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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드
챙! 챙!
연달아 터지는 쇳소리. 혈심수가 타들어가는 것처럼 연기를 내뿜고 그라드의 얼굴이 고통으로 얼룩진다. 튕겨나가는 혈심수가 굉장한 소리를 울린다. 귀를 송곳으로 파내는 것만 같은 소리에 얼굴이 구겨졌다.
파팍.
혈심수를 튕겨낸 청동빛의 흔적. 두개의 검이 땅바닥에 꽂힌다. 혈심수라는 괴력의 신기(神技)를 날려버린 물건답지 않게 무력한 빛을 흘리고 있었다.
있을 수 없다, 내가 그것을 봤을 때 느낀 감정이다. 저런 허름한 칼로는 절대로 혈심수를 막아낼 수 없다. 아니, 타격까지 낼 수는 없다. 맞상대해본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이걸로 끝이다?"
그라드가 내뱉은 말을 따라하지만, 그것은 완곡한 부정.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긴 말이었다. 게다가 익숙한 목소리, 굉장히 신뢰감이 가는 음성이었다.
하늘에서 천천히 걸어내려오는 백색의 머리카락. 바람에 나부끼며 마치 커튼과도 같은 효과를 연출했다. 머리카락이 단정하게 가라앉고, 능파의 모습이 보인다. 아침에 보았던 간소한 잠옷차림과는 영 딴판의 복장이었다.
옛날에 동양권에서 사용된 전포. 그 위로 가슴을 덮도록 만들어진 철제 판금갑옷이 능파가 입고 있는 차림이었다. 뒤에서 명령만 내리는 능파의 스타일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옷차림이, 바로 그곳에 있다.
나와 그라드의 사이로 내려앉는 능파의 손가락이 그라드을 향한다.
"그 말에 이의를 제기하죠. 끝이라니, 이제부터 시작인걸요."
"아니 아니, 능파앗! 어째서 갑자기 등장한거야?"
어느 나라의 변호사나 할법한 대사를 날리는 것이 확실히 능파다. 순간 어이를 상실했기 때문에 태클을 걸듯이 반문하고 말았다.
능파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고요하게 정지된 눈동자는 필살의 분노를 품고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가지 말라는 소리를 무시하고 달려나간 할아버지 잘못이에요. 대답이 없기는 했어도 설마하니 팔대간부랑 맞짱을 뜨러갔다고는 상상도 못 했다구요."
하긴,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이렇게 승산이 희박한 싸움에 몸을 던질 것이라고는 누구라도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상상하더라도 뭔가 꼼수를 부렸다, 그렇게 생각할 것이 틀림없다. 능파도 크게 틀리지는 않았겠지.
왠지 미안해 하고 있자니 그라드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철골조차 씹어먹을 것 같은 하얀 이빨이 마찰하면서 듣기 싫은 소리를 낸다.
"꺼져라 꼬마! 이 승부는 일 대 일, 정정당당한 맞대결이다."
"정정당당?"
그렇게 되묻는 능파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비틀어질대로 비틀어져 올라가는 그것은 분명한 비웃음. 그라드의 말을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는 의지가 묻어나왔다. 그라드의 반응이 조금 주춤하면서 능파의 기세가 강맹해졌다.
이해할 수 없었다. 그라드가 밀릴 이유 따위는 없다. 만일 밀린다면, 그것은 능파의 말이 진실이 아니면 안된다. 하지만 어디가 정정당당하지 않다는 거지?
그라드는 지원군을 부른 적이 없다. 자신만의 능력을 사용했고, 치사하게 지뢰를 깔아놓는 짓은 하지 않았다.
"바보 할아버지. 손을 봐요."
나의 사념에 끼어드는 말은 내 정신을 각성시키기에 적절했다. 왜 이제 껏 그것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 했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능파에게 바보라고 매도 당해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혈심수. 병기이기는 하나 그것 자체는 비술로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라드의 종족인 라이칸스로프들은 이만한 병기를 만들 비술이 '없다'. 설혹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육신의 변이'에 한정해야만 했다. 라이칸스로프, 그들의 특기는 분명히 '육체변이'. 피를 다루는 일은 뱀파이어의 관할이다.
살아가는 분야 자체가 다르다.
그런데도 그라드는 쓸 수 있었다. 마치 사용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그렇다면 이유는 단 하나.
그라드는 뱀파이어 기레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
"트윈홀..... 인가."
그라드는 결코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 자체가 훌륭한 대답, 더이상 추궁할 필요조차 없다.
그라드는 동료였던 기레를 '먹었다'.
"이 수 밖에 없었지, 이곳에 서기 위해서는."
그렇게 말하는 그라드의 얼굴은 세속의 괴로움으로 찌들어 있었다. 만사가 그에게 고통을 주지 못할 것 같았는데도, 그라드 또한 자신만의 고민을 가지고 있었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기레 또한, 이 자리에 설 수 없었어. 사막에서 너를 상대 했을 때, 나와 기레가 가진 힘의 대부분은 정화되어 사라졌으니까. 약 7할이 말이야."
"광진 육식의 힘은, 확실하게 발동하고 있었던건가."
대답을 하지 않는다. 하늘을 쳐다보는 그라드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있었다. 차마 보기 힘들정도로 그의 얼굴은 고통으로 가득했다.
"동료를 잃고, 힘을 잃었다. 그것을 눈치챈 그들이 뿜어대는 압박도 있었다. 괴로웠지. 하지만, 견뎌냈다. 너희가 런던에 올 때쯤에는 5할까지 회복했다만... 그게 한계였지. 더이상 올리는 건 불가능했어. 그래도 크게 슬프지는 않았다. 그래, 육왕. 네가 런던에 오기 전까지는 말이야."
"내가... 런던에 오기전?"
"정확하게는 네가 잡히기 전이지."
내가 잡히기 전. 간단한 말의 키워드로 기억해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잡힌 뒤의 일을 말함이다. 그라드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중요한 일임에는 틀림없다.
아마도, 케이슨의 정체. 황룡 구소인 그의 정체를 알았다는 것이 카타스트로피의 일원들에게 퍼진다면 어떻게 될까? 파탄이 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겠지만 그것은 천만에 말씀이다. 오히려 굳건해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 전부가 모여 있을 때 말하지 않았다. 적을 강하게 하는 미련한 짓은 이쪽으로서는 사양이다.
구소가 전선에 섰을 때는 카타스트로피에게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고 귀동냥으로 들었다. 그는 그만한 무력을 당시에 가지고 있었고, 실행했다. 이유야 어쨌건 간에 수천이 넘어가는 사상자가 나왔고 덕분에 그만한 악의 또한 가지고 있었다. 그런 원수가 알고보니 자신들의 지주였다는 것을 알면 폭동이 일어날 것이다.
일반적이라면. 하지만 팔대간부의 몇몇은 전부 케이슨의 수하. 어쩌면 황룡 시절 때부터 알던 마수들이다.
프리아가와 옴팔로스. 어쩌면 아수라왕과 베헤모스, 죽어버린 유해의 뱀까지. 절반이 넘는 인원이 배신자의 동료. 정보가 퍼질 이유가 없고 퍼지더라도 순식간에 공공연한 거짓말로 만들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분개..했다. 그렇게 화가 났던 건 내 생애 처음에 있던 일이었어. 동료들이 죽었던 것도, 부하들이 탈영했던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전쟁 중에 죽을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런 전투가 두렵다면 도망칠 수도 있었다. 솔직히... 당시에 내가 도망치지 않았던 것도 기적에 가까웠으니까. 허나... 케이슨만은 용서할 수 없었다. 그 놈은 우릴 기만했다. 동료가 배신했던 적은 있었지만, 그건 신념이 있었고 다른 길을 가겠다고 공고했었다. 웅대한 기상을 느낄 수 있었지. 결국 내 손으로 죽이기는 했어도 괜찮았다."
친우와 서로 어긋났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향이 나와는 딴판. 내가 가는 왕도(王道)와는 정반대의 길이었다. 허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라드의 왕도는 그러한 왕도. 나와는 반대의 왕도이지만 그에게 가장 걸맞는 왕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라드의 주먹이, 혈심수로 덮혀진 손이 대기를 찌부러뜨린다. 거칠게 요동치는 공기의 흔들림, 펑하고 풍선터지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케이슨은 달라! 우릴 이용하고, 기만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케이슨을 돕죠? 그럴 이유는 없을텐데."
능파의 간섭, 그라드의 분노가 한순간 사그라들었다. 그 분노의 심지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잠시 불꽃이 다른 곳을 향한 것뿐.
일그러전 감정의 발로가 그라드의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글쎄.... 화는 났지만, 그마저도 이해할 수 있다고 판단해버린 자신에게 벌을 주기 위해서.. 였다면 이해를 할까."
"....물론."
고민의 여지따위는 없다. 그러한 생각을 나 또한 해보았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었다.
챠이가 죽었다고 나의 뇌가 인식했을 때, 그 때 내가 처음으로 한 생각은 챠이에 대한 애도가 아니었다. 그의 죽음을 부정한 것 또한 아니다. 죽었다는 것을 확실히 인지하고, 그 뒤에 한 생각은 잔인했다.
이 상황을 타개할 계책. 지략가라면 지략가 다운 생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된다. 날 위해 일해주었던 챠이가 죽었는데 나라는 인간은 자기 앞가림도 급급하다니.
챠이가 비웃을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나도 본디 이곳에 있어야 할 남자다. 너희에게 줄 선물은 준비해두었다."
인간들을 먹이로 번식하기에 이곳에 있어야 했던 그라드가 그렇게 말하며 덧붙인다.
"나와 기레의 똘마니들이지. 아마 지금쯤이면 레플리카들을 섬멸하고 있을거다."
"그거 참. 적절하군."
숫자가 압도적으로 부족한 우리에게는 적절한 대응이다.
그라드의 발이 땅을 찬다. 스프링처럼 튀어오른 그가 나와 거리를 벌렸다. 길다면 긴 거리지만, 나나 그라드의 도약이라면 한발자국이면 충분한 거리다. 그라드의 혈심수가 기이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마치 유충이 번데기를 뚫고 나오는 것처럼 혈심수의 손톱이 길어진 것이다. 손톱이라기보다는 검에 어울리는 모습이 다섯개. 그 칼날에는 필살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하지마아안! 나 또한 남자고, 과거의 존재다. 미래로 나아가야 할 네놈에게 자격이 있는지 판단하겠다."
무력으로 넘어보아라.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능파가 내 옆에 서면서 바닥에 꽂힌 검을 뽑아들었다. 깨끗한 칼이지만, 어째선지 고풍스럽다는 느낌이 드는 검이었다.
"그쪽도 둘. 이쪽도 둘로 나서도 상관은 없겠죠?"
그라드의 웃음, 허락의 표시다. 쌍검을 치켜든 능파의 자세에서 정통파의 검세가 묻어나왔다. 무술을 익히고 있었던 것은 나뿐만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라드의 몸체가 날아들었다.
전투 개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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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끝난 기념입니다.
능파&주인공의 더블팀이군요. 다음편쯤에서 그라드와의 싸움이 끝날 것 같습니다.
경사로세~
드디어 동방삭과 유다전이 시작됩니다. 좋은 일입니다, 좋은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