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넌 누구냐?
“기동단, 계속 전진하라!”
“후터스 성을 초토화시켜라.”
“놈들이 정신을 못 차리게 계속 밀어붙여라.”
“단 한 명의 적군도 살려 보내지 마라.”
“와아아아~”
나흘에 걸친 타이탄 기동단의 공격은 그간 18개의 요새를 박살내고 지금은 후터스 성 함락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제국군은 마법으로 강화된 발리스타를 앞세워 끈질기게 저항했으나, 모습을 감추고 불시에 나타나는 타이탄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한층 업그레이드된 타이탄의 방호 능력은 발리스타의 파괴력을 훨씬 초과하고 있었다.
픠슝~
슈융~
“적의 발리스타를 파괴하라.”
“놈들의 마지막 저항에 물러서지 마라.”
꾸꿍~
후루룩~
431대의 타이탄이 마법을 날리고 발길질을 하며 무기를 휘두를 때마다 후터스 성은 점차 무너져 갔다.
성벽에 있던 제국군은 성벽이 기울기 시작하자 혼비백산해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후터스 성은 이미 타이탄에 의해 완벽히 포위된 상태였다.
“기동단, 전원 성벽으로 올라가라.”
“오늘부로 후터스 성은 지도에서 사라진다.”
“와아아아~”
타이탄 기동단의 선두는 테릭의 직계 부하라고 할 수 있는 카일록의 노련한 라이더들이 맡고 있었다.
그러나 라이더가 된 지 불과 20일밖에 안 된 신입 라이더들도 이제는 상당한 라이딩 실력을 보이고 있었다.
그야말로 그들에게 있어 이번 전투는 실전이자 훈련이나 마찬가지였다.
“모두 성벽을 내리찍어라!”
꽝-
꽈꽝-
우수수~
“좀 더 힘을 내라!”
꾸꿍-
우수수~
쩌쩌쩌쩍~~
성벽으로 올라간 431대의 타이탄이 일제히 성벽 바닥을 내리찍었다.
각각 수십 톤에 달하는 타이탄이 있는 힘껏 바닥을 내리찍을 때마다 후터스 성은 신음 같은 굉음을 내며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성벽 바닥 곳곳에는 이미 커다란 금이 지옥 입구처럼 쩍 벌어진 채 성벽 전체를 휘감았다.
“몇 번만 더하면 성은 무너질 것이다.”
“내리찍는 발에 모든 힘을 집중하라.”
꿍~
쩌쩌쩍-
후두두둑~
와르르르륵~
마침내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던 후터스 성이 일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제국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후터스 성의 붕괴는 아직까지 함락되지 않은 요새에서 지금껏 버티고 있던 제국의 병사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들은 허무하게 무너지는 후터스 성을 보며 머지않아 자신들의 요새도 저런 최후를 당하게 되리란 것을 직감했다.
“아악~ 저건 우리의 상대가 아냐.”
“발리스타도 통하지 않는데, 뭐로 싸우라는 것이냐?”
“이깟 창이나 활로 타이탄에 맞선다는 것은 미친 짓이야.”
“맞아. 여기서 죽는 것은 개죽음이야.”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어.”
“애초에 타이탄을 보유한 타라한 군과 전쟁을 벌인 것이 실수였어.”
“난 살기 위해서도 여길 떠나겠어.”
“나도 마찬가지야.”
“나 역시 같이하겠어.”
“와아아아~”
제국군의 붕괴는 최후방 요새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은 전선에서 이탈하면 군법에 처하겠다는 지휘관을 무참히 짓밟고는 요새의 문을 열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탈출을 본 인근 요새의 병사들도 탈출 대열에 동참했다.
순식간에 후방에 있던 27개의 요새 중 18개의 요새가 텅 비어버렸다.
이 광경을 목격한 테릭은 후방에서 잔뜩 벼르고 있던 본대의 투입을 결정했다.
=칼라히브, 어디쯤이야?
=후터스 성 후방 24km야.
=방금 후터스 성이 무너지면서 제국의 방어선이 크게 붕괴되고 있어.
=이쯤에서 본대를 투입시켜 함락시킨 요새를 접수할까?
=그래, 그게 좋겠어.
=좋아, 바로 출발시키지.
=우리는 그동안 다음 요새를 함락시킬게.
통신을 종료한 테릭은 패잔병 소탕을 위한 10명의 라이더를 후터스 성에 남기고는 북쪽 요새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지르크라는 이름의 요새는 400대가 넘는 타이탄이 몰려오자 황급히 발리스타를 날렸다.
“기동단, 적의 요새를 단숨에 파괴한다.”
“충-”
“마법 공격부터 실시하라.”
퍼퍼펑~
꽈꽈꽝~
라이더들은 그동안 20여 개의 요새를 함락시키면서 수많은 경험을 축적한 상태였다.
가장 먼저 바라나시를 필두로 중급 타이탄의 마법이 망루와 첨탑을 비롯한, 엄폐되어 있는 장소의 발리스타를 타격했다.
이어서 하급 타이탄의 마법이 성벽 위를 강타했다.
요새의 제국군은 강력한 마법 공격에 정신을 못 차리고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기동단, 이틈이다.”
“성벽 위로 올라가라.”
“요새를 무너트리자.”
“와아아아~”
제국군이 미처 전열을 가다듬기도 전에 50여 대의 타이탄이 성벽 위에 내려섰다.
그렇게 성벽 위에 올라선 타이탄은 눈에 보이는 것은 닥치는 대로 휩쓸기 시작했다.
그사이 더욱 많은 타이탄이 성벽 위에 내려섰다.
성벽은 갑작스런 하중의 초과를 이기지 못하고 짐승의 울부짖음과 비슷한 소리를 토해냈다.
“공작 각하, 모든 발리스타를 제거했습니다.”
“좋다. 지금부터는 요새의 시설물을 철저히 파괴하라.”
“충-”
진격을 시작한 본대의 안전을 위해서도 요새의 기능은 철저히 파괴해야 했다.
라이더들은 제국군이 숨어들어갈 만한 공간을 남김없이 부수며 초토화 작전에 돌입했다.
* * *
“전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인가?”
“발렌시아 제국이 조금 전에 항복을 했다고 합니다.”
“뭐! 제국이 타라한 왕국에 항복했다고?”
“그렇다고 합니다. 3일 전 후터스 성을 점령한 타라한 군이 오늘 오전 400대가 넘는 타이탄을 동원해서 제국의 수도와 황궁을 맹공격했다고 합니다.”
“아!”
“그 일로 제국의 수도와 황궁은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철저히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오! 이 일을 어찌할꼬.”
타이탄 기동단의 장점은 그야말로 소수 정예였다.
그리고 테릭의 옆에는 칼라히브를 필두로 20마리가 넘는 드래곤이 있었다.
테릭은 드래곤의 도움을 받아 타이탄 기동단을 이끌고 제국의 수도를 급습했다.
제국의 황제는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려고 했으나, 항복을 하지 않으면 매일같이 두 개의 도시를 초토화하겠다는 테릭의 협박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전하, 우리도 항복해야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 애시빌 왕국은 비명횡사한 왕태자의 원수를 갚을 때까지, 끝까지 타라한과 싸울 것이오.”
“전하, 제국이 항복한 마당에 다른 왕국이라고 항복을 안 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게다가 타라한 왕국은 계속해서 타이탄을 생산하고 있다고 합니다.”
“타라한 왕국은 이제 명실상부한 대륙 제일의 강국입니다. 우리가 그들과 계속 싸운다고 하면 필시 우리 애시빌 왕국은 패망하게 될 것입니다.”
“듣기 싫소.”
제국과 함께 5개국 동맹을 구성했던 다른 4개 왕국은 제국의 항복으로 큰 혼란에 빠졌다.
어찌되었든 가장 강력한 힘을 갖추고 있는 제국은 동맹의 수장국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믿었던 제국이 항복한 이상, 이들 4개국은 이제 스스로의 힘만으로 타라한과 싸워야 했다.
때문에 4개 왕국에서는 지금이라도 항복해야 한다는 의견이 우후죽순처럼 튀어나왔다.
하지만 아들을 잃은 애시빌의 국왕은 항복하자는 귀족들의 의견을 묵살한 채 여전히 결사항전을 부르짖었다.
“전하, 속보이옵니다.”
“또 무슨 일인가?”
“사라한 왕국의 왕궁이 수백 대가 넘는 타이탄의 거센 공격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뭐! 타이탄이 이번에는 사라한 왕국에 나타났다고?”
“그렇다고 합니다. 벌써 왕궁의 절반 이상이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조금 전까지 제국을 공격했던 타이탄이 도대체 무슨 재주로 사라한 왕국에 나타났다는 것이오? 그것들은 날개라도 달렸답디까?”
“전하, 알려진 바로는 타이탄에 날개가 달렸다고 합니다.”
“아!”
제국의 갑작스런 항복 소식으로 개최된 대책회의는 연이어 들려오는 안 좋은 소식에 더욱 침울해졌다.
그리고 이는 항복하자는 귀족들의 세를 더욱 불리게 했다. 하지만 끝까지 전쟁을 하자는 국왕은 뜻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대책회의는 항복을 하자는 귀족과 전쟁을 하자는 국왕이 충돌하는 양상으로 변질되며 아까운 시간만 허비하고 있었다.
그때 통신을 담당하는 마법사가 또다시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전하~ 급보이옵니다.”
“이번에는 무슨 일인가?”
“사라한 왕국이 방금 항복을 했다고 합니다.”
“뭐! 사라한 왕국이 항복을 해?”
“그렇다고 하옵니다.”
“아!”
“전하, 송구하오나 그 외에도 안 좋은 소식이 또 있습니다.”
“이보다 더 나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어서 말을 해보게.”
“제국과 사라한 왕국의 항복 소식을 접한 하이폰 왕국도 곧 항복 선언을 발표한다고 합니다.”
“하이폰마저…….”
“그리고 타이탄의 다음 공격지가 밝혀졌습니다.”
“헉!”
“설마?”
하이폰 왕국까지 항복한다면 이제 남은 나라는 애시빌 왕국과 메즈텍 왕국뿐이었다.
애시빌의 국왕과 귀족들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마법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항복은 절대 안 된다며 전쟁을 부르짖던 국왕도 이 순간만큼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타이탄의 다음 공격지는 메즈텍 왕국이라고 합니다.”
“휴우~”
“하악~”
“후우~”
누구랄 것 없이 일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게 지루한 논쟁의 시작이 되었다.
귀족들은 더 늦기 전에 항복해야 한다며 국왕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전하, 분해도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왕국이 존속해야 복수도 가능합니다.”
“전하, 부디 귀족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후우~ 결국 이렇게 되는 것인가?”
아무리 국왕이라고 해도 전쟁이라는 국가의 중대사를 혼자서 결정할 수는 없었다.
결국 애시빌의 국왕은 귀족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항복을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사이 사라한 왕국의 왕궁과 수도를 초토화시킨 테릭은 세 번째 목표인 메즈텍 왕국의 수도에 당도했다.
“기동단, 확장형으로 변신하라!”
윙윙~
츠파팟~
파파팟~
“메즈텍은 이미 항복을 했음에도 전쟁을 일으킨 신의 없는 국가이다. 내가 별도의 명령을 내리기 전까지는 왕궁과 수도의 주요 건물을 파괴하라!”
“충-”
테릭도 인간이기에 감정이 있었다.
그가 제국에 이어서 왕국을 공격한 순서는 얼핏 보면 차례대로 이동한 것 같지만 실은 철저한 계산대로 움직였다.
즉, 사라한은 어머니와 할머니를 공격한 것에 대한 보복이었고, 메즈텍은 항복을 했음에도 다시 전쟁을 일으킨 것에 대한 응징이었다.
“비겁한 메즈텍을 응징하자.”
“공격하라.”
꽈꽈꽝~
퍼퍼퍼펑~
쿠쿠쿵~
불시에 나타난 431대의 타이탄은 닥치는 대로 왕궁과 수도의 시설물을 파괴했다.
하지만 무고한 백성들의 인명 피해를 우려해서 마법의 사용은 가급적 자제하고 있었다.
그때 메즈텍 왕궁에 항복을 뜻하는 백기가 내걸렸다. 하지만 테릭은 공격 중지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전하, 타이탄의 공격이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혼란스러워서 보지 못한 것일 수도 있으니, 눈에 잘 띌 수 있도록 깃발을 힘차게 휘두르라고 해라.”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합니다.”
“전하, 아무래도 우리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한 보복인 것 같습니다.”
“이게 모두 경들 때문이오. 짐이 전쟁을 하지 말자고 그렇게 말렸건만…….”
“전하, 지금은 잘잘못을 따지기보다는 공격을 중지시킬 방안을 빨리 찾아야 합니다.”
“무슨 대안이 있으면 어서들 말해보시오.”
그날 메즈텍의 국왕은 수도의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벽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서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테릭은 왕궁과 수도의 주요시설을 파괴하고 나서야 항복을 승인했다.
* * *
“카트리나가 왜 접속을 안 하지?”
“글쎄?”
“나도 그날 이후로 본 적이 없는데.”
“이렇게 오랫동안 보이지 않은 적은 없었는데.”
카이젤스키에게 죽음을 당했던 레이나는 10일이 지났음에도 카트리나가 보이지 않자 걱정을 했다.
그날 먼저 죽어서 정확한 상황은 알지 못하지만 당시의 정황상 아무래도 카트리나 역시 당한 듯했다.
“정 궁금하면 귓속말을 해봐.”
“아예 접속이 안 되어 있어서 해봐야 소용없어.”
“무슨 일이 있나 보지.”
“그래도 그렇지, 벌써 며칠째인데. 혹시 우리 때문에 죽어서 화난 것은 아닐까?”
“에이~ 아닐 거야.”
“그래, 얼마 안 있으면 웃는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 거야.”
로빈과 피터팬은 걱정하는 레이나를 다독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레이나는 불안감이 가시지 않는지 여전히 불안해하고 있었다.
테릭이 접속한 것은 그때였다.
“어마! 테릭이 들어왔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친구 삭제했다고 했잖아?”
“다시 친구 등록했어.”
“어! 너, 다시 테릭을 만나는 거야?”
“남수 형은 어떻게 됐어?”
“그 사람을 왜 나한테 물어봐?”
“두 사람, 사귀는 사이 아니었어?”
“사귄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동안 남수는 틈만 있으면 입버릇처럼 레이나가 여자 친구라고 말하고 다녔다. 또 남수와 레이나가 종종 붙어 다닌 적도 많았다.
그랬기에 그 둘을 알고 있는 주변 사람들은 두 사람이 연인사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카트리나의 양심선언 이후 속사정을 알게 된 레이나는 남수를 따로 불러서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그러나 로빈과 피터팬은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남수 형이 네가 여자 친구라고 몇 번이나 그랬는데.”
“그래, 둘이 따로 만난 적도 몇 번 있잖아?”
“그건 하도 귀찮게 해서 만난 거지. 그리고 그렇게 몇 번 만났다고 사귀는 사이라면 너희들과도 사귀는 사이겠네?”
“그… 그런가?”
“아무튼 내 앞에서 다시는 그 사람 얘기는 꺼내지도 마.”
“꼭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어찌되었든 그간 쌓아온 정이 있는데.”
“됐어. 재수 없어!”
레이나는 테릭과 재회는 했지만 예전과 다르게 거리감이 느껴졌다.
레이나는 그게 전부 남수와 만득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자신이 테릭과 멀어진 이유도 그 두 사람의 음모 때문이었다.
그때의 일을 생각한 레이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머리를 사정없이 흔들었다.
반면, 아무것도 모르는 로빈과 피터팬은 괜히 짜증을 내는 레이나를 바라보며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는 말을 떠올렸다.
“난 갈래.”
“어디?”
“테릭이 오랜만에 들어왔는데 얼굴이라도 봐야지.”
“우리도 같이 갈까?”
“됐어!”
레이나는 따라오겠다는 두 친구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 무렵, 테릭은 드워프 마을에서 족장을 만나며 감사의 인사를 하고 있었다.
“전쟁은 잘 마무리되었는가?”
“족장님과 이곳 드워프들이 도와준 덕분에 잘 끝났습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나보군?”
“그것도 있지만 우리 왕국을 침략하고자 했던 모든 국가들과 휴전협상이 진행 중입니다.”
“테릭, 한 가지만 충고해도 될까?”
“아무리 힘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억누르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네.”
“이번 경험을 통해 저도 충분히 배웠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강하다고 해도 전쟁은 결국 모두에게 피해를 남겨주는 일이더군요.”
“그걸 알았다니, 자네가 사는 세상은 이제 평화와 번영이 찾아오겠군.”
“앞으로 노력해야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이전처럼 작품 창작에만 몰두하면 되겠군.”
“죄송합니다.”
100대의 타이탄을 제작할 당시, 족장을 비롯한 마을의 모든 드워프들이 작업에 동원됐었다.
물론 그 배경에는 테릭의 급한 사정을 알게 된 카트리나의 협박이 가장 큰 이유였다.
당시의 일을 떠올린 테릭은 새삼 미안한 마음에 사과를 했다.
테릭의 마음을 이해한 족장은 따뜻한 미소로 화답한 뒤 아직 제공하지 않은 예술품에 대해 말을 꺼냈다.
“오늘 온 김에 예술품을 가져가겠나?”
“어! 그사이 작품을 다 완성하셨나요?”
“다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작품이 완성되었네.”
“그럼, 나중에 한꺼번에 가져갈게요.”
“자네, 편할 대로 하게.”
레이나에게서 귓속말이 온 것은 그때였다.
족장과의 얘기를 끝내고 테릭은 자이툰에서 레이나를 만나기로 했다.
테릭은 레이나를 만나면 카트리나의 안부부터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란티아에 접속할 때면 항상 먼저 연락하던 카트리나가 오늘은 조용한 것도 이상했다.
족장과 작별인사를 나눈 테릭은 바로 자이툰으로 이동했다.
“테릭, 여기야.”
“먼저 와 있었네.”
“응, 그동안 별일 없었지?”
“그냥, 뭐 그럭저럭이지.”
테릭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너무 많은 레이나였다.
테릭은 굳이 힘든 전쟁을 치르고 왔다는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대신 아직까지 연락이 없는 카트리나에 대해 물었다.
“나도 못 본 지 꽤 됐어.”
“그랬구나.”
“나도 카트리나가 이렇게 오랫동안 접속을 안 한 적은 처음이라서 괜히 불길한 예감이 들어.”
“접속을 안 해?”
“응, 아마 10일쯤 된 것 같아.”
“뭐! 접속을 10일 동안 안 해?”
“응.”
레이나는 모르고 있지만 카트리나는 이곳의 드래곤으로 일종의 NPC였다.
그리고 테릭은 그녀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즉, 플레이어가 아닌 그녀가 접속을 안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어쩌다가 그런 거야?”
“그게 그러니까… 마왕을 쫓을 때부터 그런 것 같아.”
“마왕이라니?”
레이나는 카트리나를 마지막으로 본 장면을 떠올렸다.
레이나의 얘기를 들은 테릭은 순간 카트리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을 직감했다.
“안 되겠어. 카트리나에게 귓속말을 보내봐야겠어.”
“접속이 안 된 상태라 전달되지 않을 거야. 조금 전에도 친구창을 열어봤는데 여전히 미접속으로 나왔어.”
“뭐!”
“너도 확인해봐.”
테릭은 급히 친구창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밝게 빛이 들어온 레이나하고는 달리 카트리나의 이름은 짙은 회색으로 어두웠다.
* * *
“하하하~ 이번에는 제법 괜찮은 스킬을 건졌구나.”
“카이젤스키님, 축하합니다.”
“하벨, 어서 가서 또 한 명의 인간을 이곳으로 유인해라.”
“알겠습니다.”
카이젤스키는 오늘도 1마왕 하벨과 함께 고대 유적을 뒤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전과 비교해서 특이한 것은 카이젤스키가 각종 아이템을 착용하고 있는 점이었다.
그가 착용하고 있는 아이템들은 고대 유적을 휩쓸고 다니면서 얻은 고대급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고대의 유적을 조금 전에 클리어한 카이젤스키가 지금 재미를 붙이고 있는 일은, 플레이어들을 잡아서 그들의 스킬을 흡수하는 놀이였다.
며칠 전부터 시작한 이 놀이는 플레이어에게 앱솔션을 펼치면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신기하게도 플레이어를 상대로 앱솔션을 펼치면 생명력과 마기만 늘어나는 게 아니라 그들의 스킬까지도 얻을 수 있었다.
=>카이젤스키님, 한 놈 더 데려왔습니다.
=>잘했다.
=>저는 가서 다른 사냥감을 물색하겠습니다.
=>오냐!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또다시 인간을 유인해온 하벨은 빠르게 사라졌다.
플레이어는 갑자기 하벨이 사라지자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기 시작했다.
그 순간 어둠속에 숨어 있던 카이젤스키의 몸이 슬쩍 드러났다.
“마왕! 거기 숨어 있었구나.”
꽈꽝~
푹-
“커헉~”
“앱솔션.”
플레이어는 자신의 무기가 숨어 있는 마왕을 정확히 타격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쓰러져야 할 마왕은 멀쩡한 반면, 자신은 복부 쪽에서 찌르르 하는 감촉과 함께 화끈거리는 고통이 전해져왔다.
아울러 급격한 속도로 생명력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뭐… 뭐냐?”
“저항하지 마라. 그럴수록 네놈만 고통스러울 것이다.”
“허… 헉! 누구냐?”
“그냥 얌전히 죽어라.”
“아… 안 돼!”
“이제 사라지거라.”
“크윽~”
얼마 후, 빠져나가기 위해 발버둥 치던 플레이어는 목이 축 처짐과 동시에 잿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카이젤스키의 입에서 거친 쌍소리가 나왔다.
“빌어먹을, 겨우 이따위 스킬이라니.”
플레이어에게 앱솔션을 펼칠 경우, 대략 1~2가지의 스킬이 무작위로 흡수되었다.
그러다보니 어떤 경우에는 유용한 스킬이 흡수되기도 했지만, 이번처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스킬이 흡수되는 경우도 있었다.
하벨이 또 한 명의 플레이어를 유인해 온 것은 그때였다.
=>카이젤스키님, 한 놈 더 데려왔습니다.
=>이번에는 쓸 만한 놈이냐?
=>네?
=>아니다.
=>그럼, 저는 유인을 위해 다시 가보겠습니다.
=>됐다. 이놈만 잡고 가자.
=>그만하시게요?
=>오늘은 나도 주신의 궁전이나 찾아볼 생각이다.
=>알겠습니다.
카이젤스키와 하벨이 귓속말을 나누는 동안, 유인에 걸려 따라 온 플레이어는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어둠과 동화된 카이젤스키와 하벨을 플레이어가 찾을 길은 없었다.
“어디 갔지? 분명 이쪽으로 들어왔는데.”
플레이어가 포기하고 돌아가려는 찰나, 카이젤스키가 연기처럼 나타났다.
갑자기 나타난 카이젤스키는 다짜고짜 플레이어의 아랫배에 날카로운 손톱을 박고 앱솔션을 펼쳤다.
“치타야~”
“야! 어디 있냐?”
“이 자식, 어디로 간 거야?”
“몰라. 조금만 더 찾아보고 없으면 그냥 돌아가자!”
카이젤스키에게 스킬을 빼앗기며 죽어가는 사내의 정체는 뉴스타 길드의 2군 길마 치타였다.
그리고 그를 찾아서 따라온 이들은 남수 일행이었다.
치타를 죽인 카이젤스키는 멋모르고 다가온 남수 일행까지 사냥하기로 했다.
=>하벨, 저놈들도 이리 데려와라.
=>명을 받듭니다.
=>뒤에 두 놈은 네가 죽여라.
=>알겠습니다.
가장 먼저 들어온 남수와 떡대는 저항 한 번 못해보고 바로 죽었다.
둘을 가볍게 죽인 카이젤스키는 중간에 있던 떡대의 아랫배에 손톱을 박았다.
그사이 하벨은 뒤쪽에 있던 햄버거와 이슬을 죽였다.
“넌 누… 누구냐?”
“귀찮다.”
“허… 헉!”
“빌어먹을, 겨우 지도 제작 스킬이라니! 이런 허접한 스킬을 어디에 쓴다고?”
“그… 건 안 돼.”
“닥쳐라!”
만득이의 직업은 지도제작자였다. 그런 그에게 가장 소중한 스킬은 지도 제작 스킬이었다.
지도 제작 스킬을 뺏긴 이상, 그는 더 이상 지도를 그릴 수 없었다.
반면, 또다시 쓸모없는 스킬을 흡수한 카이젤스키는 짜증이 나서 만득이의 생명력을 거칠게 흡수했다.
고통으로 몸부림치던 만득은 유독 심하게 말라비틀어지다가 어느 순간 먼지처럼 사라졌다.
“하벨, 이제 가자.”
“알겠습니다.”
* * *
“띠링~ 띠링~”
-신분을 승계한 카트리나에게 귓속말이 전달되고 있습니다.
-귓속말을 해오는 이는 테릭입니다.
-귓속말을 받으시겠습니까?(Y/N)
-귓속말의 전달은 카트리나의 신분으로 전달이 됩니다.
던전을 빠져나온 카이젤스키는 아리아에게 통신을 하려다가 난데없는 알람과 메시지에 깜짝 놀랐다.
‘맞아! 변신이 가능했었지.’
카트리나의 일은 그동안 잊고 있었다.
그런데 신분까지 승계하다 보니 귓속말이 오는 것도 통보가 되는 듯했다.
잠시 고민하던 카이젤스키는 카트리나의 신분을 이용해서 테릭을 유인하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 어쩌면 일이 쉽게 풀릴 수도 있겠군.’
생각하면 할수록 기발한 방법이었다.
게다가 이 기회에 테릭의 철퇴까지 뺏는다면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마음을 굳힌 카이젤스키는 귓속말을 받기 시작했다.
=>카트리나.
=>예.
=>그동안 어떻게 된 거야?
=>뭐… 뭐가요?
=>한동안 접속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사정이 있었어요.
=>지금은 괜찮은 거야?
=>네.
=>지금 어디야? 내가 그쪽으로 갈게.
=>제가 지금은 일이 있으니까 좌표를 송출해 주세요. 여기 일이 끝나는 대로 바로 갈게요.
=>무슨 일인데? 내가 도와줄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니까 걱정 마세요. 그보다 좌표를 빨리 송출해 주세요.
=>그럴까?
=>어서요.
=>응.
테릭은 현재의 좌표를 송출하기 시작했다.
카이젤스키는 몇 분 내로 가겠다는 말을 끝으로 귓속말을 종료했다.
“카이젤스키님, 왜 그러십니까?”
“하벨, 너 혼자서 다른 이들과 합류해야 할 것 같다.”
“무슨 일 있습니까?”
“난 골치 아픈 놈을 처리할 생각이다.”
“그렇다면 제가 모시겠습니다.”
“아니야. 놈을 안심시키려면 나 혼자가 편하다.”
“하지만.”
“괜찮으니 어서 가봐라.”
카이젤스키의 성화에 하벨은 어쩔 수 없이 떠났다.
혼자 남은 카이젤스키는 그때서야 카트리나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변신이 끝난 그의 외모와 목소리는 영락없는 카트리나였다. 하지만 카이젤스키는 그것만으로는 안심이 안 되었는지 이마를 만져 마신의 뿔이 잡히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
또 몇 번이나 카트리나의 말투를 흉내 내며 연습까지 했다.
“이 정도면 귀신도 속일 수 있겠지.”
스스로 만족한 카이젤스키는 그때서야 텔레포트를 했다.
잠시 후 테릭을 발견한 카이젤스키는 자연스럽게 다가갔다.
“카트리나.”
“여기야.”
‘저 계집은 누구지?’
혼자 있는 줄 알았던 테릭은 낯선 여자와 함께 있었다.
레이나를 알지 못하는 카이젤스키는 어찌할지 몰라서 망설였다.
‘일단 대충 얼버무려야겠구나.’
여자 하나 때문에 이번 일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사이 옆으로 다가온 테릭과 레이나는 연신 질문을 해대기 시작했다.
“카트리나, 왜 접속을 안 했어?”
“도대체 무슨 일이야?”
“사… 사정이 있었어.”
‘이 여자는 카트리나의 친구인가 보구나.’
“그때 마왕에게 죽은 거야?”
“으… 응.”
“역시 그랬구나. 괜히 나 때문에 죽고, 미안해.”
“아니야.”
‘아! 그때 그 계집이구나.’
레이나가 마왕을 언급한 순간, 카이젤스키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을 했다.
그러고 보니 눈앞의 여자는 카트리나를 죽일 때 같이 있던 몇몇 인간 중 한 명이었다.
반면, 테릭은 카트리나가 마왕에게 죽었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카트리나, 정말 괜찮아?”
“네.”
“그런데 그동안 어디 있었던 거야?”
“그냥 사정이 있어서… 나중에 얘기할게요.”
플레이어가 사망하면 사망 페널티라 해서 일정 시간 그란티아에 들어올 수가 없었다.
하지만 카트리나는 플레이어 행세를 하고 있는 드래곤으로, 죽으면 부활이 안 되는 일종의 NPC였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테릭은 마왕에게 죽었다는 카트리나의 말이 이상했다.
‘레이나 앞이라 그렇게 얘기하나?’
레이나는 카트리나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다.
그러기에 테릭은 카트리나가 뭔가 말 못할 사정이 있어서 그런다고 생각하곤 화제를 돌렸다.
“드워프 마을에서의 일은 고마워.”
“네? 네.”
‘젠장, 드워프 마을에서 뭘 해줬는지 알 수가 있나.’
이렇게 많은 얘기를 나누다보면 아무래도 진짜 카트리나가 아닌 게 발각될 것 같았다.
카이젤스키는 그럴 바에는 차라리 속전속결로 끝내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했다.
‘놈의 무기부터 빼앗아야 해.’
테릭의 방패와 철퇴는 히바의 쌍신기로, 카이젤스키도 부담스러울 정도의 위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마기에 저항하는 방패는 욕심내서는 안 될 물건이었다.
“테릭님, 그 무기들은 잘 갖고 있나요?”
“무기라니?”
“이상하게 생긴 쇠몽둥이 있잖아요.”
“아! 철퇴.”
“네, 미안하지만 그것들을 잠깐 볼 수 있을까요?”
“그게 뭐가 어렵다고. 여기.”
“고마워요.”
테릭은 아무 의심 없이 철퇴를 꺼내선 카이젤스키에게 건넸다.
카이젤스키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테릭이 넘긴 철퇴를 받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마! 테릭, 새 무기를 구했어?”
“응.”
“나도 볼래.”
히바의 철퇴를 처음 본 레이나였다.
그녀는 냉큼 손을 뻗어 철퇴를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카이젤스키의 손이 더 빨랐다.
그는 철퇴를 움켜쥐자마자 레이나를 향해 득달같이 휘두르며, 오른손을 뻗어서는 테릭의 아랫배에 날카로운 손톱을 박았다.
불의의 일격에 레이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즉사했다.
테릭은 의외의 상황에 놀라 말도 못하고 카트리나만 바라봤다.
그사이 카이젤스키는 변신을 풀기 시작했다.
쉬쉬쉿~
“넌 누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