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78 / 0340 ----------------------------------------------
챠이
모두가 자리를 털고 일어서자 붉은 그림자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피냄새가 진득하게 묻어있는 물체를 걸친 체, 나른한 걸음걸이로 큼직한 사람이 다가온다.
챠이. 나의 삼검주 중 가장 약하지만 최고의 활동력과 충성심을 가진 영생자다. 저번에는 그라드와 기레의 합공에 죽을 뻔 하기는 했지만 살아나 나의 곁으로 돌아왔다. 본인은 '죽음은 충심으로 극복했습니다!'라고 한다. 뭐, 결국 돌아왔으면 그만인거다. 유다도, 시바도 죽어버렸는데 그마저 죽었다면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음, 죄송합니다 폐하. 살아있었음에도 연락 한번 드리지 못 해서..."
확실히 내가 챠이에게 연락받은 기억은 없다. 하지만 가면에 달려있는 '생체추적기'가 있었기에 대충 뭘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챠이가 죽었다. 그렇게 판단하고 골방에 틀어박혔던 그 순간. 나는 챠이의 가면을 썼다. 그의 의지를 잇겠다는 감정을 담아서. 그리고 그것을 썼을 때, 왼쪽 턱 아랫부분에 까슬까슬한 뭔가가 느껴졌다.
그의 생존을 알게 한 생체추적기. 그것이 거기에 있었다.
처음에 추적기인 건 알았지만 누굴표시하는건지 몰라서 골몰했는데 본디 이 추적기는 상호 호환용으로 만일의 경우 가면을 잃어버린다면 찾을 수 있게 한 장치라는 걸 능파덕에 알 수 있었다.
챠이의 신호라는 것을 알고 그것을 유심히 들여다보았을 때는 놀랐다. 영락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던 챠이가 룰루랄라(?)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능파가 전해준 소식 덕분에 이해할 수 있었다.
운천 아저씨의 회생. 크게 다치고 돌아왔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심장이 꿰뚫리고도 살아있었다는 것은 그 때 처음들었다.
덕분에 안심했다. 유다의 경우에는 그런 것조차 바랄 수 없지만, 지금은 남아있는 것을 지키기도 바쁘니까.
나는 챠이의 어깨를 토닥였다. 마치 벌 받는 강아지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크게 신경 쓰지마. 네 추적기 때문에 알고 있었어."
그렇게 위로 했지만 챠이는 여전히 우물거리고 있다. 어째서일까 돌이켜보아도 간만에 만났는데 집히는 것이 있을리가 없다.
챠이가 마치 수줍은 소녀처럼 양손을 모으면서 내 눈을 힐끗 거렸다. 도대체 떨어져있던 몇 일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드는 그 행동에 뒷걸음질 쳤다.
무서웠다. 내가 알고 있는 챠이는 저런 녀석이 아니었는데. 어쩌면 저런 모습을 보일 기회가 없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하여간에 무섭다. 근육질의 남자가 자신의 살을 부대끼면서 날 보고 있다니, 한대 때려주고 싶었다.
챠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 폐하는 오해하지 말아주십시오. 저의 충성심은 세계제일, 천하일통입니다."
"천하일통은 뭐야..... 그런데, 말하고자 하는게 뭔데?"
챠이가 자신의 충성심을 강조하는 부분은, 솔직히 본 적이 없었다. 아니, 봤다면 많이 봤지만 상황이 매우 다르다.
챠이가 충성심을 뽐내는 때는. 아니, '대상'은 내가 아니다. 챠이는 자신과 같은 위치에 있는자인 요연이나 유다에게 자신의 충성심을 뽐냈다.
아마도 나에게 그런 것을 과시하자니 건방지게(전혀 그렇지 않지만 그는 일단 신하인 입장이니) 보일 테고, 뻐기는 듯한 인상을 심어줄 수도 있으리란 생각 때문일 것이다. 좀 더 추가하자면 그로 인해 나에게 미움 받지 않기 위해서랄까.
어쨌건 그런 고로 나에게 챠이가 그런 것을 강조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러고 있는 행동을 보아서는 나에게 했던 말에 '사심'이 들어간 것 같다.
그래도 말이지? 저런 반응을 보이면 사심(私心)이 사심(邪心)으로 보인다고?
챠이의 입이 자신의 말에 살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 애정이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충성심도 그에 못지 않습니다. 믿어주실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기에 묻겠습니다."
'애정'이란 단어에 저도 모르게 광진을 끌어올릴 뻔 했지만 덧붙이는 챠이 덕분에 뼛속 깊이 차가운 것이 생겨나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더이상 말을 들으면 안된다. 그렇게 오감이 경고하지만 내 몸은 굳어버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스의 메두사를 만나 돌이 된 걸까, 금기를 어기고 뒤를 돌아본 걸까. 굳이 말하자면 후자에 가깝겠다.
듣고 싶지 않다. 겨우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웃으면서 만났는데 저 얼굴에 눈물을 그려넣을 수는 없었다. 최소한 저 미소를,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지켜주고 싶다.
챠이의 입이 열리는 모습. 비디오를 느리게 감는 것처럼 천천히 움직인다. 입술이 떨어지고, 혀가 움직인다.
이내 그런 일련의 행동은 말이 되어 내 귀에 들려왔다.
"운은, 어디있지요?"
쩌저적, 하고 분위기가 굳었다. 웃으면서 대화하던 요연과 슈, 가만히 있는 날 데리고 가려는 듯 옷깃을 붙잡는 호지, 마찬가지의 이유로 내 목에 그 긴 몸을 감아오는 능파가 멈췄다. 이곳에 있던 상황을 모르는 누님과 소요, 아쥴과 리바이어던을 제외한 모두가 석상마냥 굳어버렸다. 이렇게 되자 도리어 챠이가 당황해 버렸다.
챠이는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한건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 물론물론, 폐하를 향한 충심이 더 큽니다! 그러니 그렇게 놀라실 필요는...... 제가 너무 다른 것을 짚었던 겁니까?"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저 묵직한 침묵만을 고수했다. 챠이의 눈이 파랑을 만난 것처럼 가볍게 흔들렸다.
"서, 설마.... 죽은,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니야."
단숨에 부정했다. 죽지는 않았지만, 챠이에게는 그 이상으로 나쁜 일일 가능성이 있었다. 아마, 올곧은 그에게는 그만큼 괴로운 상황일 것이다. 어쩌면 죽은 것 이상으로 가슴 아픈 상황일 공산이 크다.
"운은..."
목이 매었다. 딱히 운에게 남은 악감정이 없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일찍 챠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텐데. 챠이가 인간이 되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텐데. 너무 섣부르게 일을 벌이는 바람에 어긋나고 말았다.
목 안에서 맴도는 일갈을 배 안까지 꾸욱 밀어넣었다. 그리고 힘겹게 간단한 몇글자를 입에 올렸다.
"배신자...다."
"....하핫, 폐하. 간만에 돌아왔다고 너무 하십니다. 그런 농담이라니요. 몸이 안좋아지긴 한 것 같은데 문병이라도 가야 겠습니다. 아, 병문안 선물은 어떤 과일이 가장 좋지요?"
챠이답지 않다. 내 말이라면 어느 것이든 곧이 듣던 녀석이 저런 반응을 보이다니. 가슴 속에 숨겨두었던 검은 것이 더더욱 구슬프게 울어버린다.
챠이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평소라면 꼬리라도 후릴 능파조차 말 없이 그저 가만히 있었다.
챠이가 얼굴에 손을 얹어 가렸다. 인정할 수 없는 것일까, 아니면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일까. 어느쪽이든 마음 고생은 심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나는 삼검주 제일의 충신에게 해줄 말이 아무 것도 없었다.
챠이가 얼굴을 보였다. 날 처음 보았을 때의 감동이 없어졌다. 운과 만나면서 어른 거리던 애정이 사라졌다. 그의 얼굴에 새겨져 있던 행복의 글자가, 지워졌다.
"폐하. 그녀가 있는 곳을, 가르쳐 주십시오."
"....따라와라."
챠이가 무슨 짓을 할지, 아무것도 모르지만 나는 그를 인도했다. 손짓으로 따라오려는 호지들을 말리고 단둘이서만 종유동을 지나 운의 가둬둔 방에 도착했다.
마치 악령이라도 가둔 것처럼 수백장의 부적이 빈틈없이 문에 붙어져 있는 형태는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부적으로 촘촘하게 묶여있는 손잡이를 잡았다. 치이익, 하고 손바닥에 반발작용이 일어났다. 하지만 나의 광진으로 가볍게 불태우자 그 불이 부적전체로 퍼져 이내 모든 결계를 부수고 말았다.
가로 막는 것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는 문을 밀었다. 문은 정체불명의 재질로 되어 있었지만 매우 가볍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그 문은 너무나도 무겁게 느껴진다.
결국 문이 열리고, 쇠사슬에 도롱이 벌레처럼 칭칭 감겨 있는 운의 모습이 보였다.
"누가 해놓은거냐, 저건."
저런 악질적인 장난을 할만한 녀석은 호지나 능파정도인가. 능파가 그럴 이유는 없으니 호지일 확률이 가장 높았다.
그런 이상한 상태에서도 챠이는 묵묵히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고개를 든 운의 눈빛이 챠이에게 닿자마자 화색을 띄었다.
"챠...이? 챠이? 살아있었어..? 살아있었단 말이야? 장난이 아닌거지? 그런거지?"
감정의 고양, 가짜 사투리의 기미는 이제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기뻐했기 때문이리라. 내가 처음 생존사실을 확인했을 때 이상으로 기쁘겠지...만, 챠이가 어떤 반응을 해올지 상상조차 안된다.
챠이가 굳은 눈으로 운을 내려다 보았다. 운도 그것을 마주 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떨궜다. 대화는, 하지 않았다.
마침내 챠이가 입을 열었다.
"나에게 접근한 것도, 그 때문이냐."
"아냐, 그건 절대로...!"
그걸로 다시 서로가 입을 다물었다. 더이상은 볼 수 없었기에 조용히 발을 옮겨 밖에서 문을 등졌다. 어떤 결론을 내릴 것일까, 모르지만 최대한 그 결정을 존중....
푸우욱!
섬뜩하게 귀를 찌르는 소리다. 살의마저 느껴지는 소리기에 피부가 곤두섰다. 뚝뚝하고 바닥에 떨어지는 핏소리가 묘하게 사실적이라 부리나케 안으로 들어갔다.
설마 챠이가, 그 챠이가 운을 찌른건가!?
"아...... 챠, 이?"
챠이는 충의의 적색으로 자신의 배를 찌르고 있었다. 챠이의 붉은 피가 충의의 적색을 더욱 붉게 칠하고 있다.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얄팍한 실력의 운이 정신조작을 했을리는 없다. 그렇다면 스스로 찔렀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어째서? 자신을 찌를 이유가 어디에 있기에?
"이걸로... 내 안에서 널 죽였다. 두번 다시, 널 보는 일은 없을테지."
펄럭.
붉은 코트가 피묻은 부분을 강조하는 것처럼 펄럭였다. 깔끔하게 돌아서서 나가는 그를 따라 나도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운을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어머 챠이 개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