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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
잽이라고는 생각도 되지않는 묵직한 공격이 오른팔 위에 떨어졌다. 저릿저릿 떠는 팔의 고통을 무시하며 왼발로 하이킥을 먹였다. 하지만 예상했는지 백스텝을 밟으며 뒤로 빠져나간다.
빠르고 경험도 있다. 그리고 체계적으로 잡혀있는 복싱. 게다가 하나하나의 공격이 보통 위력이 아니다. 광진에 버금가는 위력. 늘어나는 것은 스피드만이 아닌가보다. 평범한 길거리 싸움이라면, 나의 필패다.
하지만, 이것은 마법사들의 전투. 마법을 간과하면 곤란하다.
광진 이식을 발동했다. 마력의 폭풍이 피부 위로 드러난다. 슈의 파이팅 포즈가 풀리면서 그녀가 한마디 내뱉었다.
"멈춰라."
피할 요량으로 발을 굴러 왼쪽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실패. 빛의 고리가 나를 휘감았다. 빛의 고리가 사라지고 뒤로 후퇴했다. 그리고 이상함을 깨달았다.
몸이 느릿해졌다. 분명히 이식을 발동했을텐데도 광진 일식정도의 움직임정도 밖에 보이지않는다. 그녀의 마법은 상대방을 느리게 만드는 것이었던 듯. 그런 능력이라면 더이상 광진을 써봤자 무의미하다.
"흐와. 가장 큰 패를 묶이다니. 귀찮게 됬네."
우사를 발동했다. 마법에 영향을 받지않는 신의 힘이라면 그녀의 마법도 피해갈수있다.
바다가 가까이에 있어서 수분이 빠르게 나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요연과 싸웠을 때 요연이 썼던 물보라를 휘감은 돌격. 그것이 이 자리에 다시 나타났다.
주변에서 물이 솟아오른다. 내가 들어간 물이 용처럼 슈에게 뻗어나가며 지면을 파괴한다. 물자체에 마력을 집어넣었기 때문에 튀어나가는 물방울조차 총알에 버금가는 위력을 가진다. 직격은 피할지언정 데미지는 피할 수 없다.
오른손에 검의 형을 발동시키며 돌격의 위력을 가중시켰다. 붉은 검날이 푸른 물과 섞이면서 보랏빛의 일격을 만들어냈다. 검의 형과 마력을 머금은 물이 그녀가 뻗는 레프트 스트레이트와 충돌한다. 아니, 검의 형만이 충돌한다.
"어?"
어이없는 탄성만을 내뱉었다. 분명히 물까지 끌어모았는데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주변의 습도가 높아진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사라졌다'. 있을 수 없다. 마법적인 작용으로 우사의 능력을 지울 수는 없다. 마법으로 불을 소환해 증발시키는 것이라면 가능하다. 하지만 그랬다면 나조차 익어버렸을 터.
불가능하다. 하지만 눈앞에 일어났다.
떠오르는 나의 생각을 끊으며 그녀가 라이트 훅을 내 얼굴에 꽂아넣는다. 그리고 레프트 리버블로(간장치기).
타격에 어리둥절할 틈도 없이 호흡을 빼앗는다. 검의 형이 실려있는 왼팔을 다시 한번 횡으로 그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헛손질만 하고 말았다. 슈는 벌써 저만치 멀어져서 스텝을 밟고 있다.
설마하니 내가 근접전에서 단한번도 공격을 먹이지 못할줄이야. 잘못하면 정말 진다. 하지만 어떻게 상대해야하는 거지? 광진도 묶였고 우사가 힘을 잃었다. 삼신기도 광진도 없다면 내가 내놓을 수 있는 패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결국, 데미지를 받는 한이 있더라도 쓰는 수 밖에 없나.
"강할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정도로 강할줄은 몰랐어."
항복선언으로도 들리는 나의 발언에 슈의 표정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다시 자세를 더욱 단단하게 갖췄다.
과연 슈. 방심하지는 않는다는 건가?
"간다. 막을 수 있다면 막아봐."
오른팔의 손등이 흰빛을 띄우며 어둠을 좀먹기 시작했다. 완전하지 않은 형. 포의 형이다. 오른팔을 들어올리며 왼손으로 손목을 받쳤다.
일본에서 썼을 때는 허공에서 썼으니 반발은 거의 생각할 필요 없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면을 밟고 있는 이상, 나도 데미지를 피할 수는 없으리라. 손바닥안에 동그랗고 묵직한 백색의 마력이 솟아올랐다.
그것을 중심으로 공간이 요동친다. 발끝이 바닥에 파고들었다. 마력량이 늘었기 때문인지 반발이 장난이 아니다. 슈의 안색이 굳는 것을 보며 슬며시 미소지었다.
"포의 형. 마력포, 단식. 무뢰포(蕪雷砲)!"
백색마력으로 이루어진 포탄이 유성처럼 꼬리를 끌며 쏘아져나갔다. 무뢰포가 지나가는 곳, 바람이 비명지르고 공간이 찢겨나간다. 슈가 그것을 마주하며 양손에 흰빛의 고리를 생성시켰다. 그리고 날아드는 무뢰포에 양손을 뻗는다.
설마, 막으려는 건가?
슈우우우우우웃!!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녀의 손에 있던 고리가 무뢰포를 빨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오른팔을 버리면서까지 쓴 포의 형이 무너졌다. 하지만 이것으로 그녀가 쓰는 마법의 약점을 알아냈다. 게다가, 그녀는 변하지 않았다는 것까지 알아냈다.
오른팔이 저릿저릿하지만 이것으로 충분하다.
왼팔을 들어올렸다.
"이게 안통하면 다른 걸 쓰면 되지. 슈, 각오해."
왼팔에 새겨진 혈문신이 묵색빛을 띄기 시작했다. 강대한 마력의 소용돌이. 칠흑의 빛에서 포의 형과는 질적으로 다른 위험함이 묻어나온다.
입술사이로 핏물이 배어나왔다. 아직 사용도 안했는데 이꼴이다. 위험한 기술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 이정도 일줄이야.
"뭘 할셈이야...? 그렇게, 자신의 몸을 망치면서까지 날 막아야 해?"
그녀가 떨리는 눈으로 나에게 외쳤다. 나는 아직 잘 안움직이는 오른손으로 왼팔을 부여잡으며 그녀를 쳐다봤다.
"너야말로, 죽인다며?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찬스일텐데?"
고통에 말을 더듬는 나의 말을 들으며 그녀가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나의 말이 틀리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포의 형을 쓸 때도, 아니 그전에 우사를 쓸 때도. 광진에 버금가는 움직임을 발휘할 수 있는 그녀라면 공격이 완성되기 전에 나를 날려 버릴 수 있을 터이다. 그런데도 하지않았다.
아직은 지금까지 함께 놀던 시간을 버리기 싫다는 것이리라.
슈가 표정과 함께 굳어버린 몸을 부들부들 떨며 자신의 양손을 말아쥐었다. 그리고 자세를 잡았다. 나도 왼손을 뻗었다.
"고(鼓)의 형. 파...!"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달려들어 내 왼손을 그녀의 오른손으로 쥐었다. 왼손에 발동된 혈문신과 마력이 아무런 패널티도 없이 빠져나간다. 이만한 양의 마력을 아무런 전조도 패널티도 없이?
나의 경악에 그녀는 아랑곳않고 다리를 걸어 나를 넘어뜨렸다. 뒤통수에 전해지는 물렁한 흙의 감촉이 나의 패배를 알리고 있었다.
그녀가 나의 배에 올라타며 양손으로 내 목을 말아쥐었다. 기도가 막혀간다. 배쪽에 걸터앉은 충격으로 호흡이 곤란한데 목 덕분에 죽을 것 같다.
"크, 켁, 커걱..."
숨을 거칠게 뱉어냈다. 그 덕분일까, 목에서 느껴지는 중량감이 많이 줄어든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이상한 감각에 죽음을 각오하고 감았던 눈을 떴다.
뜬 눈 위로 물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안약이라도 넣은 것 같은 느낌에 눈을 깜빡였다. 그제야 물방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슈가, 그녀가 울고 있었다.
"나빴어. 나빴어... 내가... 내가 죽일 수 없다는 걸, 알면서...!"
그녀는 히끅거리며 말을 계속이었다. 밉다는 듯이, 계속 그렇게 말했다. 그녀가 양손을 풀고 쓰러뜨린 나를 껴안았다. 나도 손을 들어올려 그녀를 마주 안았다.
어깨위로 차가운 물의 감촉이 느껴진다. 계속해서 울고만있는 그녀의 등을 쓸어주었다. 몇분간 그러다가 등을 쓸어주던 손을 주머니로 가져가 mp3를 꺼내들었다.
"슈. 이제 곧 생일이지?"
"...? 그런데.. 왜?"
껴안던 팔을 풀고 나의 눈안을 들여다봤다. 싱긋 웃어주었다. 나의 밝은 웃음만큼 그녀가 웃을 수 있기를 기대하며 그녀의 귀에 mp3를 가져갔다.
"생일선물은 아직이지만 생일축하노래는 준비됬는데, 들어볼래? 내가 불러주고 싶었는데 나는 부를 수 없는 노래라 조금 레어할거야."
이 상황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나의 말에 그녀가 눈물을 흘리면서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염원했다.
이 것이, 그녀에게 웃음을 되찾아주기를.
mp3를 조작해 외부스피커(부잣집아가씨가 준거라 그런지 이런 것도 달려있다)로 맞추고 RECORD란에서 01이라 적혀있는 파일을 실행시켰다. 조그마한 전자음이 파직거리면서 나와 같은 나이또래의 남자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슈도, 나도 익히 들어알고있는 유운의 목소리다.
"서쪽에서 일을 처리하던 중 재밌는 사람을 한명 발견했습니다. 정확히는 그 사람들 때문에 갔던겁니다만 자잘한 건 넘어가죠. 그곳에서 '길시언 엠블레인'을 만났습니다. 정확히는 잡혀있던 것을 구출한 것이지만요. 현재 '길리안 랑페르제'라는 이름을 쓰는 모양입니다만 아무래도 상관없겠죠. 일단 우리나라에 대충 던져뒀으니 판단은 당신에게 맡기죠."
치직. 그것을 끝으로 mp3가 꺼져버렸다. 딱 적절한 타이밍에 전력이 나가버린 것이다. 제 임무를 다한 mp3를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반대 손으로 슈의 볼을 쓸어주고 미소를 보였다.
"최고의 노래지?"
나의 한마디에 그녀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손바닥 사이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고 그녀를 껴안았다. 그녀는 내 품에서 단 한마디를 하염없이 중얼거렸다.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