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난 아무 짓도 안 했네
길버트는 정중한 태도로 군나르 자작의 양해를 받고 접견실을 나왔다.
테릭이 대륙 최강의 그랜드마스터라면 원래의 계획을 시도했다가는 큰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슈피른 총괄 지부장과 통신을 하고 싶군.”
“준비하겠습니다.”
잠시 후 통신수정구에 슈피른 총괄 지부장의 상기된 얼굴이 나타났다.
“슈피른, 조금 전 보고 내용이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제가 직접 게일스 상단주에게 들은 얘기입니다.
“제국의 정보부와 연락은 해보았는가?”
-현재 제국의 정보부도 발칵 뒤집혀졌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하이폰 왕국에 침투해 있는 정보요원들의 보고에 의하면 얼마 전부터 몽블랑 백작과 하이폰 왕국 간의 연락이 두절되었다고 합니다.
전장의 총사령관과 연락이 두절되었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컸다.
설령 패배했다고 해도 이를 알리는 것이 전장에 파견된 통신 마법사의 임무였다. 그럼에도 연락이 두절되었다면 그것은 전멸을 의미했다.
즉, 게일스가 했던 얘기가 모두 사실임을 증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그런 사실이 여태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가 뭔가?”
-타라한 왕국의 아인리히 공작이 정보를 통제한 것 같습니다.
“그 말은 아인리히 공작이 모든 사실을 알고 의도적으로 통제했다는 의미인가?”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정황상 아인리히 공작도 전선의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한 것 같습니다.
타라한 왕국의 총괄 지부장은 좌우파와 중도파로 분열된 타라한 왕국의 정치 상황부터 시작하여 작금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아인리히 공작의 음모를 거의 정확하게 추측해냈다.
“그럴 수도 있겠어.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아인리히 공작이 이번에는 큰 실수를 했군.”
-제 생각이지만 이번 일로 인해 타라한 왕국의 권력 관계에 큰 변화가 올 것 같습니다.
“그러겠지.”
모든 상황을 파악한 길버트는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움직이는 것이 제너럴 상단에 유리할 것인지 깊은 고민에 잠겼다.
하지만 그는 마음속으로 어떻게든 테릭과 좋은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이미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대등한 계약을 체결해야겠어.’
대륙 최강의 사내를 적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
지금이야 모르고 있지만 곧 대륙 전역에 테릭의 소문이 진동할 게 분명했다.
게다가 그는 소주와 라이터라는 최고의 인기상품과 드워프들의 예술품까지 공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막말로 그랜드마스터라는 배경을 등에 업고 상단을 차리기라도 한다면 강력한 경쟁자로 성장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차라리 그에게 적정한 이윤을 보장해 주고 끌어안아야 해.’
더 큰 이익을 위해 눈앞의 이익도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사업이었다.
생각을 굳힌 길버트는 아예 테릭에게 힘을 실어주기로 작정을 했다.
“총괄 지부장.”
-하명하십시오.
“가능한 모든 인력을 동원해서 테릭 대장을 도와주게.”
-그리하겠습니다.
“아울러 상단의 모든 힘을 동원해서 친위원정대의 전공을 알리고 아인리히 공작의 속셈을 소문내게.”
-저희 타라한 지부와 아인리히 공작 사이에 얽혀 있는 것이 적지 않은 상황입니다.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아인리히 공작과의 관계는 정리하게.”
-알겠습니다.
길버트는 그 이후에도 몇 가지 지시를 내리고는 군나르 자작을 다시 찾았다.
특이한 것은 처음과 달리 길버트의 손에는 잘 포장된 상자가 들려 있었다.
“바쁘신데 자꾸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오.”
“아닙니다. 가신 일은 잘 마무리되셨습니까?”
“자작의 염려 덕분에 잘 마무리했소. 이것은 자작을 번거롭게 한 것 같아서 가져온 나의 선물이오.”
“제가 한 일도 없는데 이런 것을 받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약소한 것이니 부담 갖지 말고 받으시오.”
“주시는 것이니 성의를 생각해서 감사히 받겠습니다.”
군나르 자작은 길버트 후작이 왜 이렇게 잘 대해 주는지 영문을 몰랐지만 대놓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한편, 선물을 넘긴 길버트는 넌지시 테릭의 얘기를 꺼내며 군나르 자작의 눈치를 살폈다.
“자작은 참으로 훌륭한 아들을 둔 것 같소이다.”
“후작께서 제 아들놈을 아십니까?”
“어찌 모르겠소? 이번에 아카데미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북동부 전선에 자원해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다고 들었소.”
“그건 맞습니다만…….”
군나르 자작은 길버트의 말에 선뜻 수긍할 수 없었다.
자신이 알기로 테릭은 아카데미 내에서 늘 꼴찌를 도맡아서 했던 열등생이었다.
오죽하면 아카데미를 졸업하지 못하면 가문의 명부에서 도려내겠다고 했겠는가?
그나마 운 좋게 졸업은 해서 전선에 지원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역시 놀라는군.’
군나르 자작이 테릭의 얘기를 듣고 흠칫했던 것은 너무나 예상 밖의 후한 평가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는 길버트는 오해해서는 스스로 만족을 했다.
“도대체 어떻게 가르쳤기에 그 나이에 그토록 뛰어난 실력을 갖출 수 있는 것인지 참으로 궁금하오.”
“아무래도 후작님께서 뭘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습니다.”
“하하하~ 이미 다 알고 왔는데 뭘 그리 숨기시오.”
“제가 왜 숨기겠습니까?”
“하하하~ 그건 그렇고, 소주와 라이터는 보면 볼수록 신기한 것이 참으로 대단한 것 같소.”
“저도 우연찮게 접한 적이 있는데 그 맛과 효용에 참으로 놀랐습니다.”
‘역시 쉽게는 안 되겠어.’
이렇게까지 말했음에도 끝까지 모른 척하는 것이 군나르 자작도 보통은 아닌 듯했다.
길버트는 이쯤에서 슬쩍 뒤로 물러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나를 경계하는 것이 당연해.’
처음 만남에서 끝장을 보려는 것은 초보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차라리 오늘은 이쯤에서 운만 띄우고 훗날 제너럴 상단이 테릭을 적극 도운 것이 알려진 후에 다시 접촉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 * *
게일스 상단의 일을 처리한 테릭은 저택으로 돌아와서는 그란티아에 접속했다.
잠시 후, 테릭이 나타난 장소는 해방군들의 비밀 아지트였던 랭카스터 시내에 있는 한 건물 지하창고였다.
“반군을 주살하라.”
“단 한 명도 살려두지 마라.”
“놈들의 탈출을 봉쇄하라.”
“건물 외곽의 경계도 강화하라!”
테릭은 접속하자마자 요란한 함성과 비명소리를 들었다.
그때 레이나의 다급한 귓속말이 들려왔다.
=>테릭, 왜 이제 온 거야?
=>미안해. 그런데 무슨 일이야?
=>큰일 났어. 병사들이 조금 전에 공격을 해왔어. 원래는 아까 떠나려고 했는데, 내가 너를 기다려야 한다고 하는 바람에…….
원래 테릭은 금방 다녀오겠다고 말한 후 접속을 종료했었다. 하지만 뜻밖의 전투가 벌어지는 바람에 예상보다 훨씬 늦게 접속한 상태였다.
레이나의 말대로라면 해방군들은 자신을 기다리느라 이곳을 떠나지 못했고, 그러다가 공격을 받은 듯했다.
=>그랬구나. 그런데 넌 어디야?
=>지금 2층에서 해방군들과 함께 싸우고 있어. 그런데 다들 부상이 심해서 힘든 상황이야.
=>알았어. 나도 올라갈게.
이유야 어찌되었든 자신 때문에 위험에 빠진 해방군이었다.
허겁지겁 위로 올라간 테릭은 1층을 가득 메우고 있는 병사들을 봤다.
병사들은 2층과 계단에서 저항하고 있는 십여 명의 해방군과 전투를 벌이느라 아직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놈들, 죽어라!”
다급히 검을 뽑은 테릭이 사이오닉 스톰을 펼쳤다.
앞에 있는 반군만 신경 쓰고 있던 병사들은 사이오닉 스톰의 폭발에 휘말려 새까만 재로 변하고 말았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능동형을 선택하셨기에 5개의 스텟 포인트가 자동으로 분배됩니다.
-병사들을 너무 많이 죽였기에 P.K수치가 상승했습니다.
-P.K수치가 높아서 캐릭터의 상태가 카오 상태로 변했습니다.
-카오 상태에 따른 페널티가 부과됩니다.
-카오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공적치를 올려야만 합니다.
병사들을 죽여서 레벨이 올라간 것은 좋았지만 뜻하지 않게 카오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에 연연할 때가 아니었다.
“적이다!”
“적이 뒤에서 나타났다.”
“적은 한 명에 불과하다. 공격하라!”
운 좋게 사이오닉 스톰에 휘말리지 않은 병사들과 건물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6~7명의 병사들이 테릭에게 달려왔다.
테릭은 이왕 카오가 된 것, 아예 작정하고 검을 휘둘렀다.
“크아악~”
“커헉!”
“놈이 너무 세다.”
“지원군을 요청하라.”
눈 깜짝할 사이에 7~8명의 병사가 쓰러지며 포위망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때를 맞춰 2층에서 저항하던 해방군의 화살 공격과 레이나의 마법이 더해졌다.
테릭은 그 틈을 이용해 건물 안으로 들어왔던 모든 병사들을 쓰러트렸다.
“테릭, 문을 닫아.”
“아! 알았어.”
테릭은 병사들이 더 이상 건물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재빨리 출입구를 단단히 틀어막고는 2층으로 올라갔다.
“테릭.”
“레이나, 늦어서 미안해.”
“어쩔 수 없지. 그보다 여기를 벗어나야 할 것 같은데 병사들이 워낙 많이 깔려서 큰일이야.”
“어디 봐.”
아직 전체적인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테릭은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봤다.
밖은 수백 명의 병사들이 건물을 철통같이 에워싸고 있었고, 그 너머로는 수많은 백성들이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이곳의 상황을 주시했다.
테릭은 미안한 마음에 사과할 생각으로 안면이 있는 해방군을 찾았다. 하지만 상당수의 해방군은 이미 시체로 변한 상태였다.
그중에는 테릭에게 이곳의 실정을 설명해줬던 카스트로의 시체도 있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살아 있는 해방군이 하나같이 화살에 맞아 중상을 당한 상태였고, 심지어 레이나도 부상을 당한 상태였다.
다만 그녀는 그나마 실드 때문에 중상을 입은 다른 사람과 달리 거동이 자유로웠다.
“아! 나 때문에…….”
“테릭, 자책하지 마. 저분들은 운이 없었던 거야.”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놀다가 늦게 온 것 아냐.”
“알아. 그러니까 진정해.”
“이럴 줄 알았으면 여기부터 바로 왔을 텐데.”
게일스 상단을 들리지 않았다면 좀 더 빨리 돌아왔을 것이고, 그랬다면 지금의 불행은 피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때늦은 후회였다.
그때 부상을 당한 해방군이 다가왔다.
“부탁이 있소.”
“뭡니까?”
“우리를 대신해서 이 편지를 해방구에 있는 우리의 지도자인 하울님에게 전해 주시오.”
“같이 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길을 뚫겠습니다.”
“여기를 빠져나간다 해도 부상당한 몸으로 해방구까지 가는 것은 무리요. 그리고 우리 때문에 해방구의 위치가 드러날 수도 있소.”
“하지만 우리는 해방구의 위치를 모릅니다.”
“이곳을 빠져나가서 제이미의 빵집을 찾아가 톰이라는 소년에게 부탁하면 안내를 해줄 것이오.”
테릭은 자신이 이들을 버리면 이들 역시 비참한 최후를 당한다는 걸 알기에 그를 비롯한 다른 해방군을 설득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결심을 한 듯 고개를 흔들었다.
“놈들에게 해방구의 위치를 알려줄 수는 없소.”
“카스트로하고는 한날한시에 죽기로 약속을 했소.”
“하지만 우리가 나간다면 어차피 위치가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병사들은 아직까지 이방인인 당신들의 존재를 모르고 있을 것이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돌격해서 저들의 시선을 유인할 테니, 당신들은 모습을 감추시오. 이방인만이 가능한 그게 있지 않소.”
아마도 모습을 감추라는 것은 접속 종료를 얘기하는 것 같았다.
테릭은 차마 이들을 버릴 수가 없어 망설였다.
그때 우지끈 소리가 나며 막혀 있던 나무문이 부서지면서 병사들이 난입했다.
“어서!”
“아! 알겠습니다.”
“고맙소.”
“띠링~ 띠링~”
<랭카스터 해방군에게 중요한 서신을 전달하자.>
국왕의 전제와 폭압에 저항하는 랭카스터 해방군이 무장 봉기를 하고자 한다.
해방군에 동조하는 군부의 지휘관들이 해방군 지도부에 전하는 비밀서신을 전달하자.
퀘스트명 : 비밀서신을 해방군의 지도자 하울에게 전달하자.
난이도 : 6
기한 : 24시간 이내
보상 : 30골드. 공적치 40
편지를 받는 순간, 테릭과 레이나에게 퀘스트가 부여되었다.
둘은 해방군의 독촉을 받으며 다급히 접속을 종료했다.
해방군은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자 서로의 심장에 비수를 찌르며 자결했다.
* * *
한숨 푹 자고 일어난 테릭이 다시 그란티아에 접속한 것은 미리 약속한 대로 7시간 후였다.
먼저 도착해 있던 레이나는 테릭이 접속하자마자 황급히 다가왔다.
“레이나.”
“쉿!”
“왜?”
“건물 밖에 아직도 병사들이 지키고 있어.”
예상대로 해방군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고, 붉게 얼룩진 핏자국만 남아 있었다.
레이나는 옥상을 통해 빠져나가자고 했다.
잠시 후 도둑고양이처럼 조심스런 걸음으로 옥상으로 올라간 두 사람은 지붕을 밟으며 계속 몇 개의 건물을 넘었다.
“테릭, 저기인 것 같은데?”
“응, 맞는 것 같다.”
운 좋게도 제이미의 빵집은 그리 멀지않은 곳에 있었다.
잠시 후 빵집 앞에 도착한 둘은 가게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스르륵~
“문이 안 잠겨 있어.”
“들어가 보자.”
이른 새벽이었지만 제이미의 빵집은 문이 열려 있었다.
둘은 행여나 다른 사람이 볼세라 얼른 빵집 안으로 들어갔다.
“누구세요?”
“아! 네가 톰이라는 아이니?”
“그런데요?”
“아!”
톰이라는 소년을 목격한 순간, 테릭과 레이나는 목이 메여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갈색 머리에 똘망똘망한 눈망울을 하고 있는 10살 남짓의 소년은 카스트로의 모습과 너무도 똑같았다.
둘은 본능적으로 톰이라는 소년이 카스트로의 아들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때 오븐과 장작이 쌓여 있는 안쪽의 작은 문이 열리면서 단아해 보이는 중년 여인이 들어왔다.
“톰, 누가 왔니?”
“엄마, 어떤 형이랑 누나가 왔어.”
“누… 누구세요?”
여인은 조금 전까지 울었는지 눈가에는 물기가 흐르고 있었고, 두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테릭과 레이나는 여인이 남편의 죽음을 알고 남몰래 울다가 나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부탁이 있어서 왔습니다.”
“누구신데요?”
“아! 저희들은 어제 저녁에 카스트로 아저씨를 비롯해서 그분 동료들과 같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어제 저녁이라면… 설마?”
“맞습니다. 그분들이 저희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고 간 일이 있어서 도움을 청하려고 왔습니다.”
“아!”
남편의 최후를 지켜본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여인은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참았다.
레이나는 시키지도 않았건만 여인에게 다가가 그녀를 끌어안았고, 테릭은 톰이라는 소년과 얘기를 주고받다가 번쩍 안아서는 가게 뒤쪽으로 사라졌다.
“어! 형이 우리 아빠를 알아요?”
“당연하지. 아마 랭카스터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카스트로 아저씨가 얼마나 훌륭한 분인지 다 알고 있을걸.”
“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마 카스트로 아저씨는 앞으로도 톰이 씩씩하고 건강하게 자라나기를 바랄 거야.”
“저도 그럴 생각이에요.”
“그래, 앞으로 힘든 일이 있어도 형이 한 말 잊지 마.”
“네.”
톰이 없는 가게 안에서 레이나를 끌어안은 채 소리 없는 흐느낌을 토해내던 여인은 어느 순간 스스로를 진정시키며 필요한 도움이 뭐냐고 물었다.
“저희는 중요한 서신을 해방구에 전해야 하는데 위치를 몰라요. 그런데 그분들이 이곳으로 가면 톰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왔어요.”
“네, 잠시만이요. 톰, 이리 와볼래.”
가게 뒤편에 있던 테릭과 톰은 여인이 부르는 소리에 다시 가게로 들어왔다.
톰은 테릭이 목마를 태워주며 함께 놀았기에 잔뜩 신이 난 표정으로 질문했다.
“왜요?”
“아빠랑 자주 놀러갔던 산속의 오두막 알지?”
“네, 그런데 왜?”
“여기 있는 형이랑 누나를 거기까지 데려다줄래?”
“싫은데. 아빠가 거기는 아무도 데려오면 안 된다고 했어.”
“알아. 그런데 이번에는 아빠가 형이랑 누나를 데려오라고 했어.”
“정말?”
“그래.”
“와~ 거기 가면 아빠를 볼 수 있는 거야?”
“그… 그건 잘 모르겠어.”
톰은 아직 아빠의 죽음을 모르고 있었다.
테릭과 레이나는 아빠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기뻐하는 톰의 모습을 차마 계속 볼 수가 없어 고개를 돌렸다.
“엄마, 지금 바로 갈래.”
“그래, 엄마가 먹을 걸 줄 테니까 갖고 가.”
“응.”
레이나는 빵을 비롯해서 이것저것 음식을 가방에 담는 여인에게 다가가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그리고 카스트로를 대신해서 그가 아내에게 전하는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슬픔을 참으며 먹을 것을 싸던 여인은 원두막이 해방군의 경비 초소임을 얘기했다.
“그럼, 그곳에서 해방군을 만날 수 있나요?”
“아마도요.”
잠시 후 톰을 앞세운 두 사람은 가게 문을 열고 나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톰은 환한 미소를 그리며 엄마를 향해 손을 열심히 흔들었다.
“엄마, 얼른 갖다 올게.”
“으… 응.”
테릭과 레이나는 가는 도중 슬쩍 고개를 돌려 빵집을 바라봤고, 제이미라는 톰의 엄마는 그때까지도 문 앞에 서서 톰을 바라보며 눈물을 찍어내고 있었다.
* * *
“여기서 기다리시오.”
“알겠습니다.”
도시를 빠져나온 셋은 산속을 계속 누빈 끝에 그날 정오쯤에 해방군을 만났다.
해방군은 숲속 어딘가에서 세 사람을 기다리게 해놓고는 하울이라는 지도자를 데려왔다.
“난 하울이라고 한다네.”
“뵙게 되서 반갑습니다. 전 테릭이라고 합니다.”
“전 레이나에요.”
“듣자니 서신을 가져왔다고.”
“그렇습니다.”
테릭은 서신을 꺼내 하울에게 전했다.
하울이 서신을 받는 순간 알람소리가 들려왔다.
“띠링~”
-비밀서신을 해방군의 지도자 하울에게 전달하자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퀘스트 보상으로 30골드가 지급되었습니다.
-퀘스트 보상으로 공적치 40이 지급되었습니다.
-퀘스트 보상으로 경험치가 지급됩니다.
하울은 서신을 받자마자 그 자리에서 읽기 시작했다.
테릭과 레이나는 가도 좋다는 말이 없어서 어떻게 할지 몰라 그 자리에서 기다렸다.
이윽고 서신을 다 읽은 하울은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테릭과 레이나를 바라봤다.
“두 사람 덕분에 서신은 잘 받았소.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되겠소?”
“말씀만 하세요.”
“저도 상관없어요.”
카스트로를 비롯한 해방군의 죽음이 자신 때문인 것 같아 미안해하던 테릭이었다. 때문에 테릭은 해방군의 일이라면 무조건 도와줄 생각이었다.
“내 답장을 왕궁 내에 있는 경비단장에게 전해줄 수 있겠소?”
“뭐든 들어줄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왕궁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어서 성공할 수 있을지는 장담을 못하겠습니다.”
“왕궁 침투는 외부에서부터 연결된 비밀지하통로를 이용하면 될 터이니, 그 점은 걱정 안 해도 좋네.”
“그렇다면 좋습니다.”
“띠링~ 띠링~”
<하울의 답장을 왕궁의 경비단장에게 전달하자.>
착취에 신음하는 백성을 구하기 위해 해방군과 왕궁 경비대가 뜻을 합쳤다.
답장을 기다리는 경비단장에게 하울의 서신을 전달하자.
단, 보안을 위해 왕궁의 경비병들에게 절대 들키지 않아야 한다.
퀘스트명 : 하울의 서신을 경비단장에게 전달하자.
난이도 : 7
기한 : 24시간 이내
보상 : 30골드. 공적치 40
새로운 퀘스트를 받은 테릭과 레이나는 톰을 제이미의 빵집에 데려다줬다.
시간은 어느덧 꽤 흘러 오후 5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테릭, 지금 바로 갈까?”
“미안한데, 나는 지금 나가봐야 해.”
“퀘스트 조건이 24시간인 것은 알고 있지?”
“응, 오늘밤 12시에 다시 접속할 테니까 그때 같이 들어가자.”
“그래, 좋아.”
“고마워, 레이나.”
“이따가 늦지나 마.”
“알았어.”
작별인사를 나누고 접속을 종료한 테릭은 포겔 성으로 가서는 몽겔니오스 후작을 찾았다.
후작은 아리아와 함께 성벽 위에서 병사들이 기마 훈련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테릭!”
“오! 테릭 대장, 일은 어떻게 되었는가?”
“예상대로 수도에서는 원정대의 일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죽일 놈들.”
“하지만 곧 수도 전역에 원정대의 일이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게일스 상단과의 일은 잘 풀렸나?”
“그렇습니다. 제가 간 날만 해도 왕국 내의 상단은 물론이고 외국의 상단도 있었으니, 조만간 대륙 전역에 우리의 일이 소문나게 될 것입니다.”
“잘되었군, 정말 잘되었어.”
후작은 큰 고비를 넘었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후작의 마음고생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아리아는 그를 위로했다.
그 시각, 타라한 왕국의 수도는 원정대의 일로 완전히 들끓고 있었다.
특히 몽겔니오스 후작이 죽었을 것이라며 좋아하고 있던 아인리히 공작은 열이 뻗쳐서 노발대발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런 헛소문이 났는지 그 진상을 파악하라.”
“이번 괴소문의 근원지는 크고 작은 상단이라고 합니다.”
“괴소문의 근원지가 상단이라고?”
아인리히 공작은 어제부터 돌기 시작한 소문을 철저히 날조된 유언비어라고 생각했다.
그가 유언비어라고 생각한 이유는, 겨우 5천의 원정대가 5만이 넘는 하이폰 군을 전멸시켰다는 점과 얼토당토않게도 테릭이 원정대의 대장이라는 점이었다.
특히 테릭이 대륙 최초이자 최강의 그랜드마스터라는 부분에서는 너무 어이가 없어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때문에 그는 이번 유언비어를 퍼트린 세력의 배후에는 카이스트 공작의 좌파가 개입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분명 카이스트 공작의 지원을 받은 피에르 상단이 그 중심에 있을 것이다.”
“피에르 상단도 분명 소문에 일조하고는 있습니다만…….”
“그럴 줄 알았다! 근거도 없이 일국의 공작을 음해한 죄목으로 피에르 상단의 상단주는 물론이고 조금이라도 입을 벙긋거린 모든 상단주를 체포하라!”
아인리히 공작은 대뜸 피에르 상단을 그 배후로 지목하곤 체포령을 내렸다.
그러나 명령을 받은 가문의 가신들은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있었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이냐?”
“공작 각하, 피에르 상단은 그 출처를 정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뭐! 제깟 놈들이 출처를 밝혀?”
“그렇습니다. 그들은 제너럴 상단으로부터 정보를 얻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괴소문의 최초 근원지는 제너럴 상단인 것 같습니다.”
“뭐! 제너럴 상단이 왜?”
아인리히 공작이라고 해도 대륙을 대표하는 제너럴 상단은 건드리기가 어려웠다.
답답해진 공작이 방법을 찾지 못해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가문의 마법사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공작 각하, 북동부 국경에서 스탠리 공자님이 비상사태라며 긴급 통신을 요청했습니다.”
“비상사태?”
“아주 다급한 것이 무척 긴급해 보였습니다.”
“알았다.”
통신실로 들어간 아인리히 공작은 톰슨과 스탠리의 초조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톰슨은 아인리히 공작의 얼굴을 보자 다급하게 자신이 보고 겪었던 일들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 * *
“테릭 대장, 할 말이 뭔가?”
“아무래도 후작님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내 도움이라니, 뭔가?”
현재 랭카스터 왕국에 고립되어 있는 사정상 이전처럼 레이나를 방치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곳의 상황이 마무리가 되지 않은 가운데 그란티아 월드에만 접속해 있을 수도 없었다.
결국 고민 끝에 테릭이 생각해낸 해결책은 사실을 털어놓고 후작의 협조를 받는 것이었다.
“먼저 이걸 봐주십시오.”
“그게 뭔가?”
“차원이동기라는 드래곤의 마법물품입니다.”
“차원이동기라면, 차원을 왔다 갔다 한다는 것인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곳 아스리온 대륙과 그란티아 월드라는 이계를 연결하는 장치입니다.”
“세상에! 이런 작은 구슬에 그런 신비가 담겨 있다니, 믿을 수가 없군.”
몽겔니오스 후작은 떨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차원이동기를 받았다.
테릭은 몽겔니오스 후작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가 차원이동기를 얻게 된 계기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털어놓았다.
테릭의 얘기가 계속되면서 몽겔니오스 후작의 놀람은 점점 커져갔다.
“그러니까 소주나 망원경부터 시작해서 마법스크롤과 포션은 물론이고 이번에 가져온 비행화살도 그란티아라는 이계의 문물이라는 것인가?”
“그뿐만이 아닙니다. 제가 이 나이에 그랜드마스터라는 평가를 들을 수 있는 것도 그란티아에서 익힌 스킬 때문입니다.”
“엄청난 수련과 그에 동반한 깨달음을 얻어서가 아니라 단지 스킬 때문이라고?”
“그렇습니다.”
“그럼, 그랜드마스터가 아니라는 뜻인가?”
“엄밀히 말하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모른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스킬과 드래곤의 무구 때문에 그랜드마스터의 위력을 내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전에 비해 엄청 강해진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도대체 이해를 못하겠군.”
테릭의 실력이 그랜드마스터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은 충격이었다.
몽겔니오스 후작은 한참이나 고민에 잠겼다가 방금 한 얘기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향후 왕국의 정치판도가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어찌되었든 그랜드마스터라는 존재는 아주 강력한 무기였다.
때문에 후작 입장에서는 이를 세상에 알려봐야 득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중요한 비밀을 내게 털어놓는 이유가 뭔가?”
“차원이동을 하게 되면 이쪽의 상황을 전혀 모릅니다. 반대로 돌아온 후에는 그란티아의 상황을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러다보니 뜻하지 않은 사고가 생겼습니다.”
“사고라니?”
“그란티아에서 신세를 졌던 분들이 저를 기다리다가 죽었습니다.”
카스트로를 비롯한 해방군의 얘기였다.
테릭은 그들의 죽음에 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에 와서 차원이동기와 관련된 사실을 토로하는 이유도 카스트로를 비롯한 해방군의 죽음 때문인지 몰랐다.
테릭의 얘기를 들은 몽겔니오스 후작은 자신이 어떻게 하는 것이 도와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차원이동기에 마법을 걸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마법을 걸어달라고?”
“그렇습니다. 이곳에서 일이 있을 경우 차원 너머에 있는 제게 알릴 수 있는 마법만 있다면 큰 부담을 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마법사라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네.”
“아!”
드래곤이 마든 마법물품을 인간이 손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몽겔니오스 후작은 너무 안타까워하는 테릭의 모습이 딱해서 차원이동기를 세심하게 관찰했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봐도 드래곤하트와 엄청난 마법진이 집약된 차원이동기를 손볼 자신이 없었다.
“미안하네. 나로서는 감히 엄두도 낼 수가 없네.”
“휴우~ 알겠습니다.”
“그런데 차원이동기는 어떻게 작동하는 것인가?”
“마나를 주입하면 됩니다.”
“이렇게 말인가?”
후작은 테릭이 시키는 대로 차원이동기에 마나를 주입했다. 하지만 이미 테릭이 등록되어 있어서 그런지 차원이동기는 후작의 마나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테릭은 시범을 보이기 위해 자신이 직접 마나를 주입했고, 이내 후작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오! 세상에.”
후작은 눈앞에서 테릭이 사라지자 깜짝 놀라서는 차원이동기를 손에 쥐었다.
빛을 분출하며 테릭을 빨아들인 차원이동기는 어느덧 처음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왜 내게는 반응이 없는 거지?”
순수하게 감탄하던 후작은 시험삼아 자신의 마나를 다시 주입했다.
그러나 역시 아무 변화가 없는 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차원이동기에서 밝은 빛이 터져 나왔고, 어느덧 테릭의 모습이 다시 보였다.
“후작님, 방금 어떻게 하신 거예요?”
“뭘 말인가?”
“그란티아에 있는데 갑자기 안내 메시지가 들리더라고요.”
“난 아무 짓도 안 했네.”
“어! 분명 외부에서 자극이 들어온다고 안전을 위해 접속을 종료하라는 안내 메시지가 들렸거든요.”
“그런 안내도 자동으로 해준다는 말인가? 난 아까처럼 마나를 주입했을 뿐인데, 과연 드래곤이 만든 것이라 뭔가 달라도 확실히 다르군.”
테릭을 제외한 다른 플레이어들은 캡슐을 통해 그란티아에 접속을 한다. 그리고 접속한 상태에서 캡슐이 외부로부터 충격을 받게 되면 플레이어를 보호하기 위한 안전경보가 가동하게 되어 있다.
테릭의 경우에는 차원이동기에 마나가 주입되면 그런 반응이 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게임시스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테릭과 후작은 마냥 신기해하며 과연 드래곤이라며 감탄했다.
“제가 다시 차원이동을 할 테니 후작님께서는 다시 마나를 주입해보시겠어요?”
“그게 뭐가 어렵겠는가? 해보지.”
테릭은 다시 그란티아에 접속했고, 이번에도 똑같은 메시지를 듣고 나왔다.
뜻하지 않게 연락 방법을 찾은 테릭은 크게 기뻐하며 다른 부탁을 했다.
“앞으로 제가 없는 동안, 이동을 하게 되면 후작님이 차원이동기를 챙겨주십시오.”
“옳아! 그렇게 하면 차원이동을 간다고 해도 돌아오면 항상 우리 옆이겠군.”
“맞습니다.”
“알았네. 그렇게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