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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편 스타트
불사라는 초월자가 사라졌기 때문일까,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기둥을 잃은 지붕은 대지에 곤두박질 치는 것이 당연한 이치 듯 내 몸도 바닥을 향해 허물어졌다.
터억.
뒤에서 누군가가 날 안는 것 같은 형태로 붙들었다. 다행히도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뒤에서 느껴지는 풍만한 그것(차마 생각을 할 수가 없다. 그랬다간.... 이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이 등에 닿아서 감각이 절로 곤두서는 것이 느껴졌다. 특히 남성의 가장 강한 상징이자 크나 큰 약점인 세번쨰 다리가.
"자, 쓰러지면 안돼. 동생."
누님이었다. 등 뒤에 닿는 감각이 묘하게 크나고 생각은 했지만 요연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어째 솟아오른 세번째 다리와 성욕이 금방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못된 망상을 한 몸(뇌는 절대로 하지 않았다)에 대한 것은 일단 제쳐두고 누님이 한 말의 진의를 묻기로 마음 먹었다.
남자라면 강할 수록 좋지, 라며 여러가지로 단련시켰던 눈님이기는 했지만 동생사랑이 가득한 누님이라 금세 치료해주고는 했다. 겨우 감기나 열에도 그런 누님인데 몸이 잔뜩 망가져 있는 나에게 그런 소릴 할리가 없다. 아니, 지금 당장 하고 있으니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누님이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그럴리도 없으니 분명히 날 위한 것인데, 이곳에서 내가 쓰러지지 말아야 할 이유 따위는 없다.
여기서 내 능력의 반발이 강력한 것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와 교류가 거의 없는 리토도 일본에서 신과 싸우느라 반동에 입원한 것까지 알고 있으니 그 또한 알 터. 소요라는 녀석이 조금 걸리기는 하지만 그가 그런 것을 신경 쓸 것 같지도 않다.
...무엇보다 누님이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냥 심부름꾼으로 부려먹는 것 같으니까.
이럴 때는 고민보다는 직접 물어보는 것이 좋다. 누님이니 내가 한 질문은 제대로 대답해줄테지.
"어째서?"
누님은 말 없이 위를 가리켰다. 턱을 세워 하늘을 보자 두두두두 하는 기계음을 계속 내고 있는... 헬리콥터가 존재하고 있었다.
좀 더 부가설명을 하자면 인간 두명이 있는데 한 사람은 카메라로 찍고 있고 한쪽은 마이크를 들고 무언가 열심히 상황중계를 하고 있었다.
"....이런 신발."
"착한 우리 동생은 저런 거 신경 안 쓰겠지만 내가 신경 쓰이잖아. 내가 만일 동생의 악평을 들으면 뭔 짓을 할지 모른다고."
난 너무 잘 알 것 같았다.
만약에 누님이 내 악평을 들었다 가정해보자. 우선 그 놈(혹은 년)을 붙잡는다. 그리고 일단 될 수 있는데로 인생의 쓴맛을 보여주고 발가벗겨서 청와대에 있는 태극기에 얹어둔 다음 불로 태워버릴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예로, 어쩌면 상상도 못할 강력한 제재를 가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나의 누님, 고소야다.
나를 생각하는 마음만이라면 호지들에게 절대로 지지 않는 나의, 동생인지 누님인지 헷갈리는 가족이었다.
뭐, 그건 그렇다치고.
"저게 여기에 왜 있지?"
아무리 세계의 상황이 이꼴이라지만 법은 있다. 멋대로 헬기까지 띄울만한 힘이 우리나라에 있을까? 유운정도라면 전세계에 인연이 있는 모양이니.....
유운놈이 허락한 건가. 확실히 그거라면 가능성은 차고도 넘친다. 인맥만 따지자면 영왕은 육왕을 해도 될만큼 이승의 인연이 굉장히 넓으니까.
[멍청한 유운님 덕분이라는군요. 기왕 싸울 것, 역사적인 사건에 증거품을 남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면서.]
"역시나냐. 짜증나게스리."
푸욱,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행동에 대해서 세계가 어떻게 판단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일년이라는 시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나에게는 엄청나게 짧은 시간, 하지만 세계에서 저 카메라에 찍힌 방송을 보았다면 일년이라는 시간은 너무 길게 잡았다는 생각을 할 가능성이 매우 컸다.
그들이 전장이 아닌 액정 너머로 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말로 큰 이유는 바로 현재 보여주었던 숫자의 차이 때문이었다.
세계에서 방금 전력 차이를 알고 있는 사람은, 솔직히 우리팀에서도 나나 능파, 유운을 포함한 삼가 정도다. 게다가 유다전 때 누님은 엄청난 마력을 선보이며 국내의 레플리카를 섬멸했던 전과가 있다. 그런 모습을 보았고, 다쳤다고는 해도 액정너머의 사람들에게는 이만한 숫자가 있는데 단 둘에게 눌려서 기한을 잡았다는 모습으로 비춰지는 것이다.
이해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비판만 잔뜩 날아올테지. 난 상관없지만 누님이 그것을 두고 볼 것 같지가 않다.
누님은 어머니를 닮아서 과보호가 심하니까.....랄까, 그냥 누님이 열 받는 것 뿐이려나.
파박.
작은 소리를 내면서 우리의 앞에 양복차림의 은발 남자가 선다. 나보다는 어려보이지만 코도 높고 눈빛도 맑다. 이목구비가 상당히 확실해서 얼굴이 굉장히 잘생겼다. 다만 딱딱한 표정, 철가면인데도 조금 가벼워 보이는 인상이 있기 때문에 여자를 잘 사귈 것 같지는 않다.
뭐랄까, 호스트를 하면 잘어울릴 것 같은 느낌.
"처음 뵙겠습니다. 휀이라고 합니다. 아버지.... 그라드 총장의 명을 받아 라이칸스로프 총 2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 그의 너머를 보았다. 확실히 이족보행의 동물들이 곳곳에 숨어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 그라드의.... 아들이라고."
휀은 알고 있을까. 그라드라 불리는 강한 전사는 내 손에서 명을 달리 했다는 것을.
양복에 어울리는 인사법으로 허리를 숙이던 그가 고개를 들어 나와 눈빛을 마주했다. 일견 무례해 보이기까지 한 행동이지만 그의 눈빛 덕분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아이는, 내가 그라드를 죽였다는 걸 알고 있다. 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건만 직감과도 같은 무언가로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어떤 최후를.... 맞으셨습니까?"
어떠한 말을 해야할까. 솔직히 나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자에게 어땠냐고 묻는다니, 보통 담력이 아니었다. 칭찬할만한 것이지만, 그럴 수도 없다. 생각이 한바탕 몰아친 것인지 뒤죽박죽이었다.
눈을 감았다. 천천히, 끊어진 퍼즐을 맞추어가는 것처럼 그와의 싸움을 돌이켜 보았다. 메마른 지형에서의 나와 그의 모습이 투영되었다.
어느 때는 경박하게, 무겁게. 자신의 감정을 여러형태로 변형시키며 분위기를 만들어간다. 싸움이지만, 오히려 친구들의 작은 투닥거림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그 다운 싸움이었다. 아마, 날 이길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알 수 있었다. 그는 나보다 강했다. 능파가 끼어들었다고는 해도 이길 수 없을만큼 강한 면모가 그에게는 존재하고 있었다.
죽어가던 순간, 그는 웃었다. 아니, 생각해보면 괴로운 과거를 입에 담을 때외에는 전부 웃고 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미련은 없지만, 자신은 여기까지라는 걸 알았다는 것처럼.
"그는..... 그라드는....."
차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나의 말이 그를 위로할 수 있을지, 나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것이 나이기에, 그라드가 남긴 것이기에.
"남자인 나도 부러워할만큼 멋지게, 사라졌다."
짧고 담백한 그 말. 휀의 얼굴을 보았다. 그 단단해 보이던 철가면이 깨져나가고 소년다운 웃음이 보였다. 눈망울이 흘리는 푸른 물방울이 구슬이 되어 바람에 흩날린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난 말 없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뿌리치는 것처럼 손의 밖으로 나가면서 고개를 숙여보인다. 그러곤 뒤돌아 빠르게 무리가 있는 곳으로 사라졌다.
그저 묵묵히, 그 모습만을 보고 있자니 다리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감촉이 더욱 커졌다. 호지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눈망울을 키우고 있었다. 호지만이 아니었다. 요연도, 슈도. 그리고 누님도 자신의 나름대로 걱정스럽게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멀쩡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처럼 웃어보였다.
"이제, 돌아가자. 일년 뒤에 있을 전쟁에 손 쓰려면 지금부터도 힘 쓰지 않으면 안돼."
"그렇다며어어어어어언!!"
돌연 들린 외침. 하늘에서 누군가가 뚝하고 떨어졌다. 호쾌한 인상의 아저씨가 다짜고짜 나에게 킥을 날려왔다.
투로도 안정되지 않았고, 상당히 어색한 폼이다. 맞다 하더라도 아플 것 같지는 않았다. 완벽한 민간인의 그렇기에 가만히 있었는데 그것조차 용납하지 못 하는지 누님은 그 발목을 잡았다. 누님의 눈이 험악해지는 것이 당장이라도 부러뜨릴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누님을 흔들어도 도저히 듣는 기미가 없다. 아직 중년인의 인상이 멀쩡한 걸로 보아서 누님이 고민하고 있는 듯 하니 빨리 판단해야만 한다.
누님의 귓가에 숨을 불어넣으며 귀엽게(누님에게만), 깜찍하게 불렀다.
"누, 나."
"왜 그러니 나의 동생~~~!?"
다리 같은 것은 쓰레기마냥 팽겨치고 나를 끌어안으면서 볼을 부비적거렸다. 호지가 분개하며 누님을 밀어내지만 통할리가 없다.
누님을 슬쩍 밀어내고 날 공격했던 남성에게 다가갔다.
"누구십니까?"
"기자. 참고로 말하자면 하여의 아버지지."
잠시 침묵. 하지만 그것은 금방 깨졌다.
"말도 안돼! 분명히 도장을 하고 있다던데....."
"그건 내 부인. 나도 익히기는 했지만."
내 기억이 맞다면 하여는 단한번도 아버지(내 눈 앞의 남자)를 이긴 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게 정통도 아니고 데릴사위였다고? 믿기지가 않는다.
"취재, 응해주겠지?"
찔리는 점이 있어서 안해줄 수가 없다. 하지만 이곳에는 누님이 있다. 쉽게 넘어가지는 않을 터. 역시나랄까, 누님이 아저씨의 귀에 귀엣말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을 한걸까, 의아함을 마음에 품고 천천히 방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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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