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2 / 0340 ----------------------------------------------
카트스트로피
호지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린 그들은 다시 발걸음을 옮겨 안쪽으로 들어갔다. 어째선지는 모르겠지만 지나다니는 사람의 숫자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적었다. 간간히 무슨 용무라도 있는 것처럼 나른한 표정으로 이곳저곳을 쏘다니는 것이 다였다.
지금까지는 별 생각없이 걷던 능파는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감각을 혹시라도 들키지 않도록 슬며시 최대한 펼쳤다.
엷게 펴지는 반죽처럼 곳곳으로 뻗어나간 추적마법은 기지 안에 남아있는 숫자, 그리고 그들이 어떤 형태로 서 있는지 알 수 있게 해주었다.
능파는 혀를 찼다.
"달려요! 우리가 잠입한 것, 이미 들켰어!"
간단하고도 확실한 능파의 말에 모두는 앞서 나가는 능파를 뒤따랐다. 소유가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뛰면서 물었다.
"역시 너무 오래 대화하고 있었나?"
"아마도. 하지만 별 수 없는 일이에요."
능파는 자신이 예상했던 형태의 경비체계를 가지고 있었던 현실에 치를 떨었다.
만일 그들의 경비체계가 달랐다면 조금 더 쉬고 있었더라도 들키지 않았으리라. 아니, 강력화기를 쓸 수 없는 내부로 들어왔으니 더욱 시간을 벌 수 있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능파는 추적마법에 잡히는 기묘한 감각에 고개를 갸웃했다가 이내 무슨 상황인지 알아챘다.
지금 뱀파이어들의 기지에는 '중장비가 없었다'. 저번 전투에서 다 썼을리는 없으니 어디로 가져갔을 터. 분명히 자비나타를 습격하러 갔으리라. 미묘하게 숫자가 적다 싶었는데 본대는 이미 떠난 모양이었다.
"왜 뱀파이어들이 밖에 몰리나 했더니만....!"
능파의 혼잣말에 가까운 으르렁거림에 모두는 주변을 탐색하고 기이한 반응을 토해냈다. 적들은 밖에 있는데 안으로 들어가는 이유를 모르는 것이다.
능파는 '머리를 굴릴 줄 모르는 우민들'이라고 속으로만 곱씹으며 말했다.
"밖에서 저렇게 완벽한 포위진을 쌓았으니까 의미가 없어요. 중장비는 없으니까 다치는 일은 없겠지만 일망타진은 불가. 그러니 안으로 들어가야..."
지금 과반수의 뱀파이어들은 기지의 밖을 원형으로, 나머지 뱀파이어들은 기지의 중심부에서 똘똘 뭉쳐있는 상태였다. 밖으로 향하면 안쪽에서 공격해 올 것이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적들의 본거지에서 싸우는 편이니 어느쪽도 좋은 편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전투를 끝낸 뒤의 상황만 따지자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몇 배나 나았다.
지끈.
능파는 돌연 아파오는 머리에 손을 얹었지만 이내 고통이 사라져버리자 별 일 아니겠지라며 넘어가기로 했다.
때 모를 두통보다는 지금 직면한 상황이 더 중요했다.
"찾았다!"
소유의 커다란 외침에 각자의 상념에 빠진체 달리고 있던 모두의 시선이 외침 끝에 있는 문으로 향했다.
척보기에도 중요한 것을 숨기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그 묵직한 철문은 마법처리를 몇 번이나 거친 것인지 주변에 기묘한 마력의 흐름이 흐르고 있었다.
요연이 앞으로 나서 그 문을 주작검으로 일거에 양단하고 모두들은 잘려나간 문의 시신을 걷어차며 안으로 진입했다.
어차피 틀킨 것, 점잖게 마법처리를 해제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드디어 왔다."
아랍어인지 무슨 말인지를 창백한 반백의 뱀파이어가 내뱉자 능파는 시선이 확 트이는 느낌을 받았다.
능파들이 뚫고 들어온 곳은 간단히 말해 회의실 같았다. 의자, 거대한 액자, 등등의 물건들이 바리케이트처럼 둘러져 있기는 했지만 원래 자리에 가 있는다면 훌륭한 회의실일 것이다.
의자와 액자들의 바리케이트 안에서 십수명의 뱀파이어들이 웃었다. 문답무용으로 치고 들어가려던 요연이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잠시 주춤했다.
마력도, 공기도, 분위기도. 심지어 자신들이 내뿜는 살의나 전의조차 가라앉는 이 감각.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노.....!"
강렬한 섬광과 함께 소유의 노호성은 묻혀버렸다.
--------------------------------------
나는 지금 누워서 삶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전신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안식을 방해하기도 했지만 남을 부려먹는다는 행위의 저열한 쾌감을 막을 것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늘에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 구름이 내가 움직임으로서 자연스럽지 않게 흘러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대뜸 말했다.
"식수담당. 부드럽게 못 끕니까."
마치 군대나 수련회의 교관 같은 느낌으로 말하자 내가 누워있는 나무판자를 끌던 리토는 날 뒤돌아보며 발을 들어올렸지만 나에게 회복마법을 전개하고 있던 하나가 말없이 고개를 젓자 씩씩 거리며 끄는 것에 전념했다.
지금 라이칸스로프 토벌 팀인 우리는 임무를 멋지게 완성하고 자비나타가 있는 빙룡성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라이칸스로프들은 한마리도 남기지 않고 섬멸했다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기지체로 뭉개버렸으니' 상관없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도망친 녀석들도 평소의 나라면 후환이 남지 않도록 몰살 시킬 수 했겠지만 나에게는 쫓아갈 기력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광진 사식의 패널티는 물론이고 징벌포좌의 반동이 한꺼번에 몰려든 탓이었다. 느껴지는 고통은 현재 진행형으로 날 괴롭히고 있었다.
지금 상태로 습격 당했다면 그대로 당했겠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고 리토정도라면 사기가 꺾인 몇몇쯤은 상대할 수 있다.
물론 '상대만'...이지만.
"그건, 그렇고... 미안한 걸."
나는 장수들의 얼굴이 양각된 두 개의 동전을 하늘에 비춰보면서 말했다. 내가 들어올린 두 동전은 이리저리 금이 가 있었다.
내가 라이칸스로프들을 섬멸할 때 쓴 징벌포좌는 강력한 대신 표적 설정이 힘들었다. 당연히 적들과 섞여서 싸우던 금장군, 갑장군들은 그 포격에 스쳐 날아가버리는 수 밖에 없었다.
욱신, 욱신.
새삼 솟아오르는 통증에 하던 생각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아, 아프세요?"
"으응... 괜찮아, 버틸 수 있어. 겨우 이만한 상처가지고."
과거를 회상해보면 지금처럼 상태가 심각했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쓸데없이 입에 올리는 실책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오, 보인다."
리토의 탄성과도 같은 말에 슬쩍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보이는 것은 목적지의 모습과 뱀파이어 토벌팀인 호지들이었다. 그녀들의 지금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이곳저곳에 크고 작은 상처들이 나 있으며 자신들의 피보다는 적들의 피가 더 많아보였지만 전신에 피칠갑을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역전의 용사가 마지막 전투를 끝내고 돌아온 모습 같았다. 그리고 보통 그런 전투를 하고 온 영웅은 죽는다.
나는 황급히 말을 꺼내려고 했지만 뱃속에서 끓어오르는 통증에 다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런 나를 보며 요연이 씁쓸하게 말했다.
"적들의 자폭공격에 당했습니다."
"자폭공격?"
"노바 서지(nova surge)다."
덧붙이는 소유의 말에 나는 이 상황이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 깨달았다.
노바 서지. 자신을 멸하면서 적들조차 멸하는 동귀어진의 공격법이다. 일전에 아쥴이 썼던 비술로 그것에 몰살당할 뻔 했던 적이 있다. 당시에는 자의로 쓴 것이 아니었고, 약해져있었고, 알게 모르게 소화의 능력도 발동했었으며 우의 방어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넘어갔지만 저들 중에서 방어에 특화한 사람은 없었다.
저런 상황은 당연하리라. 기묘하게도 슈만이 멀쩡하기는 했지만 물어봤자 '시간축을 비틀었어'라는 이해할 수 없는 대사만을 날릴테니 질문은 마음속에만 묻어두기로 했다.
어차피 마수파인 저들에게 있어서 저런 상처는 걸림돌이기는 하지만 나처럼 목숨이 간당간당한 상처가 아니기 때문에 목숨이 간당간당한 나는 고개를 돌려 쉬려고 했다. 하지만 호지의 눈동자와 마주쳐버리는 바람에 내 몸은 순간 굳어버리고 말았다.
욱신.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엄습하는 통각에 나는 얼굴을 찌푸린체 고개를 돌리는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잠시 누워서 통각도 참을 겸 시간도 때울 겸해서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의 숫자와 머릿속의 양의 숫자를 병렬적으로 세고 있던(무지 어렵다) 나는 피부위로 느껴지는 간지러운 느낌에 정신을 차리고 시야에 집중했다.
구름이 보이지 않을정도로 몰아치는 눈보라의 향연.
지금까지 내가 셌던 구름은 뭐냐. 설마 황천....
"으응..."
잠잘 때 뒤척이는 것처럼 신음을 흘린 능파를 살짝 바라보았지만 능파는 멀쩡한 듯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용들만의 두통인건가하고 생각했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남의 통각을 신경 써 줄 정신적 여유는 남아있지 않았다.
내가 광진의 패널티와 함께 배를 움켜쥐고 있을무렵. 식수담당(리토)에게 끌려간 곳은 자비나타가 자고 있을 거대한 방이었다. 그곳의 문을 열어버리는 소유를 보며 나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제 이걸로 이 의뢰는 끝난다. 그리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어떠한 불안요소는 없다. 배반의 낌새가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시이이...
문의 가벼운 마찰소리가 울려퍼지면서 자비나타의 개인실 안에 드러난 것은,
8명의 기기묘묘한 괴물들과 자비나타였다.
===================================
드디어 등장했습니다!
누군지는 8명이란 숫자에서 짐작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