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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아성의 경우
세상이 흑백으로 반전하며 정지했다. 누군지도 모르는 여자의 한마디와 함께. 이것은 그의 착각도, 그렇게 느낀 것도 아니었다. 진짜로, 멈췄다.
그는 시간과 함께 정지한 자신의 몸을 움직이려고 부단히도 애를 썼지만 헛 일. 몸은 석굴암마냥 굳어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선처인지, 입을 놀릴 필요가 있는 것인지 다행히도 입만은 움직일 수 있었다.
공간이 정지해 굳어있는 학우들을 보며 우가 입을 열었다.
"누구십니까? 혹시, 육왕을 잡아가신 분이 맞으신지요."
자신 또한 후인계획의 초기맴버. 담벼락에 당당히 후인사냥이라고 써놓은 놈이니 지금 자신을 노려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우의 물음에 답하는 여성의 목소리에 살의나 적의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깊은 호감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니오. 아가씨의 친구분이라서 잠시 만나뵈었을뿐입니다. 하는 김에 두가지만 물어도 되겠습니까?"
갑작스런 비상사태에 두뇌는 굳었지만 그래도 의문을 느낄만큼은 이완되어 있었는지 중요한 키워드는 머릿속으로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었다.
그가 알고 있는 여성 중 이럴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은 몇 안된다. 자신이 지원을 요청하려 했던 여자도 그럴 능력은 있었지만 그녀는 해외에 있는데다가 이미 거의 모든 권한을 버렸다. 아니, 설사 하고 싶은 말이 있더라도 전화를 하면 그만. 이럴 이유따윈 없었다.
그는 왠지 묵직하니 움직이지 않는 입술을 간신히 달싹였다.
"... 예."
"적을 상대할 수 있는 당신들의 현존 전력은 어느정도죠?"
정신이 아찔해졌다.
우에게 지금 그 물음은 어느쪽으로 봐도 너희들의 전력을 측정해보고 어떻게 죽일지 생각하겠다는 발언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의 생각을 엿보기라도 한듯, 여자가 우의 생각틈으로 한마디 흘려넣었다.
"당신들의 적은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그녀는 말을 끌며 우와 자신의 관계를 설명할 단어를 머릿속으로 찾아내다가 마땅한 말을 찾아내고는 당당하게 말했다.
"선배지요. 걱정하지는 않아도 좋아요."
자신을 선배라 표하며 그녀의 분위기와 말투가 조금 가벼워졌다. 그 덕인지 우의 몸을 포박하는 것 같은 정지도 조금 느슨해진 것이 보였다.
그 대답이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우는 아마 말해도 상관없겠지라고 생각하고는 그녀의 물음에 답하기로 마음 먹었다.
"금자궁급 한명과 은자궁이 둘. 그리고 후인들이... 다섯."
이사장실패밀리를 언급할 때는 살짝 말을 끌었지만 슈가 시간을 이었다는 것까지 알려줄 필요는 없으리라. 이것은 보험이다.
그녀는 만족한 듯 작은 웃음을 흘리고 또 다른 질문을 날렸다.
"그럼 소유는 잘 있나요? '채봉이 괴롭게 한다면 언제라도'라고 전해주세요."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선배'의 말뜻을 이해했다.
그것을 깨달은 것과 동시에 동력원을 잃고 정지했던 세상은 평소처럼 생동감을 품고 돌아가기 시작했다.
우가 고개를 돌려봤지만, 역시 그녀는 존재하지 않았다.
"소유는 알겠지만... 채봉?"
그녀가 했던 말을 우가 다시 입에 담으며 머리안의 인명록을 뒤집어봤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서 채봉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도 짐작가는 사람은 있었다.
정체불명의 여자가 말하는 투로 봐선 소유와 상당히 가까운 여자. 그렇다면 단 한사람 밖에 없다. 소유의 연인이기도 한 그사람.
"하윤 선생님인가..."
그는 아리송하게 자신의 담임선생님 이름을 입에 올리며 머리를 갸웃했다.
그리고, 어디선가 못 박는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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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를 모르는 적이 지정한 승부의 날.
그 곳의 운동장에 모든 이사장실패밀리와 후인계획의 실행자가 집합해 있었다(하 윤은 집사정 때문에 이틀 전부터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그 중 기도하는 것 같은 자세를 유지하던 이린이 자세를 풀면서 용의 모습을 드러낸 소유에게 말했다.
"주변에 민간인은 없는 것 같아요. 짐승쫓기는 정확히 움직이고 있어요."
요가 사라진 그 다음날 학교의 담벼락에 이들을 향한 도전장은 이미 아이들의 입을 타고 저멀리 퍼진지 오래였다. 덕분에 이번 전투준비를 하기는 커녕, 소문을 막고 아이들이 이곳에 오자고하는 약속을 깨는 것에 주력했기 때문에 전투 그자체의 준비는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학교에 기본적으로 소유가 걸어둔 보호결계가 있지만 남의 앞마당에서 낙서를 한 뒤 여유롭게 도망치는 자다. 그런 것이 도움이 될거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호지는 먼저 꺼내든 금삼비녀를 세마수의 머리를 꼬아논 것 같은 형태로 현상시키면서 능파에게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못 온데?"
그녀가 묻는 것은 요연의 귀가를 묻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대답했고 능파는 그것에 폭언으로 절연을 표했다.
하지만 능파는 아직 여린 호지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마음이 무디지 못했기 때문에 사정이 생겨서 오는 것이 힘들 것 같다고만 해둔 상태였다.
"에... 트러블이 조금, 생겼다더라구요. 오늘까지 오는건..."
평소처럼 하연 원피스를 차려 입은 능파는 오지 않을 요연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호지에게 거짓을 고했다.
소화는 교복을 입은체로 길쭉한 대검을 바닥에 꽂아넣으며 밤바다 같은 하늘에 푸념을 늘어놓았다.
"아아~ 그녀석만 있었으면 이런 실전은 필요없는데."
소화가 입에 담는 그녀석은 한국 최강의 남자. 소유운을 이르는 말이다. 확실히 그라면 어지간한 마법의 영향따위는 무시하고 단박에 적을 잡아냈으리라.
그녀의 푸념에 호지는 씁쓸한 듯 입술을 깨물며 학교 정문을 노려봤다.
그 때, 이린이 외쳤다.
"저, 적으로 추정되는 자들을 발견했어! 숫다는 다섯. 두명은 약 3미터의 거인이고 다른 둘은 평범한 남녀. 그리고, 마지막 한명은... 아마, 용 같아!"
그녀의 마지막 단어에 우리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범인이 한명일거라고는 생각도 안했지만 설마 용까지 적에 가담했을거라고는 그들의 생각밖이었다. 용은 본디 평화와 정적을 추구하는 존재. 이런 싸움에 얼굴을 들이밀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묵직한 발소리와 가벼운 발소리. 그리고 바람에 달각거리는, 비늘의 소리. 그런 소리들을 동반하며 적들이 운동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노란 우비로 전신을 가리고 있는 두 거인이 날개처럼 양옆으로 도열하고 그 가운데에 양복을 단정히 차려입은 남녀가 자리했다. 흑룡은 그 위를 빙글빙글 회전하면서 소유와 눈을 마주쳤다.
소유가 이를 갈 듯, 흑룡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키호디 융....!"
은색의 비늘위로 실타래처럼 붉은 살기가 넘실거렸다. 그 적의에 흑룡은 이를 드러냈다.
"간만입니다. 히탄선배. 천왕을 지킬 때와는 사뭇 다른 광경이군요. 그 때는 선배님이 저와 함께 있었는데요."
소유와 키호디외에는 아무도 알아듣지 못 할 말이 그들 사이에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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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헬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