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아니 벌써? (48/90)

8. 아니 벌써?

“전하, 어서 피하셔야 합니다.”

“이 상황에서 어디로 피한다는 말이오?”

“전하와 왕가만 굳건하면 언제고 오늘의 수모를 갚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오. 짐의 병사들이 헛되이 피를 흘리는 걸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소.”

“전하!”

“솔직히 여길 빠져나갈 수 있다는 보장도 없지 않소? 그리고 설령 살아나간다고 한들 무슨 수로 복수를 한다는 말이오.”

“전하, 메즈텍 왕국이 있지 않습니까? 일단 왕궁을 탈출한 이후 메즈텍에 구원 요청을 하셔야 하옵니다.”

“그자에게 죽은 소드마스터가 몇 명이요? 메즈텍 왕국이 승산도 없는 전쟁에 병사들과 소드마스터를 내줄 것 같소?”

테릭이 스킬을 계속해서 펼치며 왕궁의 성벽과 외성을 묵사발 내는 동안 내궁에서는 국왕이 항복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이폰의 귀족들은 비분강개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찌해볼 방법이 없었기에 차마 국왕을 붙잡지는 못했다.

“오! 국왕 전하시다!”

“국왕 전하께서 나오신다.”

“아!”

테릭에게 밀려서 내성 안으로 쫓겨 들어간 병사들은 수척한 표정으로 걸어 나오는 국왕의 모습을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 병사들의 표정에는 이제는 살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왕국이 패전했다는 울분이 교차했다.

“짐이 하이폰의 국왕, 누미트리 데르 아실리안 5세이니 테릭 대장은 이제 그만 멈추게나.”

“전하, 조금 더 빨리 나오셨으면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었을 텐데 아쉽습니다.”

“지금이라도 사정을 봐주어서 고맙네.”

“그러게 전하가 바로 나오셨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 아닙니까?”

“그게 전부 짐의 불찰이네.”

“시간도 없는데 바로 시작하시죠.”

테릭은 이왕 작정한 것 끝까지 강하게 몰아붙일 생각이었다.

테릭의 재촉에 아실리안 5세는 지금 당장 항복을 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는 무릎을 꿇었다.

국왕이 무릎을 꿇자 뒤따라 나온 여러 귀족들의 입에서 흐느낌 같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크윽~”

“으윽~”

너무도 오만한 테릭의 태도에 하이폰의 귀족들은 이빨을 깨물며 울분을 삼켰다.

테릭은 미리 준비한 대로 무조건적인 항복을 요구했다. 아울러 현재 원정대가 차지하고 있는 카일록 성까지의 영토를 타라한 왕국에 편입하겠다고 했다.

왕국의 소드마스터를 전부 잃고 어지간한 마법사까지 전멸한 하이폰으로서는 분하지만 그 조건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항복 문서를 준비하시지요.”

“그리하지.”

항복 문서 작성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테릭은 항복 문서가 작성되는 도중에 버럭 공작을 불렀다.

“당신이 버럭 공작이오?”

“그렇소. 날 보자고 한 이유가 무엇이오?”

“버럭 공작, 분명히 경고하겠소.”

“뭘 경고한다는 얘기요?”

따지고 보면 버럭 공작은 아인리히 공작과 함께 전쟁의 중요한 원인을 제공한 자였다.

테릭은 버럭 공작과 아인리히 공작의 추악한 협잡행위를 따끔하게 질책했다.

아울러 그러한 움직임을 또다시 보인다면 그때는 가만있지 않겠다는 강력한 경고까지 했다.

“버럭 공작, 앞으로 본국의 아인리히 공작과 밀담을 나누지 마시오. 만일 그런 기미가 있다면 내가 당장에 날아와서 공작의 목을 베겠소!”

“그리하겠소.”

“명심하시오. 내가 당신을 주시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때는 하이폰 왕국을 아예 멸망시키겠소.”

“헙!”

만약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헛소리라 여기고 무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테릭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불과 이십여 분에 불과했지만 왕궁의 외성과 성벽은 테릭으로 인해 완전히 초토화된 상태였다.

이런 무시무시한 강자가 진심으로 멸망시키겠다고 달려든다면 그때는 왕궁이 아니라 키스턴 시 전체가 하루 만에 폐허로 변할 것 같았다.

“테릭 대장, 우리 측은 모든 서명을 끝냈는데 귀국의 서명과 인장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

“늦어도 오늘밤까지는 본국 국왕 전하의 서명과 인장을 받아서 돌아오겠습니다.”

국가 간의 공식 서류는 양국 국왕의 서명과 함께 옥새가 찍혀야 했고, 최소한 국왕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자가 대리를 해야 유효했다.

하지만 테릭의 공식 신분은 정확히 말하면 북동부방면 국경수비군 2사단 수색 3대대 2중대장이었다.

즉, 테릭이 서명을 해서는 항복 문서가 국제사회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할 수도 있었다.

“혹시 귀국의 국왕께서 이 근처까지 오셨는가?”

“국왕 전하는 본국의 왕궁에 계십니다. 하지만 약속하건데 내일이면 완벽한 문서를 받아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걸 무슨 수로 한다는 것인가?”

“가능하니까 염려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항복 문서를 챙긴 테릭은 늦어도 내일까지는 오겠다고 말하고는 곧장 파워 헤이스트를 펼쳤다.

하이폰의 국왕과 대신들은 빠르게 멀어져가는 테릭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테릭은 왕궁을 벗어나자마자 미리 준비한 텔레포트 스크롤을 찢었다.

하지만 워낙 빠른 속도였기에 그가 스크롤을 찢어서 사라졌다는 걸 목격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 * *

“일단 왔는데 어쩐다?”

전쟁을 빨리 종결하겠다는 생각에 하이폰의 항복은 받아냈지만 국왕의 서명과 인장을 받는 일도 문제였다.

그리고 그 문제가 끝나면 쉴 새 없이 아버지를 찾아가서 상의를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냥 이렇게 된 것, 계획대로 밀고 가자.”

마음을 굳힌 테릭은 곧장 인비저빌리티를 펼친 후, 에어 워킹을 펼쳐 왕궁을 넘어갔다.

왕궁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국왕이 내궁에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저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것이 내궁이겠지.’

외궁이 왕국의 힘과 권위를 상징하기 위해 웅장하고 장엄한 형태의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면, 내궁은 화려하고 아름다움을 강조한 건축 양식이었다.

때문에 왕궁에 처음 온 테릭도 외궁과 내궁은 쉽게 구별할 수 있었다.

‘어! 누구지?’

내궁 주변을 빙빙 돌며 살피던 테릭은 온갖 화초로 잘 가꾸어진 정원과 그 안에서 산책하는 남자를 발견했다.

테릭은 남자를 발견한 순간 그가 국왕임을 알 수 있었다.

‘내려가서 만나볼까?’

테릭이 정원에서 비밀리에 국왕을 만나는 동안, 아인리히 공작은 심각한 표정의 카이스트 공작과 마주하고 있었다.

카이스트 공작은 마치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씩씩거리며 흥분했다.

“아인리히 공작, 소문 들으셨소?”

“그렇소이다.”

“이제 어찌할 생각이요.”

“카이스트 공작, 너무 흥분하지 마시오.”

“지금 흥분 안 하게 생겼소? 분명 원정대는 보급품은 물론이고 식량과 식수가 없어서 어려운 지경에 놓여 있다고 하지 않았소?”

“분명 그리 하다고 들었소.”

“그렇다면 그들이 어떻게 카일록 성을 함락할 수 있다는 말이오?”

“카이스트 공작, 단지 소문일 뿐이오.”

“소문이 온 도시를 뒤흔들고 있는데 아인리히 공작은 무슨 생각으로 그리 태평이시오?”

“공작, 잘 생각해보시오. 이번 소문은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요.”

“그게 뭐요?”

카이스트 공작을 잔뜩 흥분하게 해서 달려오게 만든 원인은 원정대가 카일록 성을 함락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번 전투에서 5명 남아 있던 하이폰 왕국의 소드마스터는 물론이고, 어렵사리 구성했던 마법병단까지 전멸했다는 소식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이 일로 소문을 접한 수도의 모든 백성들은 테릭과 원정대의 전공을 높이 찬양하고 있었다.

현재 수도 내에서 테릭이 그랜드마스터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철저하게 정보 통제를 받고 있는 국왕과 왕자를 포함한 얼마 되지 않는 왕족들뿐이었다.

“먼저 보병으로 구성된 원정대가 미도 성에서 카일록 성까지 어찌 그렇게 빨리 이동할 수 있겠소?”

“그건 나도 이상하게 생각했소.”

“그리고 이번 소문의 근원지가 게일스 상단이라는 점도 이상하지 않소?”

“제너럴 상단이 아니라 게일스 상단이라고 했소?”

“은밀하게 조사한 결과, 이번 소문은 제너럴 상단에서 유출된 것이 아니었소. 제너럴 상단은 이번 일에 대해 그 어떤 언급도 없었소.”

“이것들을 당장!”

게일스 상단이 테릭으로부터 공급받은 소주와 라이터를 비롯한 여러 물품을 판매한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카이스트 공작은 게일스 상단이 의도적으로 테릭을 띄우기 위해 그런 소문을 냈다고 판단했다.

“더 황당한 얘기를 들어보겠소?”

“뭐요?”

“얼마 전에 테릭이 직접 게일스 상단을 다녀갔다는 소문도 있소. 심지어 그를 봤다는 상인도 있소.”

“이런 육시랄 놈들! 무슨 저의로 그런 소문을 내는지 당장 잡아다가 족쳐야겠소.”

“아! 진정하시오. 그런 짓을 벌였다가는 괜한 오해를 받을 수도 있소. 그리고 게일스 상단주는 오히려 잘못된 소문이라고 수습을 하고 있소.”

“휴우~ 공작 얘기를 들으니 이제야 안심이오.”

아인리히 공작은 카이스트 공작이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카이스트 공작은 본래의 신색을 되찾았다.

“이번 일을 계기로 느꼈는데, 종전 협상을 빨리 끝내야겠소.”

“그 점은 나도 동감이오. 그리고 소문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 같은데, 언제까지 국왕을 속일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소.”

“좋소. 시간을 끌면 소문처럼 의외의 상황이 생길 수도 있으니 적당한 선에서 협상을 끝내겠소.”

“협상이 끝나자마자 국왕에게 보고를 올려야 하지 않겠소? 그런데 국왕이 여태 그런 일을 알리지 않았다고 질책을 하지 않겠소?”

“미리 입을 맞춘 후, 좌우파의 모든 귀족들이 국익을 위해 그랬다고 한목소리를 내면 되지 않겠소.”

“좋소! 어서, 버럭 공작과 통신을 시도해보시오.”

소문처럼 원정대가 또 한 번의 큰 승리를 거두거나 하이폰 왕국과 종전 협상이라도 체결하면 큰일이었다.

아인리히 공작은 가문의 마법사를 불러 버럭 공작과 통신을 시도했다.

그러나 테릭의 경고를 받은 버럭 공작은 이미 통신 채널을 변경한 상태였기에 교신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두 공작은 다급한 표정으로 자꾸 뜸을 들이는 마법사가 이상해 재촉을 거듭했다.

“죄송합니다. 통신을 연결할 수 없습니다. 아무래도 저쪽에서 통신 채널을 변경한 것 같습니다.”

“버럭 공작 측에서 통신 채널을 변경했다고?”

“그렇습니다.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전혀 반응이 가지 않는 걸로 봐서는 그게 확실합니다.”

“이런!”

“아인리히 공작, 이게 어찌된 일이오? 혹시 원정대가 저들과 접촉이라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소?”

뜬금없이 괴소문이 돌때부터 이상했다.

아인리히 공작은 지금의 상황을 분석하기 위해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카이스트 공작의 추리가 제법 타당했다.

“공작, 무슨 대책을 강구해야 하지 않겠소?”

“이제는 어쩔 수 없는 것 같소. 국왕께 보고하고 우리 측에서 전권대사의 역할을 따내야 할 것 같소.”

“서둘러야 하지 않겠소?”

비록 원정대가 직접 협상을 한다고 해도 국왕의 전권을 대리 받았다는 공식 위임장이 없으면 그 협상은 실효권이 없었다.

그 말은 전권대사의 역할만 따내면 협상 테이블에서 몽겔니오스 후작을 밀어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입궁 가능한 귀족들을 오늘밤 중으로 집결시킵시다.”

“그렇다면 국왕을 만나는 것은 내일 오전으로 잡으면 될 것 같소.”

“그리해야지요.”

* * *

그날 밤 아인리히 공작의 저택에는 현재 수도에 머물고 있는 좌우파의 모든 귀족들이 모여들었다.

좌우파 귀족들이 두 공작으로부터 지시에 가까운 얘기를 듣는 그 시각, 볼턴 강에는 모리타 백작이 이끄는 3천의 병력이 추가로 의용군에 합류했다.

방금 도착한 모리타 백작은 직접 군나르 자작의 막사를 찾아와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모리타 백작님께서 직접 와주시다니 영광입니다.”

“늦게 와서 미안할 뿐이오.”

“어차피 빨리 오셨다고 해도 다리가 끊긴 상태였으니 지금과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지금 가교를 건설한다고 들었는데 어찌되고 있소?”

“앞으로 이틀은 지나야 완성된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원정대는 보급이 끊겨서 고생이라고 하던데 걱정이오. 이게 다 아인리히 공작의 음모가 아니겠소?”

“당시로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던데 믿어야지요. 그리고 원정대의 규모로 봤을 때 곧 패해서 쫓겨 온다고 판단했겠죠.”

“그게 얼마나 얄미운 행동이요? 아군의 전력이 그 상태라면 가서 도울 생각을 해야지, 다리를 끊다니.”

북동부 수비군이 볼턴 강의 다리를 전부 끊은 행위는 누가 보더라도 그 의도가 명확했다.

아인리히 공작과 제럴드 백작의 졸렬한 행위를 꾸짖던 모리타 백작은 화제를 바꿔 몽겔니오스 후작과 테릭의 얘기를 했다.

특히 테릭의 얘기를 할 때는 한 명의 기사로서 순수한 감탄과 찬양을 아낌없이 보냈다.

“군나르 자작, 테릭 군의 어릴 적은 어땠는지 얘기해줄 수 있겠소.”

“어릴 적에는 굉장히 뛰어났는데 갈수록 평범해졌습니다.”

“젊은 나이에 그랜드마스터에 오른 희대의 천재가 갈수록 평범해졌다니, 믿기지 않소.”

“사실입니다. 저도 아들이 그랜드마스터라는 얘기는 소문을 듣고서야 알았습니다.”

“하하하~ 너무 숨기시는 것 같소이다.”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사실입니다.”

테릭의 어릴 적 얘기를 하면 모든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는 테릭이 어느 순간부터 실력을 숨겼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모리타 백작 역시 이점에서는 다르지 않았다.

그때 막사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군나르 자작은 막사 안으로 들어온 젊은 남자를 발견한 순간,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아버지!”

“테릭.”

“테릭?”

“그동안 잘 계셨습니까?”

“너야말로 어찌된 일이냐?”

“군나르 자작, 혹시?”

“아차! 어서 인사 드려라. 모리타 백작님이시다.”

“오! 모리타 백작님을 뵙습니다.”

타라한 왕국을 대표하는 소드마스터이자, 끝까지 국왕께 충성을 바치다가 아인리히 공작과 우파의 견제로 중앙 정계에서 밀려난 이가 모리타 백작이었다.

한때는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기에 테릭은 최대한 경의를 표하며 예를 올렸다.

“그랜드마스터의 예를 받다니, 내가 영광이네.”

“아닙니다. 백작님은 우리 타라한 왕국의 살아있는 전설이며 기사의 표본과도 같습니다. 저 역시 어릴 때 백작님을 동경하며 검을 수련했습니다.”

“하하~ 빈말이라도 기분은 좋군.”

“추호의 거짓도 없는 진심입니다.”

“테릭,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난 너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궁금해 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테릭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제너럴 상단에서 소주와 라이터의 생산지를 찾는다며 자이스빌을 뒤졌다면 아버지를 만났을 가능성이 많았다.

“뭣부터 대답하면 되겠습니까?”

“도대체 어떤 재주를 부렸기에 그랜드마스터라는 소문이 도는 것이냐? 정말 그랜드마스터가 맞긴 한 것이냐?”

“아버지는 소문을 믿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를 쭉 지켜봐온 이 애비는 믿기가 어렵구나.”

“이걸 보시면 믿겠습니까?”

쑤욱-

“오!”

“헉! 2미터가 넘는 오러 블레이드라니, 대단하군.”

테릭은 검을 뽑아서는 오러-소드를 시전했다.

군나르 자작은 2미터 넘게 치솟은 오러-소드를 목격하고는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는 못했지만 테릭 때문에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던 군나르 자작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그랜드마스터임을 증명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테릭은 감격스러워 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는 슬며시 미소를 그리며 스크루 토네이도를 곁들였다.

웅웅~

“헙!”

“오! 세상에, 춤을 추는 오러 블레이드라니.”

두 개의 스킬이 겹쳐지면서 오러-소드는 무서운 속도로 회오리를 치며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모리타 백작은 말벌의 울음소리를 내며 소용돌이치는 오러-소드가 이전에 비해 몇 배나 강해졌음을 알아차리고는 크게 놀라며 감탄을 했다.

“과연 대단하군.”

“테릭, 진정 그랜드마스터였구나.”

“그동안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장하다, 내 아들.”

군나르 자작의 음성은 어느새 촉촉이 젖어 있었다.

테릭은 감격스러워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그의 등을 두드렸다.

한동안 말없이 부자의 포옹을 지켜보던 모리타 백작은 여전히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목소리로 질문을 했다.

“테릭 군, 소문으로 듣기로는 마나를 분출시켜 엄청난 폭발도 일으킨다고 들었네만.”

“그렇습니다만, 그건 이 자리에서 펼쳐 보이기 어려울 것 같군요.”

“언제 보여줄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테릭, 한 가지만 더 묻겠다.”

“소주와 라이터의 얘기입니까?”

“그래, 그건 어떻게 된 얘기냐? 난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네가 큰 사고를 치는 게 아닌지 걱정했다.”

“그 문제는 생산지를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거짓 정보를 흘렸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공급한다는 소문이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군나르 자작은 테릭과 관련된 소문이 모두 진실이라는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테릭은 그 뒤로도 아버지와 모리타 백작의 질문에 대답하며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줬다.

“지금 전황은 어떤 상태냐?”

“며칠 전에 카일록 성을 함락한데 이어 오늘 낮에는 하이폰 왕국의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어떻게 말이냐?”

“테릭 군, 방금 하이폰 왕국의 항복을 받아냈다고 했는가?”

“설명하자면 복잡합니다. 그리고 두 분께 부탁드릴 것도 있습니다.”

“부탁이라니?”

“실은 오늘 오후에 국왕 전하를 만났습니다.”

그날 세 사람의 대화는 그 뒤로도 계속되었다.

그런 후 잠시 어디를 다녀온 테릭은 아돌프와 몽겔니오스 후작의 아들을 데리고 왔다.

* * *

다음날, 왕궁은 아침부터 들썩거렸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아인리히 공작과 카이스트 공작이 입궁한 것을 필두로 수많은 귀족들이 연이어 입궁했다.

외궁에 자리한 대전은 많은 귀족들로 웅성거렸다.

“국왕 전하 납시오.”

“충-”

귀족들의 친견 요청에 대전으로 행차한 국왕은 많은 귀족들을 바라보며 무슨 일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아인리히 공작은 헛기침을 하며 대전의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아인리히 공작,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인가?”

“왕국의 안위와 관련해서 긴히 주청할 일이 있사옵니다.”

“아인리히 공작, 왕국의 안위와 관련이 있다고 했는가?”

“그렇사옵니다.”

“어서 말해보라.”

국왕은 정말 중요한 일이라도 생겼다고 생각하는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아인리히 공작은 좌중을 한번 둘러보고는 미리 준비한 대로 원정대의 소식을 전했다.

“전하, 현재 왕국의 군대가 국경을 넘어서 하이폰 왕국의 미도 성 근처까지 진격한 상태이옵니다.”

“공작, 미도 성 근처라고 했소?”

“그렇사옵니다.”

“호! 이해할 수 없군. 계속 말해보시오!”

“국왕 전하께는 여러 가지 사정상 보고를 드리지 못했사옵니다. 하지만 우리 왕국의 병사들이 미도 성까지 진격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옵니다.”

“여러 가지 사정상 보고를 하지 못했다고 했는가?”

“전하, 그 부분은 제가 설명을 하겠사옵니다.”

이번에 나선 이는 카이스트 공작이었다.

그는 원정대가 워낙 돌발적으로 구성되었으며, 그들의 진격 자체가 워낙 극비였기에 처음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알려진 이후에는 그 진위 여부와 정황을 파악하느라 미처 보고를 못했다고 했다.

그의 얘기가 끝나자마자 이번에는 아인리히 공작이 현재의 상황을 얘기하며 신속히 종전 협상에 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전에 자리한 귀족들은 그의 얘기가 끝나자마자 앵무새처럼 그것이 왕국을 위하는 길이라며 그렇게 해야 한다고 떠들어댔다.

“공작, 종전 협상을 위한 협상단을 꾸리자고 했소?”

“그렇습니다. 그 길만이 위기에 처한 우리 왕국 병사들을 구할 수 있으며 그들이 이룩한 성과를 지킬 수 있습니다.”

“전하, 아인리히 공작의 얘기가 지극히 타당하옵니다.”

“전하, 소신의 생각으로도 그렇게 하는 것이 왕국의 국익에 반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또다시 귀족들이 벌떼처럼 일어났으나 국왕은 피곤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귀를 후벼 팠다.

그러나 평소와 달리 그렇게 하라는 승낙의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전하, 이 일은 시급히 결정해야 할 일이옵니다. 자칫 잘못해서 늦어지기라도 한다면 왕국의 정예 병사들이 굶주림과 갈증을 이기지 못해 쓰러질 수 있사옵니다.”

“아인리히 공작의 의견이 지극히 타당하옵니다. 게다가 만에 하나라도 아군이 패하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지금보다 더 불리한 협상을 해야 할지도 모르옵니다.”

“전하, 두 분 공작의 의견이 지극히 타당하다고 생각되옵니다.”

“소신의 생각도 마찬가지이옵니다.”

“전하, 저 역시 그리 생각하고 있사옵니다.”

“전하, 속히 서두르셔서 용맹한 왕국의 병사들을 위기로부터 구하셔야 하옵니다.”

“그렇사옵니다! 전하.”

누가 들으면 여기 있는 귀족들 전부가 하나같이 충신이고 애국자였다.

그러나 국왕의 표정은 여전히 심드렁했다.

그때 국왕의 호위기사가 다가와서 뭐라고 귓속말을 했다.

기사의 보고를 받은 국왕의 입꼬리가 묘하게 올라갔다.

“잘 들으시오! 경들의 충언은 지금의 상황과 부합되지 않으니 듣지 않은 것으로 하겠소.”

“전하, 그리하셔서는 안 됩니다.”

“전하, 왕국의 안위가 걸린 문제입니다.”

“전하, 협상단을 꾸리지 않는 것은 국정을 돌보지 않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사옵니다.”

“어허~ 이미 끝난 일인데, 무슨 협상단을 꾸린다는 말인가?”

“전하, 시작도 하지 않은 일인데 이미 끝났다니요? 당치 않은 말이옵니다.”

“전하, 부디 국왕으로서 본분을 지켜 주십시오!”

“지금 타라한의 국왕인 짐이 본분을 망각하고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요?”

“전하,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귀족들의 간청은 집요하고도 끈질겼다.

그들은 좌우파가 합작을 하면서 한목소리를 내게 되자 이제는 노골적으로 국왕을 타박하기 시작했다.

국왕은 무슨 배짱인지 귀족의 청을 계속 거부하다가 나중에는 귀족들의 무례함을 꾸짖기까지 했다.

아인리히 공작과 카이스트 공작은 그때서야 뭔가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여봐라! 모리타 백작과 군나르 자작, 그리고 테릭 대장과 몽겔니오스 후작의 아들을 대전으로 불러들여라!”

“엥?”

“뭐야?”

“지금 뭐라고 했지?”

“테릭 대장이라면 그랜드마스터라는 원정대의 대장 아냐?”

“그자가 여길 어떻게?”

국왕의 한마디에 대전은 벌통을 건드린 것처럼 심하게 웅성거렸다.

그리고 그들 모두의 시선이 대전으로 향할 때 네 명의 사내가 들어왔다.

한 명은 대부분의 귀족들이 익히 알고 있는 모리타 백작이었고, 다른 세 명은 중년 사내와 두 명의 젊은 사내였다.

“타라한의 영원한 태양이며 진실의 수호자이신 국왕 전하를 미천한 종들이 배알하나이다!”

“어서들 와라.”

“충-”

한목소리로 인사를 올린 네 사람은 대전 중앙에서 무릎을 꿇었다.

국왕은 흐뭇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일어서게 했다.

“테릭 대장.”

“예, 전하!”

“짐의 밀명을 받아 왕국의 영토를 상습적으로 침탈하는 하이폰을 응징하였는가?”

“그렇사옵니다! 전하의 분부대로 카일록 성을 함락시키고 적의 대군을 격파하였사옵니다.”

“전하, 원정대는 이번 카일록 전투에서도 눈부신 전공을 세웠습니다. 특히 테릭 대장은 상대측 소드마스터 다섯 명의 목을 베었을 뿐만 아니라 마법병단까지 전멸시켰사옵니다.”

“수고했다, 테릭 대장. 하이폰 왕의 항복은 받아왔는가?”

“전하께서 분부하신 대로 하이폰의 항복을 받아냈으며, 국경선은 현재 원정대가 점령하고 있는 카이록 성을 그 경계로 했습니다.”

“하하하~ 수고했다. 테릭 대장! 그대야말로 우리 왕국의 보배요, 기둥이로다.”

“헉!”

“오! 세상에.”

“소문대로 국왕의 친위원정대였어!”

“카… 카일록 성이 새로운 국경이라니?”

“아!”

* * *

갑작스런 테릭의 등장부터 시작해서 계속되는 폭탄 발언에 아인리히 공작과 카이스트 공작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는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여서 그들은 넋을 놓고 네 사람과 국왕을 번갈아봤다.

국왕은 연신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흐뭇한 시선으로 테릭을 바라봤다.

“테릭 대장.”

“예, 전하.”

“하이폰으로부터 받은 항복 문서는 어디 있는가?”

“여기 있사옵니다! 전하.”

“이것이 하이폰의 국왕이 직접 서명하고 날인한 항복 문서렷다?”

“그렇사옵니다.”

“으하하하~”

항복 문서를 받아든 국왕은 또다시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대전이 떠나갈듯 우렁차게 웃음을 터트리는 국왕의 모습은 어제까지 귀족들의 기세에 숨죽이고 살았던 모습과는 너무도 달랐다.

국왕이 항복 문서를 살피는 동안, 지금껏 분위기에 눌려 구경만 하고 있던 아인리히 공작이 반격에 나섰다.

“전하, 무릇 국가 간의 외교서류는 그 내용도 중요하지만 형식도 중요하옵니다.”

“아인리히 공작, 그게 무슨 말인가?”

“항복 문서가 국제적으로 효력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하이폰의 서명만이 아니라 국왕 전하의 서명도 들어가야 하옵니다.”

“그런데?”

“전하, 서명만 하시옵소서! 제가 군사들을 이끌고 가서 하이폰의 국왕에게 항복 문서를 전하고 만천하에 이 사실을 널리 알리겠사옵니다.”

“전하, 신도 아인리히 공작을 적극 돕도록 하겠습니다.”

“오! 카이스트 공작이 도와준다면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이번에는 카이스트 공작까지 나서며 아인리히 공작을 거들고 나섰다.

이들은 어떻게 해서든 하이폰 측에 항복 문서를 전달하고 돌아오는 역할을 맡으려고 했다.

이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도 이번 전쟁에서 뭔가를 했음을 알리고, 나아가 대대적인 개선행군을 함으로써 원정대의 전공을 가로채기 위해서였다.

두 공작의 의도를 간파한 여러 귀족들은 앞 다투어 주청을 하기 시작했다.

“전하, 두 분 공작의 의견이 지극히 타당합니다.”

“전하, 국익을 위해서도 빠른 시일 내에 항복 문서의 조인식을 마쳐야만 합니다.”

“전하, 두 분 공작이 전권대사로 가신다면 우리 왕국의 단합된 힘과 저력을 과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하, 두 분 공작이 함께 가신다면 하이폰은 우리 왕국의 단합된 모습에 크게 놀라 향후 몇 십 년간은 감히 대항할 생각을 못할 것입니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국왕은 주청을 올리는 귀족들의 모습을 한동안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슬며시 미소를 그리는 국왕의 모습에 두 공작과 귀족들은 자신들의 의견이 당연히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인리히 공작, 하이폰 왕국으로 가는 번거로움은 하지 않아도 된다.”

“전하, 아니옵니다! 왕국을 위해서라면 신은 그 어디라도 기쁘게 갈 수 있사옵니다.”

“전하, 신도 마찬가지이옵니다.”

“하하하~ 왕국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두 공작의 충성에 짐은 진심으로 기쁘도다! 그러나 이미 테릭 대장이 모든 절차를 끝냈으니 그 일은 더 이상 언급하지 말라.”

“전하, 그게 무슨 말씀이옵니까?”

국왕은 대답 대신 항복 문서를 아인리히 공작에게 넘겼다.

항복 문서를 받아든 아인리히 공작은 양국 국왕의 서명과 날인이 끝난 걸 보곤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는 뒤이어 항복 문서를 확인한 카이스트 공작도 마찬가지였다.

또다시 예상치 못한 일로 귀족들이 혼란에 빠져 있을 때 모리타 백작이 나섰다.

“전하, 우리 타라한 왕국의 역사에서 이번처럼 눈부신 승리를 거둔 적은 없었습니다. 빛나는 전공을 세운 테릭 대장과 원정대에게 그에 합당한 지위를 내리심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옵니다.”

“그래야지! 모리타 백작은 테릭 대장에게 어떠한 상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테릭 대장은 대륙 최초이자 유일한 그랜드마스터입니다.”

“모리타 백작은 얘기를 계속하라!”

“그리고 하이폰의 소드마스터를 전부 격파한 명실상부한 대륙 최강자이옵니다.”

“그 점은 짐도 알고 있다. 그래,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모리타 백작의 얘기가 계속되는 동안 아인리히 공작과 카이스트 공작은 연신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테릭에게 상이 내려지는 것을 반대할 수는 없기에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현재의 테릭은 타라한 왕국 450년 사상 가장 빛나는 전공을 세운 영웅이었다.

“테릭 대장의 전공과 무위를 생각하면 대공의 작위와 공왕의 지위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나, 우리 왕국에 일찍이 공왕의 전통은 없었던 바, 공작의 작위를 제수해야 한다고 생각하옵니다.”

“공작의 작위라?”

“그렇사옵니다! 때마침 이 자리에 왕국의 주요한 귀족들이 모두 참석한 바, 그 결정을 지금 내리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좋다! 다른 대신들과 귀족들의 생각은 어떤가?”

국왕은 두 공작과 여러 귀족들을 바라봤다.

때를 같이해서 테릭도 눈에 힘을 주며 두 공작과 여러 귀족들을 살펴봤다.

테릭의 시선을 마주한 귀족들은 오금이 저려서 감히 반대를 못하고 두 공작의 눈치만 봤다.

막말로 여기서 반대했다가 테릭에게 찍히기라도 한다면, 그리고 그가 그 일을 핑계로 결투라도 신청한다면 그때는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었다.

“전하, 다른 귀족들의 의견도 신과 같은 것으로 여겨지옵니다.”

“하하하~ 그러겠지. 그 누가 테릭 대장의 전공을 부정할 것이며 그의 무위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지극히 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국왕의 방금 말은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엄청 살벌한 협박의 말이었다.

귀족들은 더욱 움츠러들며 국왕과 두 공작의 눈치를 살폈다.

연신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던 국왕은 이 자리에서 공작의 작위를 제수하겠다고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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