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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붕괴
빛이 들어오지 않는 칠흑의 공동이라서 그런지 시간감각이 사라졌다. 그런 상태로 있기 때문에 얼마나 지났는지도 짐작가지 않는다.
잠시 후, 케이슨이 나갔던 문으로 빛이 새어들어왔다.
백은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자랑하는 미청년이 학교 식당에서나 볼 수 있는 식판을 들고 이곳에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부드러운 동작으로 내가 앉아있는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소리없이 내려진 식판 안에는 명물 영국요리인 피쉬 앤 칩스가 들어있었다.
"먹어라."
라이칸스로프의 제왕이 오연하게 말한다. 하지만 그런 위엄속에서도 나는 웃음 외에는 내놓을 반응이 없었다.
사막에서도 그렇고 이곳에 와서도 그렇고. 라이칸스로프의 왕인 그라드는 푼수였다. 적어도 내가 본 부분은. 아니, 평소에 그가 동료들에게 보이는 모습은 정말로 푼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내 예상과 다르지 않게, 그는 맞은 편의 의자를 빼앉더니 나잇살먹은 할아버지처럼 숨을 토해내며 한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역시 나에게 이런 건 어울리지 않아. 그렇지?"
"뭐, 그렇지."
내 대답에 그라드가 눈을 홉떴다. 화가 난 것은 아니지만 화가 난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일종의 장난이다.
"어이, 난 너보다 훠~~~~~~~~얼씬 나이가 많다고? 그렇게 하대해도 되는거냐?"
나이. 생각해보면 나는 나이많은 사람에게 상당히 강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소유도 그렇고, 챠이나 유다도 그렇다. 조금 더 뽑자면 일본의 광에게도 그랬고 바다의 아쥴에게도 난 존대를 한 적이 없었다. 딱히 내가 예의없는 사람이란 것은 절대로 아니다. 객관적인 평가로도 분명히 그렇다.
난 한국에서 태어났다. 유교의식이 남아있는 동양권의 남아다. 그런 내가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게 잘하라는 동양 특유의 예의를 모를리가 없잖은가?
아마 그것일 것이다.
'생김새'. 혹은 이물(異物)이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확실히 존대를 하지만 마수들에게는 하지 않는다. 어째서냐고 묻는다면 살짝 이상한 견해를 섞어 대답해주겠다.
인간과 개의 총수명은 다르다. 인간을 80으로 잡을 때 개는 약 20. 아무리봐도 인간의 나이가 많다. 하지만 비율로 따지자면 결국 같다.
허나 그렇다고 인간이 개에게 예의를 갖추는가?
절대로 갖출리가 없다. 어째서냐면 다른 존재니까. 애초에 다른 개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에게 나이 같은 것은 무의미하다.
나의 조금 삐뚤어진 이론을 입에 올리자 그라드는 탄성을 지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오오. 옳은 말이야, 옳은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직감했다.
이 남자는 바보다.
"아, 그런데 뭐 묻고 싶은 건 없어?"
"케이슨의 목을 묻어버리고 싶군."
그렇게 가벼운 농담으로 답할 때가 되어서야 나는 왠지 모르게 느껴지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닫고 말았다.
그라드는 유창한 한국어로 나와 대화하고 있었다. 내가 날리는 개그는 전세계 언어계의 최고봉인 한글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편견) 농담. 즉, 하이개그니까.
그라드는 나의 개그를 듣곤 푸하핫, 하고 남자답게 웃었다. 누님 이후로 이런 방식의 개그에 웃는 사람은 처음이라 얼떨떨해졌다.
"으하하핫, 재밌는걸 육왕은. 어쨌건 질문 있나?"
"얼마나 지났는지, 나에 대해서는 어떠한 결론을 냈는지다. 그리고 나의 동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그것들."
"시간은 하루정도. 너에 대해서는 어려울 것 없이 감금이다. 주변에 너와 연동된 폭탄을 해제한 뒤에는 죽이겠다더군. 그동안 우리는 번갈아가면서 널 감시하는거야. 그리고 마지막 질문인 너의 동료들은 현재 무반응. 이걸로 끝이다."
날카롭게 벼려낸 칼처럼 너무나도 쉽게 대답해준다. 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그가 해준 말에 상당한 정보를 얻었다.
하루마다 날 감시하는 사람이 바뀐다면 조금 위태롭지만 계획은 착실하게 진행될 것이니 일단 패스. 두번째인 나와 연동된 폭탄은.... 상당히 곤란하게 되었다.
이 작전에서 그 폭탄의 존재는 눈치채는 것이 기본 전제이기는 하지만 상당한 난점이 하나 있었다.
폭탄이 제한시간내에 해제되면 안된다는 것. 해제 된다면 나는 물론이고 모두가 정말로 끝장이 나고 만다. 아마 유다라 하더래도 죽음을 면하지 못 하겠지.
다행인 점은 세번째인 동료들의 무반응. 능파가 잘 조절해주는 것 같으니 이건 신경 쓸만한 것은 아니리라. 능파라면 설사 내가 없더라도 잘해낼 수 있을만한 재능을, 내게는 없는 그것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
손등으로 탁자를 두어번 쳤다.
".... 그런데 그라드."
"오, 대뜸 이름을 부르다니. 어쨌건, 왜?"
"어째서 잘 대해주지? 난 너의 적이야. 사막에서는 너의 부대를 몰살시킨 적도 있어. 모르지는 않을텐데?"
그라드는 웃었다. 그 웃음은 마치 순진한 소년의 그것과 같아서 뭐라 알 수 없는 광채가 번뜩이는 것 같았다.
"맞아, 그렇지. 하지만 쓸데없이 악감정을 갖는 것도 바보 같지 않냐? 전쟁통에는 만날 일도 없는 인연과 교차하기도 하지."
정도에 따라서기는 하지만, 이라며 덧붙이는 그의 얼굴에는 조금의 사심도 없어보였다. 하지만 논제가 슬쩍 비껴나갔기에 바로 잡았다.
"그건 감정상의 문제. 실질적인 이유는 되지 못 해."
"그런가. 하지만 내가 거짓말을 했다면?"
거짓말. 그 가능성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확실히 가장 처음 떠올린 것은 그 말을 믿는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진 가정이기는 하지만 거짓말일 경우도 생각해두었다. 하지만, 그건 부질없는 생각임을 깨닫는 것도 짧지 않았다.
그라드는 거짓말 하지 않았으니까.
이유는 적잖게 있지만 역시 가장 큰 이유는 '그럴 것 같아서'. 그는 거짓말을 할만한 위인이 아니다.
내 표정을 보던 그라드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렸다. 또 다시 혼자남게 됬지만 그라드 덕분에 그리 쓸쓸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아, 그러고보니..."
그라드가 가져다 준 음식들을 잊고 있었다. 동양인인 것을 고려해서인지 젓가락이 놓여 있는 것을 보곤 헛웃음을 지었다.
아삭.
튀김을 하나 베어물었다. 바삭한 겉과 물컹한 안의 식감이 적절하게 배합되고 고소한 기름과 소금이 쳐진 감자의 맛이 섞여...
"더럽게 맛없어!!!!!! 장난하냐, 이걸 먹으라고 준거야!?"
음식이 맛 없기로 소문난 영국이라지만 설마 이정도일 줄은. 아니, 근래에 들어서 능파가 내놓는 초고급의 음식들만 즐겨왔기 때문에 더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맛을 최대한 무시하고 목구멍으로 삼켜버렸다.
여기서 얼마나 버텨야할지 모르는 이 상황에서 음식 맛은 사치다. 지금해야 할 것은 때를 기다리며 최대한 에너지를 비축해두는 것이 최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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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렀다. 그라드 이후에 팔대간부로 추정되는 녀석들이 약 셋이 반복되면서 나를 감시하고 나갔다.
기레, 프리아가, 케이슨.
누구라고 할 것없이 쟁쟁한 인물들 뿐이다. 그라드와는 다르게 딱히 말을 걸지 않고(케이슨 제외) 섬뜩한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고보니... 이제 곧 올때가 됬는데..."
마지막으로 케이슨이 나가고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지금쯤이면 아마 다음 타자가 올 시간이 됬을 것이다. 그리고 이 순간이 마지막이다.
최후의 최후에 내가 설치를 부탁한 폭탄이 실패했느냐, 아니면 '그'가 오느냐. 이것에 내 목숨이 달려있다.
"윽....."
피부가 곤두선다. 전율하는 감정, 감각. 전세계가 흐릿해져 보이기까지 하는 긴장감과 공포. 지금까지 겪어왔던 죽음의 공포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내가 계획한 작전. 스스로의 선택에 불신감이 들 정도다.
무서운 것은 죽음뿐만이 아니라, 생각이 빗나가는 것.
평소라면 웃음으로 무마할 분위기인데도 할 수 없었다. 스스로의 실책으로 인해 친구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는다는 것은 도통 무서운 일이 아니다.
위잉.
문이 열리면서 한 남자의 후광이 비췄다. 나뭇가지처럼 여러개로 갈라진 후광이 잦아들면서 그의 푸른색 피부가 확실하게 드러났다.
파괴신 시바. 팔대간부에서도 상위의 실력을 드러내는 것이 분명한 그가 친히 이곳으로 나온 것이다.
털썩.
아무데서나 볼 수 있을법한 보자기가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그 안으로 언뜻 옷가지들이 보였다.
".... 때가 된거냐, 시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시바. 나는 옷을 벗어재끼고 보자기 안의 옷을 주섬주섬 챙겨입었다. '간만에' 다시 입는 옷이라 감회가 새롭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시바가 수많은 손 중 하나를 내밀었다. 그곳에는 자그마한 구슬하나가 놓여 있었다.
뇌정광구(雷情光球). 광진을 사용하기 위한 마력을 되돌리기 위해 숨겨두었던 비약이다. 다행히도 잘 찾아준 듯 했다.
나의 가슴팍에 시바의 맨손이 닿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보다가 뭣 때문인지 기억해냈다.
"아, 괜찮아. 스스로 할 수 있어."
흐름을 지배하는 운사가 몸 안의 마력을 억누르던 힘을 지배하고 끊어놓았다. 몸 속 깊히 충만하게 차오르는 힘의 흐름.
이 느낌, 역시 져버릴 수가 없다.
손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면서 테이블을 옆으로 밀쳐버렸다. 가볍게 벽에 처박힌 테이블의 조각이 허공을 날았다.
"가자, 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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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눈치채신 분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