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생의 육아일기-280화 (280/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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챠이

마력적인 힘으로 공간을 방주의 본래 크기보다 수백배는 넓혔지만, 이 자동서기의 방만큼은 원래 크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전에 대리고 왔던 인형의 말대로라면 정보를 에너지체로 유지(겉모습은 일단 책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하고 있기 때문에 마력에 닿으면 쉽게 동화되어 순식간에 날아갈 수가 있다고 했다.

책을 한권 집어들었다. 교과서정도의 크기에 적당한 무게감. 어딜봐도 평범한 책으로만 보인다. 놀라운 기술력이 아닐 수가 없다.

제목을 보았다. 한국어라는 설정을 해놓았던 탓일까, 본디 초고대 언어여야 할 글자가 우리나라 말로 되어 있었다.

'우리집의 야수'라는 이상한 제목. 생각할 여지도 없이 바로 읽었다. 공포소설을 뺨치는 어구에 속으로만 담담하게 읽었다.

"무섭다. 도대체 왜 나는 이런 데 있는 것일까. 옛날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그 날'이 오자마자 저렇게 날 뛰기 시작한다. 저런, 저런 아이가 아니었는데..... 어제는 팔이 부러졌다. 오늘은 다리가 부러질 뻔 했다. 난 살고 싶다. 죽고 싶지 않아....."

피가 얼어버리는 줄 알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고 있기는 했지만 이것은 분명히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광기마저 느껴지는 이런 책의 내용이 도대체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일까, 짐작도 가지 않는다.

세계각지로 흩어진 레플리카가 일으키는 피해? 하지만 이 글의 주인공은 분명히 '전에는 이렇지 않았다'고 말한다. 즉, 변한 것이다.

책 모서리에 있는 날짜를 보았다. 그저께의 것으로, 상당히 가까운 시일의 것이다. 상(上)이 적혀 있는 것을 보아선 끝은 멀어보였다.

바로 옆에 박혀있는 하권을 꺼내들었다. 앞의 내용은 필요 없었다. 바로 마지막장에서 두장만 넘겨서 탐독에 들어갔다.

"드디어 화가 풀렸다. 나의 아내는 왜 이런 것일까."

거기까지 읽자 맥이 빠졌다. 단순한 아내의 발작을 한권이 넘어가도록 표현한 주인공의 비상한 두뇌가 더욱 놀라웠다.

한숨을 내쉬면서도 나는 다음장을 읽었다.

"그 이유가 궁금해져서 나는 물었다. '어째서 그렇게 날 뛴거야?' 그러자 나의 아내는 왠지 모를 진득한 웃음을 흘리면서 답했다. '그게 말이야, 믿어줄거지?' 웃음과는 정반대되는 수줍음에 나는 이유 모를 웃음을 띄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는 손뼉을 치거나 내 손을 붙잡고 방방 뛰거나 하면서 매우 기뻐했다. 그러는 그녀의 모습이 좋아서 다시금 재촉했다. 무언가 잘못한 점이 있다면 바로 도와주겠다고 생각하면서...... 이거, 남자가 꽤 거물인데."

나라도 남자와 같은 판단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그건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서지 저런 감성적인 판단은 아니다.

팔이 부러지고, 심지어 다리마저 부러질 뻔 했다. 내가 무심코 넘긴 페이지에는 어떠한 굴욕이 있었을지 짐작이 갈정도다. 그런데 아내가 제정신을 차렸단 이유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넘어가다니, 정신적인 그릇이 다르다. 그런 주인공에게 아내는 무슨 말을 할까, 하는 것도 마음에 걸린다. 그 웃음을 보면 쉬운 건 아닌 것 같은데.

다음 부분이 궁금해서 다음 페이지로 넘겼다. 그 곳에는 단 한 줄만이 적혀 있었는데, 매우 붉은 글씨였다.

"순간 그녀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그 한마디. 더이상 볼 것도 없었다. 번개가 형님이라고 부를만한 속도로 그것을 책장에 집어넣고 머릿 속에서 지워버렸다. 저런 것을 머리에 담아 두었다간 이상한 생각만 들 것 같았다.

"채, 책은 제대로 된 걸 뽑아야지."

그런 다짐을 하면서 각자 흩어진 사람들을 훑었다. 모두 독서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묵묵히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특히 놀라웠던 것은 의외로 누님이 견실하게 책을 읽고 있단 점이었다.

누님은 겉모습대로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책이라기보다 활자에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 한다.

문제집 같은 것을 보면 답지에서 틀린 것을 잡아내고 소설책을 보면 완결도 나지 않은 소설의 완결권을 써낸다. 그게 또 작가의 완결권보다 잘나서 작가의 집에 전송했는데 그 작가는 사흘밤낮을 술 먹고 폐인이 됬다더라.

하여간에 누님은 책을 읽지 않았다. 사람과의 관계도, 어지간하면 만들지 않았다(누님이 워낙 제멋대로니까. 하지만 상대방은 그걸 매력으로 여겼다. 그런 남자의 목을 망설임 없이 비트는 장면을 몇번 보았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누님의 눈을 끄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다가가서 보고 있자니 누님이 날 맞이했다.

"아, 동생왔니?"

"으응. 그런데 누님, 뭘 봐요?"

"내가 읽는 거?"

책을 덮고 적갈색의 가죽표지를 디밀었다. 그곳에는 화이트로 쓴 것인지 입체적으로 튀어 나와 있는 하얀 글로 '과거사'라고 적혀 있었다. 방금 전까지 모르고 있었는데 책 자체도 어지간한 사전은 비교도 되지 않게 굉장히 굵었다.

과연 누님이 읽을만한 책이라는 느낌이 확 들었다.

누님에게 연산을 통해서 결과가 나오는 것은 의미가 없다. 보는 순간 답이 나오는데 필요할 턱이 없지않은가. 하지만 역사의 경우에는 다르다. 알려지지 않은 인간들의 관계(직책같은 '겉'이 아니라 감정 같은 '내면'의 관계다)조차 잘 알지 못 하는데 어떻게 누님이 알아낼 턱이 없다.

결과만을 가지고 시작과 과정을 추론하지 못할 것은 없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측.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 한다.

웃으면서 누님이 읽던 부분을 보았다. 인간들이 알아낸 역사보다도 한참 전..... 불사의 탄생연원이 나오는 곳이다.

"동생, 숨겼지."

"으, 뭐, 뭘 말이야?"

"요거."

그렇게 말하며 가리키는 것은 불사와 불패의 관계. 그것이 상세히 적혀 있는 부분이었다. 확실히 반문할 수 없는 이야기라 난처하게 웃었다.

누님이 날 죽이려던 자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게되면, 나에 관해서만큼은 기묘한 결벽증이 있는 누님은 어떻게 생각할까. 자신의 힘을 도려내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지금까지 내가 봐온 누님이니까.

누님은 내 옷깃을 잡아 끌더니 자신의 가슴팍으로 끌어들였다. 요연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감각이 얼굴을 휩쓸었다. 도저히 제정신을 차리고 있기 힘들다.

"내 걱정은 필요 없어. 네가 생각하는만큼 바보도 아니니까. 그러니까.... 착하지?"

아이를 다루는 것처럼 머릿결을 쓰다듬는다. 평소에는 오히려 동생 같은데 이러니까 누님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잠시간 그 감각에 취해있자니 목에 무언가 까슬까슬한 감각이 얽어왔다. 마치 밧줄이라도 묶은 것 같은, 목을 매달고 죽으면 이런 감각일까 싶은 감촉. 스스로 생각하고도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서 목을 더듬었다. 목에는 하얀 밧줄, 능파가 용이 된 상태로 이죽거리며 내 목을 점점 조여오고 있었다.

"헤에, 할아버지. 근친은 안되죠."

"아니거든. 그런데 책은 안 읽고?"

"가지고 왔어요."

인간으로 변해 바닥에 내려선 능파가 공중을 부유하던 책 한권을 잡아챘다. 파란색 표지의 그것에는 '필살! 요리전서, 주지육림!'이라는 묘하게 불건전한 이름이 달려 있었다. 아니, 그냥 불건전한건가.

능파는 사악하게 웃으며 표지 안을 보여주었다. 제목의 불건전함과는 다르게 의외로 건전한 요리가 많이 보였다.

능파가 해줬던 음식도 있었고 TV나 책으로만 보았던 음식도 있었다. 게다가 도대체 어느 세계의 음식인지 궁금한 수준의 음식도 있었는데, 가장 특이한 것은 항목 운이다.

우연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나 요리와는 전혀 다른 짓을 하다가 만들어진 음식. 하지만 책의 평가는 최소가 중상이었다.

"후훗, 기대해도 좋아요."

어린애의 체격에는 어울리지 않는 고혹적인 표정에 부리나케 도망쳐왔다. 몇분간 눈 딱 감고 달렸다. 다친 부분의 상처가 벌어지는 고통이 느껴질 쯤, 멈춰서자 그곳에는 요연이 굳은 얼굴로 책을 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살의가 뻗쳐나와 사람이 쉽게 범접하기 힘들다. 뭐라 질문을 건네야 할까, 그렇게 생각할 쯤에는 요연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요애, 전 화났습니다."

"아, 하하하. 역시 그러려나."

역시나 요연은 카타스트로피의 케이슨, 그의 정체를 본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요연이 화낼 이유가 없었다. 요연도 바보는 아니니까 내가 꺼려하는 화제에 대해서 금방 조사했을 것이니 틀릴 일은 없다.

"어째서 화가 났는지, 아십니까?"

"숨겼기 때문이 아닌가, 케이슨의 정체."

"아닙니다!"

일갈하는 요연이다. 적으로서 서는 것이 아니기에 꿀릴 것은 없었건만 몸은 살짝 뒷걸음질 친다. 두려워질만한 힘, 감탄이 나왔다.

돌이라도 우그러뜨릴 것 같은 힘으로 내 팔을 잡은 요연이 슬픈 눈으로 날 올려다본다. 젖어있는 눈빛에 흡사 내가 잘못한 듯한 착각이 일었다.

내가 잘못한 거 맞나?

"전 요애가 못 믿었다는 것이 더 슬픕니다."

"그렇지 않아! 그런 의미가 아니라..."

아무리 마음을 굳게 잡아도, 슬픈 것은 슬픈 것이다. 요연은 내가 알고 있는 여자들 중에서도 가장 섬세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그 사실을 안다면 어찌될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요연은 내가 아니었다. 그렇게 마음 약한 아이가 아니라, 자신이 정한 것을 올곧게 밀고 나갈 수 있는 녀석이었다.

꽈악.

아까의 원한을 담은 것처럼 요연이 날 끌어안았다. 가슴과 가슴이 맞닿는 감촉을 즐길 여유는 없다. 팔이 부러트릴 려는 것이 아닐까 싶은 고통이 엄습했다.

그것을 모르는 듯, 요연은 자기 할 말만을 입에 담았다.

"절, 믿어주십시오.... 요애."

"믿고, 있어."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답하자 요연은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감정이 격해지면 힘조절이 안되는 건가, 하고 멀어져가는 의식 너머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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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편이며, 특별편이 다음부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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