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골렘이 아니라 타이탄이거든?
10만을 훌쩍 넘긴 적의 대군이 주변을 온통 새까맣게 물들이며 몰려왔다.
그러자 카일록의 병사들도 긴장이 되는지 마른침을 꼴깍꼴깍 삼키기 시작했다.
병사들의 분위기를 파악한 테릭은 타이탄 탑승에 앞서 해방의 함성이라는 스킬을 이용해 사자후를 토해냈다.
“카일록의 용사들이여, 적이 두려운가? 우리는 15만의 메즈텍 군을 전멸시켰으며, 어제는 적의 중장기병을 전멸시킨 불패의 용사들이다.”
“와아아아아~”
“나, 테릭 폰 군나르가 최선두에서 적을 무찌를 것이다.”
“와아아아~”
“자신과 옆의 전우를 믿어라. 우리는 대륙 최강의 용사이다!”
“와아아아~”
“왕국을 침략한 애시빌 군을 격퇴하자.”
“왕국을 배반한 북부 수비군을 응징하자.”
“와아~ 우리는 불패의 용사들이다.”
테릭의 사자후를 들은 카일록의 병사들은 투지와 용기가 샘솟는 것을 느꼈다.
그 때문인지 그들은 어느 때보다 더 큰 함성으로 테릭의 사자후에 대답했다.
“기동단, 타이탄에 탑승하라!”
“충-”
웅웅~
적이 거의 대부분의 병력을 이끌고 공격해온 이상, 더는 타이탄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테릭은 136명의 타이탄 라이더에게 탑승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던 라이더들은 즉각 타이탄을 소환해서 탑승했다.
“기동단, 확장형으로 전환하라.”
위윙~
처처척~
쑤욱-
확장형 모드에 돌입한 타이탄은 기계음을 내며 순식간에 30미터 크기로 확대되었다.
테릭은 확장형으로 변신이 끝난 타이탄을 둘러보고는 전방을 향해 다시 사자후를 토해냈다.
이번에는 타이탄의 외부 스피커를 통해 더욱 우렁차게 퍼져 나갔기에 아노아 요새에 남아 있던 이들도 그의 사자후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난 타라한의 공작, 테릭 폰 군나르다. 애시빌과 북부 수비군에게 엄중히 경고한다. 메즈텍의 15만 병사들처럼 전멸을 당하고 싶지 않다면 당장 항복하라!”
“엥?”
“메즈텍 군이 전멸을 했다고?”
“설마?”
“아니겠지?”
대병력만 믿고 무턱대고 달려들던 적들은 불쑥 튀어나온 타이탄을 발견하곤 깜짝 놀란 상태였다.
그 와중에 메즈텍 군이 전멸했다는 말은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놀란 이들은 성에 남아서 이제나저제나 테릭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침투조였다.
“이건……!”
“헙! 테릭 공작이다.”
“도대체 저 거인들의 정체는 뭐지?”
“아! 어쩌면 이번에는 애시빌 군이 전멸할지 몰라.”
“이 사람아, 정신 차려.”
“이봐, 이럴 때가 아냐.”
“빨리 보고하러 가세.”
다른 이들과 달리 이들은 매즈텍 군이 전멸을 당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이들이 느끼는 공포는 다른 이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침투조의 조장은 동요하는 조원을 달래서는 황급히 마법사가 대기하고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마법사는 허둥지둥 달려오는 4명의 침투조를 보는 순간, 드디어 기다리던 순간이 도래했음을 알았다.
“어서 보… 고를 하게.”
찌이잉~
마나를 머금은 통신 수정구가 금방 환해지더니 살집이 두툼한 사내의 얼굴이 화면에 나타났다.
=무슨 일이오?
“공작님께 빨리 알리시오. 이곳에 테릭이 나타났소.”
=그게 저… 정말이오?
“그렇소. 게다가 엄청난 크기의 거인도 나타났소.”
=거인이라면 골렘이오?
“그건 모르겠소. 그나저나 어서 보고를 올리시오.”
=그런데 골렘의 숫자는 어느 정도나 되었소?
“어림짐작인데 대략 1백 대는 살짝 넘는 것 같았소,”
=알았소. 바로 보고를 올리겠소.
상대 마법사는 어찌나 급했는지 통신 수정구를 끄지도 않은 채 허둥지둥 달려갔다.
덕분에 수정구 화면은 걸을 때마다 실룩거리는 마법사의 엉덩이로 꽉 찼다.
그 시각, 아인리히 공작과 카이스트 공작은 발렌시아 제국의 소드마스터들을 이끌고 있는 아이마르 후작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제국과 두 공작 휘하의 소드마스터들은 어제 저녁부터 계속 비상 대기상태였다.
우탕탕~
“웬 소란이냐?”
“각하, 드디어 나타났습니다.”
“테릭이 나타났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정체불명의 거인이 백 대 넘게 출몰했다고 합니다.”
“도대체 거인의 정체가 뭐라고 하더냐?”
“그것까지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움직이는 거인이라면 골렘이 확실할 것입니다.”
“도대체 놈은 그 많은 골렘을 어디서 구했다는 말이냐?”
아인리히 공작을 비롯해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은 마법사가 그리한 것처럼, 정체불명의 거인을 골렘이라고 짐작했다.
그리고 백 대가 넘는 골렘이 투입되었기에 메즈텍 군이 전멸했다고 판단했다.
아울러 오늘의 전투에서 애시빌 군이 상당한 피해를 입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아인리히 공작, 애시빌 군이 약해지는 건 나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숫자라면 제국도 부담되지 않겠습니까?”
“하하~ 기껏해야 돌이나 강철로 만들어진 거인은 우리 제국의 소드마스터와 마법사들이 힘을 모으면 무찌를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겠습니까?”
제국의 후작인 아이마르는 자신보다 작위가 높은 아인리히 공작이나 카이스트 공작에게 어정쩡한 존대를 했다.
하지만 두 명의 공작도 그 점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여기 모여 있는 소드마스터가 한 대씩만 맡아도 몇 대입니까? 아무리 덩치가 크다 해도 오러 블레이드에 걸리면 파괴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나는 걱정이 됩니다.”
“하하~ 걱정 마십시오. 메즈텍과 애시빌은 소드마스터가 겨우 십여 명뿐이라 숫자에서 밀리겠지만 우리는 아닙니다. 게다가 오늘 전투에서 최소 10대 이상의 골렘은 파괴될 것입니다.”
“난 후작만 믿겠습니다.”
골렘과 타이탄은 얼핏 보면 비슷하지만 그 전력은 감히 비교할 수 없었다.
과거 마도시대의 기록에 의하면 한 대의 하급 타이탄이 골렘 100대는 능히 상대한다고 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는 발렌시아 제국의 아이마르 후작은 100대의 골렘은 능히 상대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보다 이제 거사에 돌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지요.”
“제가 제국의 소드마스터를 이끌고 왕궁을 치겠습니다.”
“좋습니다. 우리 왕국의 마스터들에게는 군나르 백작을 맡기지요. 아! 왕궁에는 모리타 백작이 있으니 각별히 조심하십시오.”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이마르 후작은 제국이 자랑하는 소드마스터 최상급의 실력자였다.
그는 내심 테릭과 1 : 1로 붙어도 지지 않을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기에 모리타 백작 정도는 언제든지 붙어도 가볍게 이길 수 있다고 여겼다.
* * *
두투퉁~
퍼퍼퍽~
“피해라!”
우지끈.
테릭과 타이탄 라이더들은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그 안으로 다가오는 적군을 가차 없이 응징했다.
거대한 무기를 휘두르다가 때로는 마법을 날리고, 그것도 아니면 몸통으로 짓뭉개는 타이탄의 공격에 애시빌 군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소드마스터들은 집결하라!”
“마법사들은 앞으로 나서라!”
“물러서지 마라.”
“우리는 적의 본대를 노린다.”
너무도 압도적인 타이탄의 전력에 애시빌 군은 메즈텍 군과 비슷한 대응을 했다.
그들은 소드마스터와 마법사를 집결시켜 타이탄을 상대하게 하고, 기동력이 좋은 경기병을 모아서 측면 돌파를 시도했다.
하지만 방호력이 우수한 중장기병을 전멸시킨 카일록 군에게 2만의 경기병은 그리 어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화살을 날려라.”
“저들에게는 마법스크롤도 아깝다.”
“적의 접근을 허용치 말라!”
슈슉-
슈슈슉~
그간 몇 차례의 전투에서 빼어난 위력을 자랑했던 비행 화살은 오늘도 그 무시무시한 위력을 아낌없이 발휘했다.
기동력을 앞세워 빠르게 접근하던 애시빌의 경기병들은 눈에 띄게 그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마법병, 전투 준비!”
“전원 스크롤을 꺼내라.”
“효율적인 타격을 위해 범위 조정에 신경 써라.”
“동일 목표에 마법 스크롤이 중복해서 사용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라.”
대륙을 통틀어서 오직 카일록에만 있는 병과가 마법병이었다.
이들은 과거 하이폰 원정에서부터 테릭을 따라나섰던 고참병들로 마법스크롤을 담당했다.
그리고 그들 옆에는 대마도사로 알려진 칼라히브가 공격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1분대는 나를 따르라!”
“공작 각하를 엄호하라.”
“적의 소드마스터를 전멸시키자.”
한편, 선두에서 수없이 많은 적을 제거했던 테릭은 상대가 후방에서 소드마스터와 마법사들을 집결시키자 그들을 노리며 적진 깊숙이 뛰어 들어갔다.
“크아악~”
“괴물들이 다가온다.”
“아아악~ 피해라!”
퍼퍼펑~
테릭과 1분대의 돌진에 애시빌 진영은 극도로 혼란해졌다.
그 와중에 집결을 끝낸 애시빌의 소드마스터 9명이 일제히 테릭을 노리고 몰려왔다.
“저자만 죽여라!”
“테릭 공작을 죽이면 적들은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
“공격하라!”
타이탄을 타지 않았다 해도 9명의 소드마스터를 상대할 수 있는 테릭이었다.
그는 1분대 라이더로 하여금 마법사를 타격하게 하고는 단독으로 소드마스터를 상대했다.
전투가 치열하게 진행되는 그 시각, 수도의 왕궁에는 아인리히 공작과 카이스트 공작이 50명의 호위 기사와 수백의 병사들을 대동하고 입궁했다.
이들 50명의 호위 기사들은 두 공작가의 기사로 위장한 제국의 소드마스터였고, 병사들 속에는 위장한 마법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국왕 전하를 배알하려고 왔다.”
“먼저 접견 신청을 하셔야 하며, 호위 기사들은 이곳에서 대기해야 합니다.”
“닥쳐라!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이냐?”
“죄송합니다. 하지만 당분간은 그 누구라도 내궁의 출입을 자제시키라는 국왕 전하의 왕명이 있었습니다.”
외궁까지 거침없이 들어갔던 두 공작은 내궁 입구에서 제지를 당했다.
일개 병사들의 완강한 제지에 두 공작은 분노해서 씩씩거리며 열을 냈다.
그때 호위기사로 위장한 아이마르 후작이 다가왔다.
“공작 각하, 무슨 일이십니까?”
“감히 이놈들이 내 앞길을 막고 있다.”
“이놈들, 이분들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는 것이냐?”
“우리는 국왕 전하의 왕명만 받들 뿐입니다.”
“뭐라!”
쉬이익~
“크윽-”
“커헉-”
아이마르 후작이 언제 검을 뽑았는지도 몰랐다. 다만 그의 호통이 끝남과 동시에 내궁 입구를 막았던 두 병사는 목젖이 끊어진 채 쓰러졌다.
벽돌로 포장된 바닥은 병사들의 목에서 흘러나온 피로 벌겋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것, 바로 시작한다.”
“모두들 가면을 착용하라.”
“아직은 우리의 정체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
“왕족의 피가 흐르는 놈은 단 한 명도 남겨두지 마라.”
“오늘부로 타라한 왕국은 사라진다.”
“공격!”
“와아아~”
가면을 쓴 50명의 소드마스터가 일제히 내궁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와 동시에 왕국을 감싸고 있는 외 성벽 위에서 두 대의 불화살이 솟구쳤다.
이는 왕궁 인근에서 숨죽이며 대기하던 다른 귀족들의 기사와 병사들에게 공격을 명령하는 신호였다.
“적이다!”
“반란군이다.”
“비상!”
“국왕 전하를 엄호하라.”
국왕이 기거하는 내궁에는 모리타 백작과 그가 새롭게 편성한 200명 규모의 근위기사단이 있었다. 또한 약 500명의 경비대가 통상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요겔 남작을 대장으로 하는 20명의 타이탄 라이더도 있었다.
이들은 반란군의 습격이라는 말에 즉각적으로 타이탄에 탑승해서는 내궁으로 올라오는 계단을 막았다.
“아이마르 후작님, 저길 보십시오.”
“저건!”
“아노아 요새에 나타났다는 골렘이 분명합니다.”
“과연 오거와 비슷한 덩치를 가졌구나.”
“어떻게 할까요?”
“차라리 잘된 일이다. 훗날을 대비해서 미리 전투 경험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아마 골렘의 느린 속도로는 우리의 머리털도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마스터의 본 실력을 드러내기보다는 전투 경험을 확보하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라.”
타이탄 라이더들은 왕궁 내에서 전투를 펼쳐야 하는 점을 감안해서 일반형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반형이라고 해서 타이탄의 기능이나 위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사이 아이마르 후작의 명령을 받은 40명의 소드마스터들이 일제히 타이탄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뒤에는 마법사들이 마법을 준비하며 소드마스터를 지원할 채비를 했다.
* * *
“누구냐?”
“모조리 제거해라!”
쉬이익~
“크헉~”
“아아악~”
왕궁의 내궁에서 타이탄과 소드마스터의 전투가 벌어진 그 시각, 군나르 백작의 저택에도 10명의 소드마스터와 50명의 기사 그리고 400명의 병사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다짜고짜 저택 정문을 지키던 병사들을 죽이고는 저택 내부로 뛰어 들어갔다.
그 시각, 군나르 백작은 저택 내의 집무실에서 통신 반지를 통해 모리타 백작, 테릭과 통신을 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때마침 방문한, 바하마 후작도 있었다.
=정말 제가 안 가도 되겠습니까?
=공작께서 20명이나 되는 타이탄 라이더를 보내주셨는데 우리 스스로 막아야죠.
=테릭, 나와 바하마 후작도 최대한 빨리 힘을 보태겠다. 넌 애시빌 군을 격퇴하는데 신경을 써라.
=그리하십시오, 공작 각하.
=안 그래도 지금 한창 전투중이에요.
=뭐! 그게 사실이니?
=공작님, 전황은 어찌되어 가고 있습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왜? 어쨌기에?
지금 애시빌과 전투 중이라는 테릭의 말에 다른 이들은 왕궁의 일도 잊고 다급히 전황을 물었다.
=적의 소드마스터와 마법사들은 전부 제거했고, 적의 기병도 전멸시켰어요.
=오! 예~
=역시, 공작 각하이십니다.
=지금은 후퇴하는 애시빌 군의 퇴로를 막은 채 섬멸 작전에 들어갔어요.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다는 테릭의 말에 다들 기뻐했다.
군나르 백작은 연전연승하는 아들이 자랑스러운지 소리까지 질렀다.
=전 여러분만 믿고 애시빌 군을 무찌르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공작 각하.
=만약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바로 얘기하십시오.
=그렇게 하마.
=알겠습니다.
그때 백작의 집무실이 열리며 한 기사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그는 전신 곳곳에 아직 마르지 않은 붉은 피를 흠뻑 뒤집어쓰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백작님, 어서 피하셔야 합니다.”
=아버지, 무슨 일이세요?
“두 공작이 보낸 기사와 병사들이 지금 저택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뭐! 여기도 공격을 했다고?”
“백작님, 이럴 때가 아닙니다. 몰려온 기사 중에는 왕국의 소드마스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왕국의 소드마스터까지 포함되어 있다고?”
=아버지, 그게 무슨 말이에요?
=군나르 백작님, 무슨 일입니까? 혹시 그곳도 공격을 받고 있습니까?
통신 중에 벌어진 일이었기에 테릭과 모리타 백작도 희미하기는 하지만 군나르 백작과 기사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테릭은 두 공작이 왕궁뿐만 아니라 아버지까지 한 번에 노렸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기사는 시간이 없다며 빨리 피해야 한다고 울부짖고 있었다.
테릭은 아버지가 위험하다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 어떡하지.’
왕궁은 20명의 타이탄 라이더들이 있기에 안심할 수 있었지만, 아버지의 저택은 아직 타이탄 라이더를 배치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소드마스터가 포함된 적의 공격을 아버지가 막아낼 방법은 없었다.
그때 모리타 백작이 황급히 나섰다.
=공작 각하, 전선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혹시 공작 각하만이라도 움직이면 안 되시겠습니까?
=아니다. 여긴 내가 어떻게든 막을 테니까 넌 올 필요 없다.
텔레포트 스크롤이 있는 테릭은 단숨에 아버지의 저택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모리타 백작은 테릭만이라도 가주기를 바랐다.
=아버지,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가겠습니다!
=올 필요 없다고 하지 않느냐?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했다. 테릭은 황급히 타이탄에서 내려서는 바로 봉인을 했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모건 남작을 비롯한 다른 타이탄 라이더들이 질문을 해왔다.
“각하, 왜 그러십니까?”
“모건 남작, 이곳의 지휘를 맡기겠다.”
“각하, 무슨 일입니까?”
“난 수도로 가봐야겠다. 아버지가 위험하다.”
“알겠습니다. 여긴 저희들에게 맡기십시오.”
“각하께서 돌아오시기 전까지 끝내겠습니다.”
“고맙다.”
승기를 잡았다고는 하지만 아직 전투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모건 남작을 비롯한 라이더들은 걱정 말고 다녀오라며 더욱 부지런히 타이탄을 몰았다.
테릭은 그들을 믿고 텔레포트 스크롤을 찢었다.
부욱~
츠파파팟-
전장에서 사라진 테릭이 나타난 곳은 군나르 백작의 서재였다.
테릭은 급히 검을 뽑아들고는 아버지를 부르며 뛰쳐나갔다.
“아버지~”
“오! 공작 각하.”
“아버지는 어디 계십니까?”
“제가 말렸지만 방금 나가셨습니다.”
“아!”
시골 영지에서 평생 검에만 매달린 아버지의 검술 실력은 상당한 수준급의 실력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소드마스터였다.
문을 박차고 뛰쳐나간 테릭은 소드마스터로부터 희롱을 당하고 있는 아버지를 발견했다.
그들은 군나르 백작을 생포할 생각이었기에 치명적인 공격은 자제하고 있었다.
하지만 부상 정도는 상관없었기에 아버지의 몸 곳곳에는 적지 않은 상처가 있었다.
하지만 충분히 죽일 수 있음에도 죽이지 않는 상대의 태도가 오히려 아버지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놈, 멈춰라!”
“웬 놈이냐?”
“닥쳐라!”
서걱-
“커헉~”
단 일격에 아버지를 희롱하던 소드마스터가 두 토막 났다.
저택 곳곳에서 아버지의 기사들과 병사들을 유린하던 적들은 그제야 갑자기 나타난 젊은 사내가 군나르 백작과 많이 닮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설마?”
“어떻게?”
“분명 전쟁 중이라고 했는데?”
“그렇다! 내가 테릭 폰 군나르 공작이다.”
* * *
“커헉!”
“세상에.”
“아이마르 후작,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나도 믿기지 않소이다.”
“저 따위 골렘은 문제없이 깰 수 있다고 하지 않았소?”
“나도 그리 생각했소. 가급적 정체를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오러 블레이드를 처음부터 펼치지 않은 게 실수였소.”
아이마르 후작은 가급적 많은 소드마스터들에게 골렘과의 전투 경험을 얻게 하기 위해 40명의 소드마스터를 한 번에 보냈다.
제국의 소드마스터들은 타이탄을 골렘으로 여기고 가벼운 마음으로 전투에 임했다.
그러나 요겔 남작은 10기의 타이탄만 보내서는 40명의 소드마스터를 상대하게 했다. 그리고 6기의 타이탄은 마법사들을 상대하게 했다.
요겔 남작의 예상치 못한 배치에 제국의 마법사들은 초반에 전멸하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도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것은 전부 제국의 소드마스터였다.
특히 가장 아쉬운 것은 최초의 접전 때 실력을 숨기고 싸우다가 20여 명의 소드마스터들이 너무나 허무하게 죽어간 일이었다.
한편, 타이탄에 밟히고 얻어맞은 소드마스터들의 시체는 너무 심하게 뭉그러져서 그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 보다 못한 아이마르 후작이 직접 나섰다.
“저자는 내가 막겠다.”
아이마르 후작이 2미터에 가까운 오러 블레이드를 생성하며 앞으로 나서자 뒤에 있던 요겔 남작이 움직였다.
아이마르 후작은 묵직한 걸음걸이로 내려오고 있는 요겔의 타이탄을 발견하곤 그가 자신의 상대임을 알았다.
‘내가 먼저 기선을 잡아야 해.’
아주 노련한 아이마르 후작이었다.
그는 소드마스터들과 골렘(?)의 전투를 지켜보면서 골렘이 소드마스터들보다 민첩함과 속도가 떨어지는 점을 간파했다.
그리고 그 점을 이용해야만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도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지금 내려오는 요겔의 타이탄은 20명의 소드마스터를 상대하던 하급 타이탄이 아니라 중급 타이탄이었다.
“받아라!”
채챙~
붕~
챙~
휘리릭~
채챙~
아이마르 후작은 바람처럼 움직이며 끊임없이 검을 날렸다. 그러나 테릭과 수많은 대련을 했던 요겔은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방어에만 치중했다.
‘이놈! 아무리 오러 블레이드라고 해도 타이탄과 부딪친 이상 적지 않은 충격이 전해질 것이다.’
찌리리릿-
대륙의 소드마스터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오러 블레이드라면 상대에게 타격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클립스의 놀라운 힘은 오러 블레이드로도 어쩌지 못했다.
그리고 요겔이 예상한 대로 아이마르 후작은 누적된 충격에 손이 저리는 것을 느꼈다.
‘아! 다른 방법은 없는 건가?’
아이마르 후작은 눈앞의 상대에게 타격을 주지 못하는 현실이 당황스러웠다.
그 와중에도 소드마스터들은 정체불명의 괴물들의 공격에 하나 둘씩 쓰러졌다.
아니, 이제는 구경하던 다른 골렘까지 합류하면서 오히려 소드마스터들이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그때 국왕을 호위하던 모리타 백작이 소리를 질렀다.
“아인리히 공작, 카이스트 공작. 어서 무릎을 꿇으시오. 그대들의 반란은 실패했소!”
“닥쳐라!”
“우리가 무슨 반란을 꾸몄다는 것이냐?”
“정체불명의 소드마스터를 불러들여서 국왕 전하가 계신 왕궁을 습격한 것이 반란이 아니고 뭐요?”
“어디서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우리는 네놈들로부터 국왕 전하를 구하기 위해 병력을 동원했을 뿐이다.”
“닥치시오! 이미 모든 걸 알고 있거늘. 그런 말 같지 않은 변명은 집어치우시오.”
“흥! 네놈이 지금은 기고만장하나, 발렌시아 제국이 네놈들의 횡포를 더 이상 지켜보지는 않을 것이다.”
“네놈이 테릭 공작을 믿는 것 같은데 어디 두고 보자.”
“아! 군나르 백작가를 공격하던 왕국의 소드마스터들을 얘기하는 것 같은데, 그들은 이미 테릭 공작에 의해 제압되었소.”
“그런 거짓말에 속을 우리가 아니다.”
“네놈이야말로 어서 무릎을 꿇고 죄를 빌어라.”
“못 믿겠지만 곧 있으면 테릭 공작이 이곳에 나타날 것이오.”
“이놈, 아노아 요새에 있는 그가 어떻게 여기에 나타난다는 것이냐?”
“아노아 요새의 전투는 거의 끝나가고 있소. 테릭 공작과 그가 이끄는 카일록 군은 이번에도 애시빌 군을 전멸시켰소.”
“그따위 헛소리로 우리를 속일 수는 없다.”
“믿지 않아도 좋소. 그러나 그대들은 법의 준엄한 심판을 곧 받게 될 것이오.”
“닥쳐라. 우리는 왕국을 위한 위대한 거사를 감행한 것이다!”
“발렌시아 제국은 우리가 다시금 전면에 나서기를 원하고 있다.”
“제국이 두렵다면 우리를 어서 풀어라.”
“아무리 테릭 공작이 강하다고는 하나 그도 제국 앞에서는 어쩌지 못할 것이다.”
“흥! 아무리 제국이라고 해도 수백 대의 타이탄을 거느린 테릭 공작을 건드려서는 무사하지 못할 것이요.”
“골렘이 아니라 타이탄이라고?”
“아인리히 공작, 타이탄이 뭐요?”
아직도 골렘이라고 여기고 있던 두 공작은 타이탄이라는 말에 당혹스러웠다.
둘은 기억을 더듬으며 타이탄이 뭔가를 생각하다가 신화나 전설에 자주 등장하는 영웅의 병기가 타이탄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신화나 전설에만 등장하는 얘깃거리였다.
그 순간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끼야야얍아아아~~~”
퍽-
“크아아악~”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본 두 공작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곳에는 목이 떨어져 나간 아이마르 후작의 시체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아마도 타이탄의 주먹에 맞았을 것으로 짐작되는 아이마르 후작의 머리는 산산조각이 나서 허연 골수만이 바닥 곳곳에 흩뿌려져 있었다.
부들부들-
“아!”
“오!”
아이마르 후작은 머리가 떨어져 나간 사실을 아직도 모르는지 두 팔로 상체를 일으키려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목이 터져나간 그의 몸은 빠르게 경직되어 갔고, 결국은 힘없이 쓰러졌다.
아이마르 후작을 쓰러트리고 우렁찬 포호를 질렀던 요겔 남작이 다시 검을 치켜들며 악을 썼다.
“적의 수장이 쓰러졌다.”
“와아아~ 반란군을 토벌하자.”
“왕국을 배반한 반역자를 처벌하자.”
“와아아아~”
그 무렵 테릭의 전투도 끝나가고 있었다.
군나르 백작의 저택을 공격했던 반란군들은 10명의 소드마스터가 모두 쓰러지자 무기를 버리고 투항했다.
모든 전투가 순조롭게 끝나가는 그때, 아노아 요새 인근에 한 사내가 나타났다.
* * *
“이놈, 여기 있었구나.”
아노아 요새 인근에 갑자기 나타난 금발머리 사내의 정체는 카이젤스키였다.
그는 아라폴라 성에서 한참을 헤매다가 테릭이 벌써 이동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텔레포트 이동진을 역 추적해서 이곳으로 왔다.
“과연 허접하구나. 겨우 저따위가 타이탄이라니.”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면서 지금은 타이탄을 앞세운 카일록 군이 애시빌 군과 북부 수비군을 사정없이 타격하고 있었다.
모건 남작은 중급 타이탄으로 하여금 성문을 틀어막은 상태였다.
덕분에 퇴로가 막힌 애시빌 군은 요새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호오! 그래도 인간들의 전투에서는 제법 유용하구나.”
카이젤스키가 봤을 때 타이탄 하나하나의 능력은 정말 별 볼일 없었다.
그러나 인간의 입장에서는 대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그 거대한 덩치는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무기였다.
‘심심한데 살살 갖고 놀아볼까?’
타이탄의 위력이 저 정도라면 로드가 우려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껏 시간과 심력을 허비한 게 아까워서라도 때려 부숴야 속이 풀릴 듯했다.
“그럼, 가장 강력한 놈이 어떤 것이지?”
카트리나가 말하길 테릭이라는 이계의 드래곤은 그나마 위협적이라는 SMAX급 타이탄을 가져갔다고 했다.
그러나 찬찬히 살펴봐도 다 비슷비슷한 타이탄만 보였다.
‘아마도 SMAX급은 놈이 갖고 있나 보군.’
단 한 대뿐인 타이탄이라면 놈이 아끼느라 꺼내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불러내면 그만이었다.
“옳지! 저기 있는 놈들부터 때려 부수면 되겠군.”
전장을 살피던 카이젤스키는 애시빌 군을 맹공격하는 12분대의 타이탄을 목표로 했다.
잠시 후, 그의 몸은 허공 높이 솟구쳐 올라갔다.
‘어! 뭐지?’
테릭이 떠난 후 전장에 남아서 카일록 군을 도와주던 칼라히브는 거대한 마나의 파동을 느꼈다. 이는 분명 고룡급 드래곤 만이 낼 수 있는 파워였다.
‘도대체 어떤 고룡이?’
인간 세상에서 유희를 하는 드래곤은 자기 말고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고룡급 드래곤이 유희를 하는 경우는 절대 없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그가 감각을 집중하고 있을 때, 허공에서 다섯 줄기의 하얀 섬광이 떨어져 내려왔다.
“아! 피해.”
번쩍-
파치치치칙~
우르르릉. 꽝꽝~
대낮임에도 전장 가득 백색 빛이 번쩍였다.
그리고 몇 초 후에는 세상이 무너질 것만 같은 엄청난 굉음이 울렸다.
얼핏 보면 자연적인 천둥벼락으로 보이는 강력한 뇌전은 10서클의 용언마법으로, 12분대의 한가운데를 타격했다.
“이럴 수가!”
칼라히브는 깜짝 놀라 비행마법을 펼쳐서 12분대가 있던 곳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조금 전까지 맹렬한 기세로 적을 공격하던 12분대 소속의 타이탄이 새까만 숯으로 변해 쓰러져 있었다.
아울러 12분대를 피해 도망가던 수천의 애시빌 군은 거의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뭉그러져 있었다.
그 중에는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참가한 애시빌의 왕세자도 있었다.
“아… 아~”
“괜찮습니까? 전 칼라히브입니다.”
“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끄… 끙~ 적이 마법 공격을 해… 했나요?”
“아직 확인은 안 되고 있습니다.”
폭발의 가장자리에 있던 몇몇 라이더들은 운이 좋았는지 용케 살아나서 힘겹게 말했다.
하지만 12분대장을 비롯한 4명은 즉사한 것 같았다.
아울러 그들의 타이탄은 너무 심하게 파괴되어서 작동이 불가능해 보였다.
칼라히브는 급히 마법을 펼쳐 의식이 있는 4명의 타이탄 라이더와 타이탄을 치유했다.
과거 바라나시에게 도움이 되었던 마법은 하급 타이탄에도 큰 힘이 되었다.
그때 또다시 백색 뇌전이 허공에서 떨어졌다.
이번 뇌전은 요새 근처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7분대를 노리고 있었다.
“안 돼!”
티잉~
칼라히브가 다급하게 마법을 펼쳐 뇌전의 방향을 틀었다. 그러자 백색 뇌전이 칼라히브의 마법에 튕겨서는 수 킬로를 날아가다가 엉뚱한 산을 홀라당 태웠다.
마법을 튕겨낸 칼라히브는 더 이상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허공으로 솟구치며 고룡의 행방을 찾기 시작했다.
아울러 모건 남작에게는 매직마우스라는 마법을 사용해서 계속 전투할 것을 부탁했다.
“도대체 누구십니까?”
“이놈,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구나.”
“어떤 분이신데 제 유희를 방해하시는 것입니까?”
“네놈의 유희를 방해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일단 모습을 드러내시지요?”
“오냐,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헙! 카이젤스키님.”
“아니, 너는.”
카이젤스키는 상대가 누구든지 단단히 혼을 내주고는 차원이동기를 회수할 생각이었다. 아울러 그란티아와 관련해서는 함구시킬 생각이었다.
그런데 나타난 드래곤이 수면에 들어갔던 칼라히브임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
“수면에서 깨어났더냐?”
“그렇습니다.”
“그랬구나. 빠하르간지의 레어에서 차원이동기가 사라졌을 때 눈치 챘어야 하는 건데.”
“네?”
“아니다.”
칼라히브는 빠하르간지의 아들이었다.
즉, 그라면 빠하르간지의 레어를 얼마든지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고, 드래곤의 율법에 따라 빠하르간지가 남긴 모든 유산에 대한 상속권이 있었다.
때문에 그에게서 차원이동기를 뺏는 것은 드래곤의 율법을 어기는 행위였다.
‘아! 어쩐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에 카이젤스키는 당황했다. 그렇다고 고룡 체면에 나 몰라라 하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칼라히브를 죽인다면 자신이 타이탄의 뒤를 쫓고 있음을 알고 있는 로드가 이상하게 여겨 조사할 가능성이 많았다.
그리고 그러다 보면 차원이동과 관련된 진실도 밝혀지고 이계의 절대자가 되고 싶은 자신의 꿈도 실패할 가능성이 농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