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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
사실, 지금 내가 입에 올린 '패'는 내 패가 아니다. 실재로는 유운의 패로, 뒤통수를 먹이기 위해 남겨둔 패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가 없으니 별 수 없겠지. 지금은 내 재량으로 움직여야 한다.
허나, 그걸로 숫자가 될까? 외부에서 들여온 인원들은 아무리 많이 잡아도 백 내외가 될 것이다. 리바이어던이 방주에 있는 걸 봐서는 숭례문도 모두 모였을테니 합쳐서 약 300명. 내가 준비해둘 술식과 합치면 방어선을 짜는 것은 되겠지만 겨우 그것이 한계다. 레플리카 군대들을 상대하면 길게 버텨봐야 4에서 5분정도.
동방삭을 포기한다면 모를까 이 상태로는 제대로 된 승부가 불가능하다.
타박타박타박타박.
빠른 템포로 울리는 발자국 소리. 두명이다. 발소리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을 보면 남자와 여자의 페어.
"우릴 빼놓고 너무하는걸."
"후후훗, 오셨네요."
우와 소누가 우리가 앉아 있는 원탁에서 빈자리를 하나씩 골라 앉았다. 빈자리가 몇개 메꿔지자 왠지 허전했던 가슴이 풀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우가 길어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흉터로 가득한 얼굴이, 없다. 흉터는 커녕 잡티 하나 찾아볼 수 없다. 매끈하게 빠진 피부는 언제 흉터가 있었냐고 묻는 것 같다.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않았다.
미남. 흉터만 없다면 잘생긴 녀석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상상이상이었다.
"피부가 깨끗해졌는걸?"
"응. 이곳의 메디컬 룸에 연못 같은 곳이 있는데 실수로 빠지니까 모조리 사라지더라구."
"방주의 힘은 놀랍고도 신비롭구나~."
그야말로 환골탈태수준이었다. 저정도면 내 팔도 다시 원상복구 시켜놓는 것도 크게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시야를 내려 팔을 보았다. 소매가 나부끼는 모습은 스스로가 유운이라고 착각될정도로 내 모습은 그와 흡사했다. 이 이상 나 자신의 캐릭터성을 훼손할 수는 없다....랄까, 나에게 캐릭터성이 졸라 쳐맞는 인간 외에는 있기나 할까.
자신의 존재를 돌이켜보고 절망하는 나. 우가 고개를 갸웃하지만 평소에 볼 수 있는 헛짓거리라는 것을 아는 듯, 흥미를 죽였다.
소누가 손끝을 탁자에 튕겼다.
따닥.
"그런데, 무슨 대화를 하고 있던 거죠?"
"간단히 말해서, 이곳이 습격받는데. 그래서 아빠는 대책을 세우려고 고민하고 있어. 훌쩍."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하는만큼 자신에 대한 죄악감도 큰 법. 호지는 그것을 느끼는 듯 훌쩍거렸다. 바로 옆자리인 터라 품 안으로 끌어들여 토닥여주었다. 참고 있던 울음소리가 사그라들고 우힛, 우힛하는 괴상망측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뭔가 웅얼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뜻을 이해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무슨 말을 했는지는 짐작이 갔다. 다름 아닌 내 딸이고, 상황도 주어졌다.
계획대로, 일테지.
"아하. 그런건가요?"
내가 호지를 어떻게든 달래는 동안 능파에게 모든 내용을 하달받은건지 소누가 말한다. 귀여운 얼굴이지만, 왠지 독사같은 느낌이 들었다.
"숫자를 채운다...는 거라면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요."
"방법이 있어!?"
지금까지 나락의 구렁텅이에 몸이 던져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답이 잡힐 듯 잡히지 않아 마치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느낌. 그런 느낌이었는데 소누의 등장으로 답이 나온다고 하니,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이곳에는 무인경비 시스템이 하나 있어요. 그걸 이용하면 약 오천명 수준의 병력은 채울 수 있을거에요."
"오오. 하지만 가동이 완전히 이루어지지도 않았는데 되겠어?"
그렇게 묻기는 했지만, 실재로 의심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그냥 반사적으로 몸이 물어본 것에 불과했다.
방주는 유운이 가동중이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가동된 것이 아니라서 그런 장치가 움직일지조차 의심스럽다. 하지만, 방주철도인 아크레일은 움직이고 있었다. 아마 가능할 것이다.
"예. 그건 방주의 가동 유무와 상관없이 따로 움직이는 모양이더라구요."
"그래? 그거 다행인데. 하지만, 그거 어떤 형태야? 그냥 함포처럼 쏴대는 형식? 아니면 지뢰?"
무기의 형태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방주의 형태는 정확한 원으로 전방향으로 습격해올 수 있었다. 어떠한 방향으로도 공격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 모든 방향을 수비할 수 있는 형태의 무기가 필요하다.
만일 함포처럼 고정형 병기라면 곤란하다. 만일 상대방이 선로를 틀기만 해도 쉽게 피할 수 있고 그것의 보조를 맞추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뢰라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여차하면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전술적 가치는 적다.
소누는 사과의 싱그러움이 느껴지는 얼굴로 말했다.
"음~ 뭐라 설명해야 되나요? 간단히 말해서 약 5천개의 무인기동병기에요. 인형에게 갑옷을 씌운 것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여러가지 무기를 가지고 있더라구요. 그런데 다루는 게 상당히 어려워서 나나 오빠도 그만 뒀죠."
우나 소누가 못난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재능이 넘치고, 그렇기에 국가를 덮는 광역마법을 펼쳤다(아무리 국가급 영맥의 백업이 있었다지만). 그런 둘이 사용하지 못 한다는 건 힘의 문제가 아닌, 상성의 문제.
예컨대 요연이 들고 있는 사신검과 같은 주인을 가리는 물건이란 소리다. 그런건 대개 강력하지만 성가신 것이 많은데.
머리를 긁었다. 비듬이 털리는 것이 아닐까 싶은 기세로 긁어버렸다.
"아아. 귀찮은 것이 떴잖아."
"그러면 제가 해보죠. 제 무력은 의외로 보잘 것 없으니까."
"능파가..? 흐음. 솔직히... 내키지 않는걸."
능파는 내가 나 나름의 운명을 부여해주었다. 내게 무슨 일이 생길 경우 이대째의 육왕이 되는 것이 바로 그거다. 그런데 능파가 전선에 선다는 것은 그 운명에 차질을 빚게 된다는 것.
능파 스스로가 결정한 일이니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지라 입을 다물었다. 능파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보려는 것처럼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눈을 통해 마음의 깊은 곳, 심연과도 같은 어둠속에 파고드는 것만 같다. 두려움이 느껴질 정도의 감각이 전신으로 퍼진다.
뭐랄까, 능파다운 눈이다.
"얕보지 말아요. 그리고, 할아버지 생각대로 할 생각 없으니 그리 알구요."
"그래도 말이지, 보험이잖아?"
"보험설계사에게 용생을 맡길 수는 없잖아요?"
"내가 보험설계사냐. 뭐, 그건 또 별 수 없는 일이지."
그렇게 오늘 하루가 접어들면서 계획의 밀도가 깊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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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저 수천미터의 어느 공간.
으리으리하게 지어진 곳에 살아남은 팔대간부가 침을 삼킨다. 돈의 일부를 빼서 비밀기지를 건조한다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멋진 곳일 줄은 상상도 못한 것이다.
게다가 이 심도. 보통 이만한 수준의 해저라면 뭐가 되더라도 망가질텐데 이곳은 끄떡도 없다. 아마 지금 깊이의 두배는 더 들어갈 것 같다.
"어떠십니까? 동방삭과 베헤모스 외에는 온 적 없는 공간입니다만."
"어어, 노, 놀랐어. 설마 이런 곳이 있을줄은."
항상 호들갑 떨기를 좋아하는 분위기 메이커인 그라드가 말을 더듬었다. 그만큼 이곳의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진중하기에 간부들 사이에서 항상 중재자의 역할을 맡아왔던 아수라왕조차도 신음성을 내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라고 어떠할까.
그 팔대간부를 수호하며 이곳으로 인도한 동방삭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바닥에 내려섰다. 남에게 보이지 않을정도로 얇게 바닥에 뜬 그는 손가락을 튕겼다.
쿠릉, 쿠르릉!
바닥을 구성하던 돌이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갈라지며 솟아오르더니 의자의 형태를 취했다. 동방삭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곳에 앉으라는 말임을 모르는 간부들이 아니었다.
모두가 자리에 앉자 케이슨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 카타스트로피의 최종병기 '무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만,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먼저 작전 설명을 하겠습니다."
"작전~~? 잠깐만 케이슨. 지금 우리는 본단도 작살나고, 지부도 거의 다 박살난 실정이라며? 싸우기도 전에 이꼴인데 작전이 무슨 소리야?"
힘을 비축해서 승산이 보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지금 부딫치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진배없다.
그것을 모사격인 케이슨이 모르지는 않을 터. 모두의 시선이 케이슨에게 집중되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만,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힘을 비축해두는 것도 좋겠지만 지금 것으로 상대방의 행동은 확실해졌습니다."
"상대방의 행동...?"
"예. 저들은 이제 공격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아마 저들이 태세를 갖춘다면 일격에 몰아붙이려 하겠죠. 잃어버린 힘의 반도 되찾지 못 할게 뻔한 우리는 질겁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아니지만, 이해되지 않는 것은 여전하다.
아수라왕의 붉은 손이 돌로 된 좌석에 붉은 화인(火印)을 남겼다.
"틀린 말은 아니나 그렇다고 공격해서 시간을 벌 수도 없다."
"아니오. 삭과 레플리카 군대라면 어떻게든 됩니다."
"유다 때와... 같은 조건인가. 허나, 상대측에게 같은 방법이 통할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 육왕이 있는 곳이다."
육왕. 어리고 마법단련 경력이 겨우 일년 밖에 되지 않는다고 얕보았다. 하지만 지금 그랬기 때문에 여기까지 밀렸다. 유다전이 끝나고서도 압도하고 있던 것이 분명한데도, 순식간에 전세를 뒤집어놓았다.
그것이 육왕이다. 지략의 대가다.
케이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점에 대해서는 인정한다는 모습이다.
"확실히 틀리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유다 때와는 달리 추가 병력이 있습니다. 동방삭과 레플리카들이 일파로, 먼저 공격. 동방삭이라면 상대방의 주축을 묶어놓고 레플리카의 숫자로 중심까지 몰고 들어가면 시간을 버는 것은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쪽의 대응 또한 있을테니, 제 이파를 보낼겁니다."
이파. 두번째 부대가 있다는 소리다. 하지만 일파로 시간을 벌어놓는다고 해도 상대방은 최대한 빨리 처리하려 할테니 길어봤자 하루일 터.
케이슨이 이파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예... 이파, '불사'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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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