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아시나요?
테릭이 고대의 유적을 빠져나간 직후, 카트리나는 친구 찾기 기능을 통해 그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우려했던 충돌이 벌어지지 않자 안심하고 몬타나 산맥을 나온 상태였다.
‘아! 다시 연락해볼까?’
몬타나 산맥을 빠져나온 카트리나는 테릭에게 귓속말을 할까 말까 망설였다.
그러나 연락한다고 해서 오해를 하고 있는 테릭이 좋은 말을 할 리는 없었다.
테릭의 귓속말이 온 것은 그때였다.
=>카트리나.
=>어마! 테릭님,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아리아는 어디 있어?
=>네.
=>아니, 또 다른 낯선 방문자라는 명칭을 갖고 있는 리비에라라는 NPC 여자는 어디 있냐고?
그녀는 테릭에게서 귓속말이 먼저 오자 너무 좋아서 생글거리며 대답했다.
그러나 아리아 문제로 거의 실성을 해버린 테릭은 버럭버럭 고함만 질렀다.
=>또 다른 낯선 방문자요?
=>그래, 카이젤스키와 함께 차원이동을 해온 여자 말이야.
=>아!
‘어쩐지 이름이 그렇더라니.’
낯선 방문자라는 NPC 여자는 카트리나도 만난 적이 있었다.
당시 카트리나는 만득과 남수의 얘기만 듣고 레이나를 돕기 위해 그 여자를 공격했었다.
그런데 테릭의 얘기를 들어보니 그 여자도 이계의 존재이고 테릭과는 무슨 관련이 있는 듯했다.
=>역시 알고 있군. 지금 아리아와 같이 있는 거냐?
=>그… 그건 아니에요.
=>아니기는. 아리아가 카이젤스키를 찾아서 나간 이상 너희들과 같이 있겠지.
=>전 지금 일족과는 떨어져서 따로 행동하고 있어요.
=>흥! 끝까지 거짓말을 하는구나. 하지만 내가 못 찾을 것 같아.
=>설마 카이젤스키를 찾아가시겠다는 것은 아니겠죠?
=>왜 아니야? 경고하는데, 아리아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가는 그땐 내가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안 돼요. 지금 가면 너무 위험해요.
=>네가 그런 식으로 나온다고 내가 못 찾을 것 같아.
카트리나에 대한 테릭의 오해는 여전했다.
그는 카트리나와 귓속말을 종료하고는 바로 아르실리안에게 연락했다.
아르실리안은 예기치 못하게 테릭이 귓속말을 해오자 깜짝 놀라서 우물쭈물했다.
=>아르실리안, 나 테릭이다.
=>헉! 테릭님.
=>아리아, 아니 리비에라는 어디 있느냐?
=>리비에라가 누군데요?
=>다 알고 있거늘, 모른 척하지 마라.
=>전 정말 몰라요.
카트리나가 아리아를 만난 것은 그야말로 우연의 일치였다.
하지만 아리아를 모른다는 아르실리안의 말은 100% 진실이었다.
그러나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테릭은 아르실리안이 카트리나에게 무슨 말을 듣고는 딱 잡아떼고 있다고 판단했다.
=>닥치고 지금 있는 장소를 대라.
=>이… 이쪽으로 오시게요?
=>어서 좌표를 불러라.
=>여기 좌표요?
=>그래, 어서.
=>아!
아르실리안을 비롯한 그란티아의 드래곤들은 여전히 테릭을 이계의 드래곤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르실리안은 테릭을 함정으로 빠트리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었다.
때문에 그녀는 테릭이라면 자다가도 놀라서 가슴이 벌렁거렸다.
그런데 테릭이 분노한 음성으로 악을 바락바락 쓰자 아예 주눅이 들고 말았다.
=>빨리 안 불어?
=>좌… 좌표를 송출할게요.
테릭이 좌표를 송출 받은 순간, 암벽지대 위에서 빛이 터져 나오며 카트리나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녀는 궁리 끝에 어떻게든 테릭과 카이젤스키의 충돌을 막아야 하기에 이곳으로 이동해온 상태였다.
“카이젤스키님, 카트리나가 왔습니다.”
“여태 어디서 뭐하다가 이제야 나타났을까?”
“카이젤스키님, 큰일 났습니다.”
“아르실리안, 무슨 호들갑이냐?”
“테… 테릭이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
‘옳아! 저 계집이 나타난 이유가 이거였구나.’
아무리 불러도 대답하지 않던 카트리나였다.
그런 그녀가 나타난 직후 테릭이 온다는 것은 분명 둘이서 뭔가를 작당한 게 틀림없었다.
카이젤스키는 서서히 다가오는 카트리나를 향해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카트리나는 카이젤스키의 시선을 담담히 받아내며 곧장 다가왔다.
“테릭님이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분이서 화해를 하십시오.”
“화해?”
“그렇습니다. 그리고 테릭님은 아리아라는 여자를 찾고 있습니다.”
“아리아?”
“네, 다른 이름으로 리비에라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며 낯선 방문자라는 명칭을 갖고 있는 NPC 여자였습니다.”
“뭐! 리비에라?”
“네.”
“오! 그 계집의 일을 네가 어떻게 알지? 아니, 놈이 리비에라를 왜 찾는 거지? 분명 그 아이는 동시 차원이동에 실패했을 텐데”
“차원이동에 실패했다고요? 아닌데요? 제가 얼마 전에 그녀와 싸운 적이 있는데요.”
“네가 그 계집이랑 싸운 적이 있다고?”
“그렇습니다.”
“그녀는 인간임에도 9서클 마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했습니다. 특히 2~3개의 9서클 마법을 동시에 펼치더군요.”
“방금 인간 여자가 9서클 마법을 동시에 펼친다고 했느냐?”
“네.”
“아! 그렇다면 동시 차원이동이 성공했구나.”
“네?”
“하하하하~ 성공했어! 실패가 아니었던 거야.”
“카이젤스키님도 그분이 이곳에 있는지는 몰랐었군요?”
“하하하하~ 난 천재야. 난 최초로 동시에 차원이동을 시키는 다중 차원기의 개발에 성공했어.”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아리아를 생각해본 적이 없던 카이젤스키였다.
하지만 리비에라가 그란티아에서 움직인다는 것은 동시 차원이동이 성공했음을 의미했다.
뒤늦게 차원이동기가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카이젤스키는 기쁨의 광소를 터트렸다.
테릭이 나타난 것은 그 순간이었다.
* * *
츠파파팟-
“웬 놈이냐?”
“여긴 아무나 못 들어온다.”
“죽고 싶지 않거든 당장 사라져라.”
암벽지대는 여전히 뉴스타와 더블 트라이앵글에 의해서 통제되고 있었다.
그들은 갑자기 나타난 테릭을 향해 잔뜩 폼을 잡으며 경고를 해댔다.
그러나 테릭은 악을 쓰며 경고하는 뉴스타와 더블 트라이앵글의 길드원은 아예 무시하고 카이젤스키와 그 주변에 모여 있는 드래곤들만 바라봤다.
그 중에는 당황해하는 카트리나와 아르실리안도 있었다.
‘결국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는구나!’
한때는 자신에게 큰 도움을 줬던 두 여자였지만 이제는 과거일 뿐이었다.
테릭은 두 여자는 신경 쓰지 않고 카이젤스키만 노려봤다.
“카이젤스키, 아리아는 어디 있느냐?”
“오! 네놈이 정녕 살아 있었구나.”
“헛소리 말고 내 질문에 대답부터 해라.”
“이게 한번 살아나더니 미쳤나?”
“흥! 네깟 놈에게는 죽을 내가 아니다.”
“오냐! 이번에는 아예 머리를 뽑아주마.”
그란티아에서 죽는다고 해서 진짜로 죽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히바의 방패와 철퇴로 무장한 이상 이번에는 승리할 자신이 있었다.
반면,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카이젤스키는 테릭의 행동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백번 양보해도 테릭의 지금 모습은 마치 죽지 못해 안달 난 것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전의 그가 고분고분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무대포는 아니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아리아는 어디 있느냐?”
“네놈이야말로 내 하녀를 찾는 이유가 뭐냐?”
“아리아가 하녀라고? 이런 죽일 놈!”
“으아아악~ 이놈, 듣다보니 참으로 오만방자하구나.”
“아리아를 너 같은 놈이 하녀로 부렸다니, 용서 않겠다.”
“정녕 네놈이 단단히 실성을 했구나.”
“닥쳐라! 친구를 시기하고 음해한 것으로도 부족해서 연구 성과까지 훔쳐간 개만도 못한 놈, 탐욕으로 물든 네놈의 못된 심보를 내가 고쳐주겠다.”
“이노옴~ 거짓을 함부로 말하지 마라!”
“흥! 이미 네놈의 레어를 칼라히브와 다녀왔다.”
“뭐라고?”
“네놈의 레어에서 빠하르간지의 마법서를 비롯해서 일기까지 찾아냈다.”
빠하르간지와 관련된 일은 카이젤스키의 아킬레스건이었다.
특히 일기의 내용이 알려진다면 모든 사실이 드러날 판이었다.
그는 아무도 모르고 있을 줄 알았던 일이 언급되자 거의 광분하고 말았다.
“쥐새끼처럼 내 레어를 훔쳤다는 것이냐?”
“친구의 탈을 쓰고 훔친 네놈보다는 백배나 낫다.”
“오냐! 너뿐만 아니라 칼라히브까지 죽여주마.”
“그게 뜻대로 될까?”
“그깟 애송이에 불과한 칼라히브를 내가 처치하지 못할 것 같으냐?”
“네놈은 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 아스리온으로 절대 돌아갈 수 없다.”
“도대체 뭘 잘못 먹은 것이냐? 한번 죽고 나면 네놈처럼 겁 대가리를 상실하는 것이냐?”
“병신 같은 놈, 네놈 레어에 뭐가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나느냐? 아무래도 네가 연구해서 만든 것이 아니어서 그런가 보구나.”
테릭은 차원이동기를 이곳으로 옮겨온 사실을 알릴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걸 아스리온으로 도로 가지고 가는 대신에 아리아를 넘겨받을 생각이었다.
한편, 카이젤스키는 테릭의 말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다가 문득 차원이동기를 떠올렸다.
“혹시 차원이동기를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이냐?”
“아주 돌머리는 아니구나. 하지만 정답은 아니다.”
“저… 정답이 아니라니?”
“네놈의 레어에 있던 차원이동기는 내가 가져온 후에 이곳 그란티아로 이동시켰다.”
“내 차원이동기가 이곳에 있다고? 그렇다면 내가 접속을 종료하고 다시 아스리온으로 돌아가려고… 아!”
카이젤스키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테릭의 얘기가 사실이라면 자신은 영영 아스리온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야 알았느냐?”
“이놈, 당장 원위치해라!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네놈의 살덩어리는 물론이고 가죽과 내장이며 심지어 피와 뼈까지도 몬스터의 먹이로 줄 것이다.”
“무식한 놈! 아직도 잠꼬대를 하고 있구나.”
카이젤스키는 아직도 그란티아에 대해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테릭은 그런 카이젤스키를 향해 비웃음이 가득한 조소를 날렸다.
테릭의 눈빛에서 비웃음을 발견한 카이젤스키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광분해서 대뜸 용언마법을 펼쳤다.
하지만 테릭에게는 히바의 방패가 있었다.
“그따위 마법은 내게 통하지 않는다.”
찌잉~
“헉!”
“봤느냐?”
“어… 어떻게?”
무시무시한 기세로 날아가던 카이젤스키의 마법은 히바의 방패에 부딪친 순간 눈 녹은 것처럼 사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란티아의 드래곤들은 깜짝 놀라서 쫙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나 누구보다 놀란 것은 마법을 날린 카이젤스키였다.
그는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분명 무슨 문제가 있어서 그랬을 거라고 애써 자위하며 다시 마법을 준비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테릭이 기다려 주지 않았다.
“이놈, 받아라.”
“헙!”
부웅~
“아직 멀었다.”
슈슈슉~
“이크.”
“언제까지 피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철퇴를 이용해 라이징-샷과 빅-휠을 펼친 테릭은 카이젤스키를 암벽 끝으로 몰고는 마나-샷을 날렸다.
카이젤스키는 순간이지만 하찮은 인간에게 기세에서 밀렸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더 이상 피하지 않고 용언마법으로 마나-샷에 대항했다.
“이놈, 재롱은 여기까지다.”
“그깟 마법은 내게 통하지 않는다고 했을 텐데.”
츠파파팟~
파치치칙~
꽈꽈꽝~
마나-샷과 용언마법이 허공에서 충돌하면서 천지를 진동하는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주신의 권능이 실린 철퇴의 힘은 대단해서 중심부가 용언마법을 뚫고 카이젤스키에게 쇄도해갔다.
“헉! 이런.”
“봤느냐?”
후다닥~
부웅~
“헙!”
카이젤스키는 이번에도 용언마법이 막히자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와중에 푸른색 오러가 용언마법을 뚫고 빠르게 다가오자 깜짝 놀라서는 헛바람을 토해내며 바닥을 굴렀다.
그러나 그가 중심을 잡으며 일어서려는 순간, 눈앞에서 시커먼 것이 어른거렸다.
그리고 그걸 피한다고 고개를 흔드는 찰라 강력한 충격과 함께 눈앞에서 별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퍽-
“커헉~”
“이제는 알겠느냐?”
“이… 이노옴~”
철퇴에 얻어맞은 카이젤스키는 충격으로 기우뚱거리다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그 덕에 두 번째 공격은 피했다.
천우신조로 용케 위기를 넘긴 카이젤스키는 곧장 비행마법을 펼쳐 허공으로 솟구쳤다.
“도망가는 것이냐?”
“장난은 여기서 끝이다. 나도 더 이상 봐주지 않겠다.”
“주둥이만 산 것은 여전하구나. 브레스라도 날릴 속셈 같은데 어디 원 없이 날려봐라. 다 막아줄 테니!”
카이젤스키는 폴리모프를 풀고 본신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용언마법이 막혔다고는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 브레스라는 강력한 무기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에어워킹을 펼치며 허공으로 솟구친 테릭의 철퇴가 또다시 다가왔다.
게다가 그는 브레스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부우웅~
“헉!”
“여기서 죽고 싶지 않다면 아리아의 행방을 대라.”
슈욱~
“이크.”
그 자리에 가만있다가는 철퇴에 그대로 얻어맞을 판이었다.
때문에 카이젤스키는 더욱 높이 솟구쳐 올라갔다.
테릭은 비행마법을 펼쳐서 쫓아가려 했지만 워낙 속도 차이가 심해서 거리만 더 벌어졌다.
아무래도 에어워킹으로 비행마법을 쫓는 것은 무리였다.
‘아! 처음부터 바라나시를 소환했어야 하는데.’
히바의 방패와 철퇴를 너무 믿은 것이 실수였다.
카트리나가 나선 것은 그때였다.
“다들 말려! 여기서 본신으로 변신하게 해서는 안 돼.”
“아!”
“난 카이젤스키님께 가겠다.”
“나도.”
“카트리나, 테릭님은 네가 맡아라.”
* * *
그란티아의 다섯 드래곤이 일제히 솟구쳤다.
그중 4명은 카이젤스키에게 날아갔다.
한편, 혼자 남은 카트리나는 테릭에게 다가가기보다는 귓속말을 날렸다.
=>테릭님, 아리아라는 분의 행방은 카이젤스키도 모릅니다.
=>그런 개소리는 집어치워!
=>사실입니다. 카이젤스키는 방금 전까지 차원이동이 실패한 줄 알고 있었습니다.
=>차원이동이 실패하다니?
=>저도 그것까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카이젤스키는 제가 아리아라는 여자를 우연히 만났다는 말을 했을 때 믿지 않다가 크게 놀란 눈치였습니다.
=>내가 또 속을 것 같아?
=>사실입니다. 그는 동시 차원이동이 실패한 줄 알았다가 제 말을 듣고는 최초로 다중 차원이동기의 개발에 성공했다고 좋아했습니다.
=>동시 차원이동이 무슨 뜻이지?
=>제 추측으로는 차원이동기 하나를 통해 두 분이 동시에 이동을 한 것 같습니다.
=>다중 차원이동기는?
=>차원이동기 하나를 통해 여럿이 차원이동을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러고 보니 카이젤스키의 차원이동진을 살펴보던 칼라히브도 그런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칼라히브는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카이젤스키의 차원이동진은 빠하르간지의 차원이동진을 확대시킨 것 같다고 말했었다.
‘정말 아리아와 카이젤스키가 동시에 차원이동을 했을까?’
=>그게 사실이야?
=>소멸을 담보로 맹언을 하라면 하겠습니다.
=>아!
카트리나는 자신의 말에 목숨을 걸겠다고 했다.
테릭은 카트리나가 맹언까지 하겠다고 하자 그녀의 말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리아가 왜 자신의 이름을 리비에라라고 말했으며, 카이젤스키를 주인으로 섬기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세뇌?’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칼라히브도 종종 세뇌마법을 펼친 적이 있었다. 하물며 고룡급 드래곤인 카이젤스키라면 세뇌마법을 사용해서 아리아의 의식을 뜯어고치는 것은 일도 아닐 것 같았다.
“죽일 놈!”
아리아의 아버지를 죽인 것으로도 모자라 그녀를 세뇌까지 시키다니 새삼 분노가 솟구쳤다.
테릭이 또다시 분노하는 사이 카트리나의 맹언은 시작되었다.
“레드족의 카트리나 아리프 나말리샤리우스 제이곱은 신이 부여한 신성한 약속의 맹세를 하노라.”
“카트리나, 뭐하는 거야?”
“이는 맹언이니 거짓을 발설 시에는 오직 소멸의 벌이 따를 것이다.”
“카트리나, 이제 진실을 알았으니까 그만해도 돼.”
테릭은 카트리나를 말리려고 했다.
그러나 카트리나는 계속해서 맹언을 하며 아리아와 관련된 얘기를 했고, 그 다음에는 테릭이 오해하고 있는 일도 얘기했다.
테릭은 카트리나의 맹언을 들으면서 자신이 오해했음을 알았다.
‘아! 그랬구나.’
“지금까지 말한 것은 추호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며, 나는 내 모든 것을 바쳐 이계의 존재인 테릭을 돕겠다는 것을 맹세한다.”
“아! 카트리나.”
“테릭님, 이제 믿으시겠지요?”
“미안해, 내가 나빴어.”
그렇게 모질게 굴었건만 카트리나는 원망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테릭을 돕겠다고까지 했다.
이제야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테릭은 오히려 오해을 하고 그녀를 욕했던 자신이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전에 밝히려고 했던 문제도 얘기하기로 했다.
“정말 믿으시는 거죠?”
“그래. 그리고 나도 할 말이 있어.”
“뭔데요?”
“먼저 카트리나의 얘기를 들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의심만 해서 정말 미안해. 내가 옹졸한 놈이었어.”
“아니에요. 그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그랬을 거예요.”
“그리고 난 카트리나가 알고 있는 것처럼 이계의 드래곤이 아냐.”
“네?”
“난 이계의 인간이야. 난 카트리나가 날 드래곤으로 오해하고 있는 줄은 정말 몰랐어.”
“아!”
인간이라는 테릭의 말에 카트리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테릭은 의외의 사실에 당황하고 있는 카트리나를 향해 맹언을 취소해도 좋다고 말했다.
“난 원망하지 않을 거니까 맹언을 취소해. 나 때문에 다른 드래곤과 사이가 멀어질 필요는 없어.”
“아니에요.”
“아니라고? 난 아리아라는 여자 친구를 구하고 비명횡사를 한 그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서도 카이젤스키와 싸워야 해.”
테릭은 카트리나를 제외한 그란티아의 드래곤들이 카이젤스키와 보통관계가 아니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다른 드래곤들이 전부 카이젤스키에게 날아간 것이 그 좋은 증거였다.
그 말은 카트리나가 자신 때문에 다른 드래곤들과 불편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테릭님이 이계의 드래곤이어서 도우려고 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게 무슨?”
“내가 좋아하고 도우고자 하는 이는 테릭님, 그 자체이지 이계의 드래곤이라는 허울이 아니에요.”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고백할 게 있어요.”
“뭔데?”
“레이나, 기억하시죠?”
“으… 응.”
레이나를 왜 모르겠는가?
그란티아에 처음 접속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때 가장 큰 도움을 줬던 이가 그녀였다.
그리고 장난 내지는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란티아 내에서는 서로 애인행세를 하기로 약속한 사이였다.
물론 애인의 범위를 그란티아 내로만 국한했었기에 큰 의미를 부여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장 힘들었던 초창기에 의지가 되었던 인연이기에 지금도 그녀와의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했다.
“실은 제가 레이나와 테릭님을 속인 게 있어요. 혹시 아시나요?”
“속이다니, 뭘?”
“레이나가 우리 둘의 관계를 오해하도록 제가 일부러 연출을 했었어요.”
“연출이라니?”
“목걸이 사건요, 레이나가 오해해서 테릭님 뺨을 쳤던…….”
“아!”
이제야 기억이 났다. 사실 그날의 일이 계기가 되어 둘의 관계는 멀어지고 말았다.
카트리나는 당시의 일이 철저히 계획되어지고 계산된 행동이었다며 그때의 일을 사과했다.
“그랬던 거야?”
“네, 죄송해요.”
“됐어, 이미 지난 일인데.”
그때의 일을 사과한 카트리나는 레이나가 지금도 섭섭하게 생각하고 있는 일을 물어봤다.
그것은 레이나가 보낸 메일을 테릭이 읽어보지도 않고 삭제한 일이었다.
그러나 테릭은 금시초문이었다.
“내가 언제?”
“레이나는 그렇게 알고 있던데요?”
“난 모르는 일인데… 아! 생각났다.”
메일을 삭제한 일이라면 와이번의 알을 부화시킨 후 엄청난 메일이 쏟아져 왔을 때 벌어진 일이었다.
당시 계속해서 울려대는 알람이 귀찮고 짜증난 테릭은 메일함을 뒤지다가 엉겁결에 전체 삭제를 했었다.
테릭은 그때의 일을 언급하며 몰라서 그랬다고 설명했다.
“그랬군요. 예전의 사건과 그때의 일은 제가 레이나에게 설명을 하죠.”
“레이나를 알아?”
“그때 같이 있다고 얘기했잖아요?”
“아! 맞다.”
* * *
카트리나가 테릭에게 귓속말을 시작하던 무렵, 카이젤스키는 그란티아의 드래곤들에게 둘러싸였다.
그들은 광분해서 본신으로 변신하려는 카이젤스키를 뜯어말리고 있었다.
“비켜라!”
“진정하십시오, 카이젤스키님.”
“내가 본신으로 변신하면 저딴 놈은 상대도 안 된다.”
“하지만 많은 인간들이 지금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깟 인간들은 브레스로 전부 지져버리면 된다.”
“그건 안 될 일입니다.”
“제가 보기에 그는 카이젤스키님의 브레스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아직 드래곤의 정체가 인간들에게 알려져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면 우리 모두는 유희를 중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디 우리를 위해서 참아 주십시오.”
게임 시나리오상 아직 드래곤이 노출되어서는 안 되었다.
그란티아 내에서 드래곤들이 최강의 실력을 갖고 있다고 해도 결국 그들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프로그램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프로그램이 강제하는 대로 드래곤의 정체가 노출되지 않도록 카이젤스키를 말렸다.
하지만 분노한 카이젤스키는 그들을 뿌리쳤다.
“카이젤스키님, 본신으로 변신한다고 해서 테릭님을 이길 수 있습니까?”
“뭐야?”
“만일 그도 본신으로 변신하면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뭐! 놈이 본신으로 변신한다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천만에요. 테릭님도 당연히 폴리모프를 풀게 될 것입니다.”
이들은 테릭을 드래곤으로 알고 있었다.
카이젤스키는 테릭이 인간인 사실을 발설하려다가 자신이 한 말이 있어서 차마 말을 잊지 못했다.
그때 테릭을 이길 수 있겠냐고 물었던 아르실리안이 재차 질문했다.
테릭과 카이젤스키의 전투를 지켜봤던 그녀는 카이젤스키가 테릭에게 형편없이 밀리자 심리적으로 굉장히 불안한 상태였다.
“이전에 테릭을 이겼다는 말이 사실인가요?”
“지금 나를 의심하는 것이냐?”
“의심 안 하게 생겼습니까? 전 카이젤스키님만 믿고 그를 유인했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카이젤스키님이 그를 당해내지 못하면 저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닥쳐라. 나는 SMAX급 타이탄까지 소환한 그를 죽였다.”
“죽은 자가 어떻게 살아 돌아옵니까?”
“그게… 그것이…….”
이 부분에서는 카이젤스키도 의문이었기 때문에 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카이젤스키가 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다른 드래곤도 의심이 섞인 눈초리로 바라봤다.
불신 가득한 그들의 시선을 의식한 카이젤스키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분명 그를 죽였다! 예전에 아르실리안과 파돌프스키의 버릇을 고쳐준 장소에 가면 당시의 전투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을 것이다.”
“네?”
“그란티아 내에서 그를 죽였다고요?”
“그러니까 안 죽지요.”
“그게 무슨 소리냐?”
“카이젤스키님, 그것도 모르고 계셨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
“이방인들은 그란티아 내에서 죽인다고 해서 진짜로 죽는 것이 아닙니다.”
“흥! 그게 무슨 소리냐? 별 볼일 없는 인간들이 불사의 존재라도 된다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엥! 그렇다고?”
“확실합니다.”
“맹세할 수 있습니다.”
카이젤스키는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이곳 드래곤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며 바라봤다.
그러나 이곳 드래곤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진지하기만 했다.
카이젤스키는 그제야 이들의 얘기가 단순히 지어낸 것이 아님을 알았다.
“카이젤스키님, 일단 장소를 옮기는 게 좋겠습니다.”
“설명이 길어질 수도 있으니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테란 시로 모시겠습니다.”
그란티아 드래곤들 입장에서는 일단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잠시 후 베르키너스가 대표로 나서며 단체 텔레포트 마법을 펼쳤다.
카이젤스키를 포함한 일행 모두는 테란 시로 이동했다.
“아까 못한 얘기를 마저 해봐라.”
“그러니까 그란티아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습니다.”
“남자, 여자?”
“그게 아니라 이방인과 그렇지 않은 인간들입니다.”
그란티아의 드래곤들은 인간과 이방인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이방인이 아닌 프로그램인 이상 정확하고 자세한 설명은 하지 못하고 대충 겉만 훑는 정도의 피상적인 설명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인간들 중에서 이방인은 외부에서 오며, 그들은 그란티아에서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그럼 인간들이 나처럼 차원이동을 해온다는 것이냐?”
“그들 역시 다른 차원에서 들어오는 이상 차원이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허허~ 세상에, 인간들이 차원이동을 하다니.”
“카이젤스키님 진정하시고 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
“그래, 어서 해봐라.”
빠하르간지의 경고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이 잘못이었다. 먼저 이곳을 방문했던 빠하르간지는 이곳 인간들의 힘이 신비하고 대단하다면서 감탄과 함께 그들을 경계했었다.
그가 이곳 인간들의 얘기를 할 때마다 카이젤스키는 인간을 경계하는 빠하르간지를 비웃으며 그의 경고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러나 지금 보니 끝없이 부활하는 이방인이란 존재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빠하르간지, 그놈은 하필 와도 이런 이상한 곳을 와서 끝까지 나를 속 썩이는구나.’
빠하르간지의 연구 성과를 훔친 주제에 할 말은 아니었다.
그렇게 빠하르간지를 원망하던 카이젤스키는 문득 자신도 이곳에서 죽으면 죽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도 다른 차원에서 왔으니까 죽어도 부활하겠구나.’
이방인이라 함은 플레이어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카이젤스키는 플레이어가 아닌 NPC의 상태였기에 부활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카이젤스키는 자신도 부활이 가능하다고 착각했다.
그리고 죽어도 부활을 하는 이상, 이곳의 주신과 아예 사생결단을 내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이곳의 주신이 된 후에 아스리온으로 돌아가면, 그때는… 아차! 차원이동기.’
테릭은 분명 차원이동기를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영영 아스리온으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었다.
‘아! 내가 너무 흥분했구나.’
지금은 무엇보다도 차원이동기의 행방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카이젤스키는 여전히 횡설수설하며 아직도 이방인에 대해 떠드는 그란티아의 드래곤들을 제지했다.
“난 잠시 다녀오겠다.”
“혹시 싸우기 위해서 다시 가시는 것은 아니겠죠?”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다. 금방 다녀오마!”
윙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