. 한잔 더 해야지. 빨랑 따라~”
“아리아, 그만해.”
“에이~ 소주가 비싼 술이라 아끼는 거야? 치사해서 내가 돈 낸다.”
“시간이 늦었어. 내일 오전에 출발한다는데 너도 자야지?”
‘아! 레이나가 무지 기다릴 텐데.’
이렇게까지 술자리가 길어지리라고는 예상도 못했다.
레이나와 약속을 한 테릭은 한시 빨리 그란티아에 접속하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몇 번 더 보채던 아리아는 앙탈이 통하지 않자 상당히 아쉬운 표정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중에, 우리 가문의 힘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어서 가. 내 걱정은 말고.”
어쩌면 이 말을 하기 위해 아리아는 취했는지도 모른다.
아인리히 공작의 공식 후계자인 스탠리와 대립한다는 것은 아인리히 공작과 대립하는 것을 의미했다.
테릭은 자신을 걱정해 주는 아리아의 따뜻한 마음을 느끼며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끼이익~
“난 괜찮은데…….”
“어서!”
문 밖에는 안주를 가져오겠다며 나갔던 아돌프가 언제부터 있었는지 호위의 자세로 서 있다가 아리아를 부축했다.
“아가씨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조금 전 아가씨가 한 말은 그냥 한 소리가 아니니 절대 흘리지 마십시오.”
“명심하지요.”
“편히 주무십시오. 오늘 맛본 소주는 참으로 훌륭했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또 한잔 하지요.”
“그날을 기대하겠습니다.”
테릭을 바라보는 아돌프의 눈빛은 같이 술을 마셨을 때와는 또 달랐다.
테릭은 자신을 염려해 주는 아돌프의 마음을 느끼며 감사의 뜻으로 정중하게 인사했다.
‘이크! 늦었다.’
겨우 아리아를 내보낸 테릭은 다급히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는 차원이동기를 꺼내 마나를 주입했다.
마나를 머금은 차원이동기에서는 톱니바퀴 돌아가는 소리가 났고, 빛에 휘감긴 테릭의 모습은 이내 사라졌다.
=꿈과 모험의 세상, 그란티아 월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어서 그란티아에 들어가게 해줘.”
=죄송합니다. 테릭님은 그란티아에 접속하실 수가 없습니다.
“왜?”
=혈중 알코올 농도 0.125로 만취 상태입니다.
‘헉! 그걸 어떻게 알았지?’
“아니거든. 딱 한잔만 마셨거든?”
=섭취량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술이 깨시면 그때 접속하십시오.
“나 정말 술 안 취했거든.”
=만취 상태에서 그란티아 접속은 예기치 못한 위험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고객님의 안전을 위해서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럴 일 없거든. 그냥 들여보내줘.”
=죄송합니다. 10초 후 대기실 상태도 강제 종료됩니다.
“썩을! 뭔 참견이 이리 많아.”
강제로 튕겨진 테릭은 별수 없이 텅 빈 방에서 잠을 자야 했다.
다음날 아침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내려간 테릭은 수많은 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물론 개중에는 테릭을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스탠리의 똥개도 몇 마리 있었지만, 대부분은 테릭과 눈을 마주치려고 무지 애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특히 마법학부에 있는 여학생들의 노력은 필사적이었다.
그녀들은 마치 간택을 바라는 후궁들처럼 끈끈한 눈빛을 뜨겁게 쏘아 보내며 테릭과 눈을 마주치기 위해 아주 용을 쓰고 있었다.
‘크크큭~ 바로 이거라니까.’
어제, 그 난리를 피웠으니 유명해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테릭은 몰려오는 여학생들과 즐겁게 수다를 떨며 식사를 했다.
그 시각, 스탠리는 심각한 표정으로 레릭과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레릭, 난 그놈과 같은 하늘 아래에서는 절대 살 수 없어.”
“스탠리, 지금은 참아.”
“어젯밤에 그놈이 감히 나의 아리아와 함께…….”
“그래봐야 놈은 변방의 별 볼일 없는 자작의 후계자에 불과해. 지금이야 분하겠지만 아카데미로 돌아가면 그때부터는 복수가 시작될 거야.”
“계획은 완벽하겠지?”
“물론이지.”
공작 가문의 후계자로 부족한 것 없이, 갖고 싶은 것은 뭐든지 갖고 살았던 스탠리였다.
그래서 그런지 자신이 한번 찍은 것은 기어이 가져야만 직성이 풀렸다.
그런 그에게 어젯밤 아리아가 테릭과 여러 시간 같이 있었던 일은 충격이었다.
이제는 정략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기어이 아리아를 갖고 테릭을 파멸시켜야만 찢어진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와~ 다 왔다.”
“이게 얼마만이야?”
“드디어 지긋지긋한 현장실습이 끝났구나.”
룩스빌을 떠난 아카데미생과 여타의 일행들은 7일 후, 수도의 왕립아카데미에 도착했다.
테릭은 수도로 돌아오는 7일간의 여정 동안 어젯밤에야 겨우 그란티아에 접속해서 우여곡절 끝에 레이나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그래서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해 사과도 했고 당분간 그란티아에 올 수 없는 사정도 알렸다.
한편, 테릭을 모함한 일은 폴이 꾸민 일로 잠정 결론이 난 상태에서 아카데미에 도착하면 징계회의가 열린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다들 수고했다. 이 시간부로 제213차 현장실습을 마친다.”
“와아아~”
“내일부터 보름간의 특별 휴가에 들어간다. 단, 오늘 저녁 6시까지 현장실습의 과제물과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끼야호~”
“짝짝짝~~”
“졸업을 앞두고 보내는 마지막 휴가를 보람차게 보내기 바란다. 그동안 수고했다. 이상~”
인솔 책임자였던 클리스만 교관의 해산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학부생들은 악을 쓰며 열광했다.
테릭도 예외는 아니어서 주변의 여학생들과 얼싸안으며 좋아했다.
한편, 일부 학생들은 곧 졸업이라는 생각에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졸업인가?”
“아! 정말 졸업하는구나.”
“이번 휴가가 아카데미에서의 마지막 휴가겠네.”
휴가에서 복귀하면 바로 현장실습에 대한 평가와 졸업석차를 내기 위한 막바지 평가가 이어진다.
그사이 학생들은 졸업 후 진로에 대한 구체적인 활동, 이른바 구직 활동을 하며 아카데미의 졸업을 준비했다.
“수잔, 넌 졸업하면 뭐할래?”
“글쎄, 영지로 내려가기는 싫고 마탑에서 오라는 말은 없고…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 넌?”
“나도 마찬가지야.”
“이럴 줄 알았으면 쓸 만한 남자 하나 잡는 건데.”
“그러게. 4년이란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나갈 줄 알았나?”
아카데미를 졸업한다고 해서 모두 원하는 일자리를 얻는 것은 아니었다.
기사학부의 경우, 극히 일부는 타라한 왕국 최고의 기사단이라는 근위기사단이나 또는 그보다는 조금 못하지만 두 개의 중앙기사단에 뽑혀갔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생들은 귀족들이 보유한 각 가문의 기사단에 입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기서도 실력의 편차와 빽이라고 표현되는 배경의 유무에 따라서 중앙 귀족이나 또는 지방 귀족으로 나뉘어졌다.
하지만 지방 귀족의 기사단에도 못 들어가는 자들은 자유 기사로 떠돌거나 국지전이 벌어지는 북동부 전선의 군관으로 부임했다.
“테릭은 어떻게 될까?”
“근위기사단이 아니면 중앙기사단에 들어가겠지?”
“그러겠지. 어쨌든 출세는 보장된 셈이네.”
“당연하지. 그 나이에 소드익스퍼트 최상급의 실력자인데.”
타라한 왕국은 건국 초기부터 근위기사단이나 중앙기사단을 거치지 않으면 왕국의 주요한 보직에 오를 수 없는 오래된 관습이 있었다.
아카데미 졸업생들이 기를 쓰고 이들 기사단에 들어가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예전부터 작업을 해두는 건데.”
“웃겨. 아리아가 노골적으로 들이대던데 가능할 것 같아?”
“무슨 소리하는 거야? 넌 룩스빌에서 아리아가 쫓겨났다는 소문도 못 들었니?”
“그래? 난 다른 소문 들었는데.”
“다른 소문, 뭐?”
“테릭이랑 아리아랑 벌써 깊은 사이라던데?”
“에이~ 말도 안 돼? 둘이 친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애인으로는 전혀 안 보이잖아?”
“내가 보기에도 그런데, 이번 년도 졸업파티가 아리아 집에서 열리는 이유가 테릭과 중대한 발표를 하기 위해서라고 그러던데?”
룩스빌에서 아리아가 만취한 일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일과 관련해서 여러 가지 소문이 돌았지만 당사자들이 침묵을 지켰기에 정확한 확인은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아니야. 내가 보기에 둘은 절대 애인 사이가 아냐.”
“졸업파티 때 테릭의 파트너가 누구인지 보면 알겠지.”
졸업파티는 보름간의 휴가가 끝나는 마지막 날 개최될 예정이었다.
이번 년도 졸업파티는 아리아의 집에서 개최하기로 이미 결정이 난 상태였다.
그런데 여타의 파티와 달리 졸업파티의 파트너는 애인이나 또는 결혼을 약속한 연인을 동반하는 것이 관례였다.
많은 여학생들의 시선이 테릭을 향하고 있을 때, 테릭은 기숙사로 향하고 있었다.
‘낄낄~ 내일부터는 아무 걱정 없이 그란티아를 다녀올 수 있겠구나.’
룩스빌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은 계속해서 찾아오는 수많은 여학생들 때문에 도저히 그란티아에서 레벨을 올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보름간의 휴가기간이라면 레벨도 올리고 몽겔 사막을 찾아가는 일도 해결할 수 있었다.
‘저택이라면 방해할 사람도 없으니 그야말로 딱이지!’
테릭은 휴가기간 동안 수도 외곽에 있는 가문의 저택에서 혼자 지낼 생각이었다.
말이 좋아 저택이지 다른 귀족들의 으리으리한 저택과 달리 군나르 자작가의 저택은 평범한 주택에 지나지 않았다.
“테릭.”
“교관님.”
“휴가는 어디서 지낼 생각이냐?”
“수도의 저택에서 보낼 생각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기숙사로 향하는 테릭을 붙잡은 것은 클리스만 교관이었다.
그는 조금 당황스럽다는 표정으로 테릭을 불러 세웠다.
클리스만 교관의 뒤쪽으로는 잔뜩 주눅이 든 폴이 스탠리 일당과 함께 서 있었다.
그는 어떻게든 테릭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써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병신 같은 새끼.’
아리아에게 사건의 전모를 들었기에 폴이 주동자가 아님은 테릭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스탠리의 꼬임에 빠져 자신을 모험하고 종내에는 모든 죄를 뒤집어쓴, 비겁한 그를 위해 진실을 밝히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아리아의 명예를 지켜줄 수 있는 길이기에 모든 진실을 털어놓고자 하는 아리아를 설득해서 말리기까지 한 테릭이었다.
“나와 같이 징계회의에 들어가야겠다.”
“징계회의요?”
“그래, 너를 징계회의로 데려오라는 학장님의 명이 떨어졌다.”
“제가 징계에 회부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일단 들어가자.”
“알겠습니다.”
그 순간 테릭과 스탠리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스탠리의 음흉한 눈빛을 본 테릭은 이번 일이 그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반면, 스탠리는 교활한 미소를 만면에 그리고 있었다.
테릭은 녀석의 면상을 한 대 갈겨버리고 싶은 열망을 억지로 참으며 한마디 했다.
“까불다가 죽는다!”
“흥! 네놈이 언제까지 큰소리칠 수 있는지 두고 보마.”
* * *
테릭은 클리스만 교관의 안내로 학장실로 들어갔다.
학장실에는 머리가 절반쯤 벗겨진 뚱뚱한 체구의 학장과 주름살투성이의 교무주임, 그리고 험악한 얼굴로 항상 몽둥이를 소지하고 다니는 훈육주임이 기다리고 있었다.
“학장님, 테릭 군을 데려왔습니다.”
“수고했소, 클리스만 교관.”
“안녕하십니까? 기사학부 4학년생 테릭 군나르입니다.”
“클리스만 교관은 나가보게.”
“알겠습니다.”
학장을 비롯한 교무주임과 훈육주임은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테릭의 인사를 모른 척했다.
클리스만 교관이 나가자, 테릭은 어정쩡한 자세로 계속 출입문 근처에 서 있다가 학장의 질문을 들었다.
“테릭 군, 낙오된 이후부터 다시 합류하기까지의 과정을 소상히 말해보겠는가?”
“아! 육하원칙은 알고 있겠지? 육하원칙에 의거해서 보고를 해주게.”
학장과 훈육주임은 낙오 당시의 상황은 아예 묻지도 않았다.
자신을 징계회의에 부를 때부터 이미 예상하고 있던 테릭은 동료들을 찾다가 여의치 않아 혼자서 현장실습을 했다는 식으로 얘기했다.
테릭의 얘기가 이어지는 동안 교무주임은 뭔가를 열심히 받아 적으며 부지런히 계산을 했다.
잠시 후 테릭의 얘기가 끝나자 교무주임은 그동안 적은 것을 학장에게 넘겼다.
학장은 교무주임으로부터 받은 것을 읽어보며 확인하듯 질문을 했다.
“그러니까 지난 두 달간 총 214마리의 오크와 58마리의 트롤과 6마리의 오거를 잡았다고?”
“그렇습니다.”
“추호도 거짓말이 아니겠지? 가문의 명예를 걸고 맹세할 수 있는가?”
“그렇습니다.”
테릭은 이왕이면 보다 높은 학점을 받을 욕심에 잡은 몬스터의 숫자를 높게 불렀다.
어차피 클리스만 교관에게 그동안 모아놓은 몬스터의 귀는 산속에 두고 왔다고 얘기한 후였다.
클리스만 교관은 아카데미로 급히 복귀해야 한다며, 소드익스퍼트 최상급자의 실력이면 어련하겠냐며 굳이 갖고 올 필요가 없다고 했었다.
‘설마 내게도 과제물을 제출하라고 하지는 않겠지?’
사이비 짝퉁일지라도 어찌되었든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로는 소드익스퍼트 최상급의 실력자라고 알려진 테릭이었다.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학장은 아예 내놓고 과제물의 제출을 요구했다.
“그렇다면 그동안 사냥했던 증거는 당연히 과제물로 제출할 수 있겠지?”
테릭이 그 많은 몬스터의 오른쪽 귀를 전부 갖고 있을 리 만무했다.
테릭이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학장과 주임들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게 그것이…….”
“설마 제출할 과제물이 없다는 말은 아니겠지? 훈육주임, 현장실습과 관련한 교칙을 얘기해 주겠소?”
“교칙 108조 24항에 보면 현장실습에 나간 아카데미 학생은 일인당 최소 37마리의 오크를 잡아야만 현장실습을 이수하는 것으로 인정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밖의 다른 조항은 없소?”
“몇 가지 더 있습니다. 부칙 21조에 의하면 오크 15마리 이하의 실적을 올린 학생은 C학점 이하의 학점을 부여하고, 10마리 이하의 경우는 낙제를 부여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학장과 두 주임은 노골적으로 비웃음 섞인 눈빛을 교환했다.
테릭은 그들의 눈빛을 본 순간, 그들이 처음부터 모든 사실을 알고 의도적으로 학칙을 들먹인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뿔싸!’
아인리히 공작의 힘이라면 아카데미의 교칙도 바꿀 수 있는 자였다.
하물며 아칸소 학장은 아인리히 공작이 이끄는 우파 소속의 귀족이었기에 이런 상황도 충분히 대비했어야 했다.
짐작하건데 아마도 클리스만 교관에게 한 얘기를 스탠리가 어떤 식으로든 입수하고 손을 쓴 것 같았다.
‘스탠리와 틀어진 이상 아인리히 공작의 적이 되었다는 아리아의 말이 틀리지 않았군.’
비로소 권력자와 대립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피부에 와 닿았다. 그러나 이대로 저들의 음모에 놀아날 수는 없었다.
한편, 테릭의 당황한 표정을 읽은 학장과 두 주임은 신이 나서 얘기를 계속했다.
“교무주임, 테릭 군이 이번에 낙제점수를 받으면 어떻게 되지?”
“그동안 테릭 군의 학업성취도가 극히 부진했기에 이번 현장실습마저 낙제점을 받게 된다면 성적 미달로 제적입니다.”
“제적이라고?”
“그렇습니다.”
“하하~ 소드익스퍼트 최상급자가 아카데미에서 제적되다니? 남들이 들으면 그야말로 칼질만 할 줄 아는 멍청한 놈이라고 비웃겠군.”
“사실과 아주 다른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하하~ 그렇군.”
‘내가 제적이라니, 제적만큼은 절대 안 돼.’
장차 대륙을 활보하며 던전을 싹쓸이하고 다닐 자신이 아카데미 제적생이라는 불명예스런 딱지를 평생 달고 살 수는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버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테릭은 오기가 나서 과제물을 제출하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과제물을 제출할 수 있다고?”
“그렇습니다. 오늘 저녁에 보고서를 제출할 때 같이 내겠습니다.”
“테릭 군이 제출한 과제물의 양은 정확히 알고 있는가?”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아까 가문의 명예를 걸고 맹세한 것을 잊었는가? 정확하게 오크 214마리, 트롤 58마리, 오거 6마리의 오른쪽 귀를 제출하게.”
“아!”
“만일 이제 와서 보고서를 의도적으로 축소하면 거짓 보고로 나와 두 주임을 능멸한 것으로 여기고 바로 제적시키겠네.”
학장의 의도는 명확했다. 그는 어떻게든 테릭을 제적시키려 하고 있었다.
즉, 테릭을 아카데미 제적생으로 만들어 세인의 조롱거리로 만들 의도였다.
“걱정 마십시오.”
“걱정 말라니 기대하겠네.”
“나가보겠습니다.”
학장실을 나온 테릭은 복도에서 스탠리 일당과 마주쳤다.
스탠리와 그의 똥개들은 여유 있게 휘파람을 불면서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테릭은 시간이 없기에 녀석들을 한번 노려보고는 연무장을 거쳐서 아카데미 뒷산으로 들어갔다.
‘그깟 몬스터의 귀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지.’
치안이 좋은 수도 인근에서 몬스터를 발견한다는 건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웠다.
하지만 그란티아라면 사정이 달랐다.
적당히 외진 곳에 자리를 잡은 테릭은 곧장 차원이동기를 꺼내서는 그란티아에 접속했다.
* * *
=>어! 테릭, 무슨 일이야? 내일부터나 들어올 수 있다면서?”
=>레이나, 나 좀 도와줘.”
테릭이 그란티아에 접속하자마자 레이나가 귓속말을 해왔다.
둘은 어제 친구등록을 했기에 접속 알림 도우미가 가능했다.
테릭은 레이나에게 오크와 트롤, 그리고 오거의 오른쪽 귀가 급히 필요하다고 했다.
=>무슨 퀘스트를 받은 거야?
=>으… 응, 최대한 빨리 구해야 해.
=>그게 무슨 대수라고? 오크 사냥터는 내가 갈게. 네가 트롤사냥터를 가서 사.
=>귀를 사라고? 누구에게?
=>가서 사람들에게 소리쳐봐. 아마 엄청 몰려들 거야.
=>누가 트롤의 귀를 팔까?
=>땅 파봐라, 돈이 나오나? 아마 서로 팔겠다고 할 걸.
=>정말 그럴까? 얼마에 사면 될까?
=>오크는 개당 20실버에 내가 사가지고 갈게. 트롤은 귀 한 개당 50실버에 사겠다고 하면 될 것 같고, 오거는 몇 마리 안 되니까 얼른 잡아버려.
=>그래, 알았어.
레이나의 말대로 먼저 트롤 사냥터로 간 테릭은 트롤의 오른쪽 귀를 50실버에 사겠다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잠시 후 14~15세로 보이는 소년이 다가왔다.
소년의 뒤로는 같은 또래로 보이는 십여 명의 아이들이 잔뜩 호기심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트롤의 오른쪽 귀를 50실버에 사나요?”
“응, 그런데 무조건 사는 게 아니고 58개만 살 거야.”
“정말이죠?”
“그렇다니까.”
“애들아~ 정말이래.”
“와아~~”
“그런데 선착순 58개만 사겠데.”
후다다닥~
아이들은 선착순이라는 소리에 후다닥 헤어져서 트롤을 잡기 시작했다.
일부 아이들은 사냥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잡은 트롤의 오른쪽 귀를 자르기 시작했다.
얼마 후, 순식간에 십여 명의 아이들이 몰려왔다.
“형, 제 것 먼저 사세요?”
“제건 완전 싱싱해요. 보세요? 아직도 피가 이렇게 뚝뚝 떨어지잖아요.”
“줄 섭시다. 차례를 지킵시다!”
“형 말만 듣고 20개 잘라왔으니까 10골드 주세요.”
‘하하~ 바로 이거라니까.’
테릭은 너무 좋아서 소년들이 내민 70개의 귀를 전부 구입하고는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이제 그가 향하는 곳은 오거가 출몰하는 지역이었다. 오거는 6개만 있으면 되니 직접 잡으면 되었다.
‘오거쯤이야.’
레벨이 200을 넘어선 테릭에게 오거를 잡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눈 깜짝할 새에 오거 한 마리를 해치운 테릭은 재빨리 오른쪽 귀를 잘라냈다.
그가 막 네 번째 오거를 사냥하고 있을 때 근처를 지나가던 다섯 명의 사내들이 갑자기 멈춰 섰다.
“남수야, 저길 봐!”
“아니 저 자식은!”
“맞지! 테릭, 그놈 맞지?”
“오냐! 이놈.”
멈춰선 다섯 사내는 끝없는 미로에서 피사로에게 죽음을 당했던 남수와 그의 동료들이었다.
그들은 테릭 때문에 두 번이나 죽었기에, 안 그래도 언제고 만나기만 하면 복수를 하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갈아먹어도 시원찮을 놈.”
“저놈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걸 생각하면 지금도 피가 거꾸로 솟구친다.”
“맞아! 그것도 두 번씩이나.”
“다들 준비해.”
“아주 끝장을 내버려.”
“야! 눈치 못 채게 오거를 잡으면서 가.”
남수 일행이 서서히 접근하는 동안, 테릭은 여섯 번째 오거를 잡아 귀를 떼고 있었다.
그는 너무도 쉽게 과제물을 해결했기에 기분이 좋아 콧노래까지 부르고 있었다.
“하아~ 끝났다. 레이나도 끝났을까?”
“지금이다.”
“죽여!”
“엥?”
막 자리에서 일어서던 테릭은 갑자기 달려드는 다섯 사내를 봤다.
그들은 예전에 자신을 죽였던 P.K단이었다.
‘아! 어쩌지, 여기서 죽으면 안 되는데.’
레벨도 오르고 유니크급 장비로 무장도 한 이상, 저들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저들은 다섯 명이나 되었고, 만약 여기서 죽게 된다면 접속 제한 페널티 때문에 과제물을 제출할 수 없었다. 그건 아카데미에서 제적을 당하는 것을 의미했다.
테릭이 결정을 하지 못하고 주춤거리는 사이 마법사가 날린 마법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왔다.
‘이크!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적을 눈앞에 두고 망설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테릭은 급히 몸을 날려 마법사에게로 다가갔다.
전투에서 강력한 마법을 날리는 마법사를 먼저 죽이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으로, 아카데미에서 수없이 들었던 얘기였다.
“저놈이 햄버거를 노린다.”
“만득아, 막아!”
“이게 죽으려고!”
마법사의 이름이 햄버거인 듯했다.
테릭은 앞을 가로막는 남수와 만득을 피해서 공중으로 도약을 해 1미터 이상 솟구쳐 올랐다.
한편, 남수 일행은 테릭의 레벨이 당연히 낮다고만 여겼다.
그러다가 등 뒤에서 펄럭이는 붉은 망토를 보고서야 그의 레벨이 200레벨이 넘는다는 걸 깨달았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미처 그 부분을 간과한 것이 실수였다.
“야! 피해.”
퍽!
“커헉!”
테릭을 우습게 여긴 대가는 너무도 컸다.
테릭의 라이징 샷에 햄버거가 단말마를 토하며 소멸했다.
“이 새끼!”
“죽어.”
“네가 어떻게 벌써?”
동료의 죽음에 남수 일행은 광분했다.
그것은 어쩌면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오히려 더 고렙이 돼서 나타난 테릭의 모습이 너무 충격적이고 믿기지 않아서인지도 몰랐다.
피슝-
강철 화살 한 대가 불꽃을 피우며 무섭게 쇄도했다. 궁수인 떡대가 자랑하는 C급 스킬, 에로우 파이어였다.
그 뒤를 이어 또 다른 마법사인 이슬만먹어의 마법과 만득이의 강철 잣대가 바람을 가르며 다가왔다.
‘잣대는 무시한다.’
마법사는 최우선적으로 깨끗이 치워야 했다.
허리를 숙여 화살을 피한 테릭은 용수철이 솟구치듯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가 불쑥 튀어나오자 앞을 막고 있던 만득이가 놀라서 주춤거리며 물러서다가 뒤늦게 강철 잣대를 휘둘렀다.
그러나 테릭의 신형은 이미 그를 스치듯 지나 마법사를 향해 롱소드를 깊숙이 찌르고 있었다.
퍽-
“큭~”
강철 잣대가 등을 때리면서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고통이 찌르르 밀려왔다.
그러나 정통으로 맞지는 않았는지 마법사를 향한 검 끝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푸욱-
“헙!”
마나드릴이 상대의 배를 우악스럽게 헤집고 들어가며 또 한명의 마법사를 잡았다.
그때 뒤통수에서 따끔따끔한 기분이 테릭의 뇌리에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