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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공준비!
요연과의 데이트 답지 않은 데이트를 한 그 다음날. 나는 마치 최종보스를 기다리는 플레이어의 기분으로 아파트 앞의 나무 벤치에 앉아있었다.
지금 내가 상대해야 할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능파다.
지략. 그것도 어떤 면에서는 날 뛰어넘는 능파이니만큼 어떤 것을 들고 나올지는 나로서도 쉽사리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능파가 폭탄이라도 들고 오지는 않겠지만, 능파지 않은가? 다른 여자들이 나에게 덤비지 못 하도록 기정사실(솔직히 이 생각을 할때는 등골이 오싹하는 것을 느꼈다)을 만들 여자아이가 바로 능파다.
"으으으음. 늦네."
슬쩍 혼잣말을 하고 있자니 조금 심심해졌기에 풍백으로 지나가던 남자의 머리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머리카락이 붕 떠오르더니 옆으로 날아가는 것을 쫓아가는 남자.
"아, 죄송."
그래도 재밌는 것은 어쩔 수 없기에 풍백으로 이것저것 건드리면서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그러던 것도 잠시, 나는 금새 질려버렸다.
"아, 할아버지. 기다렸어요?"
뒤에서 들린 소리에 나는 고개를 뒤로 넘겼다. 그곳에는 상당히 기쁜 얼굴로 서 있는 능파가 서 있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검은 스커트에 교복을 연상시키는 와이셔츠. 그리고 그 위에 살짝 걸친 갈색 겉옷은 백발의 능파에게 잘 어울렸다.
능파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심심해도 그런 장난은 안되요."
다 보고 있던 모양이었다.
나는 머쓱해져서 그녀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능파는 그 행동이 싫지만은 않은지 꺄악하고 귀여운 비명을 지르며 웃었다. 잠시 동안 그렇게 사소한 행복을 즐기고 나는 능파가 어떠한 유혹을 준비 했을지 대비(기대)하며 물었다.
"자, 어디 가고 싶은데 있어?"
나의 질문에 능파가 도리어 의문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한다.
"이런 건 남자가 골라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전 분명히 할아버지가 '하루만에 러브호텔까지 향하는 데이트의 왕도'를 가르쳐줄 거라고 굳게 믿으며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는데요."
"..... 진짜로 내가 그런 뭐시기 왕도를 가르쳐줄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어라? 기대했는걸요. 여자의 기대를 배신하다니, 제대로 된 남자가 못 될거에요?"
쿡쿡쿡. 단조롭게 웃는 저 미소를 깨뜨리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절대로 잘못 된 것이 아니겠지만, 저 모습마저 나에게는 귀엽게 느껴졌다.
능파는 다시금 웃으며 내 손을 잡아 끌었다. 어린애의 체격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강맹한 힘에 내 몸이 이끌려 세워졌다. 마치 호지처럼, 아이처럼 내 배에 얼굴을 파묻고 부비적거리는 능파는 날 껴안은 그 상태 그대로 날 올려다보았다.
능파의 입은 귀에 걸려, 마치 검은 것이 스물스물 튀어나올 것만 같은 미소가 되었다.
"역시나 할아버지에요."
무언가 불안한 것을 느끼면서 되물었다.
"...뭐가?"
"슈는 무계획일게 뻔하니까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엄마는 제가 부축였거든요. 백화점. 요연도 부축일 생각이었는데 계획이 있어보였으니 관뒀구요. 그런 상황에 할아버지가 생각하는 절 생각해보면 분명히 무방비한 상태로 나와서 제 반응에 따라 행동을 결정하겠죠. 아닌가요?"
정확하게 내 행동패턴, 사고방식에 말뚝을 박는 말. 사고가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렴풋이 능파의 사고는 나보다 못 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을 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다. 지금 능파는 내 사고를 확실하게 앞지르고 있다.
유일하게 내세울 수 있는 장기를 빼앗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은 많을 수록 좋은 것. 내가 잘났다면 더 좋겠지만 아군쪽에 잘난 사람이 있다면 그걸로 좋다.
능파는 내 생각을 꿰뚫어본 것처럼 말한다.
"행동패턴이 들킨 것에 너무 속상해 하지는 마세요. 할아버지는 긴장감이 있을때 진면목을 발휘하니까요. 이런 가벼운 나날에서 진면목을 보이지 못 하는 것은 당연한거에요."
"하하, 빈말이라도 고맙네. 그래서? 내 생각을 읽었다면 뭔가 계획이 있는거겠지?"
"흐으음. 글쎄요."
능파답지 않게 말을 얼버무린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했다.
능파는 덧붙였다.
"제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밀리는 것이 하나 있어요. 아니, 두가지지만, 일단 하나는 제쳐 두고 개인적인 스펙이라고나 할까요."
여전히 능파답지 않게 말을 빙글빙글 돌려 논지에서 미묘하게 어긋나게 한다.
"그 중 하나는 확실하게 오늘 안으로 땔 생각이에요. 하지만 데이트... 라고 하기에는 조금 다르지만 하여간 데이트가 끝나면 할거 거든요. 그러니까 그 데이트 도중에는 따로 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능파가 말하는 '하고 싶은 것'이라는 것이 데이트와 크게 관련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무리없이 알 수 있었다.
능파는 귀엽게, 하지만 진지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일단 자리를 옮겨요. 멋진 대화 장소, 구해주겠죠?"
"어떻게든 찾아보도록 할까. 남이 보면 데이트라고 생각할 정도의."
내 말에 능파는 웃으면서 내 뒤를 따랐다.
능파의 손을 연인처럼(남이 보면 키 차이 때문에 그리 생각하지 않겠지만) 붙잡고 내가 향한 곳은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어느 거리에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 가격도 적당하고 사람도 친절하기 때문에 여러가지로 괜찮은 곳이다.
우리는 사람들의 눈이 잘 닿지 않는 구석에 자리를 잡곤 각자 먹을 것을 시켰다.
잠시 침묵하던 공간을 깨뜨린 것은 다름 아닌 능파였다.
"이 나라를 뜰 생각이 사실인가 보네요."
혹시나 했는데 능파가 꺼내는 화제는 역시나 그것이었다.
짐작 했던 바이기 때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정확히는 치우회 전원을 뜨게 할 생각이지만."
내 말의 의미를 곡해해서 듣지는 않은 듯, 아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얼굴로 능파는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사실 능파는 저렇게 무심한 반응을 하지만 실재로는 매우 중요한 일임이 틀림없다.
다른 나라도 아닌 우리나라는 소수정예. 마수라는 허울이 있기는 하지만 그마저도 거의 은거나 다름 없는 상태다. 만일을 대비한 후인계획의 종사자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다른 나라의 마법사 집단만도 못 하다.
그런 상태에서 우리가 모조리 한국을 떠난다는 것은 곧 한국이 공격을 받더라도 무시할 생각이란 이야기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테이블에 손가락을 두어번 튕겼다.
따닥.
작고 둔탁한 소리가 낮게 울렸다.
"움직이지 않으면 져. 이기려면 공격을 해야만 해. 상대방이 자멸해주길 기다리는 것 미련한 짓이야."
그렇기에 치우회를, 우리들이 한국을 떠난다. 그 뜻임을 모르지 않는 능파가 내 행동에 화답하듯 테이블을 쳤다.
"동감은 하지만.... 어떻게요? 우리는 적지를 몰라요."
"무슨 소리. 유다가 있잖냐."
능파가 얼굴을 구겼다.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는 눈치다.
내가 짐작한 능파의 생각은 확실히 틀린 것이 아닐 것이다.
유다가 아무리 강하고 잘나기는 했지만 그들도 처음 만났을때는 적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아군으로 끌어들였다 하더래도 '본진'은 가르쳐 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다.
"...라는 건 뻥이고, 짐작가는 곳이... 있거든."
"그저 짐작인가요?
"거의. 하지만 확신은 있어."
솔직히 말해서 맞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생각이 빗나갈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그곳은 다름 아닌....
능파가 혀를 찼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실패해도 상관없는 계책을 마련 했겠죠?"
능파의 말에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책은 확실하게 준비해두었달까, 정확히는 시간 때문에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 시간을 늘이기 위해서라도 되도록 빨리 출발하는 것도 좋겠지만 레플리카를 전국으로 원정 보냈다. 아마 상당히 오랫동안 공격해오지 못할 것이다.
서빙을 보는 여성이 내가 말을 이으려는 순간 스테이크 두 접시를 가지고 왔다.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건만 상당한 심력을 소비한 듯 배가 울렸다. 능파도 나와 같은지 잠시 그런 이야기에 대해서는 입 다물기로 한 것처럼 보였다.
능파는 스테이크를 하나 베어물며 말했다.
"굉장하네요, 할아버지는."
"...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거냐, 능파야."
나는 정말로 굉장한 자를 눈 앞에 둔 사람이라 진심으로 부정했다.
능파가 어째서 날 추켜 세우는지는 안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곁에 누님이 있었다. 누님을 뛰어넘기 위해 노력했고, 이만큼 도달하는데 십년이 넘어가는 세월이 걸렸다. 하지만 눈 앞의 능파는 다르다.
겨우 일년. 아니, 호지가 능파를 데려온 시간을 생각해보면 일년도 채 안되는 시간으로 나와 엇비슷한 수준까지 성장했다.
성장속도, 통찰력, 판단력. 무엇 하나 떨어지는 것 없이 완벽에 가까운 것이 바로 능파다.
칭찬 받아야 할 것은 바로 그녀였다.
"할아버지. 경험이 없는 계책은 밑 깨진 독이나 진배 없어요. 하지만 할아버지는 경험이 없죠. 하지만 바닥을 보이지 않아요. 어째서일까요?"
"그건...."
능파의 말에 틀린점은 없다. 확실히 능파의 말이 옳다. 하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스스로에 대해서 생각해 본 기억은 적었다.
"할아버지는 솔직히 전략을 쓸만한 상황이 없었어요. 상대측에 대응할만한 전투는 손에 꼽을만 했고 행동에 제약도 많았죠. 그런데 할아버지는 이번 공습건은 물론이고 다음에 벌일 전투까지 상당한 능력을 보이고 있어요."
나는 비꼬는 의미 따윈 없는, 순수한 의미로 질문했다.
"어째서라고 생각해?"
"상상력일까요. 할아버지가 보이는 그런 쪽의 강함은 정말로 굉장하죠. 아마 패배한 경우까지를 생각하고 하면서 경험을 보충했겠죠."
능파의 말에 지금까지의 나를 한번 돌이켜 보았다.
그런 적이 있나 싶지만 뒤에는 확실히 빠르게 여러가지 상황을 대입해보고 최선의 상황을 만들어냈던 것 같다.
그것을 상상력이라고 한다면, 그리 틀린 말은 아니겠지.
능파는 다시금 스테이크를 베어물었다. 내가 씹기에는 상당히 질긴 고기인데도 능파는 가볍게 씹어서 목구멍 뒤로 넘기고 있었다. 용의 기본 신체능력을 실감하며 나도 고기를 씹자니 능파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이건 전투와는 무관한 거지만.... 물어도 될까요?"
"...? 뭔지는 모르겠지만, 좋아. 마음대로."
"케이슨의 정체, 제 짐작과는 다르죠?"
멈칫 고기를 찍던 포크의 움직임이 파리가 떠는 것처럼 멈췄다. 왼손의 숙련도 미흡과는 관련이 없는, 그저 멈췄다.
능파는 제차 말의 칼로 물어왔다.
"어렴풋이 뇌공이 아닐까 싶었지만... 할아버지에게는 완전히 생각 밖인 것 같은데."
나는 침묵했다.
거북한 침묵이 우리 둘의 공기를 사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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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아이젠입니다
능파와 주인공의 대화는 어째 이런 것 밖에 없군요. 로망이 없습니다.
이건 전부 내 탓!?...일리는 없겠죠.
그건 그렇고, 부제가 재밌게 바뀌었습니다.
역공준비. 예, 역공이지요. 드디어 역습편의 초반부에 들어선 겁니다. 정확히는 (모자이크 처리)...가 된 다음이지만 능파와의 대화도 역습편에 가까워서 이곳에 집어넣었습니다.
역습편에서 존재하는 최대 반전 두 가지, 즐겨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