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30 / 0340 ----------------------------------------------
런던
노숙 준비는 솔직히 너무나도 화려하게 이루어졌다.
요정계의 장악으로 도움을 줄 수 없는 요연이 빠졌음에도 신속하게 이루어진 것은 논외. 호지가 데리고 있는 도깨비군단은 몇분 안되서 근처 나무를 벌목하고 통나무집을 건설하기 시작한 것이다. 멍하니 바라보던 사람들은 이내 그 행동에 초점을 맞추어 노숙(이라고 하기에는 이미 한참은 다르지만)을 준비해나갔다.
그 노동에 참여하고 있지 않은 나는 변두리에 있는 돌덩이에 앉아서 묵묵히 그 모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능...파."
능파. 그 아이의 존재가, 곧 이곳의 중심이 될지도 모른다. 나와는 다른 타입의 전략과 사람을 이끄는 힘. 그것은 분명히 이들에게 득이 될거다.
"하핫, 나도 감상적이 되어선."
"확실히. 감상적이기는 했다."
내 말의 꼬리를 물고 말하는 누군가의 말에 시선을 등 뒤로 두었다. 여전히 흐릿한 눈의 유다가 팔짱을 낀체 내가 보고 있던 공사장 터를 보았다. 옛날에 친구들과 마을을 세웠던 기억이라도 되살아 났는지 아련한 눈으로 그 모습을 보았다.
눈치채지 못 했지만 그는 나와 함께 그 모습을 보고 있었던 듯 싶었다. 하긴, 유다가 저런 노동에 참여할 것 같지도 않고, 안에서 잘 것 같지도 않다.
유다는 나를 보지도 않은 체 나에게 말을 건다.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어투라 쉽게 대답할 뻔 했다.
"어째서 그렇게 과민해서 죽이려했지?"
마치 쓴 약을 입에 댄 것처럼, 입술이 쓰렸다. 말을 토하고 싶은데 그것을 억지로 참아낸 것처럼.
과민했다. 과민반응이라면 과민반응이기는 했다. 죽이기는 했겠지만, 옛날의 나라면 일단 그 전에 포섭을 전제로 말을 걸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상당히 화가나서 지체를 못 하는 상태였다.
세현. 그의 죽음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곪고 곪아서, 이제야 터진 것 같았다.
그는 800년 뒤에나 삶을 유지할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죽을 뻔한 놈을 살려줬으니 잘된 일이라고 할 수 있나?
아니다. 그는 애초에 나만 아니었다면 평범한 삶을 계속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망가져 버렸다.
거기까지라면 괜찮았을 것이다. 잊고... 살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오베론의 얼굴에 보이는 '죄없다'는 얼굴은 나의 분노를 그 일과 연관짓기에 충분했다.
유다를 슬쩍 곁눈질 했다. 여전히 나를 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나의 말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 친구가, 혼수상태야. 전의 전투 때문에. 너희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데... 자신은 죄가 없다는 얼굴로 반문하니까 그냥 열이 받은거야. 그것... 뿐이야."
"숨기고 있는 것이 있다는 얼굴이다. 다들 곧 알게될 것이지만, 지금은 말할 수 없다는, 그런 느낌의."
".... 하하핫. 유다 주제에."
정말이지, 너무나도 쉽게 넘겨짚는다. 하지만 그것은 정답. 너무나도 호쾌하게 핵심을 찌른 한마디였다.
앞서 말했던 것은 거짓이 아니다. 진실이기는 하지만, 많은 것이 빠진 진실이다.
이번에 내가 할 작전은 솔직히 무리수가 많은 작전. 상대측이 내 의도대로'만' 움직여주어야 이 작전은 성공하고, 내가 '살아남을 수 있다'. 위험천만한 작전이고 동료들의 가슴을 매우 후벼파는 일이 될 것이다.
아마 이것도 내가 그 일을 상기하는데 큰 도움이 됬을 것이다.
그 작전의 위험성만큼, 나는 정신이 극한에 달아 있었다.
"넌..... '왕'은, 생각이 너무 깊다. 조금쯤은 얕게 보는 것도 필요할지 몰라."
나는 놀라서 유다를 보았다. 유다 스스로도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 생각했는지 황급히 자리를 떴다.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천명을 거역하고 삶을 지속시킨 강자. 그의 조언은 투박했지만 따뜻했다.
"푸하핫!"
갑자기 웃음을 참을 수 없어서 그냥 웃고 말았다.
유다가 가버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숙하는 곳 답지 않은 작은 집 몇개가 완성되어 있었다. 이리저리 명령하며 열을 내던 능파도 여유가 났는지 이곳으로 다가왔다.
"... 볼은 괜찮아요?"
"마음이 아파."
"영혼째로 날려줄까요?"
"죄송합니다."
가벼운 꽁트를 벌이고나자 능파는 물끄러미 나를 내려보았다. 차갑지만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능파의 부드러움.
탓할 것은 아니다.
"할아버지.... 답지 않아요."
"알아. 나답지 않... 았지."
무슨 생각으로 그랬냐, 고 묻고 싶다는 감정이 눈에 보였다. 아프게 비쳐드는 능파의 시선에도 나는 꿈적하지 않았다. 문득, 잊고 있던 것을 상기해냈다.
주머니를 뒤적이며 하나의 종이쪽지를 건넸다. 말없이 받아들며 펴보려는 능파의 손을 잡아서 말렸다.
"나중에 내가 작전행동에 들어가면 읽어줘."
능파는 한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리곤 심통이 난 것처럼 빙글 돌아버렸다. 살짝 얼굴을 돌려 귀엽게 웃어보인 능파는 종종걸음으로 나무집으로 들어가버렸다.
혼자 남자, 기분이 묘했다. 이런 기분을 느낀 것이 얼마만인지 잊어버렸다.
외로움. 그 단어를 이렇게까지 아프게 받았던 적이 있었던가.
요연도, 호지도, 슈도. 지금 나에게 다가오지 않은 것은 나에게 잠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이런 일로 외로워 하는 것은 옳지 않았다. 게다가 애초에 난 이것을 이유로 외로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발이 떨리고 어깨가 흔들린다.
공포, 공포, 공포.
얼마를 표현해도 부족하지 않다. 강렬하게 마음을 관통하는 말뚝과도 같은 그 말은 지금 나의 심정을 대변해주는 한마디다.
누군가가 곁에 있기를 청한다?
아니될 말이다. 이것은 내가 견뎌야 할 업보다. 나만이 가지고 있어야할 감정이다. 그렇기에 혼자여야만 한다.
이제야, 내가 옛날에 무심코 생각했던 천명이란 단어가. 이곳에서 직결되고 있다는 것을 느껴버렸다. 그 천명이 미래로 나아갈지, 아니면 이 장소, 이 하늘에서 끊어질지는... 아무도 모르고, 알아서도 안된다.
내 왼팔에 기생된 '가나안의 주신'이 요동친다. 자신에게 어떠한 일이 덮치려는 것인지 알고 있기 때문인가, 재밌는 일이다.
"후우우우우..... 어디까지, 분발할 수 있을까...?"
그것이 어디까지든, 하한선은 있다.
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내 작전의 최대 하한선.
"걱정되나."
유다와 같은 투박한 어조지만, 유다와는 달리 따뜻함이 없는 목소리. 고개를 들자 장신의 장년인, 가온이 보였다.
그는 사기그릇으로 된 컵하나를 내밀었다. 노란빛을 띄는 투명한 액체가 부드럽게 소용돌이치고 있다. 그것을 받아들여 가볍게 들이켰다.
희미하게 단맛을 내는 주(酒). 내 나이의 착한 어린이들은 손도 대지 않는다는 술이란 물건이지만, 알코올의 농도 수는 낮다고 느껴졌다. 오히려 아이들이 가볍게 손대도 상관 없을 것 같은 느낌의 맛이었다.
"동지들 중 하나가 만든 술이지. 비법은... 모르지만."
"당신이 이걸 자의로 가져왔을 것 같지는 않은데."
가온은 바닥에 쓰러지 듯 주저앉았다. 다른 한손에 들고 있는 자기 몫의 술병을 가볍게 들이키며 내 말에 대답한다.
"물론. 여왕의 명일 뿐이다."
호지. 그 아이도 내가 어지간히 걱정된 모양이었다. 걱정하지 않으면 그것이 호지라고는 할 수 없었겠지만 그 아이의 의도는 잘 알았다.
다시금 들이켰다. 달고 알코올 특유의 맛이 혀를 감돈다. 오늘밤은 잠시 취해 있는 것도 좋지 않을 것 같다.
하늘을 보았다. 창백하게 푸른 달이, 만월이다.
달과 술. 그야말로 풍류에 어울리는 대목이란 느낌이 들었다.
"내 아내는... 이름이 없었지."
나와 만나기 전에 미리 술이라도 먹은 것일까, 취기가 감도는 얼굴로 그는 말을 시작했다.
"하지만... 좋아했다. 천변만화라는 말이 무색할 감정이었지만 그런 행동도 나에게는 기뻤다. 아름다웠어. 그녀는.... 강했다."
'강하다'는 말을 하는 것치곤 그의 얼굴은 상당히 일그러져 있었다. 술에 조금이나마 남아있는 쓴맛과는 다른, 감정의 일그러짐이다. 그는 괴로운 것을 말하는 것처럼 숨을 들이키며 잠시 말을 끊었다.
묵묵히 들으며 술을 슬쩍 들이켰다. 계속 마시고 있는데도 취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계속, 계속, 계속. 싸우면 싸우는데로 이겼다. 그녀를 이길 존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아내는 그 빌어먹을 칭호를 얻었다."
그가 든 술병의 주둥이가 부러져나갔다.
"'불패'. 그 저주받은 칭호를."
대답도, 신음도 흘리지 않았다. 그저 몸에 남아있던 취기가 송두리째 빼앗긴 것이 전부였다.
'불패.' 지금은 나의 누님이 이어받은 칭호였다.
어째서 생각하지 못 했을까. 분명히 말했다. '불사를 상대할 수 있는 것은 불패 뿐'이라고. 그렇다면 퍼스트 워 때, 검제와 마종이 사망한 그 전쟁 때 불패는 실존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성적으로도, 감성적으로도 관심이 가는 말이었다. 가온은 취기를 유지하며 이야기를 한다.
"불사와의 전투 때..... 그녀는 죽어버렸다. 당연한 일이었어. 그 불사의 일격을 쳐내고 데미지를 줄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지. 그만큼 강했다. 그래서 전투가 끝났을 때 이 '아이'는 강하고, 싸움없는 삶을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지 못 했단 말이다.
가온은 술병에 담겨 있던 액체를 모조리 입안으로 털어넣었다. 쓴고 단맛의 적절한 조화를 즐기는 것처럼, 그가 회상하는 뼈아픈 기억을 잊으려는 것처럼.
"하지만 아니었다. 마수들의 예언자인 은함까마귀는 그 아이에게 다음대의 칭호를 내려주었다. 죽는다는 예언은 아니었지만, 그 당시 칭호를 받았던 사람치고 고이 죽는 사람을 보지 못 했다. 그 뇌공조차 자신의 손으로 부인을 살해하고 자결했으니."
칭호를 받은자는 행복해지지 못 한다. 그렇기에 그는 호지에게서 애정을 완전히 때어놓았다. 그 때의 슬픔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기에.
가온은 술이 남지 않은 병을 적당히 풀숲에 던지며 일어났다.
"쓸데없는 넋두리는 여기까지다. 어디 한번, 마음대로 해봐."
등을 돌리고 나아가는 그의 모습에는 유다 이상으로 투박한 애정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그의 등에서 시선을 때고 하늘을 보았다.
오늘밤은, 시리도록 푸른 달이 떴다.
==========================================
작중에서 언급한 적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호지는 전대 불패의 딸입니다.
하지만 저번대의 불패와 현대의 불패는 상당히 차이가 있으므로, 그것이 작중에서 설명될지는 아직 모르겠군요.
아마도 설명을 해야 하겠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리고 현재 비축분에서 방어편이 끝났습니다. 최종편의 전에 있는 에피소드를 짧게 짧게 보여드리다가 최종편으로 넘어가게 되겠지요. 고대하던 대망의 완결이 가까워지고 있는 겁니다!
....스네이크 쓰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