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생의 육아일기-185화 (185/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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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

겨우 칠판 닦는 것 가지고 엄청나게 살벌한 표정을 하고 있는 클래스메이트 세현에게 나는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여어~. 주번이야? 아침부터 이렇게 일찍."

내 인사에 세현은 빠른 속도로 나를 보고 다시 칠판을 올려다보았다. 칠판에는 무언가가 많이 쓰여져 있었는지 이곳저곳 흰 가루들이 원형을 알 수 없게 묻어있었다. 세현은 잠시 한숨을 내쉬더니 슬그머니 웃었다.

"아아. 오늘은 그냥 일찍 눈이 뜨여서. 할 것도 없어서 그냥 지운거야."

우리반 제일의 성실함을 가진 세현의 그다운 말에 나는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아 웃음이 나왔다.

세현이 칠판 지우개를 내려놓고 이쪽으로 걸어왔다.

"그런데 몸은 괜찮아? 외국에 나갔다가 엄청 다쳤다면서."

세현의 말에 나는 아아하는 탄성을 질렀다.

나는 이래뵈도 학우들과 사이가 원만하다. 학생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한 나이니 학교에 안 나왔을 때 선생님에게 물어본 것이리라.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나는 선생님이 '어떤 핑계로 애들을 속였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자칫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이상한 의심을 살 수도 있다. 애초에 선생님이 거짓말을 했던 것이니 머리가 조금 돌아가는 아이라면 학교까지 수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뭐, 그래봤자 어느 정도까지겠지만.

"괜찮아. 아프긴 했지만 이미 다 나았고."

다친 사유나 정도 같은 것을 절대로 입에 올리지 않음으로서 들킬 확률을 줄여서 말하자 세현은 그래?하고 간단하게 대답하더니 기분 나쁜 느낌이 드는 손짓으로 턱끝을 두어번 긁으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몸 조심하도록 해. 얼마...남지 않았잖아?"

"알았.... 뭐?"

별 생각없이 무심코 대답하려던 나의 입이 '뭐?'하고 반문을 토해냈다.

얼마 남지 않았다. 그것은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는 말. 내가 만약에 '마법'과 관련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면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머리 한구석으로 밀어넣을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그것은 나에게는 자잘한 것들을 절충해서 두가지로 해석 되었는데 그 해석된 내용이 문제인 것이다.

하나는 나의 수명에 관련된 것이고, 두번째는 카타스트로피의 공습에 관한 것. 어느 쪽이든 나에게 이로울 것은 없을 터.

나는 황급히 탐지마법을 전개했다. 하지만 세현의 몸은 물론이고 물건에서도 느껴지는 마력의 기운 같은 것은 없었다. 나는 순전히 내 착각이겠거니 생각하면서 속으로만 한숨을 내쉬려는데 세현이 불쑥 말했다.

"난 도울 수 없지만, 친구로서 네가 다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괴로움으로 일그러진 얼굴. 그렇기에 나는 한순간 말이 막혀버렸다. 그 틈을 타서 세현은 내 뒤로 빠져나간다. 정신을 차리고 그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목을 감아오는 축축한 감촉에 입을 열 틈도 없이 교실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교탁 앞까지 끌려가 바닥에 적당히 내동댕치쳐진 나는 목을 쓰다듬으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손바닥에 들어올 것만 같은 작은 체구에 금빛의 매끌매끌 해보이는 피부. 아까 내 목을 감았던 것 같은 분홍빛의 날름거리는 길쭉한 혀.

우리집에 머물고 있는 마수 중 하나, 금와다. 집에서는 능파의 충실한 발닦개 노릇을 하고 있는 마수가 내 목을 잡아챈 것이다.

"금와, 왜 그래?"

"키키키, 요님. 제 3자의 입장에서 방금 상황을 보면 어떤 느낌인 줄 아십니까아아~?"

장난스럽게 말하는 금와를 보면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금와는 비웃음이 가득한 얼굴(개구리의 모습이라 단언할 수는 없지만)로 툭 내뱉었다.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차인 남고생. 어떠신지요?"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럴싸하게 들려서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금와는 방정맞게 킥킥킥 웃다가, 진지하게(역시나 개구리라 단언할 수는 없다) 표정을 바꾸었다.

"그건 제쳐두고. 한세현이란 남자에 대해서 뭐 아는 것 있으십니까?"

"그냥, 평범해. 누가보더래도 성실하고 착한 녀석이야. 그래, 그런 녀석이야."

나는 유치원이 듣더라도 의심할 정도로 불안하게 대답했다.

아무리 내가 개그(?)로 분위기를 풀어놓았다지만 우에게 스스럼 없이 접근했던 녀석이었다(하여나 련택은 워낙 넉살이 좋으니). 성품에 대해서는 태클 걸 곳은 전혀 없다. 하지만 지금은 의아함 때문에 그런 지금까지의 판단을 수정해야 했다. '적일지도 모른다', 로.

하지만, 세현이 만일 '적'이라면 모든 계획은 무너진다. 요 일년간 학교에 있으면서 소유의 탐지는 물론이고 능파의 정보망도 뚫고 일상생활을 즐겼다는 것이니, 실력은 어지간한 것을 넘어섰을 것이다. 내가 자랑하는 계획들도 중간에 치고 들어오면 얄짤없다.

급속도로 생각을 전개하는 나를 보며 금와가 앞발을 들어 휘휘 내저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은 가지만, 일단 그건 아닐걸요. 자, 이거."

내 마음의 소리를 듣고 대뜸 부정의 말을 날린 금와는 입에서 조금 단단한 느낌이 나는 종이를 뱉어냈다. 입 안에서 나온 것임에도 타액 같은 것은 전혀 묻어있지 않은 것에 대해 놀라워 하면서 그것을 펼쳤다.

꾸깃꾸깃해서 몰랐는데, 그것은 사진이었다. 내가 펼친 사진에는 칠판이 보였다. 그리고 그 칠판은, 흰색 분필로 마치 칼을 휘두른 것처럼 무언가가 적혀있었다. 나는 부들부들 떨면서 침을 삼키고, 천천히 그것을 읽어내려갔다.

"1학년 2반의 고요는 수십명의 사람을 죽인 살인자다. '난' 그것을 목격했고, 지금까지 입막음 당해왔지만, 그가 살인을 하러 떠난 지금에는 말할 수 있다. 그는 살인자다. 미치광이다. 죽이기 위해서는 뭐든지 할 수 있는 남자다. 지금 그를 친구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 생각은 그만 둬라. 언젠가 네 옆에서 피묻은 칼을 들이밀지도 모른다."

충격적인 그 사진의 글자들과 달리 내 목소리는 높낮이가 없이 담담했다. 나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 금와에게 시선을 주지도 않은체 물었다.

"이건?"

"요님이 자비나타를 잡으러 떠난 그 다음날 아침 적혀 있던 글들입니다."

"이걸, 세현이 썼다는거냐?"

도리도리. 금와는 목(인지는 모르겠지만)을 움직이며 고개를 저었다.

완강한 부정.

"아니오. 그 세현이란 학생은 그 글들을 지운 장본인입니다. 모두들 떠나고, 저는 할 일도 없는지라 학교에 와서 산책을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봐 버린 겁니다. 그 글을. 그래서 사진으로 찍어두고 지우려는데, 누군가 들어왔지요."

금와가 말하는 '누군가'는 내가 매우 잘 아는 사람일 것이다.

"짐작하시다시피 세현입니다. 그는 그 글들을 천천히 읽어내리더니, 지우기 시작하더군요. 별 표정 변화 없이 말이지요. 그런데...."

"그런데?"

불길하게 말꼬리를 끄는 것이 심상치가 않다. 그렇기에 되묻자 금와는,

"계속 나오더군요 그 글. 매일 아침마다 말이지요. 그래서 오늘은 짜증이 피크에 오른 모양이지만, 잘되었군요오?"

다시 말을 끌면서 장난스럽게 말하는 금와를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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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아이젠입니다.

이번 편은 개인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여기서 등장하는 세현이 중요하지요.

즐감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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