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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
뭔가 분위기가 이상해서 다가갔더니 배신자 취급을 하는 이 상황에 능파는 잠시 자신의 행동이 그리 의심스러웠나 돌이켜보았다. 하지만 그런 껀덕지는 전혀 없었다. 아니,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럴 확률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보증이 있다.
이 자리의 어느 누구도 배신자는 아니었다. 사심을 품고 있는 자 또한 없었다. 목숨을 걸어도 좋다
.
"그래서요? 증거는 있나요?"
하지만, 그 이유를 바로 내놓기에는 자신도 살짝 열이 솟은 상황. 이대로 물러나주기에는 능파의 본성은 그리 곱지 못 했다.
진짜 피를 이은 어머니는 아니지만 어머니다? 미안하게도 능파의 마음은 암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시커멓고 음흉하기 짝이 없다. 할아버지의 흉내를 내는건 아니지만 할아버지라도 죽이지 않는 선에서는 마음 껏 팰 수 있다.
호지의 반응에 따라 행동을 고르려는 능파의 면전에 호지의 말이 더듬더듬 쏟아졌다.
"그, 증거는 없지만! 하지만 능파인걸!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모르잖아?"
"아, 그건 동감입니다."
"요연. 지금 당장 있는 말 없는 말 퍼뜨려서 엉덩이 가벼운 여자로 만들어줄까요?"
이래뵈도 능파는 둘의 싸움을 말리려더가 끼어들게 된 것이다. 둘이서 싸우면 누가 이길까하고 속으로 계산하고 있을정도로 속이 시커먼 능파에게는 엄청난 선심. 그런데 기껏 도와줬더니 저딴 대답이라니.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더욱 골려줄 필요가 있겠다.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요연의 안색은 시퍼렇게 변해서 시체나 다름 없었다. 말이 심했나, 싶어도 자신이 했다고 하면 다들 그러려니 할텐데 저런 반응은 이상했다.
능파가 이상한 점은 없다.
"죄,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제발 그것만은.... 순진한 처녀를 골로 보낼 생각이 아니라면 부디 자비를.... 저, 요애에게 미움받으면 살아갈 수가...."
급기야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자신은 도대체 요연에게 어떤 존재였던걸까, 능파는 진지하게 고심했다.
가끔은 착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 뭔가 내가 악의 축이라는 듯한 반응이네요."
"하, 하지만 능파는 입만 열면 20살의 풋풋한 처녀도 닳고 닳은 과부로 만들고 평범한 죽음도 성병으로 죽었다는 소문을 낸다고..."
"그럴리가 없잖아요!? 애초에 그런 적도 없는데...!"
요연이 무슨 이상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지 능파는 새차게 추궁했다. 요연은 능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열심히 빌다가 능파가 겨우겨우 동의해주자 그 말도 안되는 소문의 근원지를 알 수 있었다.
"그, 금와가 그랬습니다. 엿들은 거지만서도....게다가 마수들 사이에선 정설인지라."
"오호라?"
금와. 호지와 능파의 허락(절대로 요의 허락은 들어가 있지 않다)으로 집에 머무는 마수 중 하나다. 장난끼가 많은 소년과 같은 마수로 신성시 되는 존재치고는 장난이 심해서 고지식한 모색심명에게 맡겨두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했다니. 상상도 못 했다. 게다가 그런 말도 안되는 소문이 거주하는 마수들에게 정설이 되어있다는 것도 열이 뻗친다.
'방주에서 조금 교육이 필요할지도.'
그날은 하루를 꼬박 세우는 한이 있더라도 '무서움'이란 단어를 뼈에 새겨주기로 마음 먹었다.
뭐, 하지만 그건 그거고 지금은 당장에 해야 할 일이 있다.
"요연은 일단 제쳐두죠. 그래서 엄마? 제가 뭘 어쨌다구요?"
아까의 협박 아닌 협박 탓일까, 호지의 반응이 주춤한다. 요를 향한 마음이 진심이기에 능파가 걸고 넘어진 협박은 호지로서도 웃어넘길 수 없는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능파 본인이 부정했다지만 쉽사리 믿기지도 않을 터.
날카롭기 그지 없는 능파의 눈빛을 힐끔거리면서 호지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느, 능파는.. 아빠랑 같이 있는 시간도 길고, 정보를 뺄 수 있는 시간도 긴 걸! 전에는 케이슨에게 조종당했던 적도 있고... 그게,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맹렬해지는 능파의 눈빛에 호지는 결국 입을 다물고 훌쩍 거렸다. 더이상 말을 꺼냈다가는 살해당할 것 같았다. 실재로 능파는 어이가 날아가버려서 어떻게 하면 저 주둥이가 막힐지 고민하는 중이다.
조금씩이지만 호지의 생각에 근접하고 있었다.
'아, 그러고보니 이제 엄마 마음 신경 쓸 것도 없네요.'
생각해보면 친엄마도 아니다. 게다가 그나마 부모자식간의 연을 이어놓던 자궁의 마음조차 잃어버린지 오래. 패버린다고 해도 패륜은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예의상, 그리고 익숙한 호칭으로 계속 엄마라 불렀지만 지금 당장이라도 호지라고 부를 수도 있다.
한번 그렇게 해보았다.
"고호지. 지금 말 다 했어요?"
쿵, 하는 소리가 호지의 귓전을 내려친 듯, 호지의 시야가 흔들렸다. 충격으로 떨리는 눈동자가 조금씩 눈물을 흘려보냈다. 끽해야 화를 내며 분개할 것이라고 생각한 능파로서는 당황할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지도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당황하기는 했지만 정도가 그리 심하지는 않은 수준이라 빠른 대응이 가능했다.
무엇보다도 무슨 생각인지도 짐작이 갔다.
"그런다고 대화의 주도권 같은 건 안 뺏기거든요?"
"....칫."
"자, 장난이었습니까!?"
눈치를 못챘던 것 같은 요연을 옆으로 밀어낸 능파는 일단 천천히 자신이 배신자가 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전 확실히 엄마 말대로 할아버지랑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요. 하지만 그만큼 정체를 들킬 가능성도 높죠. 아무리 의심해도 그건 부정할 수 없을걸요. 알잖아요? 할아버지의 지력수준이 어느정도인지를."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진실에 호지는 뒷걸음질 쳤다.
확실히 요는 머리가 좋다. 비상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가까이에서 정보를 빼가고 있는데 모른다? 말이 되지 않는다. 일부러 방관하지 않는 경우에야 그럴 일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요는 분명히 말했다.
능파는 어떤 면에서는 자신보다 몇배는 낫다고. 가능성만 따지자면 굉장히 높지 않은가? 더불어 전적도 있다.
"아빠가 능파는 어떤 면에서는 잘났다고 했어!"
"어떤 면이요?"
"그건..... 뭘까?"
우물거리는 호지. 알리가 없으니 대답을 못 하는 것도 당연하다. 마침 타이밍 좋게 입을 다문 참이라 능파는 반격을 시작했다.
"그러면 엄마도 배신자일 가능성은 농후한데요."
"뭐, 뭐어어!?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마! 내가 슈도 아니고 어째서 아빠를 배반해야 하는데? 헛소리하면 날려버릴 줄 알아!"
자신의 말을 당장이라도 증명할 것처럼 마력을 줄기줄기 뻗어올린다. 피부위로 넘실거리는 태양빛 오오라가 영역을 넓혀가면서 차츰 능파의 몸을 뒤덮었다. 감정 조절이 나쁜 호지라 그런지 오오라에서 살의가 확연히 드러났다.
능파는 이 기운에도 전혀 눌리지 않고 논리적으로 말 보따리를 풀었다.
"지금 껏 엄마의 외유는 총 두번. 이유는 할아버지의 영약 수집이었죠. 안 그런가요?"
"그, 그런데?"
"하지만 그 때 카타스트로피와 접촉했다면 어떨까요? 가능성은 높죠."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 확신'을 얻기 전까지는 능파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가설이었다. 유다가 오기 전까지는 호지가 슈보다도 위험도 랭크가 높았다.
영약 수집이라는 핑계는 좋다. 듣자하니 요에 대한 정보를 이미 가지고 있었던 적, 막 태어난 호지라 하더라도 가능성은 있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발견한 것이 가장 수상하다. 힘들 것 같으니 백업으로 데려가겠다, 그런 대화가 오가서 자신을 양도 받았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런 말이 능파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호지가 벽을 쳤다. 분노가 실린 주먹 모양이 철제 벽에서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럴리가 없잖아! 난 순수하게..!"
"증거는 어딨는데요!"
"뭐가 어째!?"
대화가 조금 길어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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턱.
호지의 어깨를 잡았다. 한참 열을 올리던 차였는지 얼굴이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나라는 존재를 보았음에도 그 얼굴은 한참이나 지속되었다.
나라는 존재의 가치는 이렇게 줄어든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니 서글퍼졌다.
"아, 아빠!"
폭, 하고 내 허리춤에 얼굴을 묻고 도리질쳤다. 그야말로 아이다운 행동에 나는 난처하게 웃으면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상냥한 반응을 보여준 탓일까, 호지가 고개를 들어 날 보더니 손가락으로 능파를 가리켰다. 능파가 인상을 찌푸리자 손 끝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순수하게 그저 웃겼다. 호지의 지금 행동은 나이대를 생각해보면 지극히 옳은 일이다.... 만, 공적으로보면 분명히 호지 잘못인데.
먼저 시비를 건 것도 호지요, 일을 키운 것도 호지다. 도저히 지지해줄 껀덕지가 없다.
"느, 능파가...!"
"절대로 그럴 일은 없단다."
먼저 선수를 쳤다. 저렇게 눈망울에 습기를 머금고 말하면 눈 딱 감고 호지를 지지해주는 수 밖에 없다.
호지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누님이 보증했으니까."
"아."
나의 누님. 불패의 보증이다. 이견 따위 있을리도 없고 있더라도 가볍게 뭉개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누님도 바보는 아니었다. 오히려 천재의 정점에 속한 분이다. 아군 내에서 위험인자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고 자신의 손으로 들키지 않게 직접 확인해 보았다. 그리고 판단을 내렸다.
전무. 운을 제외하면 단 한명도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누님이 그렇게 말했다.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내 마음속을 완벽히 파혜쳐놓기도 했었고.
만약에 불패를 적으로 치부한다면 별 수 없겠지만 그랬다간 승부고 뭐고 간에 이미 끝장이 났을 것이다. 호지도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우, 우우..."
누님을 들먹이자 말이 더이상 나오지 않는 것일까, 호지가 입을 열었다.
"아, 아빠! 몸은 괜찮아?"
"응. 물론이지. 이제 괜찮단다 나의 딸."
할 말이 없으니까 말을 돌리는 것은 요연이 봐도 알정도였지만 나는 별 무리 없이 수긍하고 지나갔다.
"그런 일보다는 빨리 채비를 갖추는 것이 좋아."
숨이 탁 트이는 것을 느꼈다. 지금 껏 독방에 갇혀있던 탓에 호흡도 조금이지만 힘들다. 재활훈련 같은 것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도착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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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에 도착했습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방어편이 시작되는 군요.
슬프기 짝이 없습니다. 비축분이 줄어가는 것을 느낍니다.
요즘 슬럼프라서요. 성격이 전혀 다른 두 작품을 동시에 쓰다보니 저 스스로도 햇갈릴 정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