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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림
자잘한 이야기들이 끝나고 발견한 마을에 다 도착 했을 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반파되었다'라는 단어가 어느 곳보다 잘 어울리는 건물들이었다.
사막 특유의 황색 석재로 만들어진 집들은 어린애의 손에 의해 부러진 수수깡처럼 완전히 부서져 있었고 나무들도 성한 것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게다가 작지만 누렇게 변색된 사람의 시체도 언뜻 보였다.
그런 곳이었지만 위험은 없었다. 적은 물론이고 어떠한 마법적 장치도 없다. 하지만 여기에는 미미하지만 강대한 마력이 충돌했던 것 같은 흐름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탐지능력 쪽에 능력이 발달하지 않은 나조차 알 수 있는 강대한 힘. 이만한 힘을 쏟아낼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알기론 두 사람 뿐이다.
마을을 대충이나마 한번 훑어보고 나서 광장으로 보이는 곳에서 쉬기로 결정한 우리는 바닥에 들고 있는 짐들을 내려놓고 떨어진 체력을 보충했다.
"요애. 역시나 그 년... 아니, 소야가 여기에 왔다 갔을 가능성이 있으시다고 생각하십니까?"
땀 한 방울 나지 않은 요연의 물음에 나는 말로 쓸데없이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선택했다.
그녀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정확히는 요연뿐만이 유운도 왔다 갔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누님이야 어디를 쏘다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지만 이만한 힘을 쓸정도로 강력한 사람이라면 누님도 용의가 있다. 누님은 이런 '의심'에 지나지 않은데에 반해 유운은 가능성이 아주 컸다.
유운은 자기 스스로가 이 근처에서 단심검주를 만났다고 말했고, 자비나타에게 의뢰서를 받아온 것도 그다. 여기서 누군가와 싸웠을 가능성이 컸다....만,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것은 마력의 흔적이 이상하다는 것이다.
유운의 능력은 간단히 말해 현신이다. 정확히는 그것외에는 다른 영술사들과 다른 것이 없다. 한마디로 그의 힘이 움직이는 것은 영자(靈子)란 소리다. 하지만 이곳에 잔류하고 있는 힘은 두 종류로, 영적인 간섭은 전무했다.
유운의 현신이 마력조차 움직일 수도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문제는 다른 하나다.
"하나는 일반적인 마력인데 말이지...."
"글쎄요... 만일 나나 요애의 예상대로 소야라면 그녀를 상대할 수 있을만한 강자가 움직였다는 것이 겠지요."
요연의 담담한 말투에 실소하면서도 나는 속이 꺼멓게 타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누님이 상대할만한 자라면 공식적으로 불사뿐이다. 하지만 누님과 불사가 싸웠다고 하기에는 범위가 협소했다.
누님의 힘을 직접 목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누나가 진심으로 덤비면 이곳이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질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남아있다. 그것은 한쪽이 이곳을 지키기 위하여 싸웠다는 소리가 된다.
"조금 지나친 비약이려나. 애초에 누님이 여기 왔다 갔다는 보장도 없고."
모든 것은 누님이 이곳에 왔다는 전제하에 일어나는 가정이다. 답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면 사고할 필요는 없다.
적당히 피로가 풀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 따라오려는 것처럼 슈와 요연이 따라 일어섰다. 바닥에 앉아있던 리토가 피식 웃었다.
"아주 과보호가 따로 없구나. 그리 약한 것도 아니면서."
"내 동료들을 한번씩 접견해 봤을 거 아냐. 난 그녀석들 사이에서 약한 편이다."
그것은 정말이다. 모두의 능력이 최대치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 가정했을 때 가장 약한 것은 나나 하여였다. 비전투인원(소누등등)들은 제외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순위의 변동은 없다.
일단 삼가의 인간들과 기타 마수들은 제외. 이미 기본 스펙부터가 다르다. 백색아성인 우는 나와 상성이 안맞는다. 내 광진을 몇십분만 버티면 그의 승리. 소화의 능력은 이론상으론 한계가 없는 능력이니 그녀도 예외. 남아있는 하여는 실력을 모르지만 약하지는 않을 터.
그런 이유로 나는 약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리토는 그런 것을 믿지 않았다. 아니, 인정은 하되 조건을 달았다.
"그건 한국이란 가정을 달았으니까겠지. 세계로 넓히면 넌 분명히 상위권이다."
"그야 니들이 약하니까."
"네가 센거야!"
열을 올리며 반박하는 리토를 내버려둔 우리는 이미 한번 돌아봤던 거리를 배회하기로 했다. 나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 보면서 말했다.
"이것들... 자연현상은 아니겠지?"
"아니야. 마법사의 명예를 걸고 맹세할께. 이런 일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어. 특히 잔존해 있는 두 마력 중 하나는.... 솔직히 믿기지는 않지만 아카식 레코드에 관여하고 있는 것 같아."
슈의 발언에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아카식 레코드. 뉴에이지 외계서적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아카식 레코드란 행성의 집단의식, 행성의 마인드 라 정의할 수 있다. 과거에 이 지구상에 살다간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들의 생각과 경험, 지식들은 일련의 에너지로 작용하게 되는데, 그것들은 아카샤라 알려진 광대한 행성 주 변의 에너지 장(場)에 고밀도의 진동수로 각인되어 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것은 하나의 '강력한 힘'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다고하는 영역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도달'. '활용'은 아니다. 그런 것의 잔향을 여기서 느꼈다고?
요연은 대뜸 태클을 걸었다.
"슈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설사 황룡의 몸이라도 몇 억년을 축적해 온 그걸 버틸 수 없습니다."
"가능은 하지 않겠어? 일부만 끌어다 쓸 수 있다면 말이지. 게다가 아카식 레코드는 접촉과 동시에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잖아? 아마 '불사'가 맞다면 가능성이 있지."
말하면서도 씁쓸해지는 현실에 나는 더이상 말을 잇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슈와 요연도 어색하게 침묵을 지켰다. 그러던 중, 나는 옆에 깊게 패여있는 자국을 발견하고 말했다.
"모래가 이렇게 패여있는 건 처음보는데. 뭐 아는 것 있어?"
내 말에 암울했던 분위기는 날아가고 둘이 내 앞으로 부담스러울정도로 눈을 빛내며 다가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는 것이 없는 슈는 뒤로 밀려나고 요연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이건 홍수의 흔적입니다."
"...홍수? 사막인데?"
"사막은 2, 3년 중에 비가 한번도 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한번 오게 되면 홍수가 일어나지요. 축적했던 것을 한번에 쏟아낸다고나 할까요. 게다가 시기도 불규칙적이라 이런 피해가 많이 남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헤에. 그건 몰랐는 걸."
사막에서 비가 내려봤자 이슬비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마을을 둘러보다가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판단하고 리토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리토는 어느샌가 소환한 베파를 벗삼아 툴툴거리고 있었다.
"우리도 돌아가자."
"잠깐!? 우리 아무것도 한 것 없잖아? 바캉스가 아니란 말이야."
확실히 본 목적인 라이칸스로프와 뱀파이어의 동태를 살핀다는 목적은 잊은지 오래다. 하지만 실제로 내가 '정찰할 필요성 따위는 없었기 때문'에 하지 않은 것이다. 내가 이곳으로 온 것은 변수가 개입할 여지가 있는지의 조사. 변수만 없다면 우리가 질 턱이 없다. 그런 이유라면 자비타나는 거절할게 분명해서 그런 이유를 들먹이기는 했지만.
그 사정을 모조리 들은 리토는 표정을 구기면서,
"너, 진짜 못 됬다. 그래도 그 고룡은 절박해 보이던데."
"이쪽은 이쪽 나름대로 절박하거든."
나의 생사가 걸려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녀석의 생사 따위는 내 생사에 비하면 휴지조각만도 못하다.
으자잣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푼 나는 아직도 하늘에서 내려쬐는 태양빛을 바라보았다. 강렬한 태양빛에 눈을 제대로 뜨고 있을 수 없었다.
"...괜찮겠지."
위험요소는 없다. 현대무기로 무장한 적들은 나에게 무용지물이고 덤벼봤자 이쪽에는 강력한 수호신들이 있다. 하지만, 왠지모르게 불안했다. 그것은 원초적인 불안감일까, 아니면 순전히 기분탓인 걸까.
피식.
낮게 실소하며 나는 생각하던 것을 그만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