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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의 육아일기-175화 (175/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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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왠지 야릇한 분위기가 풍기는 요연의 말에 내가 태클을 걸 틈도 없이 능파가 아래에서 위로 요연을 차올렸다.

"이, 이 미친년이! 다짜고짜 할아버지에게 무슨 소릴 하는거야!?"

확실히 오해할 여지가 가득한 말이라서 요연을 위로해야 할 이 상황에 내 몸은 능파의 말에 동조하고 있었다.

턱 밑에 능파의 발자국(비늘 같은 자국도 다닥다닥 남아있는 것을 보아서는 발을 용신화시킨 모양이었다)이 남은 요연은 자신의 실책을 인정했다.

"음, 능파가 어느 쪽으로 상상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오해의 소지가 있었군요."

요연의 말에 능파는 얼굴을 크게 붉히면서 요연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하지만 워낙 단단한 몸을 가진 요연이니만큼 데미지는 입지 않은 것 같았다. 그것이 또 열 받는지 계속해서 싸커킥을 날려대는 능파를 요연이 내려다보더니,

"....이상합니다. 능파, 무슨 일 있습니까?"

화들짝.

요연이 저런 말을 자신에게 했다는 것이 충격인지 능파는 바닥을 짚고 절망했다. 보고 있던 요연은 기분이 나빠졌는지 조금 가시돋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요즘 신경이 곤두서 있던데, 홈쇼핑에서 사고 싶은 요리도구라도 놓친겁니까?"

가슴 한구석에서는 '어쩐지 돈이 예상외로 나간다 했더니 홈쇼핑을 하고 있었구나!'하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지금 현재 내 마음과 몸의 눈은 능파의 표정에 쏠려 있었다.

마치 개미가 코끼리에게 '나 너보다 몸무게가 많이 나가!'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눈빛. 참으로 가소롭다는 눈빛이다.

네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는 것을 저렇게 재수없게 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이다라고 생각할 쯤, 요연은 의외로 화를 내지는 않았다. 나를 슬쩍 곁눈질 하던 것으로 보아 내가 곁에 있기 때문에 화를 참는 것이리라.

"그러니까 요애."

깔끔하게 무시당한 능파가 요연의 정강이를 다시 걷어찼지만 요연은 요지부동. 나에게만 시선을 주고 있을 뿐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저와 치지의 대련에 참석해 달라는 소립니다."

"....사랑의 힘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인지 전혀 모르겠는데."

요연의 말대로라면 입회인 같은 것이 되어달라는 것 같은데 무슨 내기 시합도 아닌데 그런 것이 필요할리가 없지 않은가.

나의 말에 요연은 잠시 정리하는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가 머리를 들었다.

"요애가 참석해주신다면 저는 당신께 좋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겠지요. 아마 치지도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사랑의 힘. 낯 간지러운 말이지만 요연의 관점으로 보면 충분히 수용될만한 이야기이다. 그 사랑의 대상인 나로서는 조금 부끄럽지만 싫지는 않고.

요연은 거절당할 것을 두려워하는 아이 같은 몸짓으로,

"그래서, 어떠십니까?"

하고 싶은 일들은 있지만 해야만 하는 일은 없다. 어차피 시간도 남아도는데 요연의 일에 휘둘려지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내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이 나온 곳은 다른 곳이었다.

"안돼."

갑작스런 말에 요연이 울먹거렸다. 나로서는 절대로 본의가 아닌 말이라 황급히 수습하려는데 능파가 등을 돌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능파를 안아올리자니 발버둥치면서 '으으...'하는 신음소리를 냈다.

이윽고 진정됬는지 내 품에서 추욱 늘어진 능파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능파야, 난 갈거란다. 네가 그렇게 말해도 말이지."

"할아버지는 막 퇴원한 몸이에요. 집에서 안정을 취해야하는 몸이라구요. 병원에서 집에서는 안정을 취하란 소리도 못 들었나요?"

그러고보니 하군 아저씨도 그런 말을 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번 것은 어디까지나 관전이지 않은가. 안정을 취하고 자시고 간에 관련이 없는 일이다.

능파는 내 생각을 가볍게 읽어내고는 반문했다.

"게다가 할아버지는 그냥 내상이 아니고 마력의 과다사용으로 인한 내상이에요. 요연과 치지의 싸움이라면 분명히 엄청난 마력 파동을 뿜어댈텐데 그랬다간 다시 입원하게 되요."

능파는 이번에 내놓은 말이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적절했는지 작은 가슴을 펴며 어떤 말이라도 해보란 포즈를 잡았다. 반박할 말이 없는 나로서는 으윽하고 한발짝 물러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우리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요연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 욕심 때문에 또 상처 입힐 뻔 했군요."

"아니, 전혀 아니거든? 나도 몰랐으니까 말이야."

연속적으로 사과하기 시작하는 요연을 겨우 말리고 방(내 방이다. 잘 때는 요연, 능파, 호지, 나. 전부 함께 잤으니까 침대가 하나 밖에 없다. 부모님과 누님은 바닥에서 자는 스타일이고)에 재워버린 나는 거실로 나왔다. 다들 어디로 갔는지 그곳에는 능파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소파에 앉아서 아직도 승리자의 미소를 짓고 있는 능파를 내 다리 위에 앉혔다. 내쪽을 향해 얼굴을 보이고 다리에 걸터 앉혀진 능파는 부끄러워서 어쩔줄 모르는 듯, 얼굴을 붉히면서 이리저리 돌리기 시작했다.

"우우, 에, 우...."

하지만 그래도 내 다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지는 않는다. 정말로 나를 좋아하는 것만 같은 환상을 갖게 할 능파의 행동이지만, 나는 내가 그리 잘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 이전에 자궁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능파이니 가능성은 전무. 다른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다.

만약에 내 얼굴에 뭔가 이상한 게 묻었을 가능성. 하지만 이건 감각이 발달한 요연이나 챠이가 발견하지 못 했으니 그럴 일은 없다.

그 외의 가능성도 머릿 속에 떠오르기는 했지만 전부 기각처리 된다. 정말로 나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예상 외에는 답이 없다.

"으으음. 하지만, 그렇다면..."

내 혼잣말에 능파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나는 하고 있는 생각 때문에 그런 것에 신경 쓸 여력은 없었다.

만일 능파가 정말로 날 좋아하게 된 것이라면 '왜?'라는 명제가 붙는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유가 없다. 가정이 가능한 것은 자궁의 마음이 어떠한 연유로 풀렸을 가능성인데 내 기억이 닿는 곳에서는 전혀 짚이는 것이....

"켁, 설마 그 땐가."

케이슨에게 정신을 지배 당하고 있을 무렵, 난 분명히 광진의 정화를 이용해 그녀의 머리에 박힌 세뇌를 부쉈다. 그 때 한꺼번에 부서졌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 게다가 그 때는 능파도 지배당하고 있던 순간이니 나에게 반했다고 하더래도 무리는 아니다.

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가정하고 이야기를 진행시키자 너무나도 매끄럽게 이어지는 스토리에 당황한 나는 입술만을 달싹일 수 밖에 없었다.

"할아버지?"

조그맣게 얼굴을 붉히고 얼굴을 가까이하는 능파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순간 끌어안고 말았다. 능파는 마치 호지처럼 조금 발버둥치다가 그대로 날 껴안았다.

나는 그런 능파를 향해 망설임없이 물었다.

"혹시 날 좋아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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