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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붕괴
손을 가로로 휘둘렀다. 횡으로 찢어진 대기가 요동치면서 커다란 무밀(無密)의 공간을 탄생시켰다. 비어버린 공간, 먼 옛날 한국을 지켰던 공신들이 자신들의 낡아진 모습을 현실세계에 드러내면서 강력한 영광을 뽐낸다.
금속성이 짙은 녹색빛이 찬란한 청동의 부채, 풍백. 바람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힘은 자연마저 휘두르는 절대의 신병.
구름처럼 부드러운 질감과 색을 가진 팔찌, 운사. 흐름을 조종하는 힘의 범용성은 다른 어떠한 신병도 따라올 수 없다.
"후우....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것도 해볼까."
하나의 전쟁을 묘사한 것처럼 음각된 철과 돌을 염주알처럼 묶인 팔찌, 철암장군을 오른팔에 채웠다.
얻은지 얼마 되지 않은 물건이라 제대로 다룰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물건이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계속 늦장을 부리다간 시바의 배반을 눈치챈 간부들이 당장에라도 쳐들어올 가능성이 있었다. 아니면 내가 설치한 폭탄을 무력화시키거나. 어느쪽이든 나에게는 그리 좋다고 말할 수는 없는 상황.
행동력은 필수다.
"시바. 최대전력으로 '시계탑'을 수직으로 꿰뚫을 수 있어?"
아무리 시바가 파괴신이라 하더래도 한계는 있을 것이다. 게다가 난 그를 '제대로 알지 못 한다'. 요연이나 챠이 같은, 나와 친한 사이라면 전력을 계산해서 가부를 논하겠지만 그의 실력은 미지수.
사막에서의 일견식으로 시바의 힘은 어느정도 알고 있지만 당시에는 한도가 넘어버린지라 상대방의 잠재력까지도 꿰뚫어봤다. 실재 힘은 다를 가능성이 있었다.
시바는 대답하지 않고 석잔을 놓았다. 염력의 힘으로 잔은 허공을 둥둥 떠다녔다.
무슨 일을 하려는 거냐고 물을 틈 따위는 없었다. 그가 석잔을 놓았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한 순간 시야는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다.
"우와아악!?"
반사적이라고나 할까, 전신에서 황금빛 뇌전이 줄기줄기 세어나왔다.
광진 삼식, 발동이다. 간신히 주변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만큼의 시력으로 돌아왔다. 덕분에 나는 지금 어떠한 상황인지 제대로 요약할 수 있었다.
시바가 내 몸을 들쳐업고 방에서 시계탑 밖까지 일직선으로 뛰쳐나갔다. 그것이 시야가 흔들린 이유였다.
강력한 힘을 가진 시바답다고나 할까, 순속의 스피드로 탑을 빠져나온 그는 세번이나 회전하면서 탑의 꼭대기에 올라섰다. 일반인보다 몇배는 큰 시바에게는 바늘과도 같은 곳일텐데도 상당히 제대로 균형을 잡아선 상태였다.
하지만 그것 말고도 현실적인 문제는 하나가 더 있었다.
"우욱... 시바... 토할 것 같아."
광진 삼식을 빠르게 펼치지 않았다면 회전력을 받아서 나의 구토가 롤링(rolling)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시바는 내 말을 깔끔하게 무시하곤 하늘로 던졌다. 뒤집힌 속에 박차를 가하는 흔들림이 다시금 일어났다. 하지만 난 그 감각을 깨끗하게 무시할 수 있었다.
광진자체의 감각 덕분이기도 했지만 지금 눈 앞에 보이는 시바의 행위는 모든 것을 무시하고 볼만한 가치가 있었다.
두개의 창인 파슈파타와 피나카. 시바의 파괴력을 상징하는 두개의 창으로서 신화에서는 별로 쓰인 적이 없다고 불리는 신창이면서 마창이다. 그 위력이 지금 눈 앞에서 펼쳐지려 하고 있는데 눈을 땔 수 있을리가 없었다.
삼지창 피나카와 길게 뻗은 파슈파나가 교차하면서 푸른 뇌전을 일으켰다. 내 피부에서 돋아나는 전력은 그야말로 정전기에 불과하게 만드는 광대한 뇌력이 두 창에 머물렀다.
피잉!
피아노선을 뜯는 것과 같은 파공성. 파슈파타가 먼저 시계탑을 꿰뚫고 피나카가 뒤를 따르며 뇌격을 흩뿌렸다.
번쩌저저저저적!!!
번개의 섬광이 한번 번쩍일때마다 벽이 갈라지고 머나먼 땅으로 떨어져내린다. 일점집중의 돌파력을 가진 파슈파타와 넓은 범위의 파괴력을 가진 피나카.
그야말로 파괴신에 어울리는 무구들이다.
"웃차. 시바, 몸 흔들지마라. 중심 좀 잡아야하니까."
시바의 등에 사뿐히 내려서며 말하자 시바는 가벼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각까지 관통해버린 강력한 위력에 혀를 내둘렀지만 지금은 나도 해야할 일이 있었다.
"네놈, 시바아아아아아아아아!!!!"
무너져가는 시계탑의 파괴조차 막을 것만 같은, 그야말로 사자후가 어울리는 외침이 아래에서 튀어나왔다. 시바의 열개나 되는 손 중에서 석잔이 빙글빙글 회전했다.
아무것도 없어야 할 석잔에서 푸른 액체가 아래로 쏟아져내렸다. 그 액체들은 여럿의 물방울로 나누어지면서 이내 뇌구의 모습을 형성하며 아래쪽을 분쇄했다.
이제는 처참한 탑의 몰골에서 전혀 이전 모습을 알아볼 수가 없다. 그런 탑의 시신 속에서 하얀 거암(巨巖)이 솟구쳐올랐다.
옴팔로스. 신성시되던 돌이 고렘의 형상과 함께 자아를 가진 마수다.
"시바, 네놈이 어째서 이런 짓을!!"
"여전히 느낌표를 좋아하는 놈이로군."
"그딴 소릴 듣고 싶은 것이 아니다, 시바! 어째서, 어째서 배신 했느냐!"
애처롭기까지한 옴팔로스의 외침. 허나 시바는 코웃음쳤다. 마치 상대할 가치조차 없다는 것 같은 행동에 옴팔로스가 날아올랐다.
무거운 신체에 어울리지 않는 쾌속. 어느샌가 돌아온 시바의 창이 번개처럼 옴팔로스의 어깨를 꿰뚫었다.
퍼석.
그야말로 순속에 어울리는 행동. 파슈파타가 시바의 손으로 돌아왔다.
"이것은 '약속'. 인지하지 못 했던 이전과는 다르지. 나에게는 지켜야만 하는 약속이 있다. 게다가..."
시바가 가진 네개의 얼굴이 커다란 초승달 같은 웃음을 지었다. 기이한 감정으로 얼룩져버린 파괴신의 면모.
"나에게는 이쪽이 좀 더 싸울 길이 있으니."
"호오. 확실히 그렇기도 하겠군요. 신앙을 받아먹는 당신이니 그쪽에 붙어도 이상할 것은 없겠지요."
공중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흑색의 갑주. 평범한 경장차림의 평소와는 다른 확연한 전투상태의 모습을 한 케이슨이 눈 앞에 있었다. 게다가 그뿐만이 아니다.
그라드, 기레, 프리아가, 아수라왕. 팔대간부의 여섯명이 우리의 전방위를 점한 상태로 강력한 위용을 뽐낸다.
포위했다.
"호오. 대응이 빠른데 케이슨? 나에게 따로 마법이라도 걸어두셨나?"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이니 이정도 대응은 필요했지요. 설마 시바가 배신한다는 선택지는... 상상도 하지 못 했지만."
완전히 뒤통수를 쳤다는 것이 자랑스럽기 그지 없는 상황. 나는 시바의 위에서 위태롭게 자세를 잡으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아니, 앞머리를 치우고 '얼굴'을 매만졌다.
"간세를 심어놓는다는 건 너의 전매특허가 아니야."
얼굴을 쥔채로 손을 세게 쥐었다. 얼굴이 마치 유리조각마냥 바스러지면서 아래로 떨어졌다. 떨어져가는 얼굴의 조각들이 차츰 '유리'가 되어갔다.
거짓으로 점철된 나의 가짜 얼굴이 부서져 내리고 얼굴을 덮는 금속의 차가움이 상기된다. 부드러움과는 거리가 먼 감각을 쏟아내는 것처럼 숨을 길게 뿜어냈다. 그리고 있을 수 없는 것을 보는 듯한 얼굴의 케이슨을 보았다.
"마, 말도 안돼... 어떻게 숨겼..."
팅, 팍.
손끝에 튕겨올리는 투구모양의 반지가 하나.
언젠가 슈가 넘겨주었던 페르세우스의 투구 반지다. 마력에 대한 기척을 완전히 무시하는 힘으로 지금까지 박살난 '가면'과 내가 쓰고 있는 '가면'을 숨겨왔다.
하지만 그냥 장착하면 쉽게 떨어질지도 몰라서 하나에게 특별주문을 해둔 것이 지금 부서져버린 가면.
"아니, 그것보다! 어떻게 당신이 그 가면을 쓸 수 있지!? 그것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유운뿐일텐데...?"
케이슨이 혀를 찼다.
그렇다. 내가 쓰고 있는 가면은 찬란한 은빛을 띄는 영왕의 가면. 즉, 나에게 배정된 황금 가면이 아니라는 소리다.
하지만 케이슨은 간과한 것이 있다.
"나는 육왕(肉王).... 이승의 왕이다. 살아있는자들의 왕이지. 설사 저승의 왕이라 하더라도 살아있는 사람인 이상 나의 권한 아래에 있어."
유운은 살아있는 자. 육왕의 간섭을 받는 존재다. 그에게 허락된 것이라면 나 또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
가면이라 하더라도 예외가 아니다.
잠자코 있던 케이슨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허나, 그렇다하더라도 누굴 불러낼 셈입니까? 검제나 마종이 아닌 이상에야 우리들을 이겨낼 수는 없을텐데요."
"확실히 그럴테지."
팔대간부가 이만큼이나 몰려있다. 어지간한 녀석은 오히려 방해만 될 것이 자명한 이치. 하지만 내가 그것을 생각하지 못 했을리가 없잖은가?
현현시킨 철암장군, 풍백, 운사가 빛을 냈다. 자기만의 색채를 강렬하게 내뿜는 그것들은 지금 당장 밖으로 내보내달라는 듯이 발버둥쳤다. 그것은 나마저도 자극시켜 지금 당장 시연시키게 하는 욕구가 생겨났다.
확실히, 더이상 숨겨둘 필요는 없겠지.
"머나먼 옛날,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워왔던 명사들이 이곳에 현신한다면 틈은 충분히 만들 수 있지. 설사 팔대간부라 하더라도."
유다때 쓰려고 했던 적이 있긴 하지만 겨우 겨우 참아냈던 풍백, 운사, 철암장군의 현신. 그것이 지금 내 손에서 펼쳐지려하고 있었다.
"가라."
담담한 목소리가 주변을 휩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