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9 / 0340 ----------------------------------------------
특별편, 호수여행
모든 계획을 설정했다. 이제 남은 것은 찰나와 같은 며칠간의 준비뿐이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고,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분명히 치우회와 동료들 중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 생각했었다.
마치 수성처럼 호수를 둘러쌓은 산의 산세는 부드럽지만 자연적인 미가 날카롭게 뻗어있다. 그 가운데에 존재하는 사파이어빛의 호수는 생명의 기운이 충만해서 많은 생물들이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그 생물들의 행복을 방해하려는 존재들이 몇몇, 호수 위를 당연하다는 얼굴로 걷고 있었다.
호지, 요연.
일반인의 개념이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존재들을 부름이었다.
"랄까, 난 어째서 이곳에 있는거지!?"
나의 포효에 이곳으로 끌고 온 장본인, 가짜 사투리의 표본인 운이 스케치북을 꺼내들었다. 한장을 펄럭하는 소리와 함께 넘겼다.
순결하다고까지 느껴지는 흰 종이에 검은 선이 죽죽 그어졌다.
"외국으로 나가기 전에 하는 일이라꼬 하몬 당근 여행 아이가."
겨우 4B연필로 굉장한 퀄리티의 그림이 완성되었다. 자고 있는 내 모습과 옆에 여자들을 낀체로 침대에 누워있는, 매우 애로한 상황에 운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장면이었다.
"근디 갑자기 공격이나 해갔고..."
다시금 운의 펜이 현란하게 검은 선을 그렸다. 호지와 능파가 침대 아래에 있는 선반에서 내 속옷들을 마구잡이로 던지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 옆에 만화처럼 칸이 나누어지면서 운은 못 볼 것을 봤다는 듯이 속옷을 때어낸다.
...왠지 슬퍼져서 그림 속의 나처럼 절망하고 말았다. 평범한 여자로서의 반응으로서는 틀리지 않았지만 너무 서글프다.
그런데 호지하고 능파녀석은 왜 남의 속옷 같고.
운의 연필이 선을 그리고 마지막이라는 듯이 점을 하나 찍었다.
"패닉이 진정된 후에.. 니네 누님께 놀라가자꼬 말하니 휘잉~ 하고 데려다 주셨데이."
"잠깐, 그냥 보쌈이잖아 그거!?"
"괜찮다. 내가 한 것도 아니잖노?"
"네가 사주했잖아!?"
이런 꽁트를 벌이고 있자니 뒤에서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누님이 전형적인 낚싯꾼의 복장으로 걸어왔다. 무언가 잡다한 것이 많이 들어갈 것 같은 주머니에 여러가지 물고기 형상의 미끼가 달려있다.
"뭐, 항상 어깨에 힘주고 있는 것도 힘든 일이니까. 좀 빼두려므나."
"...그냥 놀고 싶을 뿐이잖아요, 누님은."
"그것도 그렇지."
화내는 기색도 없이 호탕하게 웃어재끼던 누님은 낚싯대를 어깨에 걸치고 물가로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짓고 있자니 어느샌가 내 팔에 감겨온 능파가 목 까지 이동해왔다.
평소라면 인간의 모습일텐데 어지간히도 심심했던 모양이었다. 아마 물가의 놀이가 능파의 손에는 맞지 않는 것이리라.
그 순간, 내 뇌리를 스쳐지나가는 하나의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호수에 우리밖에 손님이 없을 것 같지는 않은데 괜찮으려나."
여기에 온 인원은 상당히 많았다. 운 녀석이 도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굉장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양이었다.
우리일가(나, 호지, 요연, 챠이, 유다, 누님, 능파. 그리고 기타 마수들)들은 총출동. 슈도 물론 같이 왔다.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한 운은 당연한 이치고 어째선지 영왕 일파인 유운과 소화, 성녀 일파의 소누와 우까지. 게다가 중장년팀이라고 할 수 있는 컬러나이츠와 소유.
이정도 숫자면 거의 전원(부상중인 운천아저씨가 빠졌으니)이다. 운의 포섭능력이 놀라울 정도의 수준이다.
뭐, 운의 능력이야 그렇다치더라도 이만한 숫자가 호수를 점령하는데 사람의 간섭이 없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매스컴에서도 상당히 이슈가 될지도 모른다.
'우리들(어떤 말로 우릴 치장할지 모르겠다)이 왔다 간 곳'..이라고.
"할아버지."
"음, 왜?"
"괜찮아요, 저거?"
꼬리를 뻗으며 한 구석을 가리킨다. 물가 근처에서 붉은 코트의 챠이가 낙싯대로 운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은 일견 연인에 비유할 수 있을정도. 감정표현이 서툰 챠이가 저만큼이나 웃을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근래에 운과 챠이의 만남이 잦아졌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저정도까지 발전했을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용의 모습이 된 능파의 머리에서 짜증이 빛난다.
"어라, 설마 질투?"
"미쳤군요 할아버지."
농담으로 한 말인데 이렇게 폭언이 날아올 줄은 몰랐기에 충격받았다. 능파는 그런 것을 신경 쓰지도 않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챠이의 충의는 진짜지만 망집(亡執)이기도 해요. 그녀의 존재는 망집을 풀어낸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운에게도 나쁘고 계획이 틀어질 가능성이 있다. 능파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리라. 그것은 나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이미 이전부터 생각해 온 바다. 생각을 그만 두기로 결정한 것이다.
내 속 마음을 읽어낸 듯, 능파가 눈썹을 찌푸렸다.
"최후의 최후에 챠이가 망가질 가능성이 있어요. 무엇보다도 상심이 클 테죠. 그런데도요?"
"알아. 하지만 챠이는 텅 비어있어. 유다와는 다른 의미로 미쳐 있는 녀석이야. 차라리 유다쪽이 낫다고 볼 수 있어."
유다는 2000년이란 세월을 살아왔다. 챠이의 여섯배를 웃도는 그 세월은 한낱 인간의 정신을 피폐하게 하기에는 충분하다. 하지만 유다에게는 사랑하는 친우들이 살아있었던 추억이 존재해 잠시나마 도피할 수 있는 곳이 있었다. 허나 챠이는 달랐다.
그저 혼자서 자신에게 명령이 내려질 때까지, 묵묵히. 300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을 인간과 격리된 상태로 살아갔다.
그저 나 하나를 만난다는 망집으로. 하지만 나와 만나고, 괴물에서 인간이 된 그는 점점 망집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설사 최후에 슬퍼하더라도 운과 함께 있는 시간이 거짓이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무엇보다...
"운이 진심이란 건 누님이 보증 했으니까 괜찮지."
"아, 그러세요? 우리 생각에 확답은 받으셨구요?"
"그렇지. 예상대로인 모양이더라고."
가벼운 계획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능파는 졸린건지 입으로 불을 잠시 뿜어내곤 목에 둘둘 감겨 잠이 들어버렸다. 진정으로 용이 맞는건지 색색 소리를 내며 잠든 능파의 모습은 귀여웠지만 용의 모습이라 따로 사심이 들지는 않았다.
한 때나마 스스로가 로리콘인지를 의심했던 나에게는 다행인 일. 능파를 목에 두르고 주변에서 뭘 하고 있는지 구경을 다니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몇 걸음 걷지 않아 석쇠에 무언가를 열심히 굽고 있는.....
군대가 보였다.
".....참 참신한 상황이구나 유운."
"아, 요 아니십니까. 바베큐를 하고 있었습니다만, 드실런지요?"
유운이 손짓하자 굉장히 육중해 보이는 철갑의 병사가 나무꼬치에 고기와 야채를 듬뿍 꽂아 건네주었다. 그것을 떨떠름한 얼굴로 받아들며 병사에게 애도의 눈빛을 보냈다. 병사는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했다.
아아, 이녀석도 사람을 무지막지 부려먹는 놈이구나, 하고 생각하며 그곳에서 부리나케 빠져나왔다.
'같은 왕이잖아. 막아봐?'
'내가 네 몸 속에 있었을 때 얼마나 도와줬는지 잊은거야?'
'갑옷입고 석쇠를 돌리면 얼마나 더운지 겪어볼테냐?'
여러가지 마음의 소리가 너무 가슴 아파서 더이상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그만큼 병사들은 애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자리를 황급히 피하자 이번에는 낚싯꾼들의 모임 터에 도착했다. 그곳에선 누님을 필두로 우와 소누가 낚시에 전념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명품만을 입는 부르주아의 표본인 우와 소누이지만 이렇게 보니까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다.
"어라, 동생 왔구나? 동생도 낚시 해볼래?"
누님이 평범한 몸짓으로 낚싯대를 내민다. 무심코 받아들려던 나의 손은 시야를 명멸하는 굉장한 빛에 밀려 뒤로 돌아가고 말았다.
낚싯대는 낚싯대다. 하지만 겨우 30cm의 자보다 좀 더 긴 형태의 검은 막대기로 길게 뻗어낼 수 있는 형태였다. TV에서 보던 낙싯대처럼 돌리는 손잡이도 없고 그냥 막대기에 실을 달아놓은 형태이지만 확실하게 그것이 낚싯대라는 느낌이 피부로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겉의 표면. 검정 일색, 정체 불명 제질에다가 겉에는 무언가 기묘한 동양화가 음각되어 있다.
낚싯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장식적인 물건. 낚시 같은 일에 쓰기에는 너무한 일이다.
"동생이니까 쓸데는 많겠지? 전투병기로도 쓸만할지 몰라. 전에는 이걸로 건물을 넘어뜨린 적도 있었으니까."
"....누님이 괴물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거야? 뭐, 내구도는 칭찬해줄만할지도."
일반적인 물건이라면 누님의 악력을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설사 비범한 것이라도 마찬가지다.
만지는 것 자체가 황송한 낚싯대를 받아들고 허리춤의 작은 가방에 집어넣었다.
"어라, 낚시 안할거야?"
우의 물음,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흥미가 없어서. 잠시 다른 사람들이 뭐하는지나 돌아보고 올께."
그렇게 손을 흔들며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
특별편 상편입니다. 여러모로 재밌는 편이 되었길 빌겠습니다.
근데.... 역시 주인공은 좀 용자여야 좋은 겁니까. 개인적으로도 마음에 들긴 하지만 서도.
아아, 스네이크 쓸 때가 고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