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이렇게 술술 풀려도 되는 거야?
“전방에 적이 다가오고 있다.”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것이 기병들 같다.”
“대략 40명 정도로 보인다.”
아리아와 실랑이를 벌이던 테릭은 적이 다가온다는 말에 급히 막사 밖으로 나갔다.
대대의 병사들은 벌써 일사불란한 모습으로 전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대장님, 현재 우리 측 병력 집결 상황은 어떻습니까?”
“앵무새3의 병력은 이미 약속지점에 도착했네.”
“다른 병력은 언제쯤 도착합니까?”
“늦어도 10분 이내는 모두 도착할 것이네.”
“그 정도라면 상관없겠군요. 저들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그사이 나는 약속지점으로 가서 병력 집결을 마무리하겠네.”
테릭의 실력을 알게 된 요겔은 아무 부담 없이 적병의 처리를 맡기고 병력 집결지로 향했다.
하지만 테릭의 실력을 모르는 아리아가 문제였다.
그녀는 혼자서 요새 밖으로 나가는 테릭의 팔을 붙잡고 매달렸다.
“테릭, 지금 뭐하는 거야?”
“뭐하기는. 적병을 물리쳐야지.”
“그런데 왜 혼자 나가냐고? 적은 40명이나 되는 기병인데.”
“저 정도는 나 혼자서 처리할 수 있어.”
“아무리 네 실력이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혼자서는 무리야.”
“걱정 마, 아리아.”
“안 돼! 그러면 나도 갈래.”
테릭은 순간이지만 아리아의 얼굴에 레이나의 모습이 중첩되어서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리아는 왜 갑자기 웃느냐는 표정으로 테릭을 바라봤다.
테릭은 아리아의 걱정을 덜어내기 위해서도 실력을 공개하기로 했다.
어차피 곧 있으면 알게 될 터인데 굳이 숨길 필요가 없었다.
“아리아, 네가 모르는 사실이 있어.”
“내가 모르다니, 뭘?”
“실은 나 그랜드마스터야.”
“그랜드마스터면 뭐해? 적은 40명이나 되는데.”
“그게 아니라 그랜드마스터라니까.”
“그래도 적은… 뭐! 그… 그랜드마스터?”
“말도 안 돼. 어… 어떻게?”
“그동안은 내가 진정한 실력을 공개하지 않았어.”
검을 뽑아든 테릭은 구구한 설명 대신 오러-소드를 시전했다.
그러자 스킬이 펼쳐지며 테릭의 검에서 붉은색 오러가 솟구쳐서는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
아리아는 너무 놀라 말도 못하고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걱정 말고 여기서 보고만 있어. 금방 갔다 올게.”
“아! 세… 세상에.”
“이제는 가도 되겠지.”
“테… 테릭.”
급히 요새를 빠져나온 테릭은 오러-소드 스킬을 해제하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한번 오러-소드를 펼쳤다가 해제한 이상 쿨 타임 때문에 3분간은 오러-소드를 펼칠 수 없었다.
그러나 다른 스킬이 있는 이상 굳이 오러-소드를 펼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총사령관님, 전방에 누군가가 나타났습니다.”
“죽으려고 작정을 했군. 아무라도 한 명을 보내서 길을 터라!”
“제가 가겠습니다.”
리건 백작은 길을 막고 나선 자가 설마 테릭이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기사 한 명을 내보냈다.
테릭은 상대가 자신을 노리고 온 사실도 모르고 악을 쓰기 시작했다.
“멈춰라! 나는 타라한 왕국의 기사, 테릭 군나르다.”
“총사령관님, 테릭 군나르라면 오늘밤 목표가 아닙니까?”
“호들갑 떨지 말고 둘의 대결에 주목하라.”
“알겠습니다.”
“우리 측 기사가 패한다면 그때는 내가 나갈 테니 끼어들지 말라. 이는 명령이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리건 백작은 테릭의 실력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관심을 갖고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때 하이폰의 기사가 검을 빼들고 테릭을 향해 강하게 휘둘렀다.
말을 몰고 온 그는 가속도를 이용해서 단숨에 테릭의 목을 칠 생각이었다.
챙-
검과 검이 부딪치며 불통이 튀었다.
테릭이 이번에 펼친 스킬은 방어 스킬인 크로스가드였다.
유리한 상태에서 공격을 했던 하이폰의 기사는 자신의 공격이 허무하게 막히자 재차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의 검이 펼쳐지기도 전에 테릭의 검이 말의 다리를 잘랐다.
“히이이잉~~”
“헉~”
우당탕-
다리가 잘린 말은 고통에 몸부림쳤고, 그 바람에 하이폰의 기사는 보기 흉하게 바닥에 쓰러졌다.
리건 백작은 부하 기사가 위기에 빠지자 급히 소리를 지르며 테릭을 제지했다.
“멈춰라! 난 하이폰 왕국의 리건 백작이다. 테릭 군나르라고 했던가. 그대는 나와 검을 나눌 용기가 있는가?”
“헉!”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오! 적군 총사령관이다.”
“적의 소드마스터가 이곳에 왔다.”
“적은 기병이 아니라 기사단이다.”
“혹시 적의 총공세가 시작되는 것 아냐?”
“아! 테릭.”
소드마스터답게 리건 백작의 음성은 어둠의 적막을 깨고 요새 안까지 들렸다.
요새에 있던 3대대 병사들과 아리아는 갑작스런 리건 백작과 기사단의 출현에 당황했다. 그러나 누구보다 놀란 것은 테릭이었다.
‘오! 소드마스터이자 하이폰 왕국군 총사령관이라는 리건 백작?’
적군의 총사령관이자 소드마스터라니, 잡기만 하면 초대박이었다.
테릭은 너무 좋아서 하마터면 소리까지 지를 뻔했다.
반면, 리건 백작은 크게 놀라는 테릭을 보고 그가 겁이 나서 그런다고 여기곤 재차 도발을 했다.
“테릭 군나르, 기사라면 도망가지 마라.”
“누가 도망간다는 것이요? 그대의 검을 두려워할 내가 아니요.”
“나를 마주하고도 그런 말을 하다니, 배포는 좋구나.”
“그깟 소드마스터가 뭐가 대수라고. 덤비시오!”
“하하~ 참으로 오만하구나. 과연 검술도 그만한 실력이 있는지 볼까.”
말에서 내린 리건 백작이 서서히 앞으로 나섰다. 그는 유리한 조건으로 싸워서 이겼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 사이 다른 기사들이 나와서 부상당한 기사를 부축해서 데려갔다.
* * *
“이제 시작해볼까?”
“난 준비가 됐소.”
“미리 말하지만 난 상대가 젊은 기사라고 해서 봐주는 법이 없으니, 처음부터 단단히 준비해야 할 것이야.”
“나도 바라던 바요.”
공격의 시작은 리건 백작이었다.
그는 말과 달리 테릭의 실력을 알아보기 위해 처음에는 가볍게 공격했다.
테릭은 상대의 공격을 크로스가드로 슬쩍 받아내고는 바로 빅-휠을 펼쳤다.
하지만 리건 백작도 딱지 따먹기로 소드마스터가 된 것은 아니었기에 그의 공격을 가볍게 막아냈다.
“오! 날카롭군.”
“이제 시작이오.”
“그건 나도 마찬가지네.”
테릭과 리건의 불꽃 튀는 대결은 계속되었다.
그때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더니 몽겔니오스 후작과 그의 호위 기사들이 요새 안으로 들이닥쳤다.
몽겔니오스 후작은 요새 안에 들어오기 무섭게 아리아의 이름을 불렀다.
“아리아.”
“아빠.”
“아리아,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죄송해요, 아빠.”
“일단 돌아가자.”
몽겔니오스 후작은 너무도 속이 상했지만 차마 병사들이 있는 곳에서 아리아를 혼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리아는 돌아가지 않겠다며 완강하게 거부를 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후작은 오늘 일의 원흉이나 마찬가지인 테릭을 찾았다.
“테릭, 그놈은 어디 있느냐?”
“지금 전투 중이에요.”
“전투 중이라니?”
“저기.”
몽겔니오스 후작은 그때서야 요새 안의 분위기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그때 상황을 살피러갔던 아돌프가 초조한 기색으로 다가왔다.
“후작님, 하이폰 왕국의 리건 백작이 40명이나 되는 기사들을 이끌고 나타났습니다.”
“뭐! 그런 자가 이런 곳에 왜?”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테릭 군과 리건 백작이 전투를 펼치고 있습니다.”
“이런! 아리아, 어서 가자.”
소드마스터 리건 백작이 나타났다는 말에 몽겔니오스 후작은 혼비백산해졌다.
아무리 후작이 5서클 마스터라고 해도 기사단의 충분한 호위 없이는 소드마스터 앞에 나설 수 없었다.
게다가 상대가 40명이나 되는 기사단을 이끌고 왔다면 요새의 병력과 불과 몇 명 안 되는 호위 기사들만으로 그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아빠, 전 안 가요. 테릭이 반드시 승리할 거예요.”
“아리아, 제발 정신 차려라. 여기 있다가는 우리 모두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왜 죽어요? 테릭은 그랜드마스터인데.”
“뭐!”
몽겔니오스 후작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왔다. 이 정도면 보통 중증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이번에 돌아가면 아리아의 정신에 이상은 없는지 확인해봐야 할 것 같았다.
그때 바람소리를 타고 저 멀리서 함성소리가 들려왔고, 곧바로 아군 병사들 사이에서도 우렁찬 함성소리가 터져 나왔다.
“와아~”
“오예~”
“아돌프, 이게 무슨 소리인가?”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아!”
아리아는 병사들의 함성에 혹시 테릭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황급히 요새의 담장 쪽으로 뛰어갔다.
그녀가 앞으로 달려가자 놀란 후작과 아돌프도 따라왔다.
“헉!”
“오!”
“거봐요. 테릭은 그랜드마스터라고요.”
아리아를 따라서 전장을 바라보던 후작과 아돌프는 자신들의 시력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몇 번이나 눈을 비비고 봤다.
그러나 분명 전투를 펼치는 두 사람의 검 끝에서는 찬란한 오러 블레이드가 솟구친 상태였다.
“아돌프, 지금 내가 잘못 본 것은 아니겠지?”
“저도 믿기지 않습니다.”
“세상에, 저 나이에 소드마스터라니.”
“최소한 소드마스터 중급 이상으로 보입니다.”
“아돌프 경, 테릭은 그랜드마스터에요. 분명 자기 입으로 그랜드마스터라고 했어요.”
“아! 네… 알겠습니다.”
아리아의 음성은 단호하기까지 했다. 때문에 아돌프는 차마 부정을 못했다.
하지만 그를 비롯해서 몽겔니오스 후작은 테릭이 설마 그랜드마스터라고는 믿지 않았다.
모두가 떨리는 심정으로 전투를 지켜보고 있을 때, 테릭은 시저스 기동을 펼쳐서 리건 백작의 공격을 피해내고 있었다.
리건 백작은 테릭이 오러 블레이드를 펼쳤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동체시력으로도 따라갈 수 없는 움직임을 보이자 경악하기 시작했다.
“헉! 어떻게?”
“왜 놀랐소?”
“그 나이에 소드마스터라니 대단하구나.”
“하하~ 난 소드마스터가 아니요.”
“그게 무슨 말이냐?”
“지금까지 즐거웠소.”
“뭐라!”
소드마스터와의 대결은 처음이었다. 때문에 테릭은 갖고 있는 모든 실력을 발휘하기보다는 자신과 비교하는데 중점을 뒀다.
그러나 오러-소드가 오러 블레이드에 충분히 맞설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기에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부터 나의 본 실력을 보여주겠소.”
“지금까지 실력을 숨겼다는 말이냐?”
“그렇소.”
‘설마?’
리건 백작은 그 순간 얼마 전에 들었던 얼토당토않은 보고가 떠오르며 불안해졌다. 하지만 저 나이에 그랜드마스터라니 그럴 수는 없다며 애써 부정했다.
그때 테릭의 검 끝에서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막대한 마나가 솟구쳐 올랐다.
“잘 가시오.”
“어림없다.”
리건 백작은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끼며 몸을 날렸다.
하지만 테릭이 시전한 스킬은 마나-밤이라는 폭발형 범위 스킬이었다.
꽈꽝~
“커헉~”
“총사령관님!”
“어서, 총사령관님을 구하라.”
“기사단, 돌격하라!”
마나-밤에 적중당한 리건 백작의 전신에 수십 개의 구멍이 났다. 그리고 그렇게 뚫린 구멍에서는 붉은 피가 쉼 없이 터져 나왔다.
백작을 따라 나왔던 기사들이 그를 구하기 위해 일제히 몰려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테릭의 사냥을 도와주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어차피 다음 목표는 너희들이었다.”
“막아라!”
퍼퍼펑~
테릭은 주저하지 않고 트리플-샷과 사이오닉 스톰을 잇따라 펼쳤다.
어두운 밤하늘에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현란한 뇌전의 불빛이 일대를 완전히 뒤엎었다.
잠시 후 폭발에 휘말린 40명의 기사들은 순식간에 재가 되어 사라졌다.
* * *
“레릭, 찾았냐?”
“아니, 막사에도 안 계시는데.”
“도대체 어디 갔지.”
“그냥 우리끼리 갈까?”
“조금만 더 찾아보자.”
“너무 늦지 않을까?”
“어차피 하이폰 군은 우리가 가기 전에는 후퇴 명령을 내리지 않을 거야.”
스탠리와 레릭이 몽겔니오스 후작을 찾아다녔지만 아리아를 찾아 총사령부를 떠난 후작은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스탠리는 출발 예정 시간보다 한 시간이 경과해서야 출발했다.
그가 30여 명의 기사들과 두 개의 여단을 이끌고 총사령부를 떠나고 있을 때, 테릭과 그를 따르는 6천의 병사들은 하이폰 군 진영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그들이 떠나간 자리에는 스탠리에게 당하기로 했던 하이폰의 1개 보병 연대와 1개 중장보병 대대의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어느새 몽겔니오스 후작이 테릭과 이번 거사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여러 지휘관 옆에 바짝 붙어 있었다.
“테릭 군, 지금의 병력들은 어떻게 된 것인가?”
“아빠, 이들은 소모적이고 추악한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결사대에요.”
후작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테릭이 아니라 그 옆에 바짝 붙어 있던 아리아였다.
“결사대라고? 그럼, 제럴드 백작의 승인은 받은 것인가?”
“우리가 전쟁을 종식시키겠다고 하면 제럴드 백작이 좋다고 승인하겠습니까?”
테릭의 반문에 몽겔니오스 후작의 안색이 시시각각 변했다.
명색이 후작이나 되는 그가 북동부 전선의 진실과 비밀을 모를 리 없었다.
다만 아인리히 공작의 우파 세력이 워낙 막강하기에 모른 척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말은 지금의 병력들이 지휘체계에 따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렇습니다. 뭐 굳이 변명을 하자면 적군 총사령관이 먼저 병력을 이끌고 침략해서 자위권 발동 차원에서 응전을 하다가 반격했다고 둘러댈 생각입니다.”
“그럼, 앞으로는 어찌할 셈인가?”
“눈앞의 적을 쓸고 볼턴 강까지 진격을 할 생각입니다.”
“볼턴 강이라고?”
“그렇습니다. 볼턴 강을 국경선으로 삼는다면 지금 같은 소모적인 국지전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아빠, 볼턴 강의 다리를 전부 끊어버린다면 하이폰 왕국도 어떻게 하지 못할 거예요.”
“흠.”
볼턴 강까지 진격하겠다는 테릭의 말에 몽겔니오스 후작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는 이동하는 와중에도 앞으로 벌어질 일을 다각도로 계산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리건 백작을 죽이고 수많은 하이폰 군을 살상한 이상 전쟁은 피할 수 없어.’
일국의 총사령관이자 소드마스터를 죽인 이상, 외교적인 경로로 해결책을 찾을 수는 없었다.
결국 양측은 어느 순간까지는 피 터지는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적을 전부 밀어내고 볼턴 강을 국경선으로 삼겠다는 테릭의 계획은 굉장히 뛰어난 전술이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랜드마스터라는 전무후무한 무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막말로 그 점만 잘 활용한다면 하이폰 왕국을 압박해서 볼턴 강을 국경선으로 확정하고 왕국을 좌지우지하는 좌우파도 동시에 견제할 수 있었다.
“테릭 군, 내 제안을 들어보겠는가?”
“제안이요?”
“난 지금이라도 국왕 전하와 연락을 할 수 있는 비상라인을 갖고 있네.”
“왕궁 수석 마법사라면 그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내가 결사대를 왕명을 받은 친위원정대로 만들어주겠네.”
“아빠, 그게 정말이에요?”
“그래, 그렇게 되면 결사대는 지휘체계를 따르지 않은 부분에서 충분히 자유로워질 수 있지.”
“오!”
“예~”
“테릭, 아빠의 제안을 얼른 받아들여.”
테릭과 지휘관들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물론 제안의 이면에는 국왕의 힘이 되어달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왕국을 좀먹는 좌우파 어디에도 가입하고 싶은 마음은 애당초 없었기에 문제될 건 없었다.
“저야 그렇게 된다면 좋지만 그렇게 되면 후작님의 입장이 난처해지지 않겠습니까?”
“왕명을 받아서 움직이는 일인데 왜 난처해진다는 말인가? 만약 누구라도 이의를 제기한다면 그것은 감히 왕명에 따르지 않겠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렇군요.”
“그때는 자네가 엄히 꾸짖는다면 그들이 뭐라 하겠는가?”
“제가요?”
“당연하지. 자네는 친위원정대의 대장이자 대륙 유일의 그랜드마스터가 아닌가? 이번 원정이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국왕 전하께서는 분명 그에 상응하는 작위와 상을 내리실 것이네.”
“아빠, 작위요?”
“암! 대륙 유일의 그랜드마스터라면 그에 걸맞은 작위가 당연히 있어야지.”
“와아~ 너무 잘됐다.”
몽겔니오스 후작의 의도는 더욱 명확해졌다.
그는 테릭에게 원정대의 대장자리와 작위를 줄 테니까 국왕의 핵심 측근이 되라고 하고 있었다.
후작의 제안에 옆에서 듣고만 있던 지휘관들이 크게 기뻐하며 발 벗고 나섰다.
그들은 이번 거사를 계획할 때부터 테릭을 따르겠다고 작정한 상태였기에 후작의 제안이 오히려 반갑기까지 했다.
누가 먼저였는지 모르지만 지휘관들은 스스럼없이 테릭을 대장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오! 대장님, 잘 부탁합니다.”
“대장님, 까짓것 합시다.”
“어차피 왕국을 바꾸기 위해 일어선 것 아니었습니까?”
“그럽시다! 우리가 힘을 모아서 썩어빠진 놈들을 다 몰아냅시다.”
“우리는 대장님을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한번 대장은 영원한 대장입니다.”
예상 밖의 일로 인해 모든 것이 술술 풀리자 테릭은 어리둥절해졌다.
하지만 북동부 전선의 추악한 전쟁을 종식시키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었다. 어차피 이번 기회에 공도 세우고 그랜드마스터의 실력을 드러내서 그에 합당한 지위를 얻고자 했었기에 후작의 제안을 거부할 필요는 없었다.
‘클클~ 너무 쉽게 풀리는 것 아냐?’
“좋습니다.”
“동의하는 것인가?”
“어차피 저는 좌우파 어느 쪽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하하~ 고맙네.”
테릭과 몽겔니오스 후작의 합의는 순식간에 결사대 전체에 알려졌다.
지휘관들과 달리 내심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병사들은 결사대가 국왕의 친위부대가 된다는 소식에 열광했다.
* * *
“아군 요새에 아무도 없다고?”
“그렇습니다.”
“그럴 리가 있나. 분명 잘 찾아봤는가?”
“네, 전투의 흔적은 있지만 어디에도 아군이나 하이폰 왕국군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2개 연대와 30명의 기사들을 이끌고 온 스탠리는 3대대가 주둔한 요새에 아무도 없다는 척후의 말에 크게 당황했다.
설령 3대대가 전멸했다고 해도 그들을 공격한 하이폰 군은 남아 있어야 했다.
만일 하이폰 군이 3대대만 전멸시키고 돌아갔다면 이것은 명백한 약속 위반이었다.
“전투의 흔적이 있다고?”
“그렇습니다. 요새 주변에 하이폰 군 시체가 즐비합니다. 얼추 짐작으로는 1개 연대 규모인 것 같았습니다.”
“뭐! 아군 시체가 아니라 하이폰 군 시체가 즐비하다고? 혹시 잘못 본 것 아닌가?”
“제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습니다.”
“도대체 누가?”
요새 근처에 죽어 있는 1개 연대의 하이폰 군이라면 스탠리에게 당하기로 약속된 병력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자신이 공격하지도 않았는데 그들이 왜 죽었는지 의문이었다.
또 그들에게 당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아군의 시체가 없는 점도 이상했다.
‘설마 수색대대가? 아냐, 그럴 리 없어.’
말이 좋아 수색대대지 기껏해야 100명 조금 넘는 병력이었다. 게다가 테릭을 잡기 위해 하이폰의 리건 백작이 기사단을 이끌고 출발했다고 했었다.
리건 백작과 그의 기사단이 출전했다면 수색대대는 모조리 전멸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스탠리, 이럴 게 아니라 빨리 가보자.”
“아! 답답하군. 분명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긴 것 같은데.”
“일단 가서 확인부터 하자고.”
스탠리는 너무나 궁금해서 병사들을 급히 재촉해 3대대가 주둔했던 요새로 향했다.
얼마 후 도착한 요새 주변에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시체들이 즐비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하이폰 병사들이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스탠리, 이제 어쩌지?”
“약속된 진격 지점까지 가볼까?”
“지금 상황에서 거기까지 가는 것은 위험하지 않을까?”
확실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섣불리 이동할 수는 없었다.
만약 지금의 모든 것이 하이폰의 함정이라면 그야말로 큰 곤경에 빠질 수도 있었다.
“안 되겠어. 내가 통신을 해볼게.”
“그래, 어서 해봐.”
레릭은 답답한 마음에 자신이 비밀리에 하이폰 측과 통신을 해보겠다고 텅 빈 요새로 들어갔다.
그러나 한참 후에 돌아온 그는 힘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왜?”
“통신이 안 돼.”
“정말 알 수가 없군.”
“스탠리, 혹시 우리 말고 다른 아군이 출전한 것은 아닐까?”
“말 도 안 돼. 그런 일이 있었으면 제럴드 백작이 얘기했겠지.”
“별수 없어. 일단 돌아가서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아보자.”
“아흐~ 열 받아.”
올 때는 공을 세운다는 생각에 기세 좋게 왔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
스탠리가 병력을 돌려 힘없이 돌아가는 그 시각, 테릭과 6천명의 원정대는 하이폰의 총사령부를 유린하고 있었다.
하이폰의 마법사가 레릭의 통신을 받지 못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적의 총사령관이 죽은 이상, 남은 것은 오합지졸이다.”
“그랜드마스터가 함께하는 이상 우리는 무적이다.”
“우리는 국왕 전하의 특명을 받은 친위원정대임을 잊지 마라!”
“와아아아~”
양측의 병력은 거의 대등했음에도 전투의 양상은 원정대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이는 인간 같지 않은 테릭의 무위와 몽겔니오스 후작의 대규모 마법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특히, 테릭의 사이오닉 스톰이 펼쳐질 때면 하이폰의 병사들은 썩은 짚단처럼 우수수 쓰러졌다.
그때쯤 견디다 못한 하이폰 군 생존자들이 퇴각하기 시작했다.
“적을 추격하지 마라.”
“먼저 전열을 정비하고 추격에 나서겠다.”
테릭은 하이폰 군이 퇴각하자 추적을 못하게 하고 전열을 정비할 것을 지시했다.
사이오닉 스톰의 1일 사용 한도를 전부 소모한 이상, 이제는 아끼고 아껴왔던 스크롤을 풀어야 할 때였다.
또 계속된 스킬 사용으로 텅텅 비어버린 마나도 급히 보충해야 했다.
테릭이 마나 포션을 급하게 들이켜고 있을 때 후작이 다가왔다. 그는 승리에 도취해서 연신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테릭 군, 난 국왕 전하에게 오늘의 상황을 보고하겠네. 친위원정대 문제를 매듭지어야지.”
“그렇게 하십시오.”
국왕에게 보고하는 것은 테릭도 내심 바라고 있던 일이었다.
후작이 통신을 위해 사라지자 테릭은 스크롤을 꺼내 지휘관들에게 나눠줬다.
얼마 후 통신을 끝낸 후작이 다가왔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국왕 전하가 취침에 들어가셔서 부수석 마법사에게 대략적인 상황만 보고했네.”
“그렇다면 아까 말씀하셨던 것들은 어떻게?”
“아! 그 문제라면 걱정 말게. 영민하신 국왕 전하라면 친위원정대의 얘기만 듣고도 대충은 짐작하실 것이네. 그리고 내일 오전에 다시 통신을 하기로 했네.”
“알겠습니다.”
“참! 자네 실력과 리건 백작을 죽인 얘기는 일부러 안 했네.”
“네, 왜요?”
“국왕 전하가 크게 기뻐할 일인데, 내가 직접 말씀드릴 생각이네.”
“아! 네.”
“자! 우리는 전열을 정비했으면 어서 공격을 하세. 놈들에게 대비할 시간을 줘서는 안 되네.”
“저 역시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 * *
“스탠리, 큰일 났다.”
“이 마당에 더 큰일이 있겠냐.”
“지금 수도에서 아인리히 공작님이 직접 연락을 해왔어.”
“아버지가?”
“그래.”
아무런 성과 없이 총사령부로 돌아온 스탠리는 오늘밤 아군의 출병이 있었는지부터 확인했다. 하지만 오늘밤 출전한 부대는 자신이 인솔한 부대가 유일했다.
황당한 결과에 화도 나고 기운도 빠진 그는 막사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전선에서 술을 마시는 행위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금지된 행위였지만 아인리히 공작의 후계자인 그에게 감히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슨 일로?”
“하이폰 군을 쓸어버린 놈이 테릭과 국왕의 친위원정대래.”
“누가 그런 헛소리를 해?”
“조금 전에 몽겔니오스 후작이 국왕 전하께 그런 내용의 통신 보고를 올렸대.”
아인리히 공작의 힘은 생각보다 대단했다.
그는 비밀리에 중도파로 알려진 귀족들도 포섭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몽겔니오스 후작이 절대적으로 신임하는 왕궁의 부수석 마법사도 있었다.
그는 몽겔니오스 후작의 통신을 아인리히 공작에게 그대로 일러바쳤다.
“몽겔니오스 후작이 그걸 어떻게 알아.”
“지금 후작도 테릭과 같이 있대.”
“뭐! 그게 사실이야?”
“그래, 지금 하이폰 군 총사령부를 점령한 상태래.”
레릭의 얘기를 들은 스탠리는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허탕을 치고 와서 열 받은 상태였는데, 이 모든 일의 주범이 테릭이라고 하니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도대체 그딴 놈이 무슨 재주로 하이폰 군 총사령부를 점령해?”
“친위원정대라고 했으니까 국왕의 지원 병력이 비밀리에 당도했나 보지.”
“몽겔니오스 후작이 이곳에 따라온다고 할 때부터 어쩐지 수상하더니 그런 꼼수를 준비했군.”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냐. 빨리 대책을 강구해야 돼.”
광분해서 침대를 걷어차던 스탠리는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레릭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테릭이 잘되는 꼴은 두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허겁지겁 제럴드 백작의 막사로 들어간 둘은 백작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백작님, 우리도 출병을 해야 합니다. 놈에게 모든 공을 뺏길 수는 없습니다.”
“지금 가면 늦지 않겠나? 또 아무리 서두른다고 해도 내일 오전 중에나 출병이 가능하네.”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그리고 더 지체했다가는 우리는 들러리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북동부 총사령관으로서 이번 일에 아무런 공을 세우지 않으면 제럴드 백작의 위치도 애매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제럴드 백작은 출병을 결심했다.
그때 지도를 살피며 고민하던 레릭이 무릎을 치며 탄성을 터트렸다.
“왜 그래?”
“내게 좋은 방법이 생각났어.”
“뭔데?”
“녀석을 포함한 친위원정대를 깨끗이 제거하는 방법이야. 그리고 그들만 제거된다면 이번 승리도 우리 공으로 돌릴 수 있어.”
“어떻게?”
“친위원정대로 하여금 볼턴 강을 넘게 만드는 거야.”
“녀석에게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다니, 미쳤어?”
“흥분하지 말고 잘 생각해봐. 아무리 친위원정대가 강해도 지원병과 보급이 없으면 결국은 패할 수밖에 없어.”
“그게 무슨 말이야?”
“간단해. 친위원정대로 하여금 계속해서 진격하게 하고 우리는 볼턴 강의 다리를 전부 끊어버리는 거야.”
“오!”
“아!”
하이폰 왕국의 영토 내에서 친위원정대를 고립시켜 전멸하게 만들자는 레릭의 계획은 간단하면서도 매우 효과적이었다.
특히 친위원정대의 소탕을 하이폰 측에 맡김으로써 이후에 있을 분란의 소지도 없었다.
“그런데 녀석들이 볼턴 강을 건너갈까?”
“그거야 넘어가게 만들면 되지.”
“어떻게?”
“아인리히 공작 각하로 하여금 국왕 전하의 명을 받게 하면 되지. 아! 몽겔니오스 후작이 국왕과 직접 통신을 하지 못하도록 부수석 마법사가 계속해서 수를 부려야지.”
“레릭, 넌 역시 천재야.”
“그거야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 아니었어?”
“뭐! 하하하~~”
침울하던 막사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제럴드 백작은 출병을 위한 집결 명령을 예하부대에 내리기 시작했고, 레릭은 아인리히 공작과 통신을 했다.
그 시각, 테릭과 원정대는 황급히 집결한 1만 5천명 규모의 하이폰 군을 격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